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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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로랑 비네(Laurent Binet)"가 2010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HHhH"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콩쿠르 최우수 신인상(Prix Goncourt du Premier Roman)'을 작가에게 안겨주었고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올해의 주목할 만한 도서(2012년)', 일본 '서점대상 번역서 부문 1위(2014년)'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38년 독일은 체코를 합병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 3제국 보호령 체코 총독으로 SS(나치스 친위대)의 2인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임명합니다. 체코 망명정부의 베네시 대통령과 영국은 체코에 "요제프 가브치크", "얀 쿠비시" 두 청년을 포함한 낙하산 병 10여명을 침투시켜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려는 계획, 일명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을 기획합니다. 1942년 5월 27일 "하이드리히"가 탄 메르세데스 앞에 매복하고 있던 "가브치크""쿠비시"가 나타나 유인원 작전을 실행합니다.

 

그대들은 그 어느 국가도 두 명에게 단독으로 맡긴 적이 없는 최대 임무에 투입되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계속 훈련을 받는다. 그대들은 정의와 복수를 믿고 있으며 용기와 의지력과 재능이 있다. 그대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마음속에서 커지다 점차 통제가 불가능해진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그대들이지만 꿋꿋하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대들은 평범한 인간이다. 한 남자.

그대들의 이름은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 이제 그대들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 불린다(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에서 제목을 따온 "HHhH"는 SS에서 수장인 "하인리히 히믈러" 다음의 서열 2위 권력자이자 그의 오른팔, 제국보안부 수장, 나치스 보안방첩부 책임자, 게슈타포 책임자 그리고 '금발의 짐승', '독일 3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로 불리며 유대인 대학살의 주도자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 작전인 '유인원 작전'을 다룬 역사소설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역사소설과는 달리, 검증된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생각 그리고 집필과정이 섞여있는 상당히 독특한 형식의 역사소설입니다.

'유인원 작전'은 "새벽의 7인 (Operation Daybreak)" 등 여러 편의 영화와 소설 속에 등장했던 소재이지만, 이 작품 "HHhH"에서는 철저히 확인된 사실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사들 역시도 확인된 대사들 위주로 쓰였습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라도 확인이 되지 않았다면 작가 "로랑 비네"는 쓰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과감히 생략하며, 자신이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목적을 확고히 유지합니다. 거기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자료 조사 과정과 집필 과정을 섞어서 소설을 257개의 챕터로 쪼개놓습니다. 처음 읽으면 이런 독특한 구성에 적응이 힘들지만 곧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이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그리고 '유인원 작전'이 시작되는 후반부부터 작가는 픽션의 요소들을 첨가해서 클라이맥스로 독자들을 싣고 질주합니다.

 

하이드리히가 자신이 만든 가장 악랄한 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처음 사용한 곳이 폴란드다. 나치스 친위대 보안방첩부와 게슈타포 대원들로 이루어진 이들 SS 특별부대는 독일 국방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인간 청소' 임무를 담당한다. 팀마다 작은 소책자를 받는다. 얇디얇은 종이로 된 소책자에는 필요한 모든 정보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있다. 그 정보란 점령된 지역에서 제거해야 할 모든 사람의 목록이다.

 

이렇게 사실과 가상의 네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을 '인프라 소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런 형식으로 소설을 쓴 이유는 책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로 확고히 드러납니다. "역사는 여러 각도로 다시 읽을 수는 있지만 다시 쓸 수는 없다.". 물론 작가도 픽션의 요소에 굴복하고 싶은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책 곳곳에는 작가의 역사소설에 대한 고집과 집념 그리고 고민이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집착에 가까운 '유인원 작전'에 대한 관심과 애정(?) 부분을 오가며 책을 읽다 보면,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와 격렬하고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묻어있는 문체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를 책을 읽는 사람의 감정도 같이 변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독특하고 강렬합니다.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전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이미 유대인 100만 명 이상을 처형했으니 참석자 중 하이드리히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로랑 비네"가 이 작품 "HHhH"를 쓴 이유는 유인원 작전의 두 영웅 "가브치크""쿠비시"를 위해서입니다. 물론 악마와도 같지만 캐릭터적으로 매력있고 많은 자료들이 있는 홀로코스트의 주도자 "하이드리히"의 분량이 더 많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히 두 명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프라하에 침투한 다른 낙하산 병들, 이들이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도움을 주었던 많은 체코 시민들 그리고 유인원 작전의 보복으로 독일군에게 몰살당한 리디체 마을의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 "HHhH"가 쓰여졌습니다. 처절했던 성당 지하실에서의 마지막 저항이 끝나고,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사실이 주는 강렬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이것은 분명 작가 "로랑 비네"의 오랜 노력과 고민의 산물이 아닐까 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등장인물을 만드는 것은 증거를 위조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이 주제에 대해 같이 토론해 본 내 배다른 형이 말한 비유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유죄 증거가 바닥에 널려 있는 범죄 현장에 가짜 증거를 들이미는 것..."


사실 저는 역사적 이야기를 영화나 소설로 옮길 때 어디까지 각색해야 하는가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많이 관대한 편이라 수많은 작가들 그들만의 독특한 목소리만큼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이렇게 역사적 사실들, 그러니까 철저하게 고증된 실화만이 가지는 힘과 감동은 더욱 강렬한 것 같습니다. 금발의 짐승이라고 불렸던 "하이드리히"의 암살 작전을 지금이라도 알고 싶은 분들이나, 실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HHhH"는 그만큼 강렬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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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립 잭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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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이언 랜킨(Ian Rankin)"이 1992년에 발표한 "존 리버스"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스트립 잭(Strip Jack)"입니다.

 

매음굴을 급습하는 작전을 실시한 경찰들은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찾아냅니다. "그레고르 잭". 인기있는 전도유망한 하원의원. 어느 순간 매음굴 앞에는 기자들이 몰려와 있고 "그레고르 잭" 의원이 매춘 단속에 걸렸다는 뉴스는 전국적으로 퍼져갑니다. "존 리버스" 경위는 누군가 이 젊은 하원의원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생각에 측은함을 느낍니다.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답. 나도 모르겠어. 문 앞에서 펼쳐진 상황에 자극을 받은 그는 아무 대책도 없이 하원의원의 집에 불쑥 들어와버렸다. 그는 자갈 깔린 진입로를 따라 대형 세단과 큰 집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그레고르 잭을 만나기 위해.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경위님?

아뇨, 의원님. 그냥 참견하길 좋아할 뿐입니다.

첫마디로 좀 부적절한 걸 같은데.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매음굴 불시단속에 젊은 하원의원인 "그레고르 잭"이 적발됩니다. 그 순간 매음굴 앞에는 기자들이 깔리고 "리버스" 경위는 "잭"이 누군가의 덫에 걸렸다는 의심을 합니다. 다음날부터 뉴스와 신문은 매춘 단속에 걸린 하원의원에 대한 소식들을 대대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의원의 집 앞에도 기자들이 상주하기 시작합니다. 단순 호기심에 의원을 찾아간 "리버스"는 의원의 아내인 "리지"가 집을 나간 뒤로 연락두절인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부잣집 딸이자 방탕한 사생활로 유명한 "리지"는 자주 친구들과 별장에서 파티를 벌였고, "잭"은 아내가 그곳에 있으며 자신의 뉴스를 보고 화가 난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별장에도 그녀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강에서 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고 시체의 신원이 하원의원의 아내 "리지"로 밝혀지면서 인기있는 젊은 정치인인 "잭"의 정치적 생명은 끝난 상황이 되고 맙니다. 매춘 단속에 걸린 정치인, 그의 유명인 친구들 그리고 정치인의 죽은 아내 사이에서 "리버스" 경위는 몇몇 연관성을 찾아내며 수사를 진행합니다.

 

리버스는 여전히 그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장로교회파답지 않게 비관주의자였다. 하지만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과 희망. 그에게 부족한 것은 관용뿐이었다.

 

"존 리버스"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은 함정에 빠진 정치인, 살해당한 그의 아내 그리고 정치인의 친구들이 얽힌 사건을 다루는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하게 시작됩니다. 젊은 정치인이 함정에 빠져 이미지가 실추되고, 그의 아내의 연락두절도 남편 때문에 화가 나서 단순히 연락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쇼 윈도우 부부였던 이 둘은 언론이 다루기 즐겨하는 유명인이었고, 여자가 살해됨으로서 사건은 더욱 사람들의 흥미를 끕니다. 자신이 해결해야할 고서 도난 사건이 있음에도 단순한 호기심에 이 사건에 발을 담근 "존 리버스"는 이 사건에 꽤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있고 심지어 자신이 맡은 고서 도난 사건도 작은 일부분임을 알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복잡한 인간관계와 감정에 집중하고 있고, 이야기 자체도 작가의 말처럼 그간 썼던 전작들 보다 덜 흉포합니다. 하지만 작가의 일취월장한 글 솜씨 덕분에 그간 읽었던 시리즈 중 가장 읽는 맛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아재개그처럼 스코틀랜드식 영어로 하는 말장난에 피식 웃음이 나고, 주인공 "리버스"는 더 투덜거리며 찌질한 면모를 드러내 측은한 유머를 선사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생각하고 발로 뛰는 성실한 수사관이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시작이었다. 이번 사건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TV 배우, 하원의원, 섹스 스캔들, 죽음. 기자들은 어떤 순서로 표제를 써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섹스 스캔들 하원의원의 부인, TV 스타의 집에서 익사? TV 스타, 하원의원의 부인인 친구의 자살에 괴로워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소유형의 남발......

 

"이언 랜킨"은 이 작품 "스트립 잭"으로 자신과 "존 리버스"의 견습 기간이 끝났다고 몇 번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범죄소설가가 될 생각이 없이 일단 팔리는 책을 쓰려고 이런 저런 장르의 소설을 쓰던 작가 자신도 범죄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고, 캐릭터 "존 리버스"도 다음 작품부터 실제 경찰서에서 일하고 실제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등 현실성을 더 갖추게 됩니다. 그 결과 "존 리버스" 시리즈는 매년 영국에서 팔리는 범죄소설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인기 시리즈가 됐고, "이언 랜킨"은 많은 상들을 수상하며 스코틀랜드의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캐릭터 "존 리버스"도 영국에서 "셜록 홈즈", "모스" 경감 등과 함께 언급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레고르 잭은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지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런 대중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는 건 몇 배 더 어려운 일이다. 무성의한 미소와 적당한 힘이 들어간 형식적인 악수. 그는 그렇게 주민들 틈에서 선거구를 관리해왔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은 심각할 만큼 지저분했다. 그리고 잭이 은폐하려들수록 점점 더 지저분해질 뿐이었다. 옷장에 해골을 숨겨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화장장을 갖춰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많은 이들이 영국의 "마이클 코넬리""이언 랜킨"이라던가, 미국의 "이언 랜킨""마이클 코넬리"라며 비교를 합니다. 이 두 작가의 데뷔작부터 읽어 본 결과 "마이클 코넬리"가 처음부터 수준 높은 어떤 경지에 다다른 작품으로 데뷔해서 그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면 "이언 랜킨"은 조금 모자란 데뷔작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진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됩니다.

아무튼 범죄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존 리버스" 시리즈는 꼭 읽어봐야 할 시리즈이니 첫 작품 "매듭과 십자가"부터 "스트립 잭"까지 작가 "이언 랜킨"의 진화하는 모습을 직접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내년 초에는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The Black Book"이 출간된다고 합니다. 출판계가 더 힘들어진 상황 속에서 이렇게 꾸준하고 빠르게 시리즈를 내주는 출판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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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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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제임스 그레이디(James Grady)"가 1974년에 발표한 걸작 스파이 소설 "콘돌의 6일(Six Days of the Condor)"입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 책 제목을 보고 한 고전 스파이 영화를 떠올리실 듯 한데, 맞습니다. "콘돌의 6일"은 "시드니 폴락"감독이 연출하고 "로버트 레드포드""페이 더너웨이"가 출연한 영화 "코드네임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의 원작 소설입니다.

 

워싱턴 D.C.의 의회도서관 뒤편에 위치한 별다른 특징없는 건물에 있는 '미국문학사협회'에 무장괴한이 침입해서 그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 시각 우연히 외출했었던 '미국문학사협회' 직원 "로널드 말콤"은 시체들을 발견하고 즉시 그곳을 빠져나와 그가 배운 패닉 규정에 따라 행동합니다.

 

"저는......" 그 소름 끼치는 1초 남짓한 시간에 말콤은 자기 코드네임을 까먹었다. 그는 -동일한 코드네임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다른 요원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소속 부와 과의 숫자를 밝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코드네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실명을 밝히는 건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던 중에 기억이 떠올랐다. "저는 17부 9과의 콘돌입니다. 우리는 공격당했습니다."

 

'미국문학사협회'라는 간판을 걸고 미국에 출간되는 모든 출판물을 읽고 분석하는 CIA 지부에서 근무하며. 스릴러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을 담당하는 "로널드 말콤"은 매일 같은 시각, 자신의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여인을 바라보는게 유일한 낙인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점심 배달 담당으로 "말콤"이 외출을 한 시각,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미국문학사협회에 들어와 CIA 직원들을 모두 죽입니다. 사무실에 도착한 "말콤"은 자신이 끔찍한 학살에서 운 좋은 생존자가 된 것을 깨닫고 그 즉시 자리를 이동해서 평생 연락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패닉 라인으로 연락을 취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픽업할 다른 요원들을 만나는 장소로 간 "말콤"은 자신이 어떤 음모에 빠졌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 역시 죽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제대로 된 현장교육을 받지 않은 CIA 요원인 "말콤"은 6일 동안 자신을 쫒는 무리들에게서 도망을 다니며 거대한 음모의 중심에 다가갑니다.

 

"굿바이, 콘돌. 마지막으로 충고 한마디 하지. 책상에 앉아 조사 업무만 하도록 하게. 자네는 자네 몫의 행운을 다 써버렸으니까. 요점만 얘기하면, 자네는 썩 훌륭한 현장 요원은 아냐."

 

ITW(국제스릴러작가협회)가 선정한 '꼭 읽어야할 작품 100'에 꼽힌 걸작인 이 작품 "콘돌의 6일"은 작가 "제임스 그레이디"가 24살에 써낸 데뷔작입니다. 출판 계약과 거의 동시에 영화 판권이 팔리고, 완성된 영화마저 흥행에 성공해서 작가는 이 작품 하나로 노후대비로 해결했습니다.

하루종일 미스터리 소설만 읽는 분석요원인 "말콤"은 학살 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지만 바로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CIA, FBI, 경찰 그리고 어떤 음모집단들에게 이중첩자, 살인자, 살아있어서는 안될 인물로 낙인 찍힌 "말콤"은 도중에 만난 "웬디"와 함께 도망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냥감 신세가 되어 운 좋게 위험들을 헤쳐 나아가던 "말콤"은 어느 순간 사냥감이 아닌 사냥꾼이 되어 음모의 배후에 다가갑니다. 이런 "말콤"의 6일 동안의 여정을 작가는 세세한 묘사나 이런저런 수사를 배제한채 건조한 문체로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시킵니다. 대사를 제외한다면 신문기사처럼 느낄 만큼. 그렇지만 스릴러 갖추어야할 모든 요소들을 잘 갖춘 오락소설입니다.

 

"이 사건 전체와 관련해서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어르신. 말콤은 현장 요원 훈련을 받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분석관에 불과한 그가 지금 포위망을 얼마나 잘 피해 다니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래, 그것도 상당히 이상하지." 노인은 대답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있잖나, 우리 애송이 말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는군. 나를 위해서라도 그 친구를 찾아내게, 케빈. 나를 위해 신속하게 찾아내란 말일세."

 

"콘돌의 6일"이 꽤 오래된 작품이기도 하고 페이지 분량도 상당히 적은 편이지만 꼭 읽어야할 스파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데 (아직도 영화 속 "로버트 레드포드"의 패션은 끝내준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을 읽고나니 언제 한번 영화를 또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스파이 소설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거기에 재출판을 기념한 작가의 글도 상당히 재미있어서 (특히 영화를 본 소련 정부가 '미국문학사협회'와 흡사한 조직을 진짜로 만든 이야기) 더 가치가 있는 독서였습니다. 혹시 압니까? "콘돌의 6일"이 잘 팔리면 출판사에서 "콘돌"이 등장하는 후속작들도 내줄지. 아니면 계약소문이 무성했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평가를 받는 걸작 "마라톤 맨"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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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트랙 발란데르 시리즈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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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에 세상을 떠난 스웨덴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 "헨닝 망켈(Henning Mankell)"이 1995년에 발표한 "쿠르트 발란데르"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사이드 트랙(Villospår/Sidetracked)" 입니다. 이 작품 "사이드 트랙"은 출간 해인 1995년, 스웨덴 추리작가 아카데미의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고 1999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2001년, CWA(영국 추리작가 협회)의 최우수 작품상에 해당하는 '골드대거'를 수상한, 시리즈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작품입니다.


6월의 어느 날 자신의 유채꽃밭에 어떤 여자가 하루 종일 서있다고 한 노인의 신고를 받은 "쿠르트 발란데르"는 그곳으로 갑니다. 까마잡잡한 피부에 열네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의 불안한 모습을 보고 "발란데르"는 소녀에게 다가가고 그 순간, 소녀는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합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분신자살을 한 소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발란데르"는 괴로워하지만 충분히 괴로워할 시간도 없이 전직 법무부장관이 살해당했다는 신고를 받게 됩니다.


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이 소녀가 유채밭 한가운데서 자기 몸에 불을 지른 이유를 알아낼 때까지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유를 알아야만 해, 계속 경찰로 지내려면 반드시 알아야 해.


초여름이 시작된 스웨덴의 스코네에 위치한 한 유채밭에서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소녀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분신자살을 합니다. 소녀가 불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발란데르"는 크나큰 충격에 빠지지만 또 다른 충격적인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희생자는 자신의 집 앞 해변에서 도끼에 의해 살해당하고 머리가죽이 벗겨진 채 발견된 전직 법무부장관 "구스타프 베테르스테트"였습니다. 특이한 살인방법과 희생자가 유명 정치인이었기에 스웨덴의 작은 도시 스코네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유명 미술상 "아르네 칼만"이 자신의 별장에서 파티를 하는 도중에 같은 방식으로 죽은 채 발견됩니다."발란데르"를 포함한 스코네 경찰들은 이것이 영화나 외국의 뉴스에서만 보던 연쇄살인이 아니길 바라지만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발란데르"는 생애 처음으로 연쇄살인범을 상대하게 됩니다.


"베테르스테트가 법무부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미술품 절도와 관련된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죠. 되찾지 못한 그림들, 지금은 아마 개인 소장가들의 저택 벽에 걸려 있고, 절대 일반에 공개되지 않을 겁니다. 경찰이 장물아비를 잡았어요. 중간거래상이겠죠. 물론 잡으려고 해서 잡은 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장물아비가 베테르스테트가 연루된 게 확실하다고 증언을 했거든요. 하지만 증거가 없었고, 그대로 묻혔습니다. 구덩이 안에서 흙을 퍼내는 사람들보다는 위에서 구멍을 메우는 사람들이 늘 더 많았던 거죠."


눈부시게 아름답고 노란 유채꽃들 사이에서 한 소녀의 분신 장면으로 시작하는 "사이드 트랙"은 도끼로 사람을 죽인 후 희생자의 머리가죽을 벗겨가는 연쇄살인범을 뒤쫓는 형사 "쿠르트 발란데르"의 이야기입니다. 스톡홀름같은 대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 스코네에 등장한 연쇄살인범은 "발란데르"와 동료들을 혼란과 충격에 빠트립니다. 희생자들의 연관성은 묘하게 어긋나고 범행수법은 점점 더 잔혹해지지만 수사는 더디게 진행됩니다. 그와중에 "발란데르"는 유채밭에서 자살한 소녀의 생각을 놓지 못합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건의 전모는 90년대 중반부터 균형을 잃기 시작하는 스웨덴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 낳은 비극임이 밝혀집니다.

청소년 자살율이 올라가고 이민자 작취, 외국 여자들의 인신매매 등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스웨덴이 조금씩 썩어가기 시작하는 사회 문제들을 범죄 해결이라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발란데르"는 점점 지쳐갑니다. 언제까지 경찰로 버틸 수 있을지, 왜 젊은이들이 죽음을 택하는지 등 수사를 진행하며 계속 고뇌합니다. 거기다 아버지의 치매, 딸아이의 진로, 리가에 있는 연인과의 문제 등 여전히 삶에 지친 중년 남자의 고민도 합니다.


나중에 바이바와 이야기하던 중에 발란데르는, 당시 그를 사로잡았던 그 갑작스러운 느낌, 경관답지 않았던 느낌에 대해 설명해보려고 애썼다. 그건 그의 안에 있던 어떤 댐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그는 이제 스웨덴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계가 사라져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대도시의 폭력이 그가 맡고 있는 지역까지 침투했고, 일단 들어온 이상 앞으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세상은 수축하면서 동시에 확장되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암투병에 관한 글을 기고했던 작가 "헨닝 망켈". 그가 죽은지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 "발란데르" 시리즈 마지막 작품 "불안한 남자"를 끝으로 더 이상 "발란데르" 시리즈를 읽게 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고맙게도 미 출간작이자 시리즈 중 최고 걸작이라는 "사이드 트랙"을 만나게 돼서 상당히 기쁩니다. 여전히 작가는 세계최고의 복지국가이자 살기 좋은 국가 스웨덴이 품고 있는 문제들을 범죄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녹여냅니다. 이번에는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젊은이들에게 행한 악이 순환되어 다시 악이 되는 슬픈 모순들을 훌륭하게 포착해냈습니다.


그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젊은이들이 분신자살을 하고, 또 이런저런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하는 세상이었다. 그들은 소위 실패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스웨덴 국민들이 믿었던,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세웠던 무언가가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이미 잊혀버린 이상을 기념하는 기념비뿐이었다. 이제 그를 둘러싼 사회가 무너지고 있었다. 정치체계가 전복되는 중이었고, 이제 어떤 건축가가 나타나 새로운 건축물을 세울지, 그건 또 어떤 체계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름날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끔찍했다.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억하기 보다는, 잊어버렸다.


"사이드 트랙"은 오랜만에 저에게 씁쓸한 여운을 남긴 최고급 범죄소설이었습니다. 감히 이 작품 "사이드 트랙"을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북유럽 범죄소설의 정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시리즈 마지막 작품 "불안한 남자"와 묘하게 연결되는 정서와 감정들 때문에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발란데르"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셔야할 작품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이 작품이 국내에 출간될 "발란데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사이드 트랙"의 내용을 담고 있는 영국 BBC판 드라마 "Wallander" (Series 1)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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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스패로우 3 - 배반의 궁전 버티고 시리즈
제이슨 매튜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30년 이상을 CIA에서 몸 담았던 작가 "제이슨 매튜스(Matthews Jason)"의 두 번째 작품 "레드 스패로우 : 배반의 궁전(Palace of Treason)" 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 첩보전을 다룬 새로운 걸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에드거' 상을 수상한 작가의 데뷔작인 "레드 스패로우"의 후속 작품으로 "디바"라고 불리는 이중스파이 "도미니카 예고로바"와 CIA 요원 "네이트 내쉬"의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대위로 승진하며 SVR (러시아 해외정보국)에 복귀한 "도미니카 예고로바"는 이란의 핵 전문가를 포섭하여 이란이 준비 중인 대규모 핵시설 준비계획을 알아냅니다. 러시아는 중동에 자신들의 영향력 확장과 "푸틴"의 비자금을 위해 이 계획에 숟가락을 얹으려 합니다. 그러는 사이 "도미니카"는 다시 CIA와 접촉을 하며 이중첩자 "디바"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재개합니다.

 

도미니카는 마음속으로 전율했다. 크렘린. 장엄한 건물들, 금박을 입힌 천장들, 높이 치솟은 홀들, 사기와 무시무시한 탐욕과 잔인함이 서까래까지 가득 차 있는 곳. 배반의 궁전. 이제 도미니카(또 다른 종류의 배반자)가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무표정한 얼굴을 핥으러 이 궁전에 온 것이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거물급 이중스파이였던 자신의 상관의 정체를 밝혀낸 공으로 승진과 함께 SVR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 "도미니카"는 자신의 스패로우 요원을 이용해 이란 핵 개발자에게 접촉합니다. 협박과 회유로 포섭된 이란의 개발자에게서 현재 준비 중인 대규모 핵시설 계획을 입수한 "도미니카"는 9개월 만에 CIA와 접촉을 합니다. 그녀가 입수한 이란의 핵 시설 계획은 CIA뿐 아니라 러시아 정보국과 "푸틴"의 구미를 당기게 되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보이지 않는 첩보전이 시작됩니다. 또 다시 공을 세워 푸틴의 총애를 받는 "도미니카"를 시기하는 그녀의 상사 "주가노프"의 방해공작과 신분노출이 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위험 속에서, "도미니카"는 자신을 포섭한 CIA 요원이자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인 "네이트"와 함께 러시아와 이란을 동시에 엿 먹일 작전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에 정보를 흘리기 시작한 새로운 미국의 이중첩자가 등장하면서 그들의 계획이 위태로워집니다.


벤포드가 그녀를 푸틴에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걸, 그녀를 대통령의 살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브게니, 이자는 계속 주시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궁극적인 안전은 이제 그의 어깨와 불알 사이 어딘가에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첩보요원들이 서로 포섭하려고 하면서 자국에 숨어있는 거물급 이중첩자를 색출하는 내용의 "레드 스패로우"에 이어 출간된 후속작 "레드 스패로우 : 배반의 궁전"은 SVR에서 기반을 다진 "도미니카"가 크렘린 궁까지 침투해서 본격적으로 이중스파이 활동을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란이 핵시설에 사용할 내진 바닥재 거래를 진행한다는 첩보를 듣고 그 거래의 중간에 끼어들어 이익을 보려는 러시아와 그 전에 내진 바닥재 중 일부를 교체하려는 CIA의 계획 사이에서 CIA 요원 "네이트"와 CIA의 이중첩자인 SVR 요원 "도미니카"는 위험천만한 순간들을 헤쳐 나아갑니다. 정보원과 정보원을 관리하는 첩보요원들이 겪어야 하는 일상적인 위험부터 "도미니카"를 시기하는 "주가노프"의 음모 그리고 러시아에 일급 정보들을 팔려는 배신자의 등장과 그가 팔려는 미국의 이중첩자들의 실명 리스트는 "네이트"와 "도미니카"를 최악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익숙한 전작의 캐릭터들과 새롭게 등장한 흥미로운 캐릭터들은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배신과 음모들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세련된 에스피오나지 "레드 스패로우 : 배반의 궁전"은 작가의 오랜 CIA 경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행, 감시루트 탐지, 정보원 포섭 등 작품 속에 묘사되는 현대첩보 기술들은 마치 스파이 교본처럼 현실적입니다. 거기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현대 러시아의 실상 역시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줘서 허구인지 실제인지 헷갈리게 만듭니다. (전작에서 보다 더"푸틴"을 까대서 작가가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이번에도 몇 명의 이중첩자들이 등장하는데 신기하게도 러시아의 이중스파이들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동기인 반면 미국의 이중스파이들은 돈이 동기가 되는데 이런 것도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자네가 말한 걸 고려하겠어. 하지만 내 조국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 그들이 한 짓에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난 아직도 '로디나', 내 조국에 충성하고 있어." 리릭이 말했다.

네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보원들이 하는 전형적인 합리화이자 해가 뜨기 전 고요한 시간에 자신이 저지른 배반을 생각할 때 고통스러워지는 양심에 바르는 연고와 같다.


전작만큼 탄탄한 구성 속에서 펼쳐지는 스파이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의 백미는 "도미니카 예고로바"라는 캐릭터입니다. 전작이 "도미니카"의 스파이로서의 성장과정을 보여줬다면 이번엔 그녀가 이중첩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하며 베테랑 스파이로 진화해갑니다. CIA 요원 "네이트" 역시도 주인공이지만 이 작품은 "도미니카"란 캐릭터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최종 진화된 21세기의 "마타하리"같은 그녀는 러시아를 위해 스스로 이중첩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고,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능력을 완벽히 발휘합니다. 비록 원치 않는 남자에게 자신이 스패로우 학교(창녀 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써야만할지라도. 미국의 CIA 요원 "네이트"와의 관계에서도 규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네이트"와는 반대로 "도미니카"가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입장이 됩니다. 심지어 중요한 순간에 사랑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네이트"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다스리기도 합니다.


불법체류자가 오면 문제가 더 커지게 된다. 첩보가 시작된 후로, 민간인으로 위장한 외국 스파이, 다시 말해 그 나라에서 태어난 시민인 척 위장해서 아주 꼼꼼하게 준비한 개인적인 이력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단조로운 일을 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정체불명의 스파이는 적국에 있는 민감한 정보원을 관리하는 완벽한 해법이었다. 그는 공식적인 지위도 없고, 소속된 외교 기관도 없고, 첩보부와 연결된 단서도 없다. 내부첩자 사냥꾼들이 찾을 만한 프로필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러시아인들이 불법체류자들을 준비시켜서 배치하는 분야에선 최고란 걸 알고 있었다.


이 작품 "레드 스패로우 : 배반의 궁전"은 현재 미국에서 등장할 수 있는 최상급 스파이 소설입니다. "존 르 카레"의 작품들이 고전적이고 진중한 에스피오나지라면 이 작품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에스피오나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곧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The Kremlin's Candidate"가 출간된다고 하던데 이 작품을 읽으시면 저처럼 후속작을 기다리기 시작하고, 만일 국내 출판사가 내주지 않을 경우 원망할 준비를 하실겁니다. 오래전부터 소문으로 들리던 "도미니카"역에 "제니퍼 로렌스"의 캐스팅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조만간 영화로도 만나볼 수 있게 돼서 기대가 큽니다. 스파이 소설 좋아하시면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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