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평등’ 의로운 경제학 새 길을 찾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26) 아마르티아 센 Amartya Sen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1933년 인도 벵골(현재는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나 1953년에 캘커타대를 졸업하고 196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델리대, 런던정경대(LSE),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를 거쳐, 2004년 이후에는 하버드대 철학과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경제학에서 출발해서 점차 경제학과 윤리학이 만나는 지점으로 연구 범위를 확장했으며,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은 이러한 연구 활동에 대한 보상(?)이었다. 오늘날 빈곤 연구에서 흔히 이용되는 ‘센 빈곤지수’(Sen-Index)나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발표되는 ‘인간개발지수’(HDI)는 그의 직접적인 연구 성과이거나 이를 반영한 것이다.



 

» 아마르티아 센
 

냉철한 과학적 판단과 여기에 기초한 실증연구가 지배하는 경제학계에서 센의 위상은 독특하다. 그는 실증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평등이나 사회정의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경제학이 과학적인 효율성 논리에 치중해서 윤리적이거나 규범적인 문제를 간과할 경우 과학적 엄밀성을 얻는 대신 경제이론의 빈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에 대해 흔히 차가운 과학성과 윤리적 따스함을 동시에 갖춘 학자로 평가되는 이유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독특한 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윤리적 접근, 특히 ‘능력’(capability) 개념은 경제학의 윤리적 한계를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학이나 사회철학에도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현재 그가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철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기존의 윤리학은 대부분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추구한다. 여기서 평등은 대체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소득이나 자원, 또는 기회)이나 그 충족 정도(후생이나 복지)와 같은 특정 변수에 기초해서 평가된다. 존 롤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 기회와 권력, 소득과 부, 자존감 등으로 구성된 ‘사회적 기초재’(primary social goods)를 중심으로 분배정의 원칙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물질적 욕구 중심의 평등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사회적 기초재라는 특정 변수에 의존해 평등 문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평등론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욕구까지 추구하며, 이를 충족하는 능력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평등관은 지나치게 제한적인 정보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분석의 편리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이 용인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제한된 정보에 기초한 평등관이 종종 분배정의 기준을 위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 변수 중심의 평등관은 다른 변수와 관련된 평등의 문제를 간과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의도와 달리 또 다른 불평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 평등 원칙이 종종 소득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그렇다.   센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모색하는데, 이는 그의 윤리학이 인간의 다양성이나 이질성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서 센은 기능, 능력, 성취를 구분한다. ‘기능’은 인간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물질적·비물질적 욕구를 모두 포함)을 지칭하며, 이러한 기능 집합으로 구성된 것이 삶의 질을 지칭하는 복지이다. 또한 ‘능력’은 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 집합 중에서 특정한 기능(이나 기능 집합)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칭하며, ‘성취’는 이 가능성이 실현된 정도를 지칭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행위 동기, 곧 욕구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선택할 수 있으며, 행위동기가 비슷하더라도 물리적·정신적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성취 수준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능력이 항시 동일한 성취 수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비슷하더라도 행위 동기나 전략 혹은 전술의 선택에서 달라질 경우 성취 수준에서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센에 따르면, 능력은 개인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 즉 기능(혹은 기능집합)을 추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또한 이미 성취된 기능이 실제 복지수준을 구성한다면, 그러한 기능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은 복지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구성한다. 여기서 자유는 복지를 위한 수단이자 복지를 구성하는 요인이며, 그것도 실현 가능성까지 고려된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후생이나 복지에 관한 윤리적 판단에서는 실제 성취수준보다 성취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할 수 있다. 개인에 따라서는 자신의 후생이나 복지만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설령 그렇다고 해도 능력 차이가 성취수준의 차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센은 개인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 자유를 중시한다. ‘기회의 평등’은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음을 의미할 뿐이지만 ‘자유의 평등’엔 소득이나 부도 중요하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라는 윤리학의 과제는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평등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센은 개인이 스스로 원하는 좋은 삶을 구성하는 기능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 즉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필요한 목표를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는 자유를 중시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능력 개념은 특정 수단(예를 들면, 사회적 기초재나 자원, 또는 소득)을 중심으로 삶의 질이나 복지를 평가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는 관점과도 다르다. 그의 능력 개념은 개인이 자신의 목표를 실질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기회 혹은 가능성을 지칭하지만, ‘기회의 평등’은 단순히 이용 가능성이나 그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후자만으로는 실질적인 자유의 평등을 확보하기 힘들다. 자유의 평등을 확보하는 데에는 ‘기회의 평등’ 관점에서 고려되지 않는 다양한 변수들(이를테면, 소득이나 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등 문제를 능력 평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사회정의나 분배정의를 개인이 지닌 능력, 즉 자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한 삶을 스스로 항유하는 실질적 자유에 비추어 판단할 경우, 빈곤은 단순한 소득결핍이 아니라 기본 능력의 결핍이다. 또한 빈곤은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이라는 의미에서, 자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빈곤과 결핍을 사람들이 실제로 향유하려는 삶과 자유에 비추어 이해한다면, 능력 향상은 소득 향상이라는 단순히 도구적 맥락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유는 이미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센은 가치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문제만이 아니라 평등의 영역까지 능력 개념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라는 윤리학의 과제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이것의 평등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된다. 더구나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인간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그의 능력 개념은 물질적인 욕구나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중심으로 평등의 문제에 접근하는 기존의 관점에 비해 훨씬 더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현실 사회에서 빈부격차는 단순한 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친 빈곤은 종종 자유를 제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의 향상이 자유와 평등의 조화라는 윤리학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유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현실 세계에서 경제 문제가 윤리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면, 경제학과 윤리학의 통합적 접근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사안에 가깝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능력 개념은 윤리 문제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경제학의 가능성까지 제공하는 셈이다.

이상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이상호/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이상호는 고려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 가톨릭대 강사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연구 논문으로는 <사회정의와 정치경제학>(1998), <센의 ‘능력’과 사회정의>(2001) 등이 있으며, 역서와 저서로는 <불평등의 재검토>(1999), <경제학, 더 넓은 지평을 향하여>(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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