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8) 엔리케 두셀


엔리케 두셀은 1934년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태어나 철학을 공부했다. 스페인 콤플루텐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대학에서 인류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던 중 1973년 극우집단의 살해 위협을 받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윤리학, 정치철학, 라틴아메리카사상사 분야의 저술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지금도 건축중인 해방철학의 기본 골격을 마련했다. 카를 오토 아펠, 잔니 바티모, 위르겐 하버마스, 리처드 로티, 에마뉘엘 레비나스 등과 지속적으로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으며 50여권의 저서와 400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해방철학>(1977), <말년의 마르크스(1863~1882)>(1990), <타자의 은닉>(1992), <철학을 넘어서-역사, 마르크시즘, 해방신학>(2003), <정치학에 관한 20개의 명제>(2006), <해방정치학- 비판적 세계사>(2007) 등이 있다
  

 

 

 

 

 

현재 진행중인 세계화가 근대·식민 자본주의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권력의 식민성’은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두셀은 해방철학이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적 해방의 특성을 실재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며 은폐되었던 타자성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엔리케 두셀
 


혁명 사상에 치명상을 입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인류는 혁명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있지만, 그 후 20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발생한 월가의 파산은 혁명 이후를 생각하기에도 너무 성급한 시점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의 범람은 옛것은 사라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시대적 불안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다. 마르크스에게 혁명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면, 베냐민에게 혁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역사를 멈추게 하는 제동장치였다.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는 사회적 불의와 생태계의 파괴는 좌우를 불문하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부를 만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마르크스를 ‘비판했던’ 베냐민의 새로운 혁명 개념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새로운 혁명 개념은 1960년대 말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 근대성의 본산인 유럽에서는 탈근대적 비판이, 서구 바깥에서는 라나지트 구하를 중심으로 포스트식민주의운동이 태동했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두셀을 중심으로 해방철학이 등장했다. 해방철학 연구자들의 글을 모아 놓은 첫번째 책(1973)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 형식의 글이 실려 있다. “해방철학은 ‘에고’(ego)로부터, ‘나는 정복한다’, ‘나는 생각한다’ 혹은 ‘권력의지로서의 나’로부터 사유하지 않는다.… 해방철학은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변화된 사람의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종속국가의 위치에서 사유한다.… 해방철학은 타자의 외부성으로부터 사유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철학은 레비나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주체와 가치, 진리와 형이상학을 붕괴시키기 위해 고투했던 니체와 현존재(Dasein)를 통해 주체의 주체성을 비판했던 하이데거가 완고한 내부성의 철학의 외부를 탐색하는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면, 레비나스는 이성의 외부가 타자임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레비나스는 외부를 근대적 범주(예컨대 이성의 외부로서의 광기)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푸코의 타자와도 달랐다. 그러나 해방철학은 레비나스가 유럽 내부에서 사유하고 타자에 대한 순수한 윤리적 책임만을 요구하는 지점에서 레비나스와 갈라진다.  

 

 

 

 

   

두셀은 해방철학이 객관적이고 탈정치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체계의 희생자, 가부장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 황폐화된 지구를 상속받을 미래의 세대 등 가능한 모든 부류의 타자성을 위해 투쟁할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철학은 자기비판적 자세로 주변부에, 서발턴(하위주체)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두셀의 주장에는 비판철학자로서의 결기가 드러난다. “체계 안에서, 체계 앞에 서 있는 타자를 위한 책임은 모든 우선성보다 앞서는 우선성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 능동성이다. 그것은 세상의 시작보다 앞선 시작이고, 세상을 있게 한 시작이며, 세상의 선험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해방의 영웅은 체계의 반(反)영웅이고 위험에 자신의 삶을 던진다. 따라서 (억압받는 타자에 대한) 책임은 최상의 용기이고, 부패하지 않는 요새며, 총체성의 구조를 드러내는 진정한 통찰력이자 지혜다.”

해방철학의 비판적 범주가 근대적 주체성을 겨냥한다면, 비판의 구체적 실천은 역사적 접근으로부터 얻는다. 역사적 접근이란 ‘장기 16세기’에 시작된 세계체제(world-system)를 뜻한다. 해방철학을 (푸코, 데리다, 바티모, 레비나스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데카르트가 163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생각한다’를 말하기 훨씬 이전에, 스페인 국왕이 서류에 서명할 때 사용했던 ‘나’는, 코르테스가 1521년에 ‘나는 정복한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했던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프랑스 ‘고전 시대’의 인식론을 탐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난 500년 동안 근대성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체제 분석은 근대성, 식민주의, 세계체제, 자본주의, 아메리카의 발견·정복이 동시적이고 상호구성적 사건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계몽주의 근대성은 15세기 말 식민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성을 은폐하는 근대성의 신화다. 이런 맥락에서 두셀은 근대성의 신화가 독자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유럽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유럽을 마치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메리카의 발견·정복으로 시작된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대성 신화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전지구적인 중심-주변 구도의 출발이었다. 아메리카 정복 초기에 ‘인디오 전쟁의 정당한 명분’을 주장했던 세풀베다가 최초의 옥시덴탈리즘 이데올로그였다면,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했던 라스 카사스는 중심-주변의 구도에서 근대성에 대한 대항담론을 설파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한 현재 진행중인 세계화가 근대·식민 자본주의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식민주의가 종식된 이후에도 ‘권력의 식민성’은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철학이 단지 라틴아메리카사상의 한 가지 양상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면서 동시에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착취 구조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셀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럽중심적 ‘거대서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체계 외부의 타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하기 위해 단지 작은 이야기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리고베르타 멘추, 사파티스타, 아메리카의 흑인, 미국에 거주하는 라티노, 페미니스트, 주변인, 전지구화된 초국적 자본주의의 노동계급 역시 그들의 기억을 재건하고 그들의 ‘인정 투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서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두셀이 경계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환원론적인 방식으로 적용되는 이원론(중심-주변, 발전-저개발, 종속-해방, 총체성-외부성 등)이다. 다시 말해,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전통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전근대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보수주의자, 포퓰리스트, 파시스트 집단이 추구하는 반근대적 지향도 아니며, 파편화된 순수한 차이만을 긍정하는 탈근대적 비판도 아니라는 점이다. 두셀은 해방철학을 트랜스모던(transmodern)적 기획, 즉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적 해방의 특성을 실재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며 근대성이 저질렀던 희생제의적·신화적 특성을 부정함으로써 은폐되었던 타자성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화→문명화→근대화→세계화’라는 근대성의 신화와 수사학에 가려진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폭력과 불의를 비판할 수 있을 때 칸트가 설파했던 계몽의 이성은 비로소 해방의 원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계몽적 이성을 앞세운 유럽중심주의와 발전주의의 오류가 드러날 때 추상적 보편주의에 가려져 있는 현실의 다채로운 풍경이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다. 두셀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완의 기획은 근대성이 아니라 탈식민성이다. <끝> 

 

 

 

 

 

김은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 김은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김은중은 한국외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멕시코국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저항, 새로운 연대, 다문화주의>(공저), <세계화와 라틴아메리카 이주와 이민>(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활과 리라>(공역), <흙의 자식들 외>, <라틴아메리카-그 이름 뒤에 감춰진 현실>(근간) 등이 있다.


Enrique Du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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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김에 하나더 강준만의 글을 ..... 생각할 여지가 많은 글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 휴가를 앞두고 읽은 책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고 한다. 1932년에 출간된 책을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읽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한 어느 신문기사 내용이 흥미롭다.

“니버가 이 책을 쓴 것은 1930년대 대공황으로 미국 내 갈등이 극심했던 때다. 사상 초유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거치며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는 지금의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이 대통령도 이런 점에 착안한 듯하다. 최근 이념과 지역 간 고질적 갈등을 지적하며 ‘근원적 처방’을 찾겠다고 공언했던 이 대통령으로선 니버의 대안에 귀 기울일 만하다.”

그럴까? 영 어색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니버가 이 책을 쓴 주요 목적은 도덕주의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드는 개혁·진보주의자들의 비현실적인 타성을 질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한 사람들은 주로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니버의 주장에 대해 냉소주의, 비관주의, 패배주의 등의 딱지를 붙이며 맹공했다.

이젠 상식이 되었지만, 아무리 도덕적인 개인들이라도 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권한과 책임의 분산’ 때문에 전혀 다른 특성이 나타난다. 집단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논리와 생리를 갖게 된다. 그 집단은 나라일 수도 있고 거대 조직일 수도 있다. 느슨하게 조직된 연고집단도 마찬가지다. 대단히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로 구성된 연고집단일지라도 탐욕과 후안무치의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것이다.

재벌이건 공기업이건 언론사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거대 조직들의 구성원들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매우 예의 바르고 선량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평소 생각이 옳은 것인가 하고 회의하기도 한다. 이게 참 딜레마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평가할 때에 주요 기준으로 삼는 건 명분이나 강령 따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대인관계 태도나 인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시원찮으면 아무리 숭고하고 고상한 명분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라도 증오와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이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도덕적 우월감’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다.

‘도덕적 인간’의 함정도 있다. 니버는 “개인이 하나의 명분이나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는 경우에도 권력의지(혹은 힘에의 의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명분과 사적인 출세욕(명예욕)은 뒤섞이기 마련인데, 사적인 출세욕이 공적 명분의 성공을 압도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이 개혁·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늘 조직과 자기 자신을 의심하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이 책을 읽으면서 이념과 지역 간 고질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 처방’을 찾는다는 건 아무래도 번지수가 안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해석의 자유는 있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진보니 보수니 하고 나눌 것 없이, 어떤 집단의 지도자나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집단이 몹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이기주의와 부패는 모든 조직과 집단의 속성이다. 이 속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완화할 수 있는 길은 있다. 그건 바로 문호 개방이다. 잡다한 것을 뒤섞는 비빔밥 정신의 실천이다. 일사불란한 효율성은 좀 떨어질망정 집단이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는 건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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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글을 퍼왔다. 강준만은 현란한 이론적 수식보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 통찰이 강하다. 그는 지금 이자리의 한국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소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이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조상분들의 묘를 보고 뿌듯해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 어머님은 항상 저한테 ‘자네’라는 호칭을 쓰셨습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의 제게 ‘자네, 우리 집안에 정승이 3대째 끊긴 것을 아는가’라는 식의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정운찬 총리가 지난 2004년 서울대 총장 시절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희 할아버지도 늘 저만 보면 ‘언제 강릉시장이 될래?’라고 하셨다니까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또 유학을 간다고 하니까 이해를 못 하셨어요.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대학교수 오래 할 것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아야 하느니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강릉시장이 모자라면 강원도 도지사를 해라’ 이러시더라고요. … 나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영문과에 간다니까 외삼촌 왈, ‘그거 해서 뭐가 되는데?’ 치과대학에 다니던 외사촌 형이 옆에 있다가 ‘영어 잘하면 미국 대사도 할 수 있죠’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외삼촌이 또 말했어요. ‘그게 다냐?’”

지난 2005년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와 도정일 경희대 교수가 <대담>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현재 방영중인 <한국방송>(KBS) 드라마 ‘공부의 신’(유현기 연출)과 지난 1월에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스페셜 4부작 ‘출세만세’(남규홍 연출)를 재미있게 시청하면서 위에 인용한 세 분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 그 이전에 정운찬씨가 총리가 되는 걸 볼 때에도 ‘정승이 3대째 끊긴’ 그의 집안 사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출세! 이념보다 훨씬 강하고 진하고 질긴 한(恨)이다. 정치와 사회를 분석하는 한국의 사회과학이 곧잘 빠지곤 하는 함정도 ‘출세’의 문제를 비켜간 채 ‘이념’ 위주로 흐르는 데에 있다. 어느 정도 출세를 한 사람들에게만 사회적 발언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얽혀 있는 출세의 문제를 알게 모르게 외면하고 싶어 한다.

지금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左右)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선거철에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고위 공직을 출세로 간주하는 유권자들은 돌아가면서 나눠 먹으라는 ‘분배의 정의’에 투철하다. 선거 때마다 ‘물갈이’가 대폭 이뤄지면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지만, 물갈이의 주요 원인은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는 자신의 출세욕 충족을 위해 국민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유권자들의 시각이다.

출세욕이 나쁜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오늘의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출세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가? 역설 같지만, 우리 모두가 출세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이 배가 아파서 그렇단 말인가? 그게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출세 가치의 획일화와 서열화에 있다. 다양성이 존중되면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도 수단과 방법을 존중하고 소명에 충실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 남의 출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해진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치이지만, 정치는 기존 출세 가치를 바꾸진 못한다. 출세 가치를 바꾸지 못하면 정치는 출세의 수단일 뿐이라는 불신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딜레마다. 세월이 약이겠지만, 우선 고등학교에서 명문대에 학생 많이 보냈다고 뻐기는 현수막을 내거는 것부터 중단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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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평등’ 의로운 경제학 새 길을 찾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26) 아마르티아 센 Amartya Sen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1933년 인도 벵골(현재는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 1953년에 캘커타대를 졸업하고 196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델리대, 런던정경대(LSE),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를 거쳐, 2004년 이후에는 하버드대 철학과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경제학에서 출발해서 점차 경제학과 윤리학이 만나는 지점으로 연구 범위를 확장했으며,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은 이러한 연구 활동에 대한 보상(?)이었다. 오늘날 빈곤 연구에서 흔히 이용되는 ‘센 빈곤지수’(Sen-Index)나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발표되는 ‘인간개발지수’(HDI)는 그의 직접적인 연구 성과이거나 이를 반영한 것이다.



 

» 아마르티아 센
 

냉철한 과학적 판단과 여기에 기초한 실증연구가 지배하는 경제학계에서 센의 위상은 독특하다. 그는 실증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평등이나 사회정의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경제학이 과학적인 효율성 논리에 치중해서 윤리적이거나 규범적인 문제를 간과할 경우 과학적 엄밀성을 얻는 대신 경제이론의 빈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에 대해 흔히 차가운 과학성과 윤리적 따스함을 동시에 갖춘 학자로 평가되는 이유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독특한 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윤리적 접근, 특히 ‘능력’(capability) 개념은 경제학의 윤리적 한계를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학이나 사회철학에도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현재 그가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철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기존의 윤리학은 대부분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추구한다. 여기서 평등은 대체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소득이나 자원, 또는 기회)이나 그 충족 정도(후생이나 복지)와 같은 특정 변수에 기초해서 평가된다. 존 롤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력, 소득과 부, 자존감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기초재’(primary social goods)를 중심으로 분배정의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물질적 욕구 중심의 평등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사회적 기초재라는 특정 변수에 의존해 평등 문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평등론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욕구까지 추구하며, 이를 충족하는 능력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평등관은 지나치게 제한적인 정보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분석의 편리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이 용인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제한된 정보에 기초한 평등관이 종종 분배정의 기준을 위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 변수 중심의 평등관은 다른 변수와 관련된 평등의 문제를 간과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의도와 달리 또 다른 불평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 평등 원칙이 종종 소득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렇다.   센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모색하는데, 이는 그의 윤리학이 인간의 다양성이나 이질성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서 센은 기능, 능력, 성취를 구분한다. ‘기능’은 인간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물질적·비물질적 욕구를 모두 포함)을 지칭하며, 이러한 기능 집합으로 구성된 것이 삶의 질을 지칭하는 복지이다. 또한 ‘능력’은 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 집합 중에서 특정한 기능(이나 기능 집합)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칭하며, ‘성취’는 이 가능성이 실현된 정도를 지칭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행위 동기, 곧 욕구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선택할 수 있으며, 행위동기가 비슷하더라도 물리적·정신적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성취 수준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능력이 항시 동일한 성취 수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비슷하더라도 행위 동기나 전략 혹은 전술의 선택에서 달라질 경우 성취 수준에서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센에 따르면, 능력은 개인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 즉 기능(혹은 기능집합)을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또한 이미 성취된 기능이 실제 복지수준을 구성한다면, 그러한 기능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은 복지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구성한다. 여기서 자유는 복지를 위한 수단이자 복지를 구성하는 요인이며, 그것도 실현 가능성까지 고려된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후생이나 복지에 관한 윤리적 판단에서는 실제 성취수준보다 성취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할 수 있다. 개인에 따라서는 자신의 후생이나 복지만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능력 차이가 성취수준의 차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센은 개인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 자유를 중시한다. ‘기회의 평등’은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음을 의미할 뿐이지만 ‘자유의 평등’엔 소득이나 부도 중요하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라는 윤리학의 과제는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평등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센은 개인이 스스로 원하는 좋은 삶을 구성하는 기능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 즉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목표를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 자유를 중시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능력 개념은 특정 수단(예를 들면, 사회적 기초재나 자원, 또는 소득)을 중심으로 삶의 질이나 복지를 평가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관점과도 다르다. 그의 능력 개념은 개인이 자신의 목표를 실질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기회 혹은 가능성을 지칭하지만, ‘기회의 평등’은 단순히 이용 가능성이나 그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후자만으로는 실질적인 자유의 평등을 확보하기 힘들다. 자유의 평등을 확보하는 데에는 ‘기회의 평등’ 관점에서 고려되지 않는 다양한 변수들(이를테면, 소득이나 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등 문제를 능력 평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사회정의나 분배정의를 개인이 지닌 능력, 즉 자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한 삶을 스스로 항유하는 실질적 자유에 비추어 판단할 경우, 빈곤은 단순한 소득결핍이 아니라 기본 능력의 결핍이다. 또한 빈곤은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이라는 의미에서, 자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빈곤과 결핍을 사람들이 실제로 향유하려는 삶과 자유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능력 향상은 소득 향상이라는 단순히 도구적 맥락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는 이미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센은 가치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문제만이 아니라 평등의 영역까지 능력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라는 윤리학의 과제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이것의 평등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더구나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인간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그의 능력 개념은 물질적인 욕구나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중심으로 평등의 문제에 접근하는 기존의 관점에 비해 훨씬 더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현실 사회에서 빈부격차는 단순한 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친 빈곤은 종종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의 향상이 자유와 평등의 조화라는 윤리학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유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현실 세계에서 경제 문제가 윤리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면, 경제학과 윤리학의 통합적 접근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사안에 가깝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능력 개념은 윤리 문제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경제학의 가능성까지 제공하는 셈이다.

이상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이상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이상호는 고려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 가톨릭대 강사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연구 논문으로는 <사회정의와 정치경제학>(1998), <센의 ‘능력’과 사회정의>(2001) 등이 있으며, 역서와 저서로는 <불평등의 재검토>(1999), <경제학, 더 넓은 지평을 향하여>(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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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신춘문예의 공고가 나기 시작하면 가슴이 뛰었던 .... 

젊은 신인 작가의 작품을 빼놓지 않고 사보면서 첫장을 열 때 어떤 흥분을 느꼈던 날들이 .... 

이제는 신인 작가들의 책을 사보지 않는다. 왜 그러냐고 묻지는 않겠다. 

이런 기사를 보니 다시 젊은 작가의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 기대 배반한 20대 작가 열전  

1980년생 영화감독 남궁선씨는 문학계간지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에 기고한 20대 소설가 김사과에 대한 ‘작가 초상’에서 사회가 20대 문제를 논하는 세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세팅을 교실이라고 치고 이십대를 그 반의 왕따라고 하면, 이십대 담론이라는 것은 반장이 애들 모아놓고 심각한 얼굴로 ‘얘기가 필요합니다’라며 왕따 문제를 토의하는 것과 같다. 물론 당사자이니만큼 왕따도 꼭 교실에 같이 있어달라는 부탁을 해가면서.”

20대에게 20대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는 기성세대는 대부분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첫째, 자신의 낭만적인 청춘을 곱씹어보게끔 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순수하고 풋풋한 이야기를 기다린다. 둘째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세상을 움직이게 할 원동력이 20대에게도 있는지 확인해보려 한다. 특히 시 짓고 소설 쓰는 작가들은 세태에 민감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기대하기 좋은 직군이다. 
 

 

   

ⓒ이우일 그림

많은 20대처럼, 20대 작가들도 ‘어른’들의 그런 기대를 배반한다. 20대 문인들이 쓴 시와 소설들은 풋풋하지도 않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다. 1980년 광주 혹은 1987년 민주화운동처럼 그들을 묶을 끈도 없으니 당연히 ‘진보’니 ‘연대’니 하는 목표 의식도 없다.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괴로운 세대이지만 허구로 가득 찬 문학 속에서조차 20대는 나른하고 안온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 기대가 잘못됐다. 20대라는 카테고리 안에 작가들을 묶어서 두 종류의 이야기만 들으려 한 기성 독자들이 조금만 마음의 문을 넓히면, 20대 작가들의 글은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다.

여기 소개하는 20대 작가 다섯 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홍대 앞에서 자주 놀고,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소통을 하다가 휴대전화가 꺼지면 소통도 곧 꺼져버리는 작품 속 인물들의 공통점을 빼면, 이들의 글은 공유 지점이 단 한 곳도 없다. 출발점도 지향점도 모두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래서 신춘문예 심사 때마다 “요즘 젊은이들의 응모작은 모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라는 혹평이 쏟아진다.

하지만 20대가 꼭 자기 방의 문을 열고 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방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시와 소설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젊은 작가들은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왕따의 입을 쳐다보고 있는 반장과 학급 친구들 앞에서 왕따가 굳이 그들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김기홍씨(29)의 장편소설 <피리 부는 사나이>(문학동네 펴냄)는 세 가지 생각으로부터 태어났다. 한 마을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뒤따라가 모두 사라졌다는 독일의 전설을, 어릴 적 김씨는 기묘한 기분으로 읽었다. 언젠가 한 잡지 인터뷰 기사에서 어느 영화배우가 던진 “낯선 곳에서 눈을 뜨면 어떤 기분일까?”라는 물음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신문을 펼치고 텔레비전을 켜면 세상은 24시간 내내 테러와 살인과 실종 범죄로 앓고 있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전설과 물음과 현실에 답을 내는 방향으로 김씨의 소설은 출발했다. 

소설을 쓰기 전부터 김씨는 사람들의 무감각함에 자주 놀랐다.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때는 그렇게 겁에 질렸으면서 2004년 런던에서 일어난 테러는 왜 그렇게 금방 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홍대 앞에서 집으로 가던 여성들이 밤마다 사라지고, 그래서 뉴스는 매번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그녀들을 삼켜버린 도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느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종 사건처럼, 익숙하지만 이상한 것들에 김씨는 시선을 오래 두었다. 2002년 여름, 그도 거리응원을 나가 ‘대~한민국’을 외쳤지만 학교 앞에서 거리응원 인파에 발이 묶여버린 시내버스를 보고 처음으로 애국주의가 ‘좀 이상하다’라고 느꼈다. 입학할 때는 분명 학교 앞에 파파이스(프랜차이즈 닭집)가 네 군데였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몽땅 없어지고 대신 스타벅스가 네 곳 생긴 것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아메리카노나 라떼나 마키아또가 없던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요?” 김씨는 소설의 작은 부분들을 그런 의문들로 메웠다.

김씨는 원래 문학보다 음악을 좋아했다. 중·고등 학생 때 동네 친구들과 밴드를 꾸리고 기타를 쳤다. 중3 때 첫 통기타를 샀고 1년 뒤 설날 세뱃돈을 모아 첫 일렉(전자)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때는 왠지 꼭 그런 음악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메탈과 록에 심취했다.대학생이 되어서도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 공연을 하고 기타 레슨으로 용돈을 마련했다. 문학에 관심을 붙인 것은 지하철역에서 공익근무 요원으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업무가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 가 닥치는 대로 책을 집어 읽었다. 보르헤스 작품을 접하고서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라고 충격받았다. 

등단을 일찍 한 편이지만 첫 시도는 아니었다. 2007년에도 문학동네작가상 공모에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중편소설을 하나 냈다가 떨어졌다. “마치 대학 과제를 벼락치기로 하듯, 마감 당일 아침에 부리나케 써서 우체국에 뛰어가 내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1년 뒤에는 신인상 공모에 단편소설을 내 최종심까지 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공들여 쓴 <피리 부는 사나이>는 고료 5000만원과 함께 ‘소설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김씨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저력이 만만찮다”(임철우), “동화적 모티브를 현대사회의 여러 증상과 관련지어 풀어나가는 솜씨가 상당하다”(남진우)라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쓴소리도 많이 했다. “유럽 전역에 이르는 소설 공간의 광활함에 비해 그 디테일이나 사실성이 턱없이 부족하다”(신수정)라든가 “피리 부는 사나이, 피리 소리, 수연과 여인들의 연쇄 실종사건 간의 연관성이 여전히 모호하다”(임철우)라는 식이다.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김씨가 ‘겁없이’ 작품 배경을 서울 신촌에서 유럽 전 대륙으로 확대해서일지도 모른다. 또 작품의 출발 지점에서 던진 질문들에 아무런 답을 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젊은 덕에 김씨는 충분히 고민하는 중이다. 테러가 왜 일어나는지, 사람들이 좇는 가치는 뭔지, 그것들 중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앞으로 내 문학은 사회 속 깊숙이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따위를 말이다. 비행기는 곧 타볼 예정이다. “주식을 해라” “펀드에 넣어라”라는 주변 친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고료 중 일부로 배낭을 메고 필리핀 등지의 동남아시아를 돌아볼까 생각 중이다.

■ 조롱하면서 소통하는 시인 오은

“축하합니다. 등단하셨습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에, 스무 살 청년이 묻는다. “네? 등단이 뭐예요?”
대학 합격 발표 다음 날이었다. 전날 친구들과 마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청년은 자신이 쓴 시가 한 문학 월간지의 작품 공모에 당선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 끼적인 그의 시를 한 살 많은 형이 몰래 타이핑해 우편으로 보낸 덕이었다. 그는 등단이 뭔지도 모르는 ‘비문학 소년’이었다. 심사위원은 스무 살 당선자에게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네가 쓴 게 맞니?”


   
김기홍씨는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장편소설 <피리 부는 사나이>로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다.

■ 이상한 것들에 시선을 던진 소설가 김기홍

 

 

20대 시인으로는 드물게 자신의 시집 (<호텔 타셸의 돼지들>, 민음사 펴냄)까지 낸 오씨는 평론가들에게 “스스로 생장한 언어의 힘으로 새로운 시적 규율을 만들어 가는 시인”(이재훈)이라는 평을 받는다. “너무 무겁지 않게 언어와 놀면서 언어 외부의 무엇인가를 계속 환기”(박수연)하는데, 그것은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는 ‘정치성’이다.  

시인 오은씨(28)는 재수 시절 담배와 함께 시 쓰기를 시작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교내 백일장이 열리면 부지런히 시를 써서 냈지만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해서 스스로 시를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학교 밖에서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케이스’라는 학습지 회사가 공모한 문학상이었는데,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에 딸린 방에서 네 식구가 살던 경험을 토대로 “‘슬픈 독백’인지 ‘슬픈 인연’인지, 아무튼 딱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하실 만한 제목과 내용으로 시를 써서 200만원을 받았다.”

등단하고 나서도 시는 많이 쓰지 않았다. 등단이란 걸 하면 으레 문학 잡지에 글도 싣고 이름도 알려야 한다는 ‘문단 상식’을 알지도 못했고, 어차피 어린 나이라 청탁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오씨는 대학에서 학생회 활동을 ‘약간’ 했다. 선배를 따라 집회에 나갔다. 하지만 “모든 게 항상 똑같아서” 오씨는 이내 지쳤다. “반전 집회를 나가도, 농민 집회를 나가도, KTX 여승무원 연대 집회를 나가도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한 여자 선배가 집회 대열 맨 앞줄에 섰다가 전경의 방패에 맞아 귀가 찢어지는 사고를 목격했다. 덜컥 겁을 먹었다. 다시 집회에 나가기 힘들었다.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었다. 말장난 좋아하고 남 골려먹기 좋아하는 그여서 시가 제격이었다. “스카이가 다른 이유를/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열심히 일한 자들이 왜 떠나는가를/ 방과후 학습에서/ 비로소 이해”하는 아이들이 가련해 “마블링처럼 웃으며/ 고블린보다 신나게/ 더블린 한복판에서/ 텀블링, 텀블링”(<스프링> 중)이라고 말놀이판을 벌였다. “콩밥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그러다 운 좋게 한자리 해먹으면 뇌물도 먹고 쓴소리에는 적당히 가는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배우자의 영혼도 야금야금 갉아먹는”(<식충이들> 중) 사람들은 그가 조롱하고 싶은 상대이다. 

오씨는 “어른에게 반항하는 어린아이의 기분으로 시를 쓴다”라고 말했다. 그 핵심이 ‘조롱’인 까닭은 “꼰대들이 싫지만 그들이 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놀리면서 ‘소통’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귀 막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 역시 그의 비판 대상이다. “우리는 모두 겁쟁이예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을 때만 미칠 수 있지요 온실효과 때문인가요? 전쟁 핑계는 대지 마세요 술과 마약은 그때가 더 독했잖아요(<세대 차이> 중).”

■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는 소설가 안보윤

어릴 적에 안보윤씨(29)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열한 살 겨울방학 때, 학원 수업이 끝난 뒤 집에 돌아온 안씨는 엄마를 보자마자 내뱉었다. “이상한 아저씨한테 잡혀갈 뻔했어.” 열네 살 봄에는 집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집에 돌아온 언니에게 말했다. “도둑이 들었어.”


   
안보윤씨는 1981년 인천에서 태어나 명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같은 대학 대학원의 문예창작학과에 다닌다. 2005년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지금도 안씨는 거짓말을 한다. 예전에는 속아주는 사람이 있어 입으로 거짓말을 했다면, 이제는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 원고지에 거짓말을 쓴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문학동네 펴냄)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아 등단한 뒤 단편 7편을 문학 계간지에 실었고, 지난해에는 <오즈의 닥터>(이룸 펴냄)로 제1회 자음과모음문학상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안씨 소설의 스토리 전개나 인물의 행동들이 ‘만화적’이라고 평한다. 악어 문신이 새겨진 두 살배기 아이, 그 아이를 잃고 강아지에게 집착하는 엄마, 휜 다리를 비관해 아예 잘라버리는 얼짱 소녀, 고등어 대신 술집 여자 머리를 갈라버린 생선 장수,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마약 중독자 교사 같은 ‘극단적인’ 인물들이 소설 도처에서 위험한 행동을 벌인다. 작가는 그렇게 “인간 본성의 모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풍자하고 조롱한다”(서영은).  

배꼽 옆에 악어 문신이 새겨진 경찰청장의 아들이 실종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 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는 안씨가 처음 시도한 장편소설이다. “작지만 치명적인 고리로 연결되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연작 소설처럼 쓰고 싶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두 번째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는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구상했다. 영상의 언어처럼, 소설의 언어로도 사람을 쥐락펴락 긴장시키고 싶었다.  

안씨의 꿈은 원래 소설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건 “적당한 대학, 안전한 학과를 들어가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는 법”이었다. 안씨의 첫째 인생 목표도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졸업한 뒤 적당한 회사에서 일하며 3년 정도 적금을 붓다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똑같은 걸 외우고 시험치는 일만 반복하는”, 고등학생 때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별 생각 없이 문예창작과 수업을 하나 들었다. 다른 대학 과제와는 달리 ‘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써서 제출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교수에게 “너희 과로 돌아가라”고 악담을 들을 정도로 버벅거렸다. 그러다 학기가 끝날 때 쯤 교수가 연구실로 안씨를 불렀다. “집은 먹고살 만하냐? 부모님이 먹여줄 것 같으면 딱 1년만 소설을 써봐라.”

안씨의 작품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사회 범죄들, 이를테면 아동·청소년 유괴나 우발적인 살인 같은 것들이다. 범죄에 대한 분노가 유독 크기 때문이 아니다. “작정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뇌리에 박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쓴다.” 안씨를 비롯한 또래들은 어릴 때부터 범죄를 소문이나 활자가 아닌 영상으로 보고 자랐다. 안씨에게 ‘경찰청 사람들’과 같은 범죄 재현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무척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실 견딜 수 없이 끔찍하고 무서웠다. 

보험금을 노리고 어린아이를 끓는 물 속에 집어넣은 실제 사건처럼, 끔찍하지만 사람들이 이내 잊어버리는 범죄 보도들을 안씨는 끝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소설에 이용한다. “스스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에 대해 쓰기 때문에” 소설을 짓는 내내 안씨는 고통스러워한다.

■ 가난한 자를 위한 시를 쓰고 싶은 시인 백삼웅

시를 쓰는 20대는 많지 않다. 더구나 나무나 꽃 같은 자연을 관찰하고 시를 쓰는 20대는 희귀하다. 시인 백상웅씨(29)는 복숭아꽃·매화나무·오동나무·굴참나무·수련·층층나무 따위를 시로 만든다. 2008년 백씨에게 창비신인시인상을 안긴 심사위원들의 평에 따르면 백씨 시의 이런 ‘식물성’은 “인간 세계의 갈등과 상처를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봉합하고 치유한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고 순연(純然)한 상상력이 여전히 자생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이는 어쩌면 백씨가 대부분의 젊은 문인과 달리 서울에 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남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북 익산과 완주의 대학 두 곳을 다닐 때까지 백씨에게는 빌딩 숲보다 꽃과 나무 숲이 더 가까웠다.  


   
백상웅씨는 1981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이다.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했고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백씨는 여수시로 통합되기 전의 전남 여천군에서 나고 자랐다. 그곳은 희한한 동네였다. 농촌은 농촌인데 가까운 곳에 큰 공단이 있어 완전한 농촌은 아니었다. 마을 어른 절반은 농사를 짓고,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마을 어른 절반은 공장으로 출근했다. 농촌과 공단이 공존하니 이상한 일이 많았다. 유조차가 좁은 시골길을 지나가다가 논두렁에 빠져 논에 기름을 들이붓기도 했다. 매년 봄에는 등굣길에 ‘춘투’ 가는 아저씨 무리와 만났다. 웅성거림 속에 들리던 “모가지가 잘렸다”라는 말이 어린 백씨를 얼마나 떨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공장은 정말 사람 목을 ‘댕강’ 자르는 곳인 줄 알았다.

백씨의 시에는 식물과 공장(혹은 철)이 자연스레 섞여 있다. “철가죽에서 기어 나와 옥상에 서면/ 부도난 공장 굴뚝을 더디게 오르다가/ (중략) /층층나무는 기름진 나사처럼 하늘에 박혀가고/ 지상의 시간도 철제 계단을 조금씩 미어내는지/ 내가 사는 옥상도 나이테처럼 퍼져나갔으면 하는 밤”을 노래한 ‘층층나무의 잠’(<열린시학> 2009년 봄호)과,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라는 ‘꽃 피는 철공소’(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이 대표적이다. 

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백씨는 “박노해나 김지하의 시처럼 세상을 바꾸는" 시를 쓰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국사 선생님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노래로 불러줬을 때 느꼈던 울컥함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래서 문예창작과로 진학했는데, 세상을 바꾸는 시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자주, 여러 가지로 열이 받아” 인터넷에 들어가 댓글을 달아보기도 하고, 정당 학생위원회에 들어가 정치 활동을 해보기도 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래도 백씨는 여전히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를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시가 아니다. 그 말은 “참으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만날 참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되도록 다양한 시를 써보려고 하지만, 좀 더 무르익으면 시로 그런 메시지를 풀어내고 싶단다.

■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소설가 김사과

‘20대가 쓴 청소년 소설’이나 혹은 ‘청춘 연애 소설’이라는 광고 문구만 보고 소설가 김사과씨(26)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분명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청소년 소설에서는 여고생이 친구를 죽이고, 청춘 연애 소설에서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20대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삶을 쓰레기진창 속으로 끌고 간다.


   
김사과씨는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창비신인소설상에 단편소설 <영이>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씨의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순진하지 않다. 문학 평론가 강유정씨의 해석처럼 그들은 “세상이 거대한 음모라는 사실을 안다”. 장편소설 <미나>(창비 펴냄)에 등장하는 여고생 수정은 “실제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지만 그것을 감추기 위해 어른들이 제시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여 순발력 있게 흉내내는” 아이이다.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펴냄)의 ‘나’는 언뜻 보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옥탑방에서 애인과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낭만적 20대이다. 하지만 동시에, 도시의 여름에는 물을 채운 고무 대야와 선풍기보다, 단돈 800원으로 살 수 있는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의 빵빵한 에어컨과 밀크셰이크가 훨씬 낫다는 걸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20대이기도 하다.  

김씨도 순진하게 자랄 기회를 빼앗겼다. 국어 성적순으로 뽑은 논술 경시반에서 그녀는 시간에 맞춰 설명문과 논술문을 쓰는 훈련을 받았다. 최대한 빨리 써야 집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쓰는 습관이 성공적으로 몸에 배었다. 덕분에 소설가가 된 지금도 분량을 채우고 마감 기한을 지키는 일에는 어려움이 없다.

김씨는 “남녀 공학인 게 좋아서”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1년만 다니다 자퇴를 했다. 입시 공부만 시키는 학교가 싫어서였다. 하지만 자퇴생 김씨 역시 온 관심의 초점은 ‘대학 입학’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들어가는 일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압박을 엄청나게 받았다. 대학 합격 발표 날이 소설 당선 발표 날보다 훨씬 기뻤다. 대학에 들어가 서사창작과 수업을 들은 이후 김씨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이 그녀를 ‘성공’시켰다.    

스물한 살, 단편소설 <영이>로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이래 김씨는 20대 문인 가운데에서도 문단에서 꽤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신문·잡지에 칼럼을 쓰기도 하고,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인터뷰 요청도 쏟아진다. 하지만 김씨는 요새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소설을 좀 쓰다보면 어딘가 강의도 나가고 교수도 하고, 상을 받고, 심사하고…, 그렇게 앞날이 정해진 느낌이 끔찍하다”라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새 소설이 자본주의 시장의 중요한 콘텐츠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데, 내가 그 시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김씨는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야심이 있다. 다만 이제 사람들이 소설이란 장르에 바라는 것이 ‘미학적 성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 차라리 사회과학 서적 같은 것이나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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