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연재중인 김용규의 문학속 철학산책이다. 사랑에 관한 글을 모으고 있다.

 

 

 

 

 

너무많다. 다음 기회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오셀로〉를 통해서 본 ‘사랑’의 의미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 없는 질투가 있을까? 이런 생각은 지금도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그렇다. 보기에 따라서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앞뒷면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걸작 〈오셀로〉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오셀로는 질투에 눈멀어 아름답고 순결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질투가 오직 사랑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대답은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랑에 대한 한 가지 뛰어난 설명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온다. 에로스의 출생 신화다.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닮아 모든 것에서 가난하고 결핍된 자다. 하지만 아버지의 풍요를 닮으려고 끊임없이 다가가는 자다. 여기에서 상대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열병적 그리움이라는 사랑의 본성이 나왔다. 그런데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로스의 이러한 본성을 ‘탐욕적’이라고 표현했다. 에로스는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상대를 동경하고 연모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빼앗아 소유하려는 탐욕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롭게도 진화심리학이라는 최신 학문에서도 같은 주장이 나왔다. 이들 연구를 따르면, 사랑은 짝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서 우선 성적 욕구로 나타나지만 곧바로 더 내면적인 것까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연결된다. 먼저 육체를 소유한 다음에 마음과 영혼까지도 빼앗아 가지려는 집요한 탐욕이 사랑이다. 이런 소유욕의 바탕에는 짝이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질투가 나온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자들은 질투를 ‘짝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짝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나타나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상대를 완전하고 철저하게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사랑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는 말이 맞다. 또한 오셀로의 주장도 옳다.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캐시오에게 그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질투해서 죽였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설명이 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질투와 시기를 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 전서 13 : 4~7) 이런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위하고 보살피려는 이타적 마음이다. 보통 아가페라고 한다. 아가페는 본래 상대의 존재 자체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에로스와 아가페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너무 탐욕적이지만 자연스러운 데 반해 아가페는 매우 이상적이지만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보통 이 둘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며 방황한다. 그런데 귀담아 들어둘 말이 있다.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한 주장이다. 그는 현대인들의 정신질환적 특징으로 ‘소유욕’을 지적했다. 그것은 지난 이삼백 년 사이에 점점 더 병적으로 변해왔는데, 그 결과 오늘날에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마저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너는 내 거야”라는 식의 요즈음 젊은이들의 어법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를 구속하고 지배하려는 일종의 병적 증상이라는 것이 프롬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아가페를 권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이다. ‘갖는 사랑’이 아니고 ‘하는 사랑’이며,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는 사랑’이다. 청마 유치환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노래한 바로 그 사랑이다. 프롬은 이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했다. 그렇다면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본인은 사랑이라고 느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병적인 소유욕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오셀로〉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럼 생각해보자.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이든 가족이든, 상대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잠시 생각해보자.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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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컬럼을 옮겨보았다. 유도저항효과라는 것인데 로미오와 줄리엣과 관련하여 논의하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책은 많다.

반대하라, 사랑이 깊어지리니

술집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모두 예뻐 보이고, 홈쇼핑 ‘마감 임박’이 우리를 현혹하듯이…

▣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미국의 컨트리 가수 미키 길리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가씨들이 모두 예뻐 보여요. 제게는 모두 영화배우처럼 보여요.”(All the girls get prettier at closing time, they all get to look like movie stars) 술집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면 혼자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술집에 있는 모든 여성이 예뻐 보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어렵게 성취한 것이 더 가치 있어 보여

이를 알아보기 위해 실제로 실험을 해본 심리학자가 있다. 텍사스주립대(오스틴 소재) 심리학과 제임스 페너베이커 교수는 1979년 어느 날, 대학 근처에 있는 술집 세 곳을 실험 장소로 정하고 그곳에 혼자 온 손님들에게 다가가 술집에 있는 이성에 대한 호감도를 점수로 매겨달라고 부탁했다. 이러한 평가를 밤 9시, 10시30분, 12시에 세 번 반복했더니, 남녀 모두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성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로,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술집에 있는 이성들이 더 멋있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이다. 술을 얼마나 먹었느냐와 상관없이 남녀 모두 다!
술집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면 왜 여자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그 해답을 유도저항이론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위협받으면 그것을 원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더 강하게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가 가질 수 없거나 잃어버린 물건에 더 집착하고, 하지 말라는 일에 더 매달리게 된다.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오면 이제 곧 나가야 하는데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이성과 사귈 시간적 확률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고 예뻐 보이게 한다는 얘기다. 홈쇼핑 광고에서 ‘한정 판매’나 ‘마감 임박’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현혹하는 것도 비슷한 원리다.
그렇다면, 부모의 반대에 목숨 걸고 저항하다 끝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도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흔히 경험하듯, 역경은 사랑의 불꽃을 더 세게 피어오르게 한다. 가족이 반대하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사회적인 장벽이 있을수록 낭만적 열정은 더욱 뜨거워진다. 역경과 장벽은 연인들을 현실에 저항하게 만들고 상대에게 더 집중하게 만든다. 16세기 베로나의 젊은 연인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듯이.
이처럼 부모의 반대나 주위의 장애가 연인들의 사랑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을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Romeo and Juliet effect)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일까? 미국 뉴저지주립대학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 박사가 현대인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자의 73%, 남자의 65%가 ‘역경이 있더라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낭만적 사랑을 위해 기꺼이 부모와 가족, 사회에 저항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다.

동성애 연인들도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리처드 드리스콜 박사가 콜로라도대학 박사과정 재학 시절 동료들과 함께 했던 설문조사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의 존재를 더욱 잘 보여준다. 그들은 280명의 콜로라도주 남녀 커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부모의 간섭과 개입이 심할수록 두 사람의 사랑이 더 깊어졌다는 대답을 들었다. 반대로, 부모의 간섭이 처음보다 줄어들자 서로의 사랑 강도가 점차 약해지더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런 특징은 동성애 연인들에게도 발견된다. 동성애 커플들은 사회적 장벽으로 인해 불면증과 식욕 상실 등을 동반한 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가족의 반대와 사회적 편견이 그들 사이의 정서적 결합을 때론 강화하고 더욱 갈망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는 현실에도 존재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술집 문 닫을 시간이 다가올수록 여성들이 예뻐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위협받으면 그것을 원상태로 회복하기 위해서 더 강하게 저항하게 되는데, 그 저항 심리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를 만들어낸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고, 금지된 장난이 더 달콤하다. 시험 기간이 되면 소설책이 더 읽고 싶어지고, 만나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다. 사람들은 어렵게 성취한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어렵게 성취한 것이 더 소중한 이유는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려는 것에 맞서 싸워 얻은 것이라서 그렇다.
게다가 부모들은 대개 결혼을 가문 간의 경제적 거래, 정치적 결연으로 보는 경향이 많아서, 그들의 반대 사유가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모들의 반대 사유는 연인들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힌 것으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에, 연인들로서는 마땅히 싸울 용기와 명분이 생긴다.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들의 사랑할 권리를 얻고자 ‘자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자유의지까지 행사하면서 가문의 반대에 저항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심리학자 아론슨과 밀스는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독서토론 클럽의 신입회원 가입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었더니(황당하게도, 여학생들에게 노골적인 포르노 소설을 사람들 앞에서 크게 읽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클럽에 들어온 여학생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모임에 가입한 여학생들보다 모임을 훨씬 더 좋아하고 모임에 대한 자부심도 높더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장애가 호감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실험이다.
얼마 전 이탈리아 고고학 발굴팀은 이탈리아 북부 만토바 부근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5천 년 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 젊은 남녀 한 쌍의 유골을 발견했다. 치아 상태가 거의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젊은 나이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포옹한 상태로 묻혀 있었다. 더군다나 이 유골이 발견된 곳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베로나에서 약 35km 떨어진 곳이어서 더욱더 ‘낭만적인 상상’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혹시 이들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다가 동반자살로 끝내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신석기 시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었을까? 5천 년 전 신석기 시대에는 과연 두 연인의 사랑을 막는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이었을까?

외쳐라,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사랑은 종종 가장 힘든 환경에서 가장 무성한 성장을 한다”고 했다. 자식의 사랑에 불을 지피고 싶으면, 부모여 반대하라. 만나지 못하게 하라. TV 드라마 속 부모들처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안 된다’고 외쳐라. 그러면 당신의 자식들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과 ‘사랑의 불꽃’을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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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를 보았다.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야릇한 감동을 느꼈다. 이를 잊지 말아야 할 것같아서 그리고 정성일의 해설이 가슴에 다가와서 그리고 지아장커라는 감독을 잊지 말아야 할 것같아서 시네21에서 퍼왔다.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 [1]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사진 : 이혜정 | 2006.11.03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라고 노래하면서 나는 지아장커의 <삼협호인>(三峽好人, Still Life)(과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 <동>(東, Dong))이 보고 싶다고 간절하게 하소연하면서 글을 맺었다(<씨네21> 제572호, ‘그래, 지금은 가을이니까’).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 갑자기 소원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 글은 ‘소원 성취한’ 속편이다. 나는 서울에서 그 두편의 영화를 보았고, 그런 다음 지아장커와 만났다.

솔직히 말하면 <세계>를 본 다음 나는 불안했다. 이 영화는 어딘가 부서져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테마 파크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배신하고, 호소하고, 떠나간 다음,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유릭와이가 HD카메라로 찍은 2.35 사이즈의 시네마스코프 디지털 화면 위에 (말 그대로)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산만하게 진행되고, 결말은 음울하고 비관적이다. 지아장커는 세 번째 영화 <임소요>를 만든 다음 갑자기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바꾼 것처럼 보였다. 인상적이지만 종종 이야기는 핵심을 벗어나 있었고, 인물들이 서성거리는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시간(dead time)은 때로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지아장커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의 변화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일부러 그 자신의 영화를 부셔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세계>는 실패가 아니라 의도적인 이탈처럼 여겨졌다. 무언가 이 영화는 이미 만들어진 지아장커의 영화를 거북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 다시, 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세계>는 결론이 아니라 이행이다.


<스틸 라이프>

(이 글에서 따옴표 안의 말은 모두 내가 지아장커와 서울에서 만나서 나눈 대담의 발췌이다) “나는 <임소요>까지 사회적인 관계, 사회 안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어요. 그 사람이 사회 안에서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소매치기(<소무>), 방랑가극단(<플랫폼>), 어린 실직자들(<임소요>). 그런데 <임소요>를 찍던 도중에 문득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무엇보다도 그 누가 아니라 현대 중국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더이상 개인, 그 누구를 다루는 대신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는 그러므로 변해야만 했습니다. 그 변화는 중국의 변화에 대한 나의 변화입니다. 지금 중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두 가지 세계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세상입니다. 그것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후현대’(後現代, postmodern)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미학적인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만으로는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시네마스코프, 자막이 필요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후현대’ 안에는 동시에 전통적인 과거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공들은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걸 다시 부정해야 했어요. 왜냐하면 <세계>를 만들면서 그 안에는 더 큰 변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협호인>은 역사의 변화 안에 놓인, 그런데 그 앞에서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변화하고 있는 중국에 살고 있는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불안과 기대, 망설임과 믿음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삼협호인>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쓸데없는 알리바이였다. 시작한 지 첫 5분 만에 다 잊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무언가 굉장한 것을 지금 시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를 볼 때 이런 순간의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서 걸작이 펼쳐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의 첫 느낌. 누구의 글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 누구의 설명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펼쳐낼 때 그것을 내 눈으로 처음 보는 순결한 환희. <삼협호인>은 지아장커의 최고 걸작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갑자기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 혹은 차이밍량의 <하류>에도 비견할 만한 영화를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더 멀리 나아갔을 지도 모른다. <삼협호인>은 (내가 모든 중국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중국영화 중에서 왕빙의 <철서구>와 함께 가장 좋은 영화이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삼협호인>은 21세기 영화이다.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게리>,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0>,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 필립 가렐의 <평범한 연인들>만큼 멀리 나아갔다. 그런 다음 마침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마주쳤을 때 나는 거의 망연자실해졌다. 맹세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은 내가 지난 10년간 본 영화 중에서 최고의 라스트 신이다. 그 울림이 너무 커서 거의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삼협호인>과 <동>, 하나의 사태에 대한 두개의 시선


다음날 비로소 <삼협호인>과 함께 작업한 다큐멘터리 <동>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두 영화는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 다른 작품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하나의 사태에 대한 두개의 시선이다. 같은 것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반복하거나, 혹은 단지 동일한 대상을 다큐멘터리로 다가간 다음 극영화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두 영화는 하나의 질서에 대한 외재적 관찰과 내생적 개입으로 이루어진 서로 다르게 긍정된 세계의 재현 프로그램이다. 자, 여기 싼샤(三峽)가 있다.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중국의 물길을 잇는 도시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은 중국 인민폐 10위안에도 그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여기에 세개의 댐을 세운다는 발표를 했다. 이 말은 이 도시 전체가 물속에 잠긴다는 뜻이다. 수많은 환경운동가들과 학자들의 비판이 잇따랐지만 공사는 1993년에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세계 최대 규모가 되었다. 1750개의 마을이 물속에 가라앉았고, 이주민은 110만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 숫자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비판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이 공사는 2009년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두편의 영화는 모두 싼샤에서 진행된다. 그때 <동>은 이 장소에 대한 공간적인 표면의 변화, 부서져가는 건물, 달아나고 있는 긍정된 세계, 그 변화 안에 살고 있는 인민들의 삶을 쳐다본다. 혹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싼샤 그 자체이다. 하지만 <삼협호인>은 싼샤에 도착한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싼샤에서 사라져버린 시간의 무게를 다룬다. 문득 사라진 시간, 저 물 안에 잠겨버린 시간,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 응시 안에 수축된 시간, 과거를 찾아 두 남녀가 떠도는 이 텅 빈 형식의 공허함은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인민들의 사라진 현재라는 시간이다.

“<세계>를 끝낸 다음 나는 문화혁명 시대에 작은 시골 도시의 건달들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미술작업까지 끝난 상태였는데, 화가인 리우샤오동(劉小東)이 찾아와 싼샤에 가서 11명의 노동자들의 그림을 그릴 계획인데 그걸 다큐멘터리로 찍을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리우샤오동은 지하전영 감독들과 아주 친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샤오솨이의 <극도한랭>에 출연도 했으며, 장위엔의 <북경잡종>에서는 미술감독을 했습니다. <세계>에서는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로 나옵니다. 나는 1990년에 처음으로 리우샤오동을 만났는데 그는 이전의 중국 화가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작품 중 트럭에서 노동자가 웃통을 벗고 웃으면서 일터로 향하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는 중국의 일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상을 담을 수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리우샤오동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흔쾌히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싼샤는 2000년에 댐 건설을 시작해서 2004년에도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싼샤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었고, 이미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라져버린 과거에 대해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목을 <동>으로 지은 것은 화가 리우사오동을 모두 ‘동’(Dong, 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지아장커와 그의 스탭들은 마치 중국 산수화 같은 풍경을 가진 이곳, 그러나 도시로 눈을 돌려보면 매일 부서져나가고 있는 건물들의 황량한 공사가 쉴새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곳에서 11명의 노동자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리우샤오동의 작업을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동>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리우샤오동의 그림 작업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이고, 남은 하나는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노동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위험하고 험난한 곳에서 일하는 이 사람들, 여기서 땀을 흘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찍는 노동자 중에 나이 든 분이 있었습니다. 해가 아주 뜨거운 날이었는데 우리는 그가 하루 종일 일하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 싼샤는 매일 바뀌고, 매일 부서지고, 매일 새로운 곳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싼샤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감독에게 다큐멘터리를 맡기고 내 자신이 직접 노동자의 연기를 하면서 3일 동안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87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 <삼협호인>의 시작입니다. 이 시나리오는 매우 느슨했고, 많은 부분은 현장에서 바뀔 수 있게 준비되었습니다. 대신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외지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싼샤에 온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이곳의 삶을 찍는다면 거짓말이 탄로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의 촬영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촬영을 하던 11명의 모델 중 한 사람이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서 그 아래 깔려 죽고 말았다. 전통에 따라 그의 시신은 싼샤에 흐르는 강물에 떠나보냈다(이 장면은 <동>에 나오며, 같은 장면을 <삼협호인>에서도 사용하였다). 리우샤오동과 지아장커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더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여기서 이 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리우샤오동도 더이상 붓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떻게 더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은 싼샤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이 도시에서 공사 중에 사람이 깔려 죽는 일은 더이상 뉴스도 아니었다.

“더이상 촬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리우샤오동에게 말해서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가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이 대부분 돈 벌러 도시로 간 그 동네에서 그러한 소식은 매일 듣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돌아와서 리우샤오동은 남은 11명의 노동자를 다 그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리우샤우동이 11명의 여자를 그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음양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우샤오동은 이것이 이 그림의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1명의 여자를 그리기 위해서 방콕에 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리우샤오동은 싼샤를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겨울이지만 그곳에 가면 날씨가 덥기 때문에 옷을 입어도 몸의 선이 드러나게 되므로 모델들을 다루기에 좋았습니다. 나는 싼샤의 강물이 흘러서 방콕까지 흘러가는 것처럼 물을 따라 두 장소를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싼샤에 남았습니다. 다큐멘터리가 끝난 다음 싼샤로 돌아왔습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마자 함께 일했던 배우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자, 이제 이야기가 완성되었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가방을 하나씩 들고 싼샤에 왔습니다. (웃음) 그 이외의 모든 배우들은 모두 싼샤의 거리에서 찾았습니다.”

“<삼협호인>은 내게 일종의 무협영화입니다”


<삽협호인>의 첫 장면은 강물을 따라 배를 타고 한 남자가 이곳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여기에 오자마자 중국 인민폐를 미국달러로 바꾸는 마술쇼를 한다면서 끌고 간 다음 창고에서 돈을 뜯어내는 무리들과 만난다. 그런 다음 쪽지에 쓰여진 주소를 찾아 그곳에 간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물에 잠긴 지 오래다. 이 남자는 16년 만에 다시 여기에 온 것이다. 떠나간 아내와 자신의 딸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 한산밍이라는 이 사내는 아내의 오빠를 찾아가지만 그의 동료들에게 매를 맞을 뻔한다. 그는 낮에는 건물을 부수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휴일에는 아내를 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문득 옥상에서 하늘을 본다.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 39분인 이 순간(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시간52분이다), 거의 동일한 프레임의 구도로 한 여자가 하늘을 본다. 그때 이 여자는 하늘을 날아가는 UFO를 본다. 32살의 셴홍은 남편을 찾아 이곳을 찾아왔다. 2년 동안 전화 한통 한 다음 아무 연락이 없는 남편을 찾아온 셴홍은 남편의 친구인 왕동민을 찾아가 남편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루 종일 연락을 하던 왕동민을 옆에서 지켜보던 셴홍은 남편이 이곳에서 제법 성공했으며, 젊은 여자와 동거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싼샤댐 방파제에서 남편을 만난 셴홍은 새로운 남자가 생겼으니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말한다. 어디로 갈 거냐는 남편의 질문에 그녀는 잠시 생각한 다음 그 남자와 상하이로 갈 것이라고 대답한다. 셴홍은 배를 타고 싼샤를 떠난다. 떠나가는 배를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한산밍에게 아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연락이 온다. 움막 같은 집에서 아내를 만난 한산밍은 아내가 오빠 빚 때문에 여기에 팔려왔으며, 딸은 이미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산밍은 광산촌에 돌아가 돈을 벌어서 아내를 찾으러 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여기 와서 만난 노동자들과 함께 고향인 샹시로 돌아간다.

지아장커는 두 남녀, 한산밍과 셴홍을 다루면서 단 한 장면에서도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우연히 만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영화는 한산밍으로 시작해서 거의 3분의 1이 지나간 다음에 셴홍으로 넘어간 뒤 내내 셴홍을 따라가다가 그녀가 배를 타고 떠나자 다시 한산밍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두 사람은 같은 곳에서 와서 같은 도시에서 서로의 상대방을 찾은 다음 서로 다른 곳으로 떠난다. 이때 영화는 두 사람을 평행 편집으로 보여주는 대신 하나의 이야기 안에 하나의 이야기가 있거나, 혹은 하나의 이야기 중간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있거나, 또는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여준다. 두 이야기는 홍상수처럼 서로 모방하지도 않고, 에릭 쿠처럼 비스듬히 서로 겹쳐져 있지도 않으며, 스와 노부히로처럼 한 이야기를 두개로 나눠놓지도 않았으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은유적으로 간섭하지도 않는다. 그 둘은 싼샤라는 장소의 시간적인 수평적 횡단이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을 쫓아가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방법을 버렸습니다. <플랫폼>에서부터 나는 군상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삼협호인>에서 두 사람의 두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만나서는 안 되며, 그 둘은 닮아 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두명의 자리를 오가면서 그 둘이 함께 살고 있는 시간을 찍고 싶은 것입니다. 그 둘은 함께 살지만 같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외로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두 인물의 관계? 두 사람을 다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입니다. 두 사람이 있고, 그런 다음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고,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관계가 설명됩니다. 내가 그걸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로 진행하면 그건 내가 <삼협호인>에서 다루려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인물들이 가진 고독감, 내가 가진 문제를 남이 도와줄 수 없다는 고립,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 혼자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두 사람을 등장시킨 다음 서로 아무 관계도 생기지 않으면 그들이 혼자라는 느낌을 더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현대에 던져진 중국 사람들의 고립감입니다. 우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싼샤의 외지인 두 사람으로 결정했습니다. 두 주인공 중 한명인 한산밍은 나의 이종사촌 형입니다. 그는 고향에서 실제로 광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플랫폼>과 <세계>에서도 광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광산촌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광부는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그래서 돈을 주고 사는 수가 많습니다. 또 한명의 주인공 셴홍은 남편을 찾으러 이곳에 찾아옵니다. 결혼했지만 서로 다른 도시에서 헤어져 살고 있는 부부들은 언젠가 결정을 해야 할 일과 마주칩니다. 지금 이런 일이 중국에서 매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임소요>를 만든 다음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중국은 더 빨리 변하고 있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산다는 문제. 그래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면, 말하자면 자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세계>에서부터는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변화는 중국 사람들의 변화에서 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국의 변화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죽은 거야? 아니, 우리는 시작하는 거야. 그건 선택입니다. 이제 선택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선택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개인은 그런 의미입니다. <세계>는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것입니다. <삼협호인>은 그것을 더 밀고 나아간 것입니다. <세계>에서 선택을 한다면 <삼협호인>에서는 선택을 하기 위해 (싼샤에) 오는 것입니다. 그건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삽협호인>은 <동>과 어떤 울림을 갖는다. 11명의 노동자와 11명의 여자 모델들, 남자와 여자, 음과 양, 한산밍과 셴홍. 하지만 그것은 좀더 깊고 넓은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광산촌에서 온 광부와 간호원,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 인민과 전문교육을 받은 지식인 분자. 그들의 두개의 선택. 중국의 자본주의. 물론 이런 것들은 지아장커가 줄기차게 다루어온 것들이다. 그러나 지아장커의 영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 혹은 이미 <세계>까지 본 사람들일지라도 <삼협호인>을 보면 어리둥절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화가 시작한 다음 39분. 옥상에서 한산밍은 무심하게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 영화는 거의 동일한 프레임, 동일한 날씨, 동일한 제스처로 이제 막 싼샤에 도착한, 그래서 우리가 영화에서 지금 막 처음 보는, 셴홍이 대낮에 하늘을 가로 질러가는 UFO를 본다. 혹은 그런 다음 그날 밤 그녀가 머물고 있는 왕동민의 집 앞에 있는 기이하게 생긴 폐허가 된 건물이 갑자기 우주로켓처럼 밤하늘을 향해 불꽃을 내면서 발사된다. 이 알 수 없는 초현실주의적인 장면들. 혹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은 비루한 현실 속의 낯선 현상들. 어쩌면 마음속의 신기한 풍경.

“싼샤에는 매일 많은 배와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그걸 옥상에서 보고 있으면 내가 마치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강호에 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삼협호인>은 내게 일종의 무협영화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안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싼샤에 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맞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점점 다른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지막에 다시 중국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미 주어진 삶을 따라야 했지만 지금 중국은 자기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의 삶의 어느 순간을 칼로 내려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무협소설은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렇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중국의 새로운 삶입니다. <삼협호인>에서 싼샤에 도착하자마자 주인공이 마주치는 마술 쇼는 중국의 일상입니다. 모든 것이 미국 달러로 바뀌는 마술 같은 상황.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민들. 지금 중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실주의적으로 찍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마술적인 상황의 사실주의란 초현실주의적인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현대 중국의 생활방식 때문입니다. 그걸 정확하게는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의 ‘후-현대화’(postmodernization)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일부러 두 사람을 같은 모습으로 찍어서 연결시켰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데, UFO가 지나갈 때 한 사람은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때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혼자인 것입니다. 혼자일 때조차 그들이 느끼는 혼자라는 외로움은 혼자 안의 혼자인 것입니다. 물론 UFO라는 설정이 가능했던 것은 여기가 싼샤이기 때문입니다. 싼샤는 기후가 이상합니다. 맑은 날씨에 비가 오고 갑자기 구름이 몰려옵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상당히 신비롭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기 UFO라도 날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삼협호인>에서 UFO는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이미지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영화에서 상징적인 장면이란 없습니다. 그건 감정입니다. 그건 말 그대로의 고독감입니다.”

 

‘세계 안의 인민’의 외로움을 노래하다


<삼협호인>은 그 외로움이 스산하리만치 쓸쓸하게 영화 안에서 배어나오고 있다. 그것은 꼭 현대 중국을 살아가는 인민만의 외로움이 아니다. 그 감정은 모든 것이 달러로 환원되는 세계화 안에 살아가고 있는 ‘세계 안의 인민’의 외로움이다. 대낮에 UFO를 보는 것 같은 마술적 현실. 한산밍은 거의 말이 없다. 그는 맞을 때조차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셴홍은 권태로운 동작을 반복한다. 그때 그들 곁의 도시는 쉴새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건물을 부수고, 그들은 부서져가는 도시를 떠돈다. 그때 이 부서져가는 건물들은 한산밍의 부서져가는 마음, 혹은 셴홍의 이미 부서져버린 기다림처럼 보인다. 그때 이 부서져가는 건물들은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건물을 부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부서져가는 건물 안에서 산다. 부수기 안에서 살아가기. 그때 같은 장면이 <동>과 <삼협호인>에서 반복된다. 같은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라 같은 숏을 두 영화에 동시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두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든다. 나는 이것을 <삼협호인>만 보았을 때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런 다음 <동>을 다시 보면서 신기하게도 동일한 숏을 보게 되었고, 그런 다음 다시 <삼협호인>을 보면서 동일한 숏이 두 영화에 나란히 사용하게 된 또 다른 영화적 전통을 떠올렸다. 지아장커는 명백히 허우샤오시엔의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에서 시작했다. 그때 그에게는 감정적 객관과 주관적 거리라는 둘 사이의 긴장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큐멘터리는 지아장커의 극영화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여기에는 정말 벌어진 일과 거기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재현적 사태와 잠재적 현재 사이의 공통의 구도를 찾는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키아로스타미에게서 본 것이다. <삼협호인>의 놀라운 점은 21세기 영화의 두개의 영화적 전통, 그러니까 허우샤오시엔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미학 사이의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화해를 시도한다.



“다큐멘터리 <동>에서 극영화 <삼협호인>으로 옮겨오면서, 그러니까 사실적인 것을 찍다가 갑자기 드라마를 찍으려니까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동>에 나온 장면의 일부를 <삼협호인>에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그런 방법의 하나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초현실주의적인 장면을 끌어들이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둘은 그렇게 연결된 것입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내면과 세상 사이를 중계하는 몸이었습니다. <삼협호인>에 이르러서 내가 개인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부서져가는 도시의) 풍경보다도 노동하는 사람들의 몸, 그 몸에 흐르는 땀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사회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보았다면 이제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중국에서 진행되는 근대화, 자본주의화, 세계화, 그 안에서 점점 더 사람의 중요성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중국영화가 중국을 찍기 위해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시급합니다. <삼협호인>은 그것을 하소연하는 영화입니다.”

그때 지아장커는 단지 <동>에서 쓴 장면을 가져다가 <삼협호인>에서 사용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더 밀고 나아갔다. 두편의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순간은 UFO나 우주로켓이 아니라 <동>에서 본 숏, 그러니까 리우샤오동이 옥상에 서 있는 장면과 똑같은 장면, 똑같은 구도, 똑같은 제스처로 <삼협호인>에서 한산밍을 카메라 앞에 세워놓을 때다. 그때 이 명백한 기시적 효과(deja vu)는 단순한 재현의 반복이 아니라 이 끔찍한 싼샤에 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화가 리우샤오동, 혹은 예술가, 지식인분자를 향해서 이곳에 찾아왔지만 들고 있는 주소는 이미 물에 잠겼고, 아내와 딸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낮에는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면서 일당을 벌면서 그들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 한산밍을 같은 자세로 쳐다보면서 누가 정말 싼샤의 진실을 보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맹렬한 비판이다.

“그건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동>과 <삼협호인>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의 화가 리샤오동은 동시에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예술가들 혹은 지식인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힘들어, 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실의 무게 아래서 그걸 다 들고 서서 버텨야 하면서 진정 힘든 것은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현실은 험난하고, 그 현실을 떠받치고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민, 그들의 힘이 이 힘겨운 세상의 현실을 떠메고 온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이 고단함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동>을 만들면서 발견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회를 다루면서, 사회를 잘 다루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 그래서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를테면 소매치기(<소무>). 하지만 <동>을 만들면서 나는 노동자들, 중국의 인민을 보았습니다. <동>과 <삼협호인>에서 똑같은 화면, 동일한 프레임으로 리우샤오동이 있던 그 장소, 그 자세, 그 각도, 그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비판입니다. 그때 둘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싼샤를 보는 사람은 예술가 리우샤오동이 아니라 노동자 한산밍입니다. 세상 안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동>과 <삼협호인>은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HD로 현실의 표면과 디지털의 질감을 연결


그때 지아장커를 따라가는 것은 유릭와이의 HD 카메라다. 유릭와이는 지아장커의 졸업영화를 포함해서 모든 영화를 찍었으며, 그 자신도 연출했다(그의 데뷔작 <천상인간>은 그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그리고 두 번째 영화 <명일천애>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받았다. 이 영화에는 조용원씨가 출연한다. 유릭와이는 이 영화로 중국 정부에 5년간 연출 금지를 선고받았다). 사실 지아장커는 데뷔작인 <소무>를 16mm로 찍은 다음 <플랫폼>을 35mm 필름으로 찍고 그런 다음 모든 영화를 디지털로 찍었다. <임소요>는 디지털 베타로 찍었고, <세계>와 <삼협호인>은 HD로 찍었다.

“무엇보다도 유릭와이가 HD 카메라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HD로 찍으면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현대 중국이 필름보다 디지털로 찍을 때 비로소 사실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은 지금 디지털의 세계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이 불러일으키는 질감, 그 안에 살고 있다는 인상을 잡고 싶었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모든 피사체, 사물, 사람들의 표면의 공기를 디지털로 붙들려고 합니다. 영화의 모든 변화는 테크놀로지의 변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영화가 아니라 과학 기술 전체의 변화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이 영화가 세상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에릭 로메르의 <영국 여인과 공작>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디지털영화의 미래입니다. 하지만 내가 디지털에 갖는 관심은 그들과 다릅니다. 나의 관심은 그 질감입니다. 오늘날 보여지는 현실의 표면과 디지털의 질감을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이 그 둘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디지털은 종종 도둑 촬영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배우에게 내가 어디서부터 찍을지를 말해주지 않고 그냥 세워놓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훈련된 배우들보다는 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찍고 싶습니다. 그때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습관을 찍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마추어일지라도 배우에게는 인물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종종 나는 배우에게 동선을 주지 않고 카메라로 너를 따라갈 테니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면 배우는 처음에는 연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인물이 됩니다. <삼협호인>의 몇 장면은 그냥 카메라를 세워놓고 밤새도록 찍기도 했습니다. 그 인물이 될 때까지! 디지털은 영화에 새로운 사실주의가 가능하게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 사실주의적인 장소에 가서 찍은 <삼협호인>은 지아장커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다. 종종 산마루에 걸리는 구름은 산수화의 풍경이 떠오르고, 녹색의 색감이 살아나는 화면은 계절이 묻어난다. 대부분의 화면은 이제 막 비를 맞은 꽃처럼 화사하게 물기가 번져나가고, 인물들은 젖은 공기 속을 거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풍경을 따라 카메라는 수평 트래킹을 한다. 나는 지아장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부터 물러나서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수평 트래킹을 처음 보았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어딘가 탐미주의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지아장커는 단 한번도 탐미주의적인 이미지에 몰두한 적이 없다. 그것은 제5세대들이 중국의 산수에 빠져든 위험한 매혹이었다. 심지어 장이모는 대답하지 않았던가. “지아장커가 훌륭한 이유는 오직 그만이 중국을 아름답지 않게 찍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탐미주의를 노린 것은 아닙니다. 그건 싼샤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것이 마치 중국의 산수화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앞에 서면 정말 산수화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찍으면서 그 도시와 지방의 풍경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 도시가 아닌 것처럼 찍고 싶지 않았습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 풍경이 좋은 곳은 사실은 살기가 힘든 곳입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이 <삼협호인>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림 같은 그곳, 그것이 여기서는 현실적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인상을 그대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만일 <삼협호인>이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일종의 두루마리그림(手卷畵)처럼 찍고 싶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중국화의 오랜 전통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중국의 도시, 2천년에 걸친 문화가 한순간에 물에 잠겨버린 그 역사를 애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애도라는 문제가 이 영화에 다가가는 나의 감정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싼샤라는 댐 건설의 역사에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싼샤댐 건설은 2천년이나 된 이 도시를 2년 만에 물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2000년이라는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 급속한 발전 안에서 과거의 기억과 문화를 부수고 있습니다.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것은 과거를 없애버리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천안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천안문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누구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 정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자체를 없애고 있습니다. 기억을 지우고,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삼협호인>은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고 있습니다. 싼샤의 폭포와 계곡은 그곳에 가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중국 인민폐 10위안은 싼샤의 산수가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싼샤는 중국 돈에만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싼샤를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기억을 불러일으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두루마리그림을 가져왔고, 그 느낌을 얻기 위해서 트랙을 길게 깔아서 옆으로 찍었습니다. 그런 다음 녹색의 산수화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후반작업에서 색보정을 했습니다. 아마도 <삼협호인>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그림을 떠올린 것은 청록 산수화의 느낌이 감돌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간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흔적들


말하자면 <삼협호인>의 주인공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저 강물 속의 도시들인지도 모른다. 싼샤는 이 영화의 무대가 아니라 주인공이며, 한산밍과 셴홍은 싼샤의 복화술사들이다. 물론 지아장커가 도시를 다룬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는 항상 도시를 방문했다. <소무>에서는 펀양의 소매치기를 다루었고, 그런 다음 <플랫폼>에서는 마오쩌둥의 고향인 샤오산을 향해 이동하는 퇴락한 혁명가극단을 다루고 있다. <임소요>(와 다큐멘터리 <공공장소>)는 한때 광산촌으로 공업화가 발달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도박과 실직자로 가득 찬 따퉁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계>는 베이징 테마파크에서 시작해 광산촌에서 끝난다. 그리고 <삼협호인>(와 <동>)은 세개의 댐으로 물에 잠긴 싼샤를 찾아온 다음 떠난다. 그래서 지아장커의 영화는 중국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펀양영화, 따퉁영화 혹은 싼샤영화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중국은 도시를 찾아가면 거기에 공간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말을 빌리고 싶습니다. 안토니오니는 어떤 장소에 도착하면 일단 5분 동안 그 장소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어떤 장소에 가든지 그 공간만의 대화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살아 숨쉬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느끼고 대화합니다. 나에게는 공간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걸 지아장커는 종종 멈춰 서서 롱테이크 화면으로 지켜본다. 이를테면 한산밍이 아내를 만났을 때 카메라는 무한정 거기 멈춰 서서 그 둘을 지켜본다. 혹은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다. 그러나 지아장커는 허우샤오시엔처럼 모든 신을 예외없이 숏으로 찍는 롱테이크를 택하지 않는다. 그는 종종 멈춰 서서 바라보지만 때로 장면을 나누기도 한다. 그의 카메라는 때로 서 있고, 때로 핸드헬드로 인물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셴홍이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말할 때 카메라는 그들의 기나긴 마지막 산책을 따라간다. 혹은 인물이 서 있지만 그 주변을 서성거리듯이 움직이기도 한다. 옥상에 서 있는 한산밍. 그가 오래 멈춰 서 있기는 하지만 차이밍량의 영화처럼 침묵하지 않는다. 그는 장소가 주는 물질성에 기꺼이 영화의 감각을 열어둔다. 그래서 <삼협호인>에서 가장 예민한 것은 청각이다. 아이들의 소리, 멀리서 들리는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혹은 구름 저편의 천둥소리. 그 소리 속에서 주인공들은 나직하게 중얼거리거나 아무 말 없이 저 멀리 산을 본다. 종종 지아장커 영화에서 주인공이 도착하기 전에 숏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혹은 등장인물이 화면 바깥으로 빠져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카메라는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거기 서 있기도 한다.

“롱테이크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영화 중에서 <플랫폼>만이 롱테이크에 충실하게 찍었습니다. 나는 롱테이크를 내 영화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야기, 지금 앞에 서 있는 인물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롱테이크는 내게서 미학이 아닙니다. 그걸 이해해주십시오. 그것이 서방세계에서 내 영화를 종종 오해하는 것입니다. 혹은 롱테이크가 내 영화의 부담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 그들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롱테이크가 좋지만, 저런 사람은 편집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이 있는 공간입니다. 공간 안에는 여러 인물이 있고, 사건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물이 떠나간 다음에도 공간은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른 사건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간은 단 한개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개의 사건, 복수의 사건을 품고 있습니다. 그 공간 앞에 서면 사람들이란 얼마나 작은가, 사람은 공간 안에서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사람이 떠나간 다음 그 공간을 보고 있으면 일종의 여운이 거기 남습니다. 나는 그 여운을 찍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호수에 돌을 던진 다음 물결 같은 것, 돌을 던지는 것은 사건이지만, 물결은 그 여운입니다. 그때 호수는 장소입니다. 사건은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가버리지만 장소는 거기 머무르는 것입니다. 내가 다루는 주인공이 그곳에 오기 전에 다른 사건이 있었을 것이고, 그 주인공이 가버린 다음 다른 사건이 시작될 것입니다. 내 영화에서 인물이 그 공간에 오기 전에 시작한다는 것, 혹은 떠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카메라가 거기 남아서 그 장소를 보여주는 것은 그 시간이 이 공간의 입장에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루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울림


그럴지도 모른다. 지아장커 영화에서 종종 인물들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그들을 잠시 멈춰 세워서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중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의 두배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라고 100년 전에 루쉰이 말했다. 더 빠른 속도 속에서 과거의 기호들은 부서져나가고, 현재는 눈앞에서 사라져가고 있으며, 내 앞의 사물들은 더이상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그때 중국영화의 질문은 시작되었다. 지금 여기는 어디입니까? 이 불안정한 발판 위에 서서 지아장커는 질문하는 대신 그곳을 방문한다. 그런 다음 우리를 향해 돌아본다. 그것이 그가 다른 중국 감독들과 다른 점이다. 그때 그는 종종 어느 순간을 세운다. 처음에는 롱 테이크 카메라로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소무>에서 소매치기 소무가 가라오케 아가씨 메이메이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장면. 그러나 지아장커는 이것을 몇번 반복한 다음 곧 버렸다. 그런 다음 그의 영화에 애니메이션과 자막이 등장했다(<세계>). 그는 여기서 좀더 나아갔다. <삼협호인>에는 네번의 자막이 나온다. 煙(담배), 酒(술), 茶(차), 糖(사탕). 그때 신기하게도 이 자막들이 나올 때마다 이 한자들은 그 숏 위에서 마치 한지 위에 먹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어떤 이상한 감정적 울림을 안겨주었다.

“<동>을 찍을 때 노동자의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곤 그냥 시멘트가 발라져 있는 벽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벽 앞에 빈 술병이 하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 술병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건 내 생일을 기념해서 혼자 사다 마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예전에 그림을 그릴 때 대부분의 그림은 정물화였습니다. 그때 그림에 붙인 제목은 그림을 멈추는 그 어떤 순간이 되었습니다. 담배라는 말은 그냥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어떤 물질과 서로 만나서 멈출 때 어떤 기억, 어떤 흔적, 어떤 순간을 담게 됩니다. 그러니까 <삼협호인>의 영어제목인 <Still Life>는 중국어로 <靜物人生>입니다(<고요한 삶>이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담배, 술, 차, 사탕은 가장 중요한 네 가지입니다. 그 네 가지만 있으면 가정생활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네 가지 물질을 통해서 삶의 순간을 멈춰 세운 다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행복하십니까?”



물론 한산밍은 싼샤에서 만난,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흉내내는 젊은이와 담배를 나눠 피우지만 행복하지 않다. 한산밍은 술을 들고 아내의 오빠를 찾아가지만 그를 반기지 않는다. 셴홍은 남편의 캐비닛에서 자기가 보낸 차가 버림받은 채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한산밍은 아내에게 다 부서진 건물에서 사탕을 건네준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느닷없이 부서져내린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지만 그들 말에 의하면 같은 고향에서 왔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각자의 선택을 한다. 셴홍은 남편에게 상하이로 떠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중국 자본주의의 첨단. 이제 그녀는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에 가서 더 마술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삼협호인>의 한 가지 선택이다. 노동자 한산밍은 이곳에서 만난 노동자들과 산시(山西)로 돌아간다. 물론 산시는 지아장커의 고향이다. 하지만 산시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은 잘 알려진 것처럼 마오쩌둥의 팔로군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상대로 게릴라전에서 승리하여 결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쫓아낸 역사적 지역이다. 이때 한산밍이 노동자들과 함께 물에 잠겨가는 싼샤를 떠나 산시로 돌아가는 마지막 선택은 마치 사회주의 중국, 혹은 마오쩌둥에 대한 어떤 그리움처럼 보인다. 그것이 두 번째 선택이다. 중국의 두개의 선택.

“마오쩌둥에 대해서 모두가 비판을 합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의 정치가들 중에 인민의 역량을 진정으로 인식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그래서 마오쩌둥을 비판하지만, 인민 스스로에게 자신의 역량을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그걸 높이 평가합니다. 중국의 인민을 이해하려면 마오쩌둥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배워야 합니다. <삼협호인>이 시작할 때, 이 영화 제목의 자막 글자는 모두 마오쩌둥이 쓴 글자 중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서 만든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영화의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을 만난다. 한산밍은 그의 노동자 친구들과 싼샤를 떠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때 저 멀리, 두개의 건물이 보인다. 거의 다 부서져가는 높은 건물. 그 두개의 건물 사이에 외줄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위를 한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간다. 마치 하늘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그 위험한 외줄 위를,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듯이, 아니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마치 마술이 벌어진 것처럼, 더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이 노동자를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위험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산밍의 마음처럼, 저 하늘 위에서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걸어간다. 천상의 길. 그러면 아주 오래된 노래가 흐른다.

“중국 옛말에는 철사 줄을 잡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그때 흐르는 이 노래는 촨쥐(川劇: 쓰촨 경극) <수호전>에서 80만 금군교두였던 임충이 고향을 떠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고향이 더 멀리 느껴지는구나…(중략).”

이 장면은 정말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삼협호인>은 나에게 올해의 영화이다. 이보다 더 나를 움직인 영화는 없다. 이 긴 글은 그러므로 여러분을 부추겨서 기어이 이 영화를 개봉시켜야 한다는 나의 유혹이며, 긴급한 하소연이다. 자본주의의 규칙은 간단하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다.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여러분의 소원도 이루어지기 바란다. 지아장커는 3박4일 동안 영화아카데미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수업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말을 마지막으로 했다.

“당신이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세상을 부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순응하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더 대담해지고, 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 이 말의 방점, 좋은 영화, 더 많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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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박사가 연재하는 과학자가 본 사랑에 관한 에세이이다. 사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요즘 아주 딱 들어맞는 에세이가 아닐 수 없다. 되도록 자료함에 보관하도록 한다.

사랑에 관해서 과학적으로 연구한 책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내 반쪽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감정의 이성 납치 현상’이 높은 사람에게 일어나… 유전적 기억과 본능일 수도

▣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평생을 함께할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우리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이몽룡이 성춘향을 보고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듯이, 줄리엣이 로미오를 본 순간 온통 그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듯이,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첫눈에 반한 사랑’(love at first sight)이 과연 현실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일까?



△ 너, 나한테 반했지? 사랑학 연구자들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생물학적 이끌림’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바람둥이들도 의외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신봉한다. 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에서 바람둥이로 분한 주드 로.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

사랑학 전문가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사랑과 관련해서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 중 하나로 바로 이 질문을 꼽았다고 한다.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 커플 중에서 ‘첫눈에 반한 사례’는 어느 정도 되는지, 그리고 그들은 그렇지 않았던 커플들보다 결혼 뒤에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지 매우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많은 미혼 남녀들이 ‘내가 과연 잃어버린 내 반쪽을 만났을 때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첫눈에 반한 사랑’ 옹호론자인 얼 나우만 박사는 1970년대 미국인 1495명(남자 547명, 여자 948명)을 대상으로 ‘첫눈에 반하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보면 첫눈에 반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응답자의 무려 64.1%나 되었다. 남녀의 차이도 별로 없었다(남자 65.2%, 여자 63.6%). 다시 말해 성별에 상관없이 전체 응답자 중 3분의 2가 첫눈에 반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강력히 믿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나 태평양계 민족에서는 다른 민족들보다 그 수치가 월등히 높아 무려 80%가 첫눈에 반한 사랑을 믿는다고 응답했다. 우리 주변에도 운명적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첫눈에 반할 수 있다고 믿는 958명 가운데 558명, 즉 60%의 사람들은 첫눈에 반한 사랑에 ‘실제로 빠진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즉 전체 응답자 1495명 중 38% 정도가 첫눈에 반한 사랑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들 중 결혼에까지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첫눈에 반한 커플은 뭔가 다를까? 통계에 따르면 ‘그렇다’! 첫눈에 반한 커플들 중에서 55%가 결혼에 성공했다. 미국의 경우 결혼 전 연애 경험이 5회를 넘는 것에 비추어보면, 첫눈에 반한 경우 결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혼 뒤에 더 행복하게 살까? 결혼에 골인한 첫눈에 반한 커플들 가운데 75.9%가 평균보다 더 오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평균 이혼율이 50%를 웃도는 상황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사람들 중 4분의 3이 아직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의 이혼율은 불과 15.9%. 나머지 8.2%는 사별을 한 경우다. 결국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결혼 뒤에 좀더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얘기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자신의 시 ‘첫눈에 반한 사랑’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이미 결정된 운명적인 관계’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주었고,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갑작스런 열정’에 더욱 확신을 갖지만, 사실 그들은 예전에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을 수도 있고, 잘못 건 전화로 잠시 목소리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다.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을 친 것은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 그러다가 때가 되어 두 사람이 마주 보게 됐다는 것이 심보르스카의 주장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1970년대와 1990년대, 사랑이 이렇게 변하니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실제로 ‘첫눈에 빠진 사랑’은 소설 속 얘기만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은(최소한 38%는) 운명처럼 정해진 제 짝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반쪽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1990년대 설문조사에서는 그 결과가 많이 다르게 나왔다. 사랑을 연구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아얄라 파인스가 1990년대 미국인 커플 100쌍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들 중 약 11%만이 ‘자신의 파트너에 첫눈에 반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10명 중 한 사람만이 “나는 이 사람을 본 순간 ‘바로 이 사람이다’ 싶었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70~80년대,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와 비교하면 많이 줄어든 수치다. 첫눈에 반한 커플들의 이혼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커플들은 ‘우리의 운명은 여기까지!’라고 쉽게 선언하고, 다른 사람과의 운명적 만남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난다는 것이다.
사실 결혼이 계약관계 중 하나였던 중세에서부터 20세기 이전까지 낭만적 사랑은 결코 결혼의 전제조건이 아니었으며, 한두 번 서로 얼굴 보고 결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당시 결혼이라는 ‘집안과 집안의 계약관계’를 벗어나 ‘첫눈에 반한 이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생물학적 욕정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해석되곤 했다.
20세기 들어 ‘낭만적 사랑’이 결혼의 전제조건이 되고 그 가치가 높게 평가받는 시대가 되면서, ‘첫눈에 반한 사랑’은 현대인의 ‘결혼에 대한 낭만적 신화’로 자리잡게 된다. ‘운명적 사랑의 완성이 바로 결혼’이라는 이 신화에는 결혼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결혼에 대해 다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첫눈에 반한 운명적 사랑에 대한 신화가 무너진 것은 아닌가 싶다. 결혼이 다시 경제적 거래요, 정치적·권력적 결연이 돼버린 오늘날, 첫눈에 반한 사랑을 믿는 것은 ‘아직 어리다’는 증거와 다름없는 사회가 돼버린 것이다.
사랑학 연구자들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생물학적 이끌림’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첫눈에 반한 사람 앞에서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고 기분이 들뜨면서 행복해지는 것은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물질의 작용 때문이다. 대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활동적인 뇌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감정의 폭도 훨씬 넓고 깊다. 잠재 감성지수도 높기 때문에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감정의 이성 납치 현상’에 걸려들기 쉽다는 것이다. 특히 이상적 사랑을 꿈꾸는 젊은이에게 잘 나타나며, 그 사랑에 감전될 때 느끼는 감정의 폭과 깊이가 워낙 커서 여러 번 일어나기는 어렵다. 흔히 느낌은 근거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이성을 앞서는 유전적 기억과 본능이라는 것이 사랑학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사실 ‘첫눈에 반한 사랑’은 자연계에선 흔한 일이다. 대부분의 암컷들에게는 생리적으로 성숙하는 주기가 따로 있고 새끼를 낳는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다. 그들에게는 수컷의 씨를 받고 새끼를 낳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는 시간이 단 몇 주, 혹은 며칠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수컷 구애자들의 이력서를 검토하느라 몇 달씩 허비할 수가 없다. 시각과 청각, 후각 등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단번에 판단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도 얼굴 인상만으로 ‘함께 가정을 꾸릴 경우 이 남자가 가족을 잘 보살필 만한 사람인가’를 굉장히 빠른 시간에 간파한다고 한다. 특히 그러한 능력은 가임기 때 현저히 늘어난다는 사실이 심리학 저널에 보고된 바 있다.

때론 핑계 또는 작업 수단

‘첫눈에 반한 사랑’에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셨는지.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의 유명한 바람둥이이자 매력남 조지 클루니에 대해 한마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는 첫눈에 반한 사랑을 믿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4년간의 결혼생활을 한 바 있고, 러네이 젤위거에서 크리스타 앨런, 리사 스노든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린 그는 매번 헤어진 이유에 대해 ‘운명적 사랑이 아닌 것 같다’는 말로 대신했다. 자신의 부모는 첫눈에 반해 결혼해 아직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며 그도 그런 사랑을 지금도 꿈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매번 새로운 사람을 쉽게 만나고 새로운 운명적 사랑을 찾아 쉽게 떠난다. 조지 클루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첫눈에 반한 운명적 사랑’은 때론 바람둥이에게 ‘헤어짐의 핑계’ 또는 ‘작업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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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벽침사록 - 벽을 마주하고 홀로 생각하다
류짜이푸 지음, 노승현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에밀 시오랑, 라로슈푸코 등 간단하지만 뒤통수를 때리는 잠언식의 성찰을 좋아한다. 하지만 언제나 아쉬운 것은 중국 문화에서는 왜 이러한 잠언식의 에세이들이 없었을까였다. 고대의 문헌들에는 이러한 잠언식의 뒤통수 때리는 문헌들이 차고 넘치지 않은가. 그런데 왜 현대 작가들이 쓴 이런 책들이 소개되지 않는 것인지.......

그러던 중 발견한 책이 바로 면벽침사록.

지은이 또한 고별혁명을 통해서 리저허우와 중국 문명 전반에 대해서 대담을 했던 류짜이푸 아니던가. 그의 간단한 사색의 편린 속에는 루신, 홍루몽, 그리고 선사들의 깨달음들이 녹아들어 사회와 인생 전반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벽을 마주하고 홀로 생각한다는 면벽침사록은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공간 속에서 마치 농익은 포도주를 음미하듯이 야금야금 혀를 적시며 맛을 보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는 시간은 출퇴근의 지하철 속에서 혹은 누군가 마냥 한없이 기다려야만 할 시간에 이 책의 잠언들을 맛본다면 좁아터진 속세의 공간은 텅빈 혼자만의 공간으로 화하고 한없이 지루한 시간은 응집된 한 순간의 정적으로 변할 것이다.

아 그리고 또한 강추할 공간은 바로 화장실이다. 가장 집중도가 높은 공간이며 시간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어느 순간 뚝 터지는 황당함을 경험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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