노컷 조선왕조실록 - 무삭제판 조선의 역사
김남 지음 / 어젠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새로 나온 책이라길래 바로 구해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읽고 난 소감은 "세상에 이럴수가..."였다.

 

  내가 그동안 줄곧 비판해온 재미교포 저술가 백지원씨의 괴작인 <왕을 참하라>와 <조일전쟁>, <완간 고려왕조실록>, <대양시대 개막>보다 더 하다, 더해.

 

  최근 개인적인 저술 활동에 바빠서 남의 책을 읽고 긴 리뷰는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남겨야겠다. 이대로 그냥 지나가면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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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책의 저자 소개란을 보니,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나는 의구심이 든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는 49,646,667자인데, 설마하니 이 많은 글자를 저자가 다 읽어 보았단 말인가? 자그마치 4천 9백만개의 글자들을?

 

   대학에서 역사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들도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했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전문 역사 연구가나 학자도 아니고, 소설이 본업이던 저자가 언제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했단 말인가?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인터넷으로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나 아니면 다른 인문 교양 서적에 실린 흥미 위주의 <조선왕조실록> 중 일부만 읽어본 게 아닐까?

 

 

  2. 내용부터 보니 더욱 기가 막힌다.

 

  당신은 김씨나 이씨가 아니다/ 성씨가 있던 사람은 10퍼센트 미만/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다/

 

  : 그래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뭔지? 우리는 상놈의 자손이니, 모두 비천하고 더럽고 열등하고 한심한 족속이란 말인가?

 

  조선 시대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족보는 양반만 가지고 있었다."인데, 족보는 양반만이 아니라, 중인 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노비를 거느리고 있지도 않은 사람들도 노비를 거느렸다고 허위 기적을 한 사례도 있다고 하니, 노비의 수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다.

 

  노비 값이 조랑말의 절반 수준 / 조선 중기 통계로 본 신분 구성 /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저자는 과연 조선시대 노비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노비들은 모두 주인 집에서 먹고 살지 않았다. 주인이 가진 토지를 위탁 받아서 집 밖에서 살면서 관리하고, 그 대가로 곡식 등 자기 재산을 모으는 일도 가능했다. 그런 노비들을 외거 노비라고 부른다. 조선 성종 무렵, 임복이란 노비는 자신이 모은 곡식 2천 석을 나라에 바치고, 자기 네 아들과 함께 노비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새로 창설한 훈련도감에는 관공서에서 일하던 공노비(公奴婢)나 양반 댁에서 부림을 당하던 사노비(私奴婢) 등 천민들이 군사로 지원했고, 훈련도감과 비슷한 시기에 창설된 속오군(束伍軍)에도 노비들이 포함되었다. 더해서 속오군에 들어가서 일정 수 이상의 도적을 검거한 천민은 노비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임진왜란 중 천인 백운상(白雲常)은 군공으로 3품직인 훈련정에 기용되었으며,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천첩자인 홍계남(洪季男)은 호서 지방을 보전한 공으로 수원판관 겸 경기도조방장으로 기용되었다.

 

  이밖에 조선 후기인 1745년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에는 사노비의 경우 100냥, 즉 쌀 13석의 속전을 지불하면 면천종량할 수 있도록 그 값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조선은 노비라고 해도 자기 재산을 모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해서 모아진 재산으로 얼마든지 자기 신분에서 벗어나 양민으로 신분 상승을 하는 일이 가능했던 사회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 힘으로 신분 해방을 이룬 노비들이 양반 족보를 사서 자기들이 양반인 것처럼 꾸민 일을 두고 저자와 같은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조선은 후기에 이르러 전국민의 양반화가 진행될 정도로 신분 제도가 유동적인 사회였다고 말이다.

 

  양민이 된 노비가 자기가 번 돈으로 양반의 족보를 사서 양반 계급으로 행세하는 일이 정말 큰 잘못일까? 그렇다면 한 번 노비였던 사람은 영원히 노비로 지내야 할까? 그게 합당한 일일까?

 

  이런 말을 하면 혹시 저자는 "전 세계에서 노비가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서 거짓 양반 행세하는 나라는 한국만이 유일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썩어빠진 나라야!"하고 고래고래 날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구의 프랑스에서조차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원래 프랑스에서 귀족들은 매우 적었는데, 루이 14세 시절에 돈을 벌어 신분 상승을 이룬 평민들이 너도나도 귀족 족보를 돈주고 사서 귀족입네 하고 행세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한 귀족들이 "대검 귀족"이니 "법복 귀족"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서, 원래부터 귀족이었던 자와 최근에 돈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신흥 귀족들을 구분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3. 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햇수만 길 뿐, 의미 없는 오백 년 위선의 역사

 

  : 조선 왕조가 오백 년을 간 것이 불만일까? 그렇다면 조선은 대체 얼마를 갔어야 했을까? 삼백년? 이백년? 사백년?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생기지 말아야 했을까? 햇수만 길 뿐, 의미가 없어? 그럼 햇수가 짧은 나라들은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의미있는 일일까?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처럼 백년 동안 이웃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약탈과 착취로 버티다가, 이민족들의 반격을 받고 원래 고향으로 후퇴하는 길? 아니면 서구 열강들처럼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쳐들어가서 원주민들 대량학살하고 식민지배하다가 원주민들의 저항에 다시 식민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


  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중국이 끌고간 공녀들에 대한 침묵 / 명나라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

 

  : 여기서 저자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저자는 속국과 식민지의 구별도 못 하고 있다. 이런 말은 안 쓸려고 했지만, 저자는 정말이지 기본적인 역사 지식조차 없는 사람이다.

 

  식민지라 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제 강점기나 로마 제국 시대, 혹은 대영 제국 시대처럼 본국에서 총독이 파견되어 외부 지역 주민들을 직접 통치하는 정치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총독이 파견되어서 조선을 직접 다스렸나? 조선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나? 조선의 내정에 직접 지시를 했나? 전혀 없다.

 

  저자는 조선이 내내 명나라에 조공 많이 갖다 바치고, 속국이라고 했다는 점을 들어서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조공은 힘없는 아이가 깡패한테 당하듯이, 일방적인 "삥뜯기"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조공이지만, 사실은 국가 간의 국제 무역이었다.

 

  한 예로 조선 사신이 명에 가서 황제에게 조공품을 바치면 황제는 그에 따른 답례로 회사(回賜)를 내려 주었다. 그것이 조공의 기본 관례였다. 또한, 조선의 국왕이 죽으면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에 가서 왕의 죽음과 세자의 등극을 알렸고, 황제는 이를 승인하며 조선 왕의 장례식을 치를 돈과 조선 왕자의 왕위 계승을 축하한다는 명목의 돈을 하사했다. 명나라의 황제가 죽었을 때는 조문 사절을 보내 위로의 명목으로 조공품을 바치면 황태자는 그에 따른 회사를 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명은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에게 회사 이외에 별도의 은상(恩賞)까지 지급했다. 이런 점을 노려 조선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을 조공의 빌미로 삼아 더 많은 이득을 타내기 위해 명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1년에 두 번이나 조공을 했으며, 이는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횟수였다. 그만큼 조선과 명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뜻이다.

  몽골의 오이라트 부족은 매년 2천 필의 말을 명나라에 조공했는데, 1448년 명나라에서는 더 이상 조공을 받지 않겠다고 오이라트 사절단이 오는 것을 금지했다. 왜? 그들에게 답례로 주는 선물이 너무 많아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선만 명나라에 조공 바쳤을까? 아니었다. 몽골, 오이라트, 티벳, 베트남, 미얀마, 태국, 류쿠, 캄보디아, 위구르, 만주족 등 중국 주변 국가들은 서로 중국에 조공 바치려 애썼다. 심지어 일본조차 아시카가 막부 시절,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 영락제에게 "신(臣) 일본국왕" 운운하며 조공을 바쳤다!

 

  이는 명나라에 조공을 보내면 그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명나라(중국)가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 무역 기구인 WTO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조선이 명나라 황제를 존경하고 숭상했다는 사실이 무척 못마땅한가 보다. 하지만 조선 임금과 대신, 양반 사대부들이 아무 생각없이 사는 바보 멍청이라서 명나라를 그렇게 숭상했던 것일까? 아니었다. 조선 시절, 명나라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초대 황제 주원장은 1백 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을 박살내고 북방으로 쫓아 버렸다.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다섯 번이나 북벌을 감행해 몽골과 오이라트 족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남방의 미얀마와 베트남까지 정복하였으며, 만주의 여진족들을 제압했다. 어디 그뿐인가? 환관 정화에게 3만 명의 수군을 이끌고 인도와 아랍, 동부 아프리카까지의 대항해를 무려 7번이나 강행하여 절정에 달한 국력을 과시했다.

 

  명나라의 국력이 쇠퇴기로 접어들던 16세기 말경에도 명나라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했다. 북방에서 침입하던 만주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국경 지대에 50만이나 되는 대군을 배치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고통받던 때, 명나라는 자국의 손해를 무릅쓰면서도 두 번이나 대규모 군대를 보내서 조선을 도와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명나라를 조선 선비들이 숭상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나라를 숭상해야 옳았을까? 일본? 만주족?

 

  조선의 조공과 사대주의에 대하여 어떤 분이 남긴 글을 인용해 본다.

 

  - 사대주의는 굴욕적인 것이 아니라 강대국 중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민족의 지혜였다. 동아시아 역사의 전문가인 라이샤워 교수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조공은 오히려 중국 쪽에 더 큰 손해였고, 중국이 조선더러 너무 자주 오지 말라고 말렸다. 중국에 조공 바치러 갈 때마다 무역을 하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할 수 있어서 조선은 오히려 더 갈려고 중국에 간청했다.
  사대주의를 나쁘게만 본다면 우리 조상들에 대한 커다란 모독이 될 수 있다.
  만약 강대국에 무모하게 저항했다면 로마에게 맞서다 멸망한 유태인들처럼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난을 당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본질은 튼튼히 지키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서는 최소한 타협을 하고, 그 어려운 고비를 넘김으로써 7천만 대민족을 오늘날까지 보존해 온 우리 조상들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저서인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발췌

 

 

  4. 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 이건 좀 일일이 다루기 어려운데, 이 세상에 역모나 반역이 없었던 나라도 있었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 현대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나 형벌제도는 잔혹했다. 서구 선진국? 중국? 아랍? 일본? 그네들도 조선에 못지 않았다. 아니, 조선보다 더 잔혹한 면도 있었다.

 

  아래 글은 러시아의 국회의원이자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의 교수인 블라지미르 메진스키가 쓴 <러시아와 그 적들 그리고 거짓말>에서 참조한 내용이다. 서구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형벌제도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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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에 공개처형을 관람하는 것은 서유럽 성인들의 놀이문화였다. 유럽의 사형관람은 오락이자 구경거리였다. 극장에 가듯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사행집행인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사형을 집행하는지 논의하며 아는 척하는 것이 매너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교수대와 사형 도구를 가리켜 '마셴카 교수대', '여윈 표클라(사형용 도끼)', 같은 애칭으로 불렀다. 영국은 마셴카를 '리틀 메리'라고 불렀고, 사형용 도끼를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여윈 거트루트',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빠른 알베르트'라고 불렀다.

 

  계몽사상이 뚜렷하고 3권 분립이 이루어진 시기의 영국에서는 창고 2개를 불지른 죄로 8세 소년을 사형시켰다. 사람들은 이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웃었다. 영국에서는 어린 아이가 손으로 사형수를 만지면 행복을 가져다 주고, 교수대의 나무조각을 빨거나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면 치통을 막는 약이 된다는 미신도 널리 퍼져 있었다.

 

   독일에서는 사형수를 목매달아 죽인 밧줄이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프랑스에서는 사형수의 손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준다는 미신도 생겨났다. 1788년 영국에서는 사형당한 죄수에게 군중들이 달려들어 말 그대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신을 부위별로 나누어 가진 사건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어느 선술집 주인은 사형수의 머리를 가져가 썩은 냄새가 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게에 걸어놓고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프랑스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파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사형 장면을 보면서 즐기고 노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러시아 작가인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보보리킨은 1864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에 반 년만 살면 알 것이다. '라 코케트' 감옥 근처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보다 더 잔혹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호색가, 고급 매춘부와 퇴물, 바람둥이, 도둑, 도망간 유형수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주변 술집에 모여 술에 취해 형편없는 노래를 불렀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형수들이 매달려 있는 광장을 둘러싼 경비대쪽으로 다가가 이 소름끼치는 기구를 불렀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매혹적인 구경거리를 기다리며 사형장에 있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며, 즐겁게 밤을 지세웠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교수대가 기요틴(거대한 칼날을 장착해 죄수의 목을 자르는 기계)으로 대체된 후, 프랑스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다시 교수대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조 시대 이후, 프랑스의 사형 집행 기구는 다시 교수대로 바뀌었다. 파리에서 최후의 공개처형은 무려 2차 세계 대전 바로 전에도 벌어졌다.

 

   소련의 배우,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는 그가 사랑하는 파리의 광장에서 군중들이 소리지르고 즐긴 공개처형 장소에 있었다. 사형장면을 본 알렉산드르는 그가 본 참혹한 광경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실만큼, 사형을 저속하게 평가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연미복을 잘 차려 입은 어느 신사가 다가와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 이 신사는 그에게 공개처형은 예술활동에 좋은 것이 아니니, 더 이상 그런 구경거리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이 신사는 파리의 공식 사형집행인이었다!

 

   이밖에도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의 신하들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마다 부인을 데리고 감옥으로 행차했다. 감옥에 갇힌 창녀들이 서로 대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좋은 좌석을 사 구경거리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아달라고 감옥소에 부탁까지 했다.

 

   영국의 신사숙녀들은 이 흥미로운 행사에 다니면서 사형 집행인의 이름, 그들의 행동, 창녀들을 파악했다. 지난 경기, 또는 다른 창녀와 비교하거나 예전의 상처와 비교하는 일을 에티켓으로 삼았다.

 

  1810년에서 1826년까지 영국 런던의 미들섹스 백작령에서만 2755명이 사형을 당했다. 미들섹스 백작령과 런던 전역에는 약 800만 명이 살았다. 3천명 당 한 명이 사형당한 것이다.

 

  런던의 명소 중 하나가 사형대인데, 어떤 사형대에는 여러 높이의 기둥과 21개의 올가미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약 500년 동안 연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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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 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 그래도 조선에서는 서자라도 왕의 아들로 태어나면 왕이 될 수 있었다. (선조) 하지만 서양에서는? 왕의 아들이라도 정비가 아닌 첩이나 애인에게서 태어난 자에게는 아예 왕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자의 권리 면에서는 조선이 서양보다 더 나았던 것일까?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홍계남은 서자였는데도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건 저자가 알까?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 이 사람은 대체 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읽은건지나 모르겠다.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임진왜란 때를 보자. 진주성 전투와 행주대첩, 이치 전투, 북관대첩, 웅치 전투, 금산 전투, 명량대첩, 노량해전은 다 뭔가? 이 전투들이야말로 정말 조선 관군과 의병들이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전투였는데?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 그렇다면 그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에서 왜 일본군은 끝내 조선을 점령못하고 물러갔을까? 조선은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웠"는데?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더 한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것이었을까?

 

  솜이불을 펼쳐서 적탄을 막자? / 호미를 녹여 만든 칼과 일본도의 대결

  : 저자가 군사사와 전쟁사에 관한 상식이 너무나 없어서 뭐라고 반박하기도 힘들다. 물에 적신 솜이불은 구식 조총탄에 대해 충분히 방호력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대원군이 만들었던 목면 갑옷은 미군의 총탄도 잘 막아냈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본군, 하면 무조건 일본도만 떠올리는데 이거야말로 짧은 식견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6세기, 일본군의 주요 무기는 긴 창과 활 및 조총이었고, 일본도는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호미로 녹여 만든 칼 어쩌고 하는데, 전쟁이 칼 하나로만 하나? 조선군이 일본군과 싸웠을 당시, 제일 많이 사용했던 무기는 활과 대포였고, 칼은 역시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 임진왜란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무모한 기병 돌격을 펼치다 전사한 일과 그가 출전하기 전에 유성룡과 나눈 대화에서 “왜군이 조총을 갖고 있다지만, 그게 어디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하고 말한 일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일화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신립의 식견이 모자랐다느니, 총의 위력도 제대로 모르는 한심한 장군이라느니 하면서 비웃는데 온당치 못한 일이다.
  신립이 “조총이 쏠 때마다 맞느냐?”라고 말했던 배경에는 조선의 개인용 화기였던 승자총통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것이었다. 승자총통은 최대 사정거리는 2백 미터나 되었지만 유효 사정거리가 매우 짧았고, 탄도의 명중률도 낮아 실제 살상 효과보다는 큰 소리로 적을 놀라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만들어진 무기였다. 그래서 임란을 거치면서 조선에 조총이 보급되자 승자총통은 얼마 못 가 사장되고 만다. 
  비단 승자총통뿐만이 아니었다. 현대의 총기들과는 달리, 근대 이전의 개인용 총기는 동서양 어디에서나 명중률이 낮았다.
  임진왜란보다 2백년 후인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에도 총의 명중률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 총기 안에 총탄이 회전하면서 날아갈 수 있도록 한 장치인 강선(라이플)이 없어 총탄이 멀리까지 안정적으로 발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의 장군들은 병사들에게 “적의 눈동자가 보일 때까지는 총을 쏘지 마라.”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독립 전쟁을 다룬 헐리우드 영화 <패트리어트>에 보면 재미있는 전투 장면이 나온다. 미국 독립군과 영국군이 서로 대열을 이루며 다가가다 바로 가까이에서 서로 총구를 대고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일제 사격을 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거기에는 총기의 낮은 명중률을 집단 사격으로 인한 화망 형성으로 극복하려는 양군 지휘관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더구나 16세기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총기는 1분 당 총탄을 두 번 발사하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장전 속도가 느렸다.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 역사를 공부할 때, 유념해야 할 사실은 제발 현재의 눈으로 그 시대의 일을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 사람들을 가리켜 "왜 그 때 사람들은 핵폭탄이나 비행기를 안 만들고 말타고 싸웠을까요? 되게 멍청한가 봐요."라고 비웃을 수 없는 이유다.

 

  병자호란을 못 막았던 조선인들이 바보라고? 병자호란은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7년 당시, 청나라는 추위로 인해 농사가 흉년이 들어 굶주림에 시달렸고, 설상가상으로 명나라와의 무역도 끊겨서 경제적으로 무척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청나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자 부족을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반드시 조선을 공격해 물자를 약탈해와야 했었던 절실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사실이나 제대로 알련지 모르겠다.


  쌍령전투의 치욕 /

  : 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병자호란 내내 조선군이 패배하지만은 않았다. 광교산과 금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청 태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전사시키는 승전을 거두기도 했으며, 청나라 군대의 돌격을 저지하고 격파하는 전공도 세웠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다 망한 나라

  : 이보셔요, 근대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은 한 번 기근이 들면 수십만씩 굶어죽어나갔답니다. 특히나 조선이 굶주림에 시달렸던 경신 대기근 무렵은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라고 불릴만큼, 기온이 낮아서 농사가 잘 안 되었던 때였어요. 일본? 일본도 텐메이 대기근 당시, 무려 90만명이 굶어 죽어나갔던 일은 알아요?

  그나마 조선에서는 대기근이 닥치면, 나라에서 직접 창고에 보관된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먹이고, 세금을 면제해 주고, 심지어 사이가 나빴던 청나라에 부탁을 하면서까지 곡식을 얻어와 어떻게 해서든 백성들을 구휼하려고 애를 썼답니다.

  근데 일본은?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이웃 번에서 백성들이 굶어죽어가도 나몰라라 했어요. 왜냐?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은 엄연한 봉건 국가였거든요. 따라서 남의 번은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어요. 이건 아나요?

 

  

  조선인들의 악덕 중 하나, 식탐

  : 30년 전쟁이 일어났던 17세기 무렵, 독일 농민들은 1년 동안 번 돈을 모두 결혼식 잔치에 써버렸다. 부유한 귀족이나 가난한 평민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 어느 독일인은 "우리들은 번 돈을 모두 뱃속에 퍼붓는다."라고 말할 만큼, 독일인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했다. 그렇다면 독일인들도 식탐이란 악덕에 빠져있던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담배 피는 조선의 궁녀들

  : 여자가 담배피면 안 되나? 설마 저자는 성차별주의자인가?

 

  왕은 부친도 형도 믿지 못했다

  : 어디 다른 나라 왕실들은 언제나 가족들이 모두 훈훈하게 지냈던 사이인지 알아보고 그런 말을 하십시다. 유럽이나 중국의 왕실, 일본의 막부 통치자들은 부친과 형이 서로 믿던 화기애애한 관계였을까요?

 

  욕설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 세상에 한국어에만 욕설이 있고, 다른 나라 언어에는 욕이 없답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욕 안하고 사나요? 미국 영화나 드라마 보니까 배우들이 하는 대사마다 온통 퍽(fuck)이란 말이 빠지지 않던데, 그 퍽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욕설의 제왕이었던 건 아나요? 성경 볼까요?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마귀에서 태어난 자들이니, 아비인 마귀의 욕심대로 행동한다."

  "내 집을 기도하는 곳이라 말했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대충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

 

  나머지는 생각나면 따로 올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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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박원순의 正體(정체) - 언론이 덮고 넘어간 충격적 사실들
조갑제닷컴 편집실 지음 / 조갑제닷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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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이 빨갱이라니, 이거 명예훼손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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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 람세스.살라딘.나폴레옹이 사랑한 도시
맥스 로덴벡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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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제목은 카이로다. 그리고 책의 소개문에 람세스가 사랑한 도시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구절은 틀렸다. 카이로는 아랍이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에야 생겨난 도시이다. 그러니 람세스 살아생전에 카이로란 이름을 가진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은 카이로라는 도시를 통해서 람세스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이집트에 이르는 약 5천년의 장구한 이집트 문명사를 한 권의 에세이를 통해 다루는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이집트에 자주 드나들면서 이집트인과 이집트 사회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서구 저자들처럼 이집트를 자뭇 깔보거나 멸시하는 식의 차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이집트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었다.

 

  또, 저자는 사람들이 이집트 하면 으레 람세스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고대사만 거론하는 경향에 반발하여 맘루크로 대표되는 중세 이슬람 시대의 이집트 역사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이 부분도 매우 좋았다. 이제 제발 클레오파트라 얘기는 지겹다고! 좀 그만두자고! 그것보다 이집트를 250년 동안 통치하면서 몽골군과 십자군 같은 침략군을 모두 격파하고, 이집트를 중동의 중심국가로 떠으르게 했던 맘루크 시대에 주목하면 안 되겠나?

 

  그리고 저자는 영국 식민지 시대와 이스라엘과의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하고, 이후 이슬람 세계의 중심 국가로 떠오르기 위해 자립하는 이집트의 모습도 잘 묘사해 놓았다.

 

  아쉽게도 이 책은 2000년 이전에 쓰인 책이라, 현재 이집트에서 벌어진 재스민 혁명으로 인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된 사건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만큼 한 권으로 이집트를 잘 풀어낸 책도 드물다. 이집트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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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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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터키를 가리켜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때, 인터넷상에서 퍼진 말이다.

 

  하지만 그런 터키가 사실은 일제 뺨칠만한 악랄한 만행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저지른 나라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터키 정부는 적국인 러시아와 인접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칫 러시아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무려 200만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고, 사막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고통을 겪고 죽어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0만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이런 식의 박해를 통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학살을 저지른 터키에 대해서 아무런 제제나 불이익도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히틀러가 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보고 유대인 대학살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만이나 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육되었는데 터키가 아무런 불이익도 겪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저런 식으로 유대인 죽여도 뒷탈이 없겠다, 싶은 것이다.

 

  숨겨진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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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민의 개념사회 - 바른 언론인의 눈으로 본 불편한 대한민국
신경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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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한 명이 바뀌었다고 사회가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법을 다루며 공정해야 할 검찰이, 사회의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도, 모두 권력자들과 한 패가 되어 서로의 잘못을 숨기고 감싸며 국민들의 눈을 속이기에 급급하다.

 

  명백한 사기와 비리를 저지른 용의자를 수사하는 것도 과잉수사라며 하지 않겠다니, 이건 같은 편 감싸주기라 해도 지나쳤다.

 

  어디 그뿐인가. 대통령 이하 정부 고관들은 아예 자신들이 회사를 차려놓고, 국가 살림을 팔아먹으며 자신들의 뱃속을 불리는 일에 바쁘다. 이걸 지적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도 없다. 뷰스앤뉴스나 나꼼수를 제외하면 모두 정부와 한 패가 되어 서로 감싸고 돌기만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쳐 어느 정도 살만 했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도대체 왜 이렇게 후퇴해 버린 것일까?

 

  MBC 앵커를 지낸 신경민은 그의 저서인 <신경민의 개념사회>에서 이 같은 현상은 결코 이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것(투표 등)에 그쳤기에, 오늘날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미국이나 서유럽 같은 선진국 가정에서는 아이가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 가정에서는 어떤가? "아무 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건 결코 민주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다. 영락없는 독재다.

 

  가정에서만 그런가? 사회로 나가 보아도 그렇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오직 입시에만 매달리며, 인생에 한 번 밖에 없는 10대의 젊은 시절에 가져야 할 자율 활동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지독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아이들은 서로 약한 아이에게 폭력을 쓰며 화풀이를 한다. 학교가 끝나고 나서도 학원에 다니느라 쉬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정작 학교 수업 시간이 되면 대부분은 졸거나 자고 있다. 이러니 공교육이 망하고 있다는 소리가 나온다.

 

  직장에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생계가 걸려 있으니 학생 시절보다 더 심하게 억압당한다.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게 아무리 잘못되거나 불합리적인 일이라고 해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그 중에서 제일 심한 건 구타인데, 학교나 군대에서 때리는 것도 모자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진 어른들도 먼저 들어온 사람인 선배들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얻어맞는 것을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여긴다. 구타에는 누구의 예외도 없다. 대학 교수나 병원 의사도, 과학자도, 심지어 TV에서 관객들을 웃겨야 할 코미디언들도 모두 두들겨 맞는다.

 

  특히나 재벌은 더욱 심하다. 재벌은 아무런 감독이나 규제, 제제도 당하지 않으니 거의 신처럼 회사 내에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잘못된 투자나 사업을 해서 손해를 보면, 그 책임은 재벌 총수가 아닌 밑의 직원들이 책임진다. 삼성이 시작한 자동차 사업이 엄청난 적자를 본 끝에 무려 6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해고당했지만, 정작 삼성의 입지는 튼튼하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이런 한국 사회의 내면은 지독하게 반 민주, 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민은 더 많은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국 사회는 지연, 학연, 혈연에 종교연과 직장연 등 온갖 연줄이 겹쳐서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아직 젊은 세대들도 그렇다. 그들도 직장에 들어가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연줄 사회에 물들게 된다. 만약 연줄을 거부하게 되면 조직으로부터 배척받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 물론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오랫동안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 신경민은 그 방법으로 공정한 투표를 제안한다. 젊은이들이 지연이나 학연, 혈연, 종교연 같은 연줄이 아니라 공정하게 우리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말한다.

 

  지난 지방 선거와 서울 시장 선거에서 보수 우익 세력이 빨갱이와 색깔론을 부추겼지만, 결과는 정 반대로 진보 야권 세력이 승리했다. 이것만으로도 이제 우리 사회에 작게나마 희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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