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52일 월요일)

 

 

 

 

 

<새벽의 푸념>

 

 

새벽 340.

잠든 지 2시간이 겨우 지난 시각이다.

눈을 뜨지만 눈꺼풀만 열린다.

몸은 도무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다.

애구, 새벽 기상 괴로워서 여행도 못가겠네.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는 탄식이 찡그린 이마에 그려진다.

늦게 자는 습관 때문에 지난밤에도 결국 원하는 시간에 잠들지 못했다. 물론 일찍 자려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람. 수십 년 몸에 밴 습관이 하루 저녁에 반짝 달라지는 기적을 일으킬 리가 없다. 빨리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이 되어 오히려 잠을 방해했다. 취침 모드 90분이 지나 저절로 라디오가 뚝 꺼졌고 다시 라디오를 켰을 땐 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자는 버릇도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사실은 빨리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켜놓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캄캄한 밤, 잠들지 않고 누워있는 시간에 괜히 무서운 생각이 끼어들 때가 있다. 언젠가 본 영화 때문일 수도, 책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난데없이 뛰어드는 전설의 고향도 있다. 어릴 때 많이 꾸던 귀신 영화 같은. 그런 생각에 휩싸이면 어둑어둑한 방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둠은 사물의 윤곽을 기묘하게 바꾸는 재주가 있어서 눈을 떴다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괜히 헛것이라도 보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지 않고 있는 것이 훌륭한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눈 대신 귀가 사방으로 촉수를 뻗는다. 조용한 밤. 너무나 조용해서 귀는 공간을 날아 멀리 있는 소리를 동냥해올 판이다. 그 정도 되면 소리도 무서워진다. 아니 어떤 소리가 들릴까봐 무서운 것이다.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소리라도 들리면 뇌는 기묘한 상상을 하기 시작하니까. 왜 꼭 한밤중에 뇌는 그런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떤 소리가 들리는 걸 막기 위해 차라리 음악을 듣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이 라디오를 켜놓고 자는 버릇이 생긴 이유다.

내 방 라디오의 취침 모드 최고 긴 시간은 90.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안에 잠들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여행의 강박이 잠을 설치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쁜 수면 습관은 오늘같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날엔 좀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눈이 아프고 빙빙 돌지만 무조건 일어나 움직여야 하니까.

 

눈을 크게 떠볼 노력도 없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간다.

어차피 모든 것이 희미하다. 시간이 좀 더 지나야 사물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아직 눈을 뜰 시간이 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뇌의 작용인지도 모르겠다.

우와, 서울로 이사 가야겠다.

서울 사람들은 좋겠다. 공항이 가까워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푸념에는 영혼이 없다. 의사전달의 기능이 전혀 없는 발성일 뿐이다. 대구란 도시가 내가 살기엔 여러모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니까. 도로 정체가 있다 해도 서울에 비하면 견딜만한 정도이고, 외곽지라 해도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으며, 도시가 가진 기능을 모두 갖추었으면서도 압도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라 느끼는 것이다. 아니 이것도 생각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구를 구석구석 탐사하며 지역에 대한 사랑을 키워본 적도 없고 외곽지를 돌아봐야겠다는 꿈을 가져본 적도 없다.

어차피 방향 감각도 별로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쏘다니는 취미도 없으며, 지구가 넓든지 좁든지 궁금하지도 않은 나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익숙한 곳이 편한 뿐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을 편리함으로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그 편리한 도시가 해외로 여행을 가야할 때면 불평의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대구에도 공항이 있고 해외로 가는 항로도 있다. 하지만 제한이 많다. 그 제한에 부딪칠 때마다 그냥 투덜거려보는 것이다. 서울로 이사를 가겠다는 둥 어쩌구 하면서. 물론 투덜거림 속에 변화의 결심은 전혀 없다.

변화를 꾀하는 자는 투덜거리지 않는 법.

그래서,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은 나는 푸념의 기억조차 잊어버리고 거울 속의 얼굴에 집중한다.

화장은 간단히.

긴 시간 세수를 하지 못할 테니까.

 

 

 

 

 

<호출택시>

 

 

?

그 말밖에 못했는데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물론 예의는 갖춰 끊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죄송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뭐? 난 아무런 질문도 못했고, 항의도 못했다. 왜냐고? 상대가 죄송합니다, 란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으니까.

이른 새벽에 이건 또 무슨 날벼락? 난 기차를 타야 한다고. 그 기차를 놓치면 비행기를 못 탈 수도 있고, 그리고 비행기를 놓치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상을 하게 만들다니.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530분까지는 동대구역에 도착해야 한다. 인천공항행 KTX550분발이다. 이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잠을 설쳤고 이 기차 외엔 답이 없다. 앞으로 열흘 남짓의 여행 일정은 이 기차에 무사히 올랐을 때야 보장되는 것이다. 부아가 치밀지만 불평과 분노에 나를 맡겨놓을 여유도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인정사정없이 흐른다.

항상 이용하던 호출택시의 배신.

다른 호출택시는 번호도 모른다. 허둥지둥 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114를 누른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온갖 생각이 스친다. 다른 곳에서도 택시를 바로 보내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짐을 끌고 큰 도로까지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시간이 이렇게 촉박하지 않다면 그깟 1020분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될까.

다른 호출택시는 다행히 곧 연결이 되었다.

택시에 앉아서야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분노의 이유를 곱씹어볼 여유를 가졌다.

아아! 정말 싫다.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기에 지난밤에 미리 전화로 확인을 했다. 호출택시 상담원은 24시간 대기라며 언제든 호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지만 예약은 받지 않으며 필요한 시간에 전화하면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난 강조했다. 새벽 4시든 5시든 괜찮으냐고. 그 질문에도 시원스레 괜찮다고 했다. 하기 너무 시원한 대답이 언제나 문제였다. 너무 빨리 나오는 대답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말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렇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당연한 대답이라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고 뇌가 인식할 시간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대답이 말끝을 물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듣지 않았거나 할 말이 이미 정해져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래도 믿었다. 상담원을 믿었고 호출택시 회사를 믿었다. 성의 없이 느껴질 정도로 질문의 끝을 자르며 대답이 나왔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벽이나 한밤중에 택시를 호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이한 현상도 아니고 어떤 이유로든 현재의 대한민국은 밤에도 모두 잠들어있는 건 아니니까. 낮만큼은 아니지만 밤에도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나처럼 새벽차를 타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래서 24시간 편의점의 존재도 이상하지 않으며 찜질방은 이제 우리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난 유비무환을 실천했고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면서도 택시 걱정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설 준비를 완전히 끝낸 후 전화를 했다. 일반적으로 호출택시는 호출 후 10분을 넘긴 적이 거의 없었다. 대개는 5분이면 족했다. 그래서 택시를 타야할 시간에서 10분을 남겨놓고 전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리면 연락이 갈 것이란 대답을 듣고 여행 가방을 현관 앞으로 끌어다놓았다. 곧 전화벨이 울리고 난 현관을 나서기만 하면 되니까. 정말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그 전화는 운전기사의, 곧 나오면 된다는 전화여야만 했다. 그럴 줄 알고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전화는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혼란으로 바꿔놓았다.

상담원이었다.

고객님, 가까운 곳을 지나는 택시가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

세상에 그런 날벼락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무책임한 말도 존재한단 말인가.

너무나 당황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어제 전화로 미리 물어보지 않았느냐?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 거기만 믿고 있다가 큰일 났단 말이다!

이런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아니, 어떤 말이 나올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당황해 예? 하고 있는 사이, 그 시간이 아마 1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상담원은 죄송합니다를 던지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면서 고객은 무슨. 고객이라면서 물을 먹인단 말인가. 고객(顧客)이 아니라 고객(苦客)대하듯 하잖아? 마치 귀찮은 손님 밀어내듯 말이야.

상담원의 태도는,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신속하게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비법이란 바로 수많은 같은 경험.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화가 난 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해주기도 싫었다.

그리고 만약 상담원의 대응에 대한 내 판단이 맞다면, 그런 무책임한 행동은 회사의 방침일까. 방침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업무 태도가 묵과 되고 있다면 방침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같은 결과를 가져올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상담원 개인의 실수나 안일한 근무태도일까. 어떤 것이 원인이라 해도 손님에 대한 상담원의 이런 대응은 회사의 미래에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회사에 독이 되는 것이 회사원들에게도 약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손님을 태운 택시는 한산한 새벽 거리를 몹시 빠르게 달린다. 어느 순간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복잡한 생각 때문에 속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속도 때문에 생각이 날아갔는지는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들이 이젠 오직 속도에 집중한다. 속도에 대한 집중도 잠시 후 흩어진다. 역이 가까워지고 있다. 씨스뜨라는 동대구역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다. 마음은 이제 그들이 있을 대합실로 가 있다.

누가 먼저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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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스뜨라

 

 

여행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해.

이건 나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해.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라는 전제를 미리 할게. 같은 곳을 같이 다닌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또 그들만의 이야길 가지고 있을 거야. 그건 분명해.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비슷한 것이 있다 해도 그건 다른 거야.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더라고.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한순간 엄청난 거리감에 놀란 경험이 있을 거야. 부모 형제간이라도 그건 마찬가지야. 같을 곳을 보거나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있어도 그걸 느끼는 마음은 같지가 않아.

, 내 말이 삭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말이란 이렇다니까. 뜻을 참되게 전달하기엔 참 부족한 도구라니까. 내가 문자로 작업을 하는 사람이지만 늘 한계를 느끼곤 해. 마음은 한순간에 엄청 많은 것을 동시에 깨닫지만 그걸 글로 옮길라치면 얼마나 너절해지는지 몰라. 새삼 마음의 무한성을 느끼는 동시에 문자의 한계에 의기소침해져. 그래서 결국 생략과 간결을 선택하게 되지. 표현을 많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뜻하곤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더라고. 너무 할 말이 많을 땐 차라리 한 문장으로 끝내버리는 방법을 택하게 돼. 여백을 주는 거지. 마음의 여백 말이야. 아니 여운이라고 해야 하나? 내 마음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의 마음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몰라. 내가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다른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알아들을 거라는 기대를 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어.

이심전심이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마음의 본바탕이 한마음이란 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종교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경험하고 감동하며 살아가니까 말이야. 하지만 마음의 무한한 힘과 능력은 너무 거대해서 내가 설명하고 판단할 존재가 아니란 거지. 한계가 없는 존재에 한계를 둘 수는 없잖아. 설명하고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한계를 지우는 거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개인의 마음이란 것은, 마음의 본바탕인 무한함 속에서,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한계 속의 마음인 거지.

 

씨스뜨라는 러시아말인데 자매란 뜻을 가지고 있어.

러시아 여행기이니 러시아 이름으로 의미를 더해 보았지. 하지만 깊은 고민 없이 얻은 이름이야. 본격적인 여행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름 짓는 고민으로 지치고 싶지 않았고 깊이 고민할 건덕지가 사실 없었어. 아는 러시아 단어라곤 아마 서른 개도 안 될 거야. 알파벳이라도 익히고 간다며 2주 동안 속성으로 공부했는데 정말 알파벳만 겨우 익힌 수준이었으니까. 그래도 알파벳은 단어가 아니라고 단어 개수에 넣진 않았어. 양심적으로 말이야.

하여튼 순식간에 결론이 났어. 후보가 적으니까 편한 점도 있더라고. 아는 것이 힘이 되는 세상보다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세상이 나을 지도 모르겠어. 나이차가 나는 여자 4명을 지칭하는 단어로 이보다 더 적당한 이름이 있을까? 혼자 질문하고 얼른 만족해버렸어.

이 이름은 순전히 여행기를 편리하게 쓰기 위해 멋대로 만들어낸 이름이야.

여행 중에는 물론이고 다녀와서도 이 이름을 우리들이 사용한 적은 없어. 나중에 책을 보고야 알게 될 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아직도 난 결심이 서지 않았어. 완성된 후에 이 글을 그들에게 미리 보여주고 허락을 받아야 할지, 멋대로 출간을 해버리고 말지를. 어찌하였든 그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밝히고 싶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될 수도 있고 기분이 상할 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편의 책을 출간했지만 누구에게도 미리 보여준 적이 없었어. 완성되기 전에 작품이 드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지거든. 목욕하는 모습이나 화장하는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여자의 심리와 같은 건지도 모르겠어.

물론 여행기와 소설은 달라. 소설은 그야말로 나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 홀로 쓰고 홀로 그만두고 홀로 결정할 수 있었지. 그 차이를 모르진 않아. 하지만 아는 것과 습관이 통일되는 것이 엄청 어렵거든. 습관은 버리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완성된 작품을 짜잔! 하고 보여주고 싶은 개인적 욕심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야. 사실 정말 두려운 것은 기분이 나빠진 누군가가 자신의 출연을 거부하거나 수정을 요구하는 일이 생길 경우야. 완성된 글을 고치는 것은 다 된 새집을 다시 뜯고 수리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맥 빠지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지. 어쩌면 그들을 믿는 마음이 불안한 마음보다 더 큰지도 모르겠어. 길게 변명을 하는 것은 미리 용서를 구해보려는 수작인지도 몰라.

그 고민은 밀쳐두고 앞으로 나아가려 해.

모든 일은 가장 알맞은 때가 있는 법이고 여행기도 더 이상 미뤄두면 때를 놓친 수확기 들판처럼 시들해져 버린 것들로 채워질 것 같기 때문이야. 갑자기 마음이 무지 바빠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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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달리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학창 시절.

달리기가 정말 싫었어.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100빨리 달리기가 싫었지.

항상 꼴찌를 맡아 놓고 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야.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꼴찌는 상관없었어.

꼴찌를 했다는 건 달리기가 끝났다는 말과 같은 거잖아.

달리기를 끝낼 수만 있다면 등수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

달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맡아 놓고 꼴찌를 주어도 괜찮았어.

정말이야. 내가 공개적으로 쓰는 글에서 왜 거짓말을 하겠어.

거짓말은 언젠가는 엉키고 꼬이게 마련이란 걸 잘 알고 있는데 말이야.

이제 막 시작한 글에서 거짓을 쓰면 어떡해?

어디서 어떻게 거짓을 들통 낼 실마리가 조용히 촉수를 흔들고 있을 진 아무도 몰라.

그 촉수는 너무 작고 너무 기척이 없어서 글을 쓰고 있는 주인도 눈치를 채기 힘들어.

그러니 아예 그런 꼼수를 둘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거지.

 

100나 이어진 여러 줄의 흰 선.

흰 선들을 가로지르는 한 줄의 출발선.

출발선에 섰을 때의 긴장과 불안을 견디기가 싫었어.

심장이 너무 뛰어 터질 것 같은 느낌도 싫었고 그런 긴장 속에 있는 나 자신도 미웠어.

어떤 일을 앞두고 긴장하는 건 못난 짓이라고 배웠던 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자신감과 활달함을 강조했던 교육의 희생자인지도 몰라.

꼴찌를 도맡아 해도 괜찮다면서 무엇이 불안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정말 꼴찌를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거의 꼴찌를 하다 보니 면역이 되어서 그랬는지, 포기를 하게 되었는지는.

그런데도 불안했어. 마냥 불안했다고.

너무 심할 때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반대로 뛰어가는 상상을 하곤 했어.

뛰기도 전에 숨이 턱까지 차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출발신호가 터지지.

!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놀라면서 내 몸은 뛰어나가.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져.

달리기 시작하면 내 몸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거야.

불안과 긴장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달리는 일 외엔 아무 것도 없어.

오직 달리고 있는 몸만 있어.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이라고.

불안을 지고 달리는 것도 아니고 긴장으로 몸이 굳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속도가 붙진 않아. 말했지만 난 빨리 달리는 덴 소질이 없어.

하지만 달리고 있는 나는 아주 편안해.

앞서 뛰어가는 학생들의 뒤통수나 등을 바라보는 것도 편안하지.

아마 뛸 때마다 보던 상황이라 그랬던 지도 모르겠어.

내가 결승선을 보며 앞서 뛰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반 정도 뛰면 다리가 무거워지는 건 느껴져. 심장박동도 아주 빨라지지.

하지만 출발선에서 느꼈던 심장이 터질 듯한 감각하곤 달라.

그냥 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몸이 느껴질 뿐인 거지.

그 몸에서 쾌감도 느껴.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쾌감을 느낀다는 말은 들었지.

운동중독자들이 그런 쾌감을 추구하는 지도 모르겠어.

드디어 발이 결승선을 밟고 나면 거친 호흡만이 남아.

꼴찌도 숨은 차니까.

그리고 환희가 찾아와.

아니 후련함을 환희로 느끼는 지도 모르겠어.

사실, 좀 허탈하기도 해.

불과 몇 십초 전의 극도의 긴장과 불안이 떠올라서 그런 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싫어했던 달리기가 드디어 끝났어.

포기하지 않고 해냈다는 잔잔한 기쁨이 나를 찾아오는 순간이기도 해.

정말 싫었지만 꾀를 부려 빠진 적은 없었어.

어쩌면 한 번 면제를 받고 나면 다신 달리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었던 지도 모르겠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날 위로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꼴찌는 나를 흔들 만큼 위력 있는 가치의 잣대가 될 수 없었을 거야.

결과를 셈할만한 여유가 달리기 전엔 전혀 없었던 거지.

그래서 끝까지 달리기만 해도 만족하는 지도 모르겠어.

아니, 난 오직 달릴 때의 평온을 위해 출발선에 다시 섰던 지도 몰라.

그 무중력과 같은 평화의 시간에 끌려서 말이야.

 

 

나에게 여행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다른 일의 무게가 온전히 사라져버리는,

오직 한 가지 일만 있는 무중력과 같은 시간의 세계에 있게 되는 것.

체력으로만 본다면 일상에선 엄두도 못 낼 일이야.

하루에 10를 넘게 걷다니.

단 하루가 아니라 여행하는 내내 말이야. 일주일을 넘기는 건 예사였어.

물론 여행이 길면 사나흘에 한 번 정도 느슨한 시간을 가지긴 하지.

그렇지만 여행지에선 느슨한 시간이라 해도 마냥 하루 종일 퍼져있긴 힘들어.

집을 떠나는 순간 사람은 변하는 것 같아.

먹는 건 아끼지 말자던 신조가 어느새, 그 돈으로 그걸 먹어?로 바뀌어 있어.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사치처럼 느껴지는 거지.

본다고 다 기억하니? 라며 친구를 놀려먹던 나도 여행지에선 하루 종일 방을 지고 있을 수는 없게 되고 말아.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사실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온 거니까.

그래서 아무래도 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신기한 건 그런 일정에 몸이 따라가 준다는 거지.

과로하면 감기가 와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아.

그렇다고 모든 여행에서 몸이 완벽히 따라주었단 뜻은 아니야.

아픈 적도 있었지.

그래도 아플 땐 그럴 만한 필연적 이유가 반드시 있었어.

같은 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이 감기로 기침을 계속 했다거나, 먹지 말라는 현지 물을 마셨거나, 하는.

집에 있을 때처럼 이유도 없이 몸살이 나거나 편도선이 붓거나 하진 않더라고.

여행지에선 몸이 내내 날아갈 것 같았단 얘긴 아니야.

발목이 시큰거리고 매순간 앉을 자리를 찾곤 해.

그렇지만 숙소로 돌아와 자고 나면 또 나갈 수 있는 몸으로 변해 있어.

아침엔 제법 가벼운 몸으로 일정을 시작 하게 되는 거지.

 

하지만.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순간 중력이 돌아오고 몸이 무거워져.

마치 떠나기 전의 불안이 다시 살아나 실체를 보여주는 것 같아.

여행을 떠나기 전엔 상당히 불안해.

아프지 않을까.

아파서 고생하지 않을까.

그게 가장 큰 고민인 모양이야.

어릴 때부터 감기를 달고 살았던 일상이 만든 불안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막상 여행이 시작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마치 달리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한 가지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지도 모르겠어.

오직 한 곳에만 에너지가 모이니까.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가 쓰이는 지도 모르지.

일상에선,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너무 많아서, 그래서 온통 신경이 분산되어 에너지가 과하게 쓰이는 지도 모르겠어.

일상을 여행처럼 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야.

그런데 그건 불가능이었어.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지만, 정신을 한 곳에 모으는 자체가 불가능이었어.

잠깐은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필요한 만큼 지속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숙제야.

나에겐 그랬어.

의지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로 느껴진 거지.

여행지라서 가능했던 무중력의 시간이었다고.

여행이 인류에게 필요하다면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여행을 휴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라고.

잡다한 분산의 더듬이를 거두어들여 한 곳에 조용히 쉬게 하는 의식의 휴식.

의지의 강제 종료.

신경줄이 잡스러운 나에게 여행은 바로 그런 선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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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늬 높새 갈마 소슬바람 러시아로 불다>

는 러시아 여행기입니다. 연재에 앞서 차례를 미리 소개합니다. 연재이니 만큼 맥이 끊겨 연결이 잘되지 않아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까 하는 염려에서입니다. 재밌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에필로그

씨스뜨라

첫째날(5월 9일 월요일)

  <새벽의 푸념>

  <호출택시>

  <셰례메티예보 공항>

  <호객 택시>

  <러시아 청년, 샤샤>

  떠나기 전에. 1

 

 둘째날(5월 3일, 화요일)

  <계산이 맞지 않으면 개조를 하라>

  <붉은 광장이 아닌 아름다운 광장>

  <크렘린>

  <성 바실리 성당>

   <슈펴마켓 찾아 삼만리>

  <어둠 속에 벨이 울리고>

  떠나기 전에, 2

 

셋째날(5월 4일  수요일)

  <적응력>

  <모스크바 투어 버스>

  <감자요리와 굼백화점>

 떠나기 전에, 3

 

넷째날<5월 5일 목요일>

  <또 택시!>

   <초고속 열차 삽산>

  <모이까 강, 그리고 숙소>

 떠나긴 전에, 4

 

다섯째 날(5월 6일,금요일)

  <맑음과 흐림은 뫼비우스의 띠>

  <에르미타쥐 가는 길과 궁전광장>

  <네바강을 건너 멘쉬코프 궁전으로>

  <달밤의 함박눈, 요르단 계단>

  <과욕이 낳은 작은 사고>

 

여섯째 날 (5월 7일 토요일)

  <다시 에르미타쥐>

  < 중국 식당>

 단상 1--미술품 수집과 감상할 권리

 

일곱째 날(5월 8일 일요일)

  <그리보에도바 운하와 피의 구세주 성당>

  <여름정원과 묘령의 여자>

  <식당 마말리가에 밀린 카잔 성당>

  <마린스키 극장과 한여름밤의 꿈>

단상 2--여름정원에서 생긴 일

 

여덟째 날(5월 9일 월요일)

  <국가의전승기념일과 국민의 추모 행렬>

  <바실리 섬과 라스트랄 등대>

  <자야치 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바람의 다리, 뜨로이쯔 모쓰뜨>

 단상 3--추모의 의미

 

아홉째 날(5월 10일  화요일)

  <배를 타고 뻬쩨르고프로>

  <세상의 모든 분수, 여름궁전 아래정원>

   <대궁전을 뒤로 하고>

 단상 4-- 권력과 능력

 

열번째 날<5월 11일 수요일>

  <차고 신선했던 숲, 빠블롭스크 공원>

  <예카테리나 궁전>

  <버스 타고 집으로>

 단상 5-- 비쩹스끼 역에서

 

열한번째 날<5월 12일 목요일>

  <러시아 박물관>

  <러시아 도넛 삐쉬까와 한국 식당 서울>

  <풀코보 공항으로>

 단상 6 --여유가 불러온 엉뚱한 생각

 

열두째 날(5월 13일 금요일)

  <집으로>

마지막 단상

 

에필로그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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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미래에 꿈을 영상으로 촬영하는 기술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개인의 꿈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처럼 영상으로 재현된다. 그것이 몽찰(夢札)’이라 불리며, 몽찰을 보고 꿈을 해석하는 꿈해석사라는 전문 직업도 생긴다.

 

 <몽위>는 위의 내용이 미래에 가능하다는 가설 위에 태어난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에 또 한 번 놀란다.

 

 유이코는 예지몽을 꾸는 여자다. 그런데 그 예지몽은 늘 나쁜 미래를 보여준다. 비록 미래를 보여주긴 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어디서 일어날지 자세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예지몽은 악몽이며 재앙의 경고다.

 재앙을 막아보기 위해 유이코의 꿈은 정부 차원에서 감시된다. , 많은 밤을 몽찰을 뽑는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잠들게 된다. 재앙을 예고하는 예지몽은 유이코에게도 힘들고 두려워 잠이 들 때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를 원한다. 그런 유이코를 짝사랑하면서 끝까지 곁을 지켜준 히로아키.

 유이코는 본래 히로아키의 형 시게아키의 연인.

 시게아키가 유이코를 집으로 데려온 첫 날부터 몰래 그녀를 사랑하게 된 히로아키.

 유이코의 특별한 능력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는지 차츰 거리가 생기고 그 사이를 자연스럽게 히로아키가 채워가게 되는데, 그즈음, 유이코는 주유소 폭발 화재 현장에서 사라진다.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망으로 처리되고 장례식도 치루어지는데, 10년 뒤 유이코의 모습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물론 히로아키에게도.

 꿈 해석사가 되어있는 히로아키는 그녀의 존재를 찾아나서게 되는데.

 

 꿈은 외부에서 온다.

 그러므로 꿈에 보이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자가 그리워서 찾아온 사람이다. 고로 사람의 의식 속은 꿈으로 드나들 수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의식은 연결되어 있고 연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의식 차원은 물리적인 시간과 상관이 없이 움직인다.

 

 이런 가능성이, (나는 물론 가능성이 아니라 진실인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야기로, 그것도 기발한 상상력이 꽃피운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태어났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란 이런 소설에 딱 맞는 찬사이리라. 기묘하다느니, 공포라느니 하는 서평이 앞서지만 그건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방편으로 쓴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런 말보다 아름다운 사랑이란 말이 앞서야 한다고.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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