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52일 월요일)

 

 

 

 

 

<새벽의 푸념>

 

 

새벽 340.

잠든 지 2시간이 겨우 지난 시각이다.

눈을 뜨지만 눈꺼풀만 열린다.

몸은 도무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이 없다.

애구, 새벽 기상 괴로워서 여행도 못가겠네.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는 탄식이 찡그린 이마에 그려진다.

늦게 자는 습관 때문에 지난밤에도 결국 원하는 시간에 잠들지 못했다. 물론 일찍 자려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람. 수십 년 몸에 밴 습관이 하루 저녁에 반짝 달라지는 기적을 일으킬 리가 없다. 빨리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이 되어 오히려 잠을 방해했다. 취침 모드 90분이 지나 저절로 라디오가 뚝 꺼졌고 다시 라디오를 켰을 땐 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자는 버릇도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사실은 빨리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켜놓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캄캄한 밤, 잠들지 않고 누워있는 시간에 괜히 무서운 생각이 끼어들 때가 있다. 언젠가 본 영화 때문일 수도, 책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난데없이 뛰어드는 전설의 고향도 있다. 어릴 때 많이 꾸던 귀신 영화 같은. 그런 생각에 휩싸이면 어둑어둑한 방에서 눈도 뜨지 못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둠은 사물의 윤곽을 기묘하게 바꾸는 재주가 있어서 눈을 떴다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괜히 헛것이라도 보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지 않고 있는 것이 훌륭한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눈 대신 귀가 사방으로 촉수를 뻗는다. 조용한 밤. 너무나 조용해서 귀는 공간을 날아 멀리 있는 소리를 동냥해올 판이다. 그 정도 되면 소리도 무서워진다. 아니 어떤 소리가 들릴까봐 무서운 것이다.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소리라도 들리면 뇌는 기묘한 상상을 하기 시작하니까. 왜 꼭 한밤중에 뇌는 그런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떤 소리가 들리는 걸 막기 위해 차라리 음악을 듣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이 라디오를 켜놓고 자는 버릇이 생긴 이유다.

내 방 라디오의 취침 모드 최고 긴 시간은 90.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안에 잠들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여행의 강박이 잠을 설치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쁜 수면 습관은 오늘같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날엔 좀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눈이 아프고 빙빙 돌지만 무조건 일어나 움직여야 하니까.

 

눈을 크게 떠볼 노력도 없이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간다.

어차피 모든 것이 희미하다. 시간이 좀 더 지나야 사물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아직 눈을 뜰 시간이 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뇌의 작용인지도 모르겠다.

우와, 서울로 이사 가야겠다.

서울 사람들은 좋겠다. 공항이 가까워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푸념에는 영혼이 없다. 의사전달의 기능이 전혀 없는 발성일 뿐이다. 대구란 도시가 내가 살기엔 여러모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니까. 도로 정체가 있다 해도 서울에 비하면 견딜만한 정도이고, 외곽지라 해도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으며, 도시가 가진 기능을 모두 갖추었으면서도 압도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라 느끼는 것이다. 아니 이것도 생각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구를 구석구석 탐사하며 지역에 대한 사랑을 키워본 적도 없고 외곽지를 돌아봐야겠다는 꿈을 가져본 적도 없다.

어차피 방향 감각도 별로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쏘다니는 취미도 없으며, 지구가 넓든지 좁든지 궁금하지도 않은 나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익숙한 곳이 편한 뿐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을 편리함으로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그 편리한 도시가 해외로 여행을 가야할 때면 불평의 대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물론, 대구에도 공항이 있고 해외로 가는 항로도 있다. 하지만 제한이 많다. 그 제한에 부딪칠 때마다 그냥 투덜거려보는 것이다. 서울로 이사를 가겠다는 둥 어쩌구 하면서. 물론 투덜거림 속에 변화의 결심은 전혀 없다.

변화를 꾀하는 자는 투덜거리지 않는 법.

그래서,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은 나는 푸념의 기억조차 잊어버리고 거울 속의 얼굴에 집중한다.

화장은 간단히.

긴 시간 세수를 하지 못할 테니까.

 

 

 

 

 

<호출택시>

 

 

?

그 말밖에 못했는데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물론 예의는 갖춰 끊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죄송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게 뭐? 난 아무런 질문도 못했고, 항의도 못했다. 왜냐고? 상대가 죄송합니다, 란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으니까.

이른 새벽에 이건 또 무슨 날벼락? 난 기차를 타야 한다고. 그 기차를 놓치면 비행기를 못 탈 수도 있고, 그리고 비행기를 놓치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상을 하게 만들다니.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530분까지는 동대구역에 도착해야 한다. 인천공항행 KTX550분발이다. 이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잠을 설쳤고 이 기차 외엔 답이 없다. 앞으로 열흘 남짓의 여행 일정은 이 기차에 무사히 올랐을 때야 보장되는 것이다. 부아가 치밀지만 불평과 분노에 나를 맡겨놓을 여유도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인정사정없이 흐른다.

항상 이용하던 호출택시의 배신.

다른 호출택시는 번호도 모른다. 허둥지둥 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114를 누른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온갖 생각이 스친다. 다른 곳에서도 택시를 바로 보내지 못한다면 어떡하나. 짐을 끌고 큰 도로까지 나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시간이 이렇게 촉박하지 않다면 그깟 1020분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될까.

다른 호출택시는 다행히 곧 연결이 되었다.

택시에 앉아서야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분노의 이유를 곱씹어볼 여유를 가졌다.

아아! 정말 싫다.

이런 식의 무책임한 행동.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기에 지난밤에 미리 전화로 확인을 했다. 호출택시 상담원은 24시간 대기라며 언제든 호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지만 예약은 받지 않으며 필요한 시간에 전화하면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난 강조했다. 새벽 4시든 5시든 괜찮으냐고. 그 질문에도 시원스레 괜찮다고 했다. 하기 너무 시원한 대답이 언제나 문제였다. 너무 빨리 나오는 대답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말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렇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당연한 대답이라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고 뇌가 인식할 시간은 있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대답이 말끝을 물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듣지 않았거나 할 말이 이미 정해져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래도 믿었다. 상담원을 믿었고 호출택시 회사를 믿었다. 성의 없이 느껴질 정도로 질문의 끝을 자르며 대답이 나왔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벽이나 한밤중에 택시를 호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이한 현상도 아니고 어떤 이유로든 현재의 대한민국은 밤에도 모두 잠들어있는 건 아니니까. 낮만큼은 아니지만 밤에도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나처럼 새벽차를 타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래서 24시간 편의점의 존재도 이상하지 않으며 찜질방은 이제 우리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난 유비무환을 실천했고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면서도 택시 걱정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설 준비를 완전히 끝낸 후 전화를 했다. 일반적으로 호출택시는 호출 후 10분을 넘긴 적이 거의 없었다. 대개는 5분이면 족했다. 그래서 택시를 타야할 시간에서 10분을 남겨놓고 전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리면 연락이 갈 것이란 대답을 듣고 여행 가방을 현관 앞으로 끌어다놓았다. 곧 전화벨이 울리고 난 현관을 나서기만 하면 되니까. 정말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그 전화는 운전기사의, 곧 나오면 된다는 전화여야만 했다. 그럴 줄 알고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전화는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혼란으로 바꿔놓았다.

상담원이었다.

고객님, 가까운 곳을 지나는 택시가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

세상에 그런 날벼락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무책임한 말도 존재한단 말인가.

너무나 당황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어제 전화로 미리 물어보지 않았느냐?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 거기만 믿고 있다가 큰일 났단 말이다!

이런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아니, 어떤 말이 나올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당황해 예? 하고 있는 사이, 그 시간이 아마 1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상담원은 죄송합니다를 던지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면서 고객은 무슨. 고객이라면서 물을 먹인단 말인가. 고객(顧客)이 아니라 고객(苦客)대하듯 하잖아? 마치 귀찮은 손님 밀어내듯 말이야.

상담원의 태도는,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신속하게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비법이란 바로 수많은 같은 경험.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화가 난 내 마음은 그렇게 생각해주기도 싫었다.

그리고 만약 상담원의 대응에 대한 내 판단이 맞다면, 그런 무책임한 행동은 회사의 방침일까. 방침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업무 태도가 묵과 되고 있다면 방침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같은 결과를 가져올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단지 상담원 개인의 실수나 안일한 근무태도일까. 어떤 것이 원인이라 해도 손님에 대한 상담원의 이런 대응은 회사의 미래에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회사에 독이 되는 것이 회사원들에게도 약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손님을 태운 택시는 한산한 새벽 거리를 몹시 빠르게 달린다. 어느 순간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복잡한 생각 때문에 속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속도 때문에 생각이 날아갔는지는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들이 이젠 오직 속도에 집중한다. 속도에 대한 집중도 잠시 후 흩어진다. 역이 가까워지고 있다. 씨스뜨라는 동대구역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다. 마음은 이제 그들이 있을 대합실로 가 있다.

누가 먼저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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