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를 가져온 김에 자연법과 관련된 것 몇개를 다시 가져온다.

 

3. 그로티우스와 '바다의 자유'
  
  
네덜란드 사람인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근대 자연법의 창시자이자 국제법의 아버비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1609년에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라는 글을 통해 바다의 자유를 주장했고 1625년의 <전쟁과 평화의 법>이라는 책을 통해 국제법의 원리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자연법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보통 평화롭고 공정한 국제관계의 형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 휴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583 –1645)


  그러나 그가 바다의 자유를 주장한 것은 공정한 국제법을 위해서가 아니다. 17세기 초는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만드는 등 아시아 무역을 위해 매우 애쓰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내세우며 이 수역의 독점권을 주장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논리를 분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노력은 네덜란드의 상업적 나아가 식민주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것이다.
  

▲ 토르데시아스 조약 (Tordesillas條約, 1494) 원본


  그는 인간은 신으로부터 이성과 자유의지를 물려받았으므로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며 도덕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자연법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적인 고려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그가 자연법을 구축하기 위해 인간의 사회적 본능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다섯 개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1)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 2) 부당하게 뺏은 재산을 돌려줄 의무 3)잘한 일을 명예롭게 해 주기 4)손해에 대해 배상해줄 의무 5) 자연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다.
  
  이 원리들을 보면 그의 사상에서 재산권이 중심적인 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 대한 주장을 기본적으로 재산권 위에 구축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 1609)


  

▲ 전쟁과 평화의 법 (De Jure Belli ac Pacis, 1625)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토리아와 함께 역시 살라만카 학파에 속하는 바스케스(Ferdinando Vasquez)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글에서 두 사람을 수십 번씩 언급하고 있다.
  
  특히 비토리아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논리의 큰 틀이 같으며 아에네아스를 포함한 고대의 터무니없는 글들에서 자기 논리의 근거를 끌어내는 방식도 똑같다. 다만 두 사람의 논리를 더 정교하게 만들고 그것을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이익을 위해 재구축했을 뿐이다.
  
  그는 재산을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분했는데 동산은 그것을 직접 신체적으로 취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 몸을 움직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울타리치기가 필요하다. 울타리치기를 통한 점유와 시효(時效)에 의해서만 재산권의 주장이 가능하다. 점유만 해서는 안 되고 상당기간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바다는 깊어서 울타리를 칠 수 없다. 당연히 바다를 개인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공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하고 다른 나라와 교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네 가지이다.
  
  1) 동인도에 대한 접근은 모든 나라에게 열려있다.
  2) 이교도들은 그들이 단지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공유나 사적인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는 없다.
  3) 바다 자체나 항해의 자유는 점령이나 교황의 수여, 시효나 관습 등에 의해 어느 일방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4) 다른 국가와 교역을 하는 권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특정한 한 쪽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식민지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권리나, 교황의 수여에 의한 권리를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배타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 신은 자급자족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원하지 않으므로 상업을 통한 교환과 그것을 진작시키기 위한 수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갈이 이런 자연법적 원리를 침해할 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토르데시야스조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배권의 경계선. 연두색 부분이 포르투갈 세력권, 초록색 부분이 스페인 세력권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러한 주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에 도전했을 때에는 이와는 달리 '폐쇄된 바다'를 주장했다. 자격 없는 자들이 제멋대로 무역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객관적인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네덜란드의 이익과 밀착되어 있다.
  
  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 사냥하는 북미 인디언 (18세기)


  그는 또 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도 같은 원리를 내세웠다. 토지는 신이 인간에게 공유로 수여한 것인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소유로 하려면 울타리를 칠 뿐 아니라 그것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에 대한 재산권은 직접 경작을 하는 개인에게만 가능했다.
  
  이런 논리로 그는 경작을 하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침탈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반면 유럽에도 많이 산재하고 있는 빈 땅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의 땅은 모두 누군가의 재산권 하에 있다는 것이다.
  

▲ 정착생활을 하는 인디언의 실내 풍경


  또 그는 어떤 땅의 재산권은 그것을 경작하는 개인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땅을 직접 경작할 개인들에게 분배될 경우에는 국가가 어떤 토지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다른 유럽국가가 이미 확보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고려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자유라는 원리로 인도양이나 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기득권을 가진 다른 나라들의 권리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재산권 이론으로 식민지 토지의 침탈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의 자연법 이론은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주의적 열망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귀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와의 교섭에서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쓴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자연법이나 국제법에 대한 이론적 구성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주장하는 평등하고 공정한 국제법은 유럽 내에서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한 비유럽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매우 제한된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푸펜도르프의 자연법
  
  그로티우스의 제자로 자연법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자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fendorf)이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독일의 룬트 대학 등에서 교수를 하다가 나중에는 스웨덴에서 활동했다. 그가 1672년에 쓴 자연법(De Jure Naturae)은 로크가 '이 종류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푸펜도로프는 로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 푸펜도르프 (Samuel Pufendorf, 1632~ 1694)


  그는 자연법을 논할 때 그로티우스나 로크와는 좀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독일이나 스웨덴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달리 당시 식민지 문제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과 달리 이교도와 기독교인들에게 다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을 만들기를 바랐다. 그가 자연법을 재산권이 아니라 도덕적인 맥락에서 검토한 이유이다.
  
  그는 자연상태를 원시 시대에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아메리카나 다른 식민세계를 원시상태로 보지는 않았다. 또 아메리카 원주민을 원자화한 자연인으로 보지도 않았다. 아메리카인들도 종족이나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유럽 국가들의 구성원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본 토마스 홉스와는 달리 평화상태로 보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자연법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사교를 하며 인간의 본성과 목적에 맞추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산권에 있어서도 그는 신이 인간에게 공동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고 믿었으나 그것을 소유권이라는 적극적인 형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소극적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도, 또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 푸펜도르프의 자연법(De Jure Naturae, 1672)


  따라서 존 로크가 나중에 개인적인 점유를 뜻하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를 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사용(使用)이 전유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사용권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아메리카에서의 스페인인의 여행과 무역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비토리아의 논리를 공격하는 가운데 식민주의의 침략성을 고발하고 있다. 유럽인이 원주민의 땅에서 여행할 자유를 갖는 것은 단지 폭풍에 밀려 왔을 때나 순수하게 손님으로 해안에 도착했을 때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환대를 받아야 하나 물론 필요한 단기간만 머물러야 했다. 장기간 머물 때는 그들의 동기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교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원하는 누구나와, 또 무엇이든지 교역할 자유를 주장하나 그때도 동기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의와 관용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도 국가로부터 특허권을 수여받은 동인도회사 같은 특허회사들의 교역 독점권을 자연법에 속하는 것으로 믿었다. 또 필요한 경우 식민지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굶주리고 쓸모없고 반역적인 사람들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이 그로티우스나 로크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식민주의적인 고려를 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로크와 같은 사람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컸으므로 그의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은 잊혀지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시안에 연재되는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를 퍼왔다.

상당히 의미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연법을 세계시민주의의 원류로 생각하여 보편적 사고를 가능케 했다고 보지만

그것조차 식민주의의의 발로였던 것이다.

보편적 사고의 토대란 이렇게도 허술한 것이다.

 

 

 

 

 

 

 4. 존 로크와 식민주의
  
  존 로크와 아메리카

  
  로크는 보통 1688년 영국 명예혁명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민정부 제 2론>이 군주에 대한 잉글랜드 의회의 우월을 확인한 명예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씌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양에서 의회민주주의 확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생각된다. 서양 근대 정치사상에서 그를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집어넣는 이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체로 그렇게 가르친다.
  

▲ 존 로크 (John Locke, 1632~ 1704)


  물론 그가 사회계약설 등을 통해 자연법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유주의 사상과 입헌군주제가 만들어지는 데 이론적으로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또 18세기 계몽사상의 중요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양 사람들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비서양인의 입장에서는 달리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자연법사상이 아메리카 식민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의사의 조수로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하던 로크는 1666년에 당시 잉글랜드 정계의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샤프츠베리 백작과 알게 되고 그 후 그의 주치의이자 비서로서 일했다. 그 인연으로 1671년에는 샤프츠베리가 북아메리카의 캐롤라이나 식민지에 갖고 있던 영지의 관리를 돌보게 되었고 1673년에는 정부의 '무역과 플랜테이션위원회'에서 비서로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동안 캐롤라이나에서 거주하면서 북아메리카 상황에 대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게 되었다.
  

▲ 샤프츠베리 (Anthony Ashley-Cooper, 1st Earl of Shaftesbury, 1621~1683)


  이 시기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의 잉글랜드 식민지가 점차 확장되며 원주민과의 갈등도 점점 커져가고 있던 때이다. 식민자들이 울타리를 치고 농장을 확대하자 주로 사냥이나 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던 원주민들이 생존권을 잃게 되고 따라서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 북미 원주민의 들소사냥 모습


  토지를 둘러싼 원주민들과의 분쟁들 가운데에서 로크는 잉글랜드 식민자들의 권리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또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투자를 함으로써 식민지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 속에서 아메리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크의 자연법과 재산권 이론
  
  로크는 자연 상태나 자연인, 사유 재산권 등 그의 자연법의 중요한 개념들을 그로티우스나 푸펜도르프에게서 빌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 속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앞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메리카의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도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인의 '정복의 권리'는 부인했다. 그것이 자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자연인으로, 아메리카의 상태를 자연 상태로 보았다. 그것은 아메리카인을 원시적인 인간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국가나 종족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도 앞의 사람들과 같이 인간은 이 세계를 신으로부터 공유로 하사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본래적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타인을 배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이 세계를 공유물로 준 것은 마찬가지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생존의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생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개인이 그것을 전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전유는 자연에 사람의 힘을 가함으로써 가능하다. 과실을 나무에서 따든 짐승을 잡든 모두 자기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힘이 자연에 가해져서 얻어진 것이다. 땅의 사유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로티우스는 땅의 사유를 경작과 관련시켰으나 로크는 그것을 보다 추상적인 개념인 '노동'이라는 개념과 결합시킴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경작이라는 노동 행위를 통해 토지의 생산 능력을 높이고 그래서 이 세상을 더 풍요하게 만드는 사람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면적의 잉글랜드 토지가 아메리카 토지에 비해 10배 이상의 생산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런 노동 행위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만으로 전유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울타리치기를 전제로 한다. 즉 개인이 울타리를 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울타리를 쳐서 땅이 전유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 경작은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땅으로부터 원주민의 축출
  
  이렇게 전유가 재산권의 기초이므로 집단으로 공동 경작을 하는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그 재산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유럽적인 농업의 형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그는 더 나아가 원주민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아메리카의 버려지고 비어 있는 광대한 땅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버려진' 이나 '비어 있는' 이라는 표현들은 중요하다.
  
  비어 있는 땅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땅이다. 따라서 그것을 차지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버려진' 땅은 적절히 관리가 되지 않은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방치되어 결과적으로 버려진 땅'인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 의해 방치되어 버려진 땅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 다시 전유가 가능했다. 그것을 경작하려고 하는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문제는 '방치' 되었다는 판단을 누가 하느냐 하는 것이다. 로크의 경우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식민자들이었다.
  

▲ 존 로크의 저서, 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


  

▲ 존 로크의 시민정부2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


  로크는 시민정부제2론에서 재산권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로크는 전유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울타리를 치고 전유하고도 충분한 땅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땅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이 남아서 썩을 만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아메리카의 경우 인구에 비해 땅이 넓으므로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두 번째 조건이다. 이 조건이 의미하는 것은 만약 원주민이 자기들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땅에서 생산물을 썩게 만들 정도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면 이 조건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그 땅은 다른 사람에 의해 전유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땅의 풀이 그대로 시들어 썩든가 따지 않은 과일이 떨어져 썩는다면 그것은 '버려진' 땅으로 간주될 수 있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전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된다. 결국 원주민에게는 당장 소비할 수 있는 만큼의 과일, 사냥감 외에 다른 것을 더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된다.
  
  그러면 잉글랜드인은 이 제한 조건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것은 화폐를 통해서이다. 화폐를 통해 '이 세계의 다른 부분들과 통상'을 함으로써 생산물이 썩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디언들도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가 전유를 제한하는 조건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원주민의 토지 전유만 막을 뿐 잉글랜드 식민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식민자만이 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토지 전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또 화폐라는 장치를 통해 무한정한 자본 축적도 가능하게 된다.
  
  원주민과 잉글랜드인의 차별
  
  원주민에 대한 이런 차별적인 태도는 잉글랜드와 아메리카의 공유지에 대한 그의 다른 태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아메리카에서는 공유지는 원래 신이 인류에게 공동으로 준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조건만 맞춘다면 누구나가 전유할 수 있다.
  
  반면 잉글랜드의 공유지는 어떤 사람들의 집단 사이의 계약의 산물로 생각한다. 잉글랜드에서는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역이나 교구 사람들만의 공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메리카에서의 경우와 달리 아무나 함부로 전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로크의 재산권 이론이 그 후 아메리카식민지에서 원주민을 토지에서 원천적으로 분리시키는 중요한 근거로 이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주민이 사냥을 위해 잉글랜드인이 만든 울타리를 넘거나 파괴하는 것은 잉글랜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제재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북아메리카에서 19세기 말까지 지속된 원주민 배제와 학살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었다. 후대인들이 계속 그의 논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로크는 서양인들에 의해 근대적인 사유 재산권 이론의 기초를 만들고 자유주의 사상의 기초를 놓은 선구자로 높이 평가 받으나 그것이 비유럽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분명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로크의 자연법을 유럽적인 문맥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크게 왜곡시킬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그의 자연법도 그로티우스의 것과 같이 유럽과 비유럽에 달리 적용되는 매우 차별적인 원리로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하겠다.
  

▲ 백인 식민자들의 들소사냥. 백인들은 특히 19세기에 가죽을 얻기 위해 중부평원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들소들의 씨를 말려서 원주민들의 생존을 크게 위협했다. 올란도 본드라는 사람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단 하루에 300마리, 두 달 사이에 5,855마리의 들소를 사냥하기도 했다.


  5. 자연법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니다
  
  18세기 초가 되면 자연법 사상은 대부분의 신교 국가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에서 학문적인 도덕 철학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되었다. 또 빠르게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메리카에서 지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정치경제학 같은 새 학문들의 발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의 법 개혁 같은 개혁운동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법이 형식적으로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했으므로 이 자연법의 개념은 18세기 사람들이 자신들을 국제적이고 세계시민적이라고 믿게 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근대 자연법은 식민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한 것이다. 그것은 유럽인과 비유럽인에게는 달리 적용되는 차별적인 원리로서 식민주의적 행위를 옹호하고 정당화 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구체적인 실천원리까지도 만들어 주었다.
  
  물론 푸펜도르프에서와 같이 그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학문 체계로 발전할 싹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7,8세기를 주도한 것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 같은 식민 국가들이었지 독일, 스웨덴 같이 식민 활동과 무관한 나라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로티우스나 로크의 자연법 이론이 주류를 이룬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법 이론의 이런 식민주의적 성격은 계몽사상에도 대체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래서 식민주의를 옹호하거나 상업의 자유를 주장하며 비유럽지역에 대해 통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17-18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벌인 수많은 전쟁들은 거의가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당시 유럽 국가들은 모두 보호 무역의 장벽을 치고 있었으므로 어디에도 자유 무역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비유럽지역에 대해서는 통상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시 서양인들이 그 보편성과 세계 시민성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에 내재해 있는 식민주의적 성격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초가 된다. 자연법의 성격을 바로 안다는 것이 이에 대한 유럽 중심주의적 해석을 넘어서서 서양 근대 사상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게 해 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인디언 유보지역(Indian Reservation).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쓸모없는 오지로 내몰고 그곳을 인디언 유보지라고 불렀으나 그 땅도 점차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땅을 인디언 보호지구라고 부르나 그것은 결코 보호지구가 아니고 일종의 유형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례21에 연재하고 있는 정재승씨의 글이다.

질투다. 질투.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오! 왕이시어, 질투를 주의하옵소서.
이는 거짓을 행하는 녹색 눈의 괴물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고 살죠. 아내의 부정을 모르는 남편은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운명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죠.
오, 하지만 시간이란 얼마나 야속한지!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한구석 의심이 있고,
의혹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사랑을 불태우니!”




△ 질투는 역설적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데 그것이 사랑을 비극적 종말로 이끌 수 있다. 뭉크의 그림 <질투>.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 <오셀로>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베니스의 용병장군 오셀로와 그를 사랑해 비밀 결혼식을 올리는 데스데모나,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파국으로 이끌 음모의 모략꾼 이아고. 이들의 질투와 배신, 그리고 살인과 파국을 그린 작품 <오셀로>는 사랑의 어두운 뒷면인 ‘질투’라는 열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jalousie’ 뒤에 숨어 지켜보다

과학자들은 질투를 ‘배우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배우자가 제3자와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표현되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건조하게 정의하는데,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한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에 빠진 인간에겐 두 가지의 위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거나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성적 배신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자를 의심하는 질투라는 욕망이다.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라틴어 ‘zelosus’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열정과 강한 욕망’이라고 한다. 프랑스어로 질투를 뜻하는 ‘jalousie’는 질투라는 뜻과 함께 커튼 대신 사용하는 창 가리개인 ‘베네치아 블라인드’라는 뜻이 포함돼 있는데, 그 해석이 흥미롭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닐스 레터스톨은 이것이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현장을 잡으려고 블라인드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상황에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발견되는 이 쌍둥이 열정은 ‘질투’라는 단어의 어원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질투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립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스 버스가 수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남녀가 인생에서 최소한 한 번씩은 ‘격렬한 질투심’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전체의 31%는 ‘때로 질투심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놓았으며, 현재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고 답한 사람들의 38%는 그 질투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답하기도 했다. 질투가 얼마나 보편적이며 파괴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설문 결과다.
앞서 언급한 오셀로의 한 대목은 ‘질투가 얼마나 역설적인가’를 잘 포착하고 있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6%는 ‘질투는 진정한 사랑에 필수적으로 수반된다’고 응답했다. 다시 말해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면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얘기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질투가 사랑의 깊이를 말해주는 표시라고 여기며, 사랑이 없다면 질투도 없다며 질투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아내를 죽인 혐의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도 “제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제가 아내를 몹시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런 말은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다.
질투가 역설적인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데 그것이 사랑을 비극적 종말로 이끌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13%는 배우자 살해이며, 그중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질투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 과도하게 보이는 배우자 의심 증세를 ‘오셀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부부편집증이라고도 하는 이 병리적 상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흔하게 발견된다. 실제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오셀로 증후군 환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질투와 의심’에 시달린다.

일단은 의심하는 게 진화에 유리해

흥미로운 것은 오셀로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이 배우자로부터 얻는 불확실하고 애매한 단서들을 잘 포착해서 그들의 부정을 놀랍도록 잘 감지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오셀로 증후군 환자들의 병적인 의심이 항상 망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를 위협할 수 있을 만큼 파괴적인 ‘질투’라는 속성을 갖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데이비드 버스 교수는 그 원인을 자신의 책 <위험한 열정 질투>(추수밭 펴냄, 2006)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숲 속을 산책하다가 앞쪽 오솔길에서 무언가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을 감지했다고 치자. 그것이 독을 품은 뱀일 수도 있고, 뱀이 아닌 다른 것을 뱀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을 해야 하다 보니, 실제로 뱀 따위는 없는데 있다고 믿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고, 정말로 위험한 뱀이 버티고 있는데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오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매우 다르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런 상황을 수십만 번 치렀을 텐데,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뱀이 존재한다’고 추론했던 조상들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다. ‘뱀이 아니겠지’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조상들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겼겠지만,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불행으로 인해 우리를 태어나게 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과학자들은 ‘적응적 오류’라고 부른다.
바로 이렇게 질투는 ‘낮은 확률일지라도 일어날 수 있는 성적 배신의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점에서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유리하다. 무고한 배우자와 다투면 연인 관계가 깨질 수도 있기에 확실히 손해라고 볼 수 있지만,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배우자가 내게 좀더 충실하게끔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단서로도 배우자의 부정을 추론하게끔 적응적 해결책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이 질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내가 더 관심이 있는 것은 ‘그렇다면 왜 사람마다 질투의 정도가 다를까’ 하는 것이다. 질투가 성적 배신을 막는 데 유용한 전략이라면 왜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른 것일까? 질투가 적은 사람은 성적 배신에 너그러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성적 배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죄책감으로 인해 좀더 관대한 것일까?
질투는 성적 배신을 막으려는 이성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성적 배신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배우자의 바람기가 심각한 수준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할수록 질투심이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질투하는 사람은 네 번 괴롭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에세이 <사랑의 단상>에서 질투하는 사람은 네 번 괴로워한다고 쓰고 있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롭고,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롭고,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롭고, 또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돼서’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자신을 ‘초록 눈의 괴물’로 만드는 질투가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 기형도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질투는 나의 힘’이지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일보에 난 기사를 옮겨와 본다.

사주팔자도 과학으로 연구 가능하다는 이야기 아닌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영부인이 점성가와 상의하여 조언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점성가들은 출생 당시의 별자리에 따라 그 사람의 기질과 운명을 점친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그가 태어난 계절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점성술은 대표적인 사이비 과학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근년에 점성술의 주장처럼 사람의 기질이 출생 시기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먼저 운동선수에서 흥미로운 계절 요인이 확인되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의 심리학자인 애드 듀딩크는 1991~92년 시즌에 활약한 영국 프로축구 선수들은 9~11월생이 여름철에 태어난 사람보다 두 배 많은 것을 발견했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의과 대학생들은 4~6월에 유난히 생일이 많았다. 신장이나 수명에 대한 계절적 상관관계 역시 밝혀졌다. 1998년 빈대학의 게르하르트 베버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10년간 징집된 50만명의 18세 청년을 대상으로 평균 신장을 조사하고 키가 태어난 달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5월 출생한 남자는 9~11월생보다 평균 6㎜ 큰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가브리엘 도블해머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들이 훨씬 더 오래 산다고 주장했다.









가장 진기한 계절적 영향은 과학자의 세계에서 발견되었다. 1999년 영국 심리학자인 마이클 홈즈는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진화론 등 논쟁의 소지가 많은 학설을 남보다 앞서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10~4월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고 주장했다.

개인 기질과 출생 시기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사례가 속출함에 따라 과학자들은 계절 요인이 개인의 질병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주목했다. 특히 정신 분열증, 공황 발작, 알코올 중독 따위의 정신질환이 발병할 확률은 출생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신분열증의 경우, 1929년 스위스 심리학자인 모리츠 트래머가 늦은 겨울 태어난 사람이 발병할 가능성이 높다고 처음 주장한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 엇비슷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대개 2~4월생들이 다른 때 태어난 사람들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될 확률이 5~10% 더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신병 전문가인 존 맥그래스는 겨울철에 햇빛이 부족해서 태아의 뇌 발달에 필요한 비타민 D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2~4월에 태어난 사람들이 정신분열증에 시달릴 위험성이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가을에 생일을 가진 사람들은 공황 발작과 알코올 중독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9~12월생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공황 발작으로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8% 더 많고, 9~11월에 태어난 남자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될 확률이 약간 더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 역시 출생 시기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늦봄과 초여름 사이, 곧 4~6월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살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 영국의 정신병학자인 에머드 샐리브는 '영국 정신의학지'(BJP)에 기고한 논문에서 자살자 2만5000명을 분석한 결과 4~6월생들이 17% 더 많이 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4~6월생은 7~9월에 임신된다. 샐리브는 태아의 발육 기간에 햇볕이 산모의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미쳐 태아의 뇌에 변화를 일으키고 결국 훗날 자살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연구 논문들도 자살이 계절적 영향을 받으며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기에 자살률이 비교적 높은 것을 밝혀냈다.





▲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이러한 연구결과는 역학(epidemiology)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대량의 자료로 질병의 전모를 파악하는 의학을 역학이라 한다. 점성술의 영역에 머물던 계절 요인이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넘겨지는 셈이다.
입력 : 2008.01.11 23: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 서재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는 로쟈님이 한겨레21에 쓴 글을 옮겨왔다.

마지막 말 아직도 우리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필요하다는 말에 잠시

안구에 습기가 찼다. 아 이런 안습이란 이런거구나.

상탈 무폐의 책을 다시 꼼꼼히 읽어야 겠다.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적던 이름이 있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그의 만세를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가 싶은 기억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적은 이름이 ‘민주주의’였고 우리가 부르던 만세가 “민주주의여 만세”였다. 그리고 20년, 어느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 묻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를.





그러자니 먼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물어야겠다. 혹은 한 정치철학자를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이 무엇인가를. 클로드 르포르에 따르면 민주주의 혁명이란 권력의 자리를 ‘텅 빈 장소’로 만든 사회적 제도의 새로운 기원이다. 이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그 텅 빈 자리에 앉혀놓을 권력의 대행자를 뽑아왔다. 간혹 못해먹겠다고 푸념도 늘어놓는 자리이지만 한꺼번에 열두 명이나 나서서 좀 앉게 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역설의 자리는 어떻게 마련되고 또 유지되는 것인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의 물꼬를 튼 바 있던 샹탈 무페의 이어지는 두 저작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펴냄)과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펴냄)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민주주의의 역설’에 새삼 주목하도록 해준다. 먼저, 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와 함께 생각하고 슈미트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슈미트의 비판에 맞서 그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할 정도로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는 이는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런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려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은 불가피하다. 즉, ‘그들’이라는 외부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그래서 ‘구성적 외부’라고 부른다). 이때 ‘그들-우리’ 관계는 정치에서 자연스레 ‘적-친구’ 관계로 전화된다. 이 적-친구 관계의 갈등과 적대는 항구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이러한 관계와 조건의 산물이기에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행위자는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갖는 특수성과 한계를 인정할 때 더 ‘민주적’이 될 수 있다. 민주적 사회는 사회적 관계의 완벽한 조화가 실현된 사회가 아니다. 국민 전체의 ‘승리’나 ‘행복’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을 말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기만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 행위자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을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프로젝트이다(다만 덧붙이자면, 우리의 ‘적’에는 ‘적대적인 적’과 ‘우호적인 적’이 있어서 ‘그들-우리’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만이 아니라 경합적 관계도 형성하며 이를 통해 ‘경합적 다원주의’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된다). 대선은 그런 민주주의의 경연장이다. 샹탈 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감이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타는 목마름’이고 ‘치 떨리는 노여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