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 A Frozen Flow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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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주진모와 조인성의 동성애 연기로 많은 이슈를 낳았던 "쌍화점". 영화가 제작될때는 기대가 많았는데 요즘 이 영화의 리뷰를 보고있자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것 같다. 심하게는 에로영화 같다는 말부터,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아 오히려 더 궁금해져서 보게됐다.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의 왕(주진모)은 건륭위의 수장 홍림(조인성)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린시절 건륭위를 지도하며 그중에서도 홍림을 눈여겨보았던 왕은 그를 충성스런 신하이자 애인으로 여겼다. 홍림 또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로 임한다. 왕에게 홍림은 신하,애인을 넘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것 같다.

이름만 왕일 뿐이지 평생 원의 황제에 의해 감시를 당하고 굴욕을 당하며 마음 편할날이 없는 상황에서 의지하고 기대할 사람은 홍림 뿐이기 때문이다.또 그 자신이 여자와 동침을 할수없는 몸이기 때문에 왕후와의 잠자리를 거부했고, 그때문에 후사가 없었다. 자칫하면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길수도 있는 상황이라 그의 자리는 위태위태했다. 
   

그래서 왕은 자신이 가장 믿는 홍림을 왕후의 침실에 보냈다. 이때부터 세 남녀의 비극이 시작된다. 평생 밖의 세상은 알지 못한채 왕 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홍림, 10여년동안 홀로 밤을 새우며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왕후, 그리고 홍림만을 사랑했던 왕. 

홍림과 왕후는 합궁을 하면서 육체의 쾌락을 알게되고 점차 서로를 탐하면서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한 죄가 그들에게 씌워진다.그리고 그들을 만나게 한 왕은 질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빚어지는 처절한 비극.. 

감독은 홍림과 왕후의 배드신을 무려 7번이나 찍으면서 그들이 나누는 몸의 대화를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많은 비판이 나오는것 같다. 감정신이 충분히 나오지 않아 그들의 감정이 과연 사랑인지,욕망인지 헷갈리게 만든다고 말이다. 물론 몸으로 나누는 사랑도 충분히 있을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쌍화점의 배드신이 주인공들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조금 소홀했다고 여겨진다. 

'색계'라는 영화처럼 주인공들의 감정이 내게 전달되어지고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된게 아니라, 불필요하게 많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이런 생각이 들게 만든것 자체가 안타깝다)과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내면에 더 많은 할애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반면 주진모의 연기는 훌륭했고, 그때문에 왕의 시선에서 이 영화를 보게됐다. 그래서 왕이 처한 상황에 안타까워 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슬펐던것 같다. 특히 왕의 마지막 장면과 홍림이 왕한테 한 마지막 말은 더 애통하고 슬펐다. 오직 홍림만을 사랑했던 왕이 느꼈을 처절한 배신과 슬픔, 모든것을 다 포기했을 그 마음이 상상됐다. 

홍림과 왕후의 합궁이라는, 말도 안되는 방법을 생각해낸 그였기에 100% 피해자는 아니다. 이런 비극을 탄생시킨 주범은 바로 왕 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다시 제자리로 돌리길 원했고 끝까지 홍림만은 지키고 싶었던 왕이었다. 그를 위해 좋은 옷도 입히고, 자신의 말 보다 더 훌륭한 말까지 선물로 준비해가며 들떴던 왕이다.

하지만 홍림은 더이상 그가 알던 홍림이 아니었다. 여자를 알게되고 사랑에 눈 떠 버린 남자가 된 것이었다. 

반대로 홍림에 대한 느낌은 안타까움 보다는 씁쓸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왕후에게 새로운 사랑을 느낀 순간부터, 왕에 대한 사랑은 그만큼 사그라들겠지만 그렇다고 왕에 대한 충성조차 저버린 그가 미워보였기 때문이다.

왕을 위해 죽을수도 있었던 그가 왕의 명령을 저버리면서까지 왕후의 오라비를 살려둔것만 봐도 그렇다. 왕후의 오라비는 바로 왕을 죽이려고 가담한 자 였다. 다른 죄목도 아닌, 왕을 죽이려고 한 역적을 사랑 때문에 살려둔것 자체가 이미 충성을 저버린 것이다.

왕후에겐 그저 안쓰러운 감정만 일었다. 홍림을 사랑하는 왕 때문에 사랑한번 받지못한채 10여년을 홀로 지새워야 했던 그녀가, 홍림때문에 남자를 알게 되고 사랑을 알게됐지만 함께 할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녀의 남은 삶이 어떨지 상상이 되어 가슴이 무거워졌다.

송지효씨는 나이답지 않게 왕후의 무게감을 잘 보여주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가 좋다, 싫다 라고 함부로 말하긴 힘들다. 전반적으로 스토리도 통속적이고 미술,음악도 마음에 드는건 아니었다. 솔직히 정말 잘 만든 영화도 아니고 조인성씨의 연기가 좀 버거워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다. 끝맛이 너무 써서 한번 더 볼 생각은 안들지만, 자꾸 자꾸 생각나게 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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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purple 2009-03-0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엇보다 유하감독이 처음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전제를 하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때문에 무엇보다 아쉬웠어요. 장르가 코미디인 것도 아닌데, 처음 조인성이 대사를 할 때부터 여기저기 극장에서 터지던 웃음이란 저 자신도 민망하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저도 주진모의 연기는 빛났다고 생각해요. 조인성과 주진모를 한 자리에 두니, 주진모의 연기가 더 강하고 크게 느껴졌답니다. 어쨌든 유하감독의 지금까지의 영화 중에는 제일 안타깝게 느껴진 작품이지 싶네요....
 
공부하다 죽어라 - 눈 푸른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현각.무량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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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제목이 너무 과격해서 수험생들에 관한 조언 같은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하는 시험 공부가 아니라 불교 승려들이 이야기하는 인생 공부에 관한 법문이었다. 1년여동안 매달 둘째주 일요일에 한 법문을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 나 같은 독자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읽을수 있는 기회를 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괴롭히는 번민들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수 있게 되었고,그동안 잊고 지냈던 감사하는 마음과 수행의 방법을 되새기게 해 주었다. 

'비워야 채울수 있다'라는 말을 항상 기억하면서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 죽을때 바리바리 싸가지고 갈것도 아닌데 욕심이 닿는한 사고 모으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소유하는 기쁨이 오래 가는것도 아니다. 예쁜 그릇이 탐나 열심히 돈을 모아 사지만 그 기쁨은 너무도 짧고 다른걸 사고 싶은 욕심이 또 생긴다. 언제나 이런식의 반복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것처럼 그것은 고통 그 자체이고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집착을 반복하는걸까?

자동차,집,돈 등은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것 같지만 실상은 고통만을 안겨준다고 스님들은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왜 우리는 그런 물질을 갖고 누리는게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진정한 행복을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영원히 살지 못하다는걸 항상 생각하면서 불교의 본질인 '무상'을 염두해두고 산다면 훨씬 다른 삶이 열릴것이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는 수행을 하면 내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말이 너무 상투적이고, 그래서 쉽게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 당연한 말처럼 여겨질 테니까. 하지만 스님들의 말씀을 들으면 무릎을 치게 되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길잡이를 세울수 있다. 또 항상 나를 두렵게 하는 죽음에 대한 것도 스님의 말씀대로 이 몸은 단지 이 생을 살아가기 위한 수레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두렵다는 생각이 안든다. 죽음은 슬픈게 아니라 우주로 돌아가는 생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 많은 않겠지만 이런 수행을 계속해나가고 마음가짐을 갖춘다면 고통에서 해방될수 있을것이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승려들은 대부분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엘리트 지성인들이다. 또 집안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던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에서 자신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했고,궁금했던 질문을 속시원하게 해결할수 없었다. 그러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했고 이제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불교를 전파한다. 특히 아시아에서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소홀하게 대접받고,심지어 미신적인 종교라는 취급까지 받는 현상을 두고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서양에선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과학적으로 여겨지고 점점 더 많은 불교신자가 생기고 있다면서, 오래전부터 불교를 믿어온 아시아 나라들은 축복이고 가꿔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엔 부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꿔나가는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끝없는 고통속에서 살수밖에 없지만,수행을 통하면 그 고통에서 해방될수 있다. 난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상처받고, 내 자격지심에 슬퍼하고, 더 갖지 못한것에 신세 한탄하며 나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뜨렸다. 내가 상처받는건 항상 외부 요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정작 나를 번민에 빠뜨리게 한 대부분의 원인은 내 마음 이라는걸 미처 생각하진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항상 던지면서 수행해야 함을 깨달았다. 당연히 쉽지 않은 질문이고 매일매일 승려들처럼 그 물음을 쫒을순 없지만 적어도 내 마음만은 조종하고 움직일수 있다는건 알았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고싶다. 그래서 난 죽는 순간까지 공부하고 수행할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우울하고 힘든 시기엔 스님들의 말씀을 따르고 수행하면서 이겨나가는게 현명하다고 여겨진다. 나의 행복은 내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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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새싹동화 1
고정욱 글, 박은영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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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는 뇌성마비 일급 장애아이다.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해 항상 휠체어에 앉아있어야 한다. 말도 더듬고 웃을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손도 마음먹은대로 움직이지 않고 경련까지 일어난다. 지영이가 뇌성마비가 된데는 태어날때 엄마 뱃속에 오랫동안 있느라 뇌에 산소 공급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일 이었지만 그래도 귀한 생명이고 살아준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영이의 엄마는 매일 술만 먹는 남편과, 지영이의 치료에 몸과 마음이 지쳐 결국 집을 나갔다. 그래서 지영이는 아빠와 할아버지와 셋이서 산다. 그래도 지영이는 행복한 편이다. 하루종일 일하는 아빠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부모가 되고 친구가 되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지영이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작가 고정욱 씨에게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듯이, 지영이에겐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영이에게 취학 통지서가 날아오게 된다. 장애인인 지영이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 다닐수 있을까. 아직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편의시설이 부족한 편이다. 만약 지영이가 일반학교에 다닌다면 불편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높은 층은 안고 가야 할테고, 장애인 화장실이 없으니 용변보는것도 쉽지 않다. 또 장애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는 선생님들은 난처할게 분명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단호했다. 자신이 하는데까지 노력해볼테니 지영이를 일반 학교에 보내자고 아빠를 설득한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께 간절히 부탁한다. 부디 이 아이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지영이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할아버지를 가진것 같다. 이런 할아버지가 있다면 든든하고 기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지영이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못마땅해한다. 율동시간에 춤을 추지 못하는 지영이를 위해 할아버지가 대신 따라해하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이 웃자 부끄럽게 생각한다. 휠체어 때문에 학교 책상을 사용하기 힘들자 할아버지가 직접 책상을 만들어주는데도 고맙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게 다 싫었다.  일어나서 잠들때가지 자신을 위해 모든것을 해주는 할아버지가 귀찮았고 짜증났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은 커녕 신경질만 부리기 일쑤였다.

그런 지영이를 버릇없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영이는 '장애'라는 말이 너무도 듣기 싫었고 할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싫었을 것이다. 소풍날 친구들과 함께 뛰놀수 없고, 친구들이 자신의 휠체어를 미는것도 싫었다. 특히 독후감을 써 상을 받은 지영이에게 "글을 잘 썼구나" 라는 말 대신 장애를 극복했다며 칭찬해주는 말은 기분 나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쓰러져버렸다. 지영이는 할아버지가 미리 써놓은 유서를 읽고 자신의 잘못을 늬우치게 된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깜짝 선물은 지영이로 하여금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 나갈수 있는 행복을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영이가 학교에 갈수 있도록 노인정 할아버지들께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영이는 노인정 할아버지들에 의해 학교에 출석할수 있었고 할아버지의 큰 사랑을 느낄수 있었다. 이젠 투정부리는 지영이가 아닌 "고맙습니다" 하며 밝게 웃는 지영이가 된 것이다.

TV를 보면 이런 이야기를 심심치않게 볼수있다. 그때마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봐도 그분들이 참 대단해보인다. 몸이 불편한 아이를 위해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나면 마중나가는 어머니. 아이를 업고 높은 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혹시 수업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밖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그걸 몇년동안 계속 한다는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작가 고정욱 씨 또한 그런 어머니 덕분에 대학원까지 갈수있었고 지금은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

장애우와 일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사이좋은 친구가 될수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장애우에 대한 교육과 책임을 장애우 가정에게만 지우지 않았으면 한다. 혼자서 안전하게 통학을 할수있고, 층계를 오르내릴수 있으며, 아이를 많이 도와줄수 있는 인력도 생겨야 할것이다. 그래서 장애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고 중단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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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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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은 굴곡없는 평범한 인생이 가장 어렵고 축복받은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게다가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닥쳐 숨 돌릴 틈도 없게 만든다. 마치 어느 누군가가 삶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깨닫게 해주려는것 같다.

푸구이 노인의 삶이 바로 그렇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있자면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하느님은 왜 당신에게만 이런 고통을 안겨주시는 건지. 이제 그만 이 불쌍한 노인을 가만 내버려 두라고."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가 겪는 짧은 행복 뒤의 더 큰 불행은 정말 처절할 정도로 심하다. 차라리 기쁜일이 없었다면 고통스러운 일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했을테니까. 하지만 가장 기쁜 순간에 맞는 청천벽력같은 사고 소식은 푸구이뿐 아니라 독자들도 괴롭게 만들었다.

한번 꼬이기 시작한 인생은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계속 어둠의 길로 가는것일까. 더이상 손 쓸수도 없을만큼 지치게 만들고 싸우고자 하는 의욕도 꺾는 불행의 연속. 그러다 마침내 체념하게 되고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게 되는 푸구이. 세상의 거친 풍랑앞에서 한 인간은 너무도 나약했다.

푸구이의 젊은 시절은 철없는 한량의 그것이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산 그는 남들 보기를 우습게 알았다. 돈 몇닢 던져주면 모든게 해결되니 세상에 무서울것도, 두려울것도 없었다. 아마 그는 죽을때까지 '고생'이라는 단어는 알지못한채 살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노름에 빠져 전 재산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조금씩 쌓인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조상이 물려주고 자신이 후대에게 물려줘야할 집과 재산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푸구이의 굴곡많은 인생이 펼쳐진다.

처음엔 푸구이의 몰락이 자업자득 이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은 전혀없었다. 오히려 그의 인생에서 처음 닥친 시련이 그를 강하게 만들고 새롭게 만들겠다 싶었다. 한번 정신을 차려봐야 자신이 가진것의 소중함을 알게되고, 그의 나쁜 성격도 고칠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계속되는 불행앞에서 푸구이보다 내가 더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이제야 겨우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되었는데 전쟁은 그를 집에서 떼어놓았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약을 구하러간 그는 국민당원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갔고, 겨우 살아 돌아온 그를 맞는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게다가 딸 펑샤는 열병을 앓고나서 벙어리가 됐으니 찢어지는 마음을 가눌길이 없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아내와 펑샤,아들 유칭이 있기에 다시 한번 힘을 냈다. 비록 힘든 농사 일이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는게 가장 큰 행복이고 보람임을 알게된 것이다.

때로는 가난 때문에 모진 결심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뭉클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직 모진 불행은 끝난게 아니었다. 옛 전우의 아내에게 수혈을 해주던 아들 유칭이 병원의 어이없는 실수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건강했던 아들이 너무도 허무하게 싸늘한 시신이 된 그 날, 푸구이가 느꼈을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를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는 모든것을 용서한다. 너무도 힘든 선택이었지만 참혹한 전쟁을 함께 겪은 전우였기에, 아무리 화를 내도 죽은 아들이 살아돌아오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 남은 딸 펑샤가 있기에 기운을 차렸다.

실제로 딸의 결혼식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아이를 낳다 죽고, 사위 또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건 손자 뿐 이었지만 운명은 그 작은 행복도 허락하지 않을 셈이었는지 손자 마저 앗아갔다. 나 같았으면 미쳐버렸을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고 분노를 터트렸을 것이다. 한명도 아니고, 자신에게 남은 모든 가족을 앗아가버린 잔혹한 운명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가족을 주지 않았더라면 덜 슬펐을까.

이제 늙은 노인이 된 푸구이에게 남은건 자신의 이름을 붙인 소 한마리 뿐이다. 중국의 급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민중으로, 한 가족의 가장으로 수많은 일을 겪었다. 그리고 이젠 조용히 죽을 날을 기다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손수 죽은 가족의 무덤을 만들어야만 했던 푸구이. 더이상 잃을게 없는 그의 모습에서 살아간다는게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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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의 기적 - 네덜란드 문학 다림세계문학 15
얍 터르 하르 지음, 유동익 옮김, 페이터르 파울 라우베르다 그림 / 다림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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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쟁이 싫다. 아이들이 죽음을 매일 봐야만 하는 전쟁이 싫다. 우스운 생각일진 모르나, 할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곳에 피신 시킨채 어른들만 전쟁을 했으면 좋겠다. 물론 전쟁이 없는게 제일 이상적일테지만, 그럴수 없다면 최소한 아이들에게만은 전쟁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지 말았으면 한다. 악몽이 현실이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들의 상처는 깊어질대로 깊어진다. 또 이미 공포를 맛 본 아이들은 평생동안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어야 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웃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이들이 받아야 할 고통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가슴이 먹먹해진다. 

레닌그라드에 살고있는 보리스는 매일밤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선 얼어버린 강을 따라 식량과 물자를 가득 실은 수십대의 트럭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트럭중 한곳에 아버지가 타고있다. 보리스는 강 밑에서 헤엄치는 괴물을 보았고 얼음 구멍이 생긴 곳에 트럭이 빠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위험을 알리고 싶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가 운전하는 트럭이 강에 빠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매번 아버지가 죽는 꿈은 보리스를 괴롭혔다. 전쟁은 보리스의 아버지를 앗아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보리스에게 남은 가족은 병든 어머니 뿐이었다. 길어진 전쟁 탓에 음식을 구하기가 어려워 더 말라가는 어머니를 보는게 가슴아프다. 보리스는 어머니가 얼른 낫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건강보단 보리스를 염려해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 시키려고 한다. 이에 보리스는 완강히 거부한다. 자신이 어머니를 지킬수 있을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보리스가 없는 어머니는 더 약해지고 아파할것이 분명했으니까. 물론 보리스도 살아갈 힘을 잃을게 뻔했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맞는 보리스. 폭격으로 인해 도시의 건물은 온전하지 못하고 길거리엔 시체들이 눈에 띈다. 이젠 그리 놀랍지 않은 풍경이다. 죽음이 일상이 된 곳에서 살아가는 보리스에게 가장 중요한건 "오늘은 무 수프에 고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니까. 아픈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먹을것이 간절히 필요했다. 뭐라도 배를 채울수 있는거라면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도 묽디 묽은 수프 한 그릇 뿐이다. 

실망감에 움츠러든 보리스를 본 친구 나디아가 그를 조용히 부른다. 자신이 감자가 있는곳을 알고있다며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한 것이다. 아직도 감자가 있는 곳이 있을까 라는 보리스에게 나디아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젯밤 죽은 친오빠가 죽기전에 말해준 거라고, 위험한 곳에 있긴 하지만 충분히 모험해볼만한 가치가 있을거라고. 실제로 감자가 있는 곳은 러시아 군과 독일군이 마주하고 있는 땅에 있었다. 어린 두 꼬마 아이들이 숨어서 가기엔 거리도 너무 멀었고 추위도 매서웠다. 자칫하다간 위험해질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위험보단 배고픔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감자는 며칠간 이라도 배고픔을 잊게 해줄거라는 부푼 희망에 아이들은 감자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였을까. 목전을 눈앞에 두고 나디아가 쓰러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적이자 원흉인 독일 군인들이 아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군인이 되어 독일인들을 무찌르겠다던 보리스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수없었다. 이 약한 어린 소년은 그저 해코지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 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독일 군인들은 아픈 나디아와 보리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도와주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러시아 진영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인들도 독일군에게 감사를 표한다. 죄없는 아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줘서 고맙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 중 이었지만 아직 인간애는 남아있었다. 보리스에게 독일군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고 사악한 괴물이었고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그들을 보며 생각을 바꾸게 된다. 독일군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음을, 그들도 나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 임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붙잡힌 독일 군인들에게 러시아 사람들은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럴수가 없었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독일 포로들의 얼굴속에 자신을 도와준 독일 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스는 한 독일 포로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주위 사람들은 보리스의 행동에 대해 쑥덕거리고 이해할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증오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자유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라고.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지만 증오 보단 용서를 택하는게 자신의 상처를 낫게 해주지 않을까. 보리스가 겪은 놀라운 기적과 행동이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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