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지형도 - 비서구적 이론의 가능성 - 이택광

 

우리에게 언제나 서양사상은 ‘첨단의 노래’였다. 김수영이「서시」에서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이라고 썼을 때부터, 서양사상의 수입에 대한 반성은 진지하게 제기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고, 근대적 세계관을 특징화하는 과학적 사유는 동서양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실천의 구체성이고, 들뢰즈의 말처럼, ‘영토’라는 터전이다.

영토는 사유이미지를 터 잡아주는 경계이자 토대이다. 따라서 서구사상과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발생하는 이론에 대한 모색은 여러 인문학적 작업 중에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기보다, 인문학 자체를 규정하는 근본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에게 인문학은 ‘수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을 일러 ‘백인 남성의 것’이라고 지칭했을 때, 인류사를 형성해온 사상의 지평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논리에 근거해서, 바타이유처럼, 동양은 자신의 내적 경험을 기술할 수 있는 현대적 언어를 획득하지 못했다고 말하더라도, 이런 발언에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내재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구도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서양사상의 언어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동양이라는 ‘타자’를 설득시키지 않는 한, 서양사상은 ‘전 지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과 서양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체제적 양분에 따른 역사적 경험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여줬고, 이 와중에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서양사상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체계와 다른 가치들에 대한 관심들이 중요한 인문학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얼마 전에 타개한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7.16~2009.6.18)의 작업들은 자본주의의 소내로서 중국의 사회주의를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다른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서양의 타자’에서 발견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롭게 펼쳐지고 있는 국면들이 잘 말해주고 있듯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행해왔던 사상이나 이론의 ‘이동’과정에 대한 습관적 인식을 수정해야할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처럼 무조건 서구가 최신의 이론을 생산하고, 그것을 비서구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론의 이동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역전현상은 단순하게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다기보다는, 비서구적 영토에 근거한 새로운 사유방식의 출현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눈에 띄고 있는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의 작업들은 단순하게 서구의 이론을 중국과 일본 사회를 위한 분석의 도구로 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서구의 근대성에 근거한 이론적 탐색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사유가 구성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왕후이와 가라타니 고진은 서구사상의 말석을 차지한다기보다, 그 사상전개의 첨단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사상의 지도에 보탠 가라타니 고진의 행보는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기점들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한국 사상계에서 감춰진 기원이었던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와 연계해서 마르크스를 읽어내는 독특한 시각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읽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내에서 붐을 이뤘던 탈근대이론의 수입에 상당히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마르크스와 칸트를 일본의 문맥에 맞춰서 새롭게 읽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의 의미는 단순하게 ‘텍스트 다시 읽기’ 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통해 서양사상에서 제기하는 가치들의 문제를 재점검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트랜스크리틱』이 탈근대이론의 문제점을 넘어선 이론적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윤리21』은 이런 서양의 고전텍스트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고자 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에피소드는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고베 시 중학생 사건에서 ‘연소자’ 범죄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지 않고, ‘부모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가라타니 고진은 지적하고 있다. 사건을 저지른 부모가 사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본 사회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서양적 가치체계를 호소하는 ‘윤리’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아시아 나라들을 무시하고 사죄에 응하는 정치가를 규탄하는 신문일수록 부모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애당초 이 사람들에게 ‘책임’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이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로 복귀한다. 선악의 기준을 부여할 사회가 부재할 때, 아니 설령 사회가 있더라도, 그 사회가 규정하는 선악의 기준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어떻게 윤리가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을 ‘자유’로 간주한’ 칸트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도덕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부의 도덕이 곧 외부의 자유를 보증해주는 것이 될 수 있는 경우를 가라타니 고진은 비서구의 근대화에 필요한 윤리라고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다른 관점이긴 하지만,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왕후이는 서구근대화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근대화의 과정에 대한 천착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왕후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동양과 서양을 구분했던 과거의 분류체계를 함께 아우르기 위해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중요한 이론적 교두보로 확보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통해 수행하고자 했던 목적과 비슷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왕후이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다른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중국의 사상사를 파고 들어간다. 이를 통해 왕후이는 서구 근대화의 ‘거울상’으로서 일본의 근대화 문제를 거론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의식을 넘어서서, 비서구적 근대성의 모델을 중국의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1990년대 이후 왕후이는 신좌파의 대표주자로서 중국 내에서 끊임없이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해온 것으로 명성을 쌓았다. 중국 지식계에서 그의 존재는 이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얼마 전에 그동안 집필한 글들을 모아서 『혁명의 종언: 중국과 근대성의 한계』라는 책을 영국의 버소에서 영문판으로 출간함으로써 서구사상사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저는 중국에서 나온 『중국근대사상의 흥기』이고, 이 작업에서 왕후이는 유럽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자본주의에 가장 근접한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달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의문점들을 해소시킬 야심찬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가라타니 고진과 왕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침묵에 빠진 한국의 지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진석 교수는 언젠가 한국은 ‘이론 생산’에 실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실천의 맥락을 찾아 나가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바로 이런 실패의 지점에 세계사상의 흐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론 생산의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을 굳이 ‘한국적’이라고 불러야할 이유는 없겠지만, 여하튼 김진석 교수가 예측했던 그 지점보다 세계사상사의 지도가 훨씬 확장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흥미진진한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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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워킹푸어] 지방대생은 스펙 쌓아봤자 '단기 알바직'?

 20대가 고통 받고 있다. 1000만 원에 달하는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태반이 백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의 문은 2008년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더 심해졌다.

지난 1분기 20대 취업자 수는 29년 전인 1981년 4분기 이후 최저였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440만 명(1998년), 434만 명(1999년) 수준을 유지하며 400만 명을 거뜬히 넘겼던 20대 취업자 수가 1분기에는 370만 명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실업률은 급증했다. 지난 1분기 20대의 공식 실업률은 9.1%로 2000년 1분기의 9.4%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 13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대 대졸 실업자는 무려 20만4000명에 달했다. 1년 전에 비해 15.2%나 늘어났다.

20대 대부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통 받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중의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는 아니어도 'in 서울' 조차 되지 못한 지방대생들이다. 2009년 시도별 대학 재적학생수를 보면,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242만7662명 가운데 서울, 인천, 경기의 수도권 대학 학생 수는 107만 명(44%)이며, 그 외의 대학에 속한 학생은 135만 명(56%)이다.

비수도권 대학의 학생 수가 전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지방대 출신은 저임금의 임시 일자리일지언정 정부 대책으로 마련된 청년 인턴마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자조가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고려대 학생 김예슬 씨가 이른바 '대학 거부' 선언을 한 뒤, 한 지방대 학생은 김예슬 씨의 선언과 그 사회적 울림을 지켜본 소회를 이렇게 토로했다.
 

 

 

 

 


"그 일을 지켜본 '어느 지방대생'은 좌절했다. 그 용자의 이름은 '고대 자퇴녀'였기 때문에. 만약 한밭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박수는커녕 눈길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까? 많은 대학생들이 여전히 학력과 학벌로부터 자유롭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대학생들은 마음으로 이미 자퇴했고, 그들 중 일부는 조용히 교문을 나서기도 한다. 더 이상 이는 낯선 얘기가 아니다. 이렇게 명문대 학생도, 비 명문대 학생도 진정으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사회는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인권연대 소식지에 이런 글을 쓴 한밭대 학생 임아연 씨는 "세상은 어느 한 대학생이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교교육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퇴했다는 것보다 '고대생'이 그랬다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는 메시지는 강력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했다. '고대를 관둘 정도면…'이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과 빈곤한 교육철학으로 점철된 '그 대학'을 스스로 거부한 그를 마지막까지 빛나게 한 건 명문대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방대생. "김예슬 씨를 더욱 빛나게 했던" 그 이름을 갖지 못한 이들. 만일 그들이 김 씨와 마찬가지 이유로 대학을 '거부'한다면,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같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을까? 임아연 씨가 느낀 '좌절감'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의 반응과 지방대 출신이 학벌폐지를 요구할 때 반응이 어떻게 다를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대 김예슬'의 대학 거부 "스펙에 열중하는 대학이 싫었다"

이상호(가명, 28) 씨는 지난 2008년 대학을 그만뒀다. 두 번째 들어간 학교였다. 첫 학교는 사는 곳에서부터 왕복 4시간이 걸렸고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시험을 쳐 2001년 충북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꼭 7년 만에 이 씨는 학교를 스스로 뛰쳐 나왔다. 군대를 제대한 뒤 1년 간 휴학 상태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다시 복학한 직후였다.

이 씨가 학교를 떠났던 3년 동안 "대학은 전혀 다른 공간이 돼 있었다"고 했다. 그 변화가 이 씨에게는 낯설었다.

"모두 다 똑같은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수업 들어갔다가 도서관 갔다가 토입 수업 들으러 가고, 토익 학원 끝나면 의미 없는 술자리로 하루 일과를 끝내는 생활의 무한 반복. 사람과 사람이 모여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축제만 해도 그랬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각 동아리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을 들고 나오는 자리였다면, 2008년이 되니 형식은 과거와 똑같을지 몰라도 내용물이 아무 것도 없어졌다. 예전처럼 각 동아리가 친 천막도 있었지만, 창작물은 없고 끽해야 일일카페나 주점이 다였다. 대신 축제는 외부에서 데려 온 대중가수나 개그맨이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상호 씨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이 씨가 군대와 휴학을 거쳐 돌아온 뒤 학교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모든 애정을 쏟았다는 동아리 역시 전혀 다른 곳이 돼 있었다. 달라진 동아리의 모습에 대해 이 씨는 "관심사를 공유하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기 보다는 스펙 쌓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장소 이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기존에 하던 동아리 활동은 점점 축소돼 갔다. "하자"고 해도 같이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다 지치면 쉬어가는 쉼터"가 돼 버린 동아리는 이 씨가 활동하던 곳만은 아니었다. 영어 스터디, 주식 공부 등 "자기 경력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가 아니면 대부분 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대학의 가장 큰 변화였다.

따지고 보면 이 씨가 군입대 등으로 학교를 떠났던 3년 이란 세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학교는 그렇게 급격하게 변해버린 것일까? 이 씨는 답했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그 사이 사회의 변화는 급격하게 눈에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려고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질 기회 자체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이니, 다들 조급해진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등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사람은 점점 더 몰려들고. 적어도 적당한 일자리마저 없어진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이 등록금도 가파르게 올랐다. 국립대인 우리 학교만 해도 내가 입학할 때 120만 원이었는데 군대 갔다 오니 230만 원이 돼 있었다. 학기마다 꾸준히 20만 원씩은 올랐던 것 같다. 학교 다니는 동안 이미 모든 대학생이 엄청난 빚쟁이가 돼 버린 셈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일자리에 취직하지 못하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신은 신용불량이라는 올가미에 걸리는 걸 20대도 잘 알게 된 것이다."

스펙에 열중하는 20대의 모습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지만, 이 씨는 그런 대학이 싫었다고 했다.

"빚으로 다녔던 대학,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었다"

이상호 씨도 학자금 중 일부는 대출을 받아 냈다. 입학금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방학 등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를 해도 치솟는 등록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그만둘 때까지 모두 400만 원 정도의 학자금을 빌렸다. 이 씨는 내년이면 원금 상환을 시작해야 한다. 그는 "솔직히 대학을 그만둘 때 대출을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 씨의 여동생도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다닌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학을 다닌다는 이 씨의 동생은 한 학기에 500만 원 넘게 등록금을 낸다. 고향을 떠나 대학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다 보니 생활비도 더 많이 드는데, 웬만한 아르바이트로는 생활비도 빠듯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휴학을 자주 했고, 스물여섯 살인 여동생은 이제 겨우 대학 4학년이다.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 동생도 대학을 간다면 똑같을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전라도 광주의 한 대학을 졸업한 박민재(가명, 35) 씨도 마찬가지였다. 박 씨는 "등록금은 거의 다 대출로 냈다"고 했다. 게다가 박 씨가 대학생일 때는 학생증만 있으면 신용카드가 몇 개씩 발급이 되던 시절이었다. '카드대란' 직전이었다. 박 씨는 "생활비까지 다 신용카드로 썼으니 카드빚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뒤부터 신용불량자가 됐고, 이후 신용회복 절차를 밟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박 씨는 2004년 대학 졸업 이후 7년 동안 온갖 일자리를 전전하며 먹고 살아야 했다. 프로야구 경기장 진행요원, 텔레마케터, 이마트 협력업체 직원, 학원 총무, 서울시 교통국에 소속된 행정 서포터즈, 한강사업본부 소속의 기간제, 샌드위치 가게, 돈가스 가게 등 이력도 다양하다. 평균 월 100~150만 원을 벌었다.

고향 나주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살기에는 결코 넉넉치 않은 돈이다. 박 씨는 "영화를 보는 등 문화생활이나 따로 연애를 안 하면 살 수야 있다"고 말했다. 매달 기본으로 들어가는 돈만 월세 20만 원에 휴대폰 비용 3~4만 원이다. 고시원에 살고 있어 각종 공과금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역시 서울에서 작은 인쇄업체에 다니고 있는 이상호 씨도 생계가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씨까지 직원이 3명인 이 인쇄소에서 그가 받는 돈은 월 100만 원이다. 사는 집은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가 37만 원인 작은 원룸이다. 이 씨는 "이 월급에서 문화적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하면서 살려면 줄일 수 있는 것은 식비 뿐이라 먹는 게 늘 부실하다"고 말했다.

박민재 씨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보통 한 끼를 밖에서 먹으려면 최소 5000원인데, 돈이 없으면 두 끼를 집에서 먹고 여유가 있으면 한 끼만 집에서 해결한다. 집에서 가끔씩 보내주시는 반찬에 그냥 밥만 해서 먹는 거다. 과일을 엄청 좋아하는데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수중에 돈이 있어도 사먹을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한다. 

1년 정도 다녔던 이마트 협력업체를 빼면 박 씨가 얻었던 일자리는 모두 단기였다. 따로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고 일한 종로의 돈가스 가게나, 이태원의 샌드위치 가게도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아르바이트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더 이상 그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되면 박 씨는 다시 인터넷 등을 통해 새 일자리를 구했다. 박 씨에게 아르바이트만 하며 사는 삶에 대해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어떤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하니까. 당장 들어가야 하는 돈이 있는데 놀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폭은 굉장히 좁다."

박 씨는 안정적인 곳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기능직 공무원 시험도 봤다. 9급이나 7급 공무원은 공부를 꾸준히 오래 해야 하는데 그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기능직 공무원은 택했다. 하지만 두 번 다 미끄러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딱히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박민재 씨지만, 그는 높은 실업률을 놓고 '20대가 눈높이가 너무 높다'고 핀잔을 주는 주장에 대해 "일부 맞긴 맞는 말"이라 했다.

"그런데 중소기업환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눈높이만 얘기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중소기업 근무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 월급이나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밖에 나가면 중소기업 경력은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반면 부당한 대우는 정말 많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눈높이만 지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 하루 평균 13시간 노동에 월 100만 원 안팎

이상호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대학 시절 생활비를 벌고 등록금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 씨는 제일 좋았던 곳으로 대기업 계약직을 꼽았다.

한 대기업 화장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4개월 일했던 그는 "아무리 비정규직이어도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복지도 상대적으로 좋고 출퇴근도 정확했다"고 회상했다. 주5일제도 지켜졌고, 근무 시간도 정확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중간 휴식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고, 작업복도 돈을 받지 않고 회사에서 지급해 줬다. 연장근무를 하면 수당도 줬다. 그곳에서 월 95만~100만 원을 받은 것이 이 씨의 아르바이트 경력에서 최고액이었다.

반면 핸드폰 공장, 군납 낙하산 제조 공장, 신축 아파트 하자 보수, 대형마트의 청과물 판매 등 다른 일자리의 노동조건은 정말 열악했다. 2003년, 그가 대학생인 것을 속이고 정규직으로 들어가 두 달 정도 일했다는 경기도 안양의 핸드폰 공장에서는 하루 13시간 노동이 기본이었다. 주말은 없었다. 회사에서 내준 기숙사와 공장만을 왔다 갔다 하며 그가 번 돈은 한 달에 70만 원 수준이었다.

경기도 광명의 낙하산 제조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 전에는 시급 3000원을 주겠다고 하더니 첫 달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시급 2500원으로 계산해 월급을 줬다. 노동시간도 하루 13시간이었고 2주일에 한 번 일요일만 쉬게 해줬다. 휴식 시간은 하루에 2번,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뿐이었다. 그것도 채 한 시간이 안 됐다.

"핸드폰 공장이나 낙하산 공장이나 노동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기숙사에서 아침 8시에 눈 떠 공장에 가서 퇴근하고 방에 돌아오면 밤 11시였다. 그러면 할 일은 잠 자는 것 뿐이다. 그래도 피곤했다. 인간 같지가 않았다. 공장 안에 먼지가 정말 많은데 마스크 같은 걸 지급해주지도 않았다."

군대 제대한 뒤 바로 일자리를 얻었던 청주의 대형마트는 대형 유통업체였음에도 환경이 열악했다. 이 씨는 파견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4대 보험은 전혀 없고 심지어 유니폼도 하청업체가 파견 노동자에게 따로 돈을 받았다.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하루 평균 10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88만~92만 원 정도를 벌었는데 이 씨는 '아르바이트'였지만, 동료들 가운데는 그 일자리가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형들이 많았다. 나야 '알바'로 생각했으니 그렇지만, 직장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소연하거나 항의할 곳조차 없다. 몸이 아파서라도, 일단 무단결근이 생기면 바로 해고다."
 

박민재 씨가 전전했던 일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생활 '첫 경험'이었던 텔레마케터는 실적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서 출신 대학 동문 주소록을 가져다 줬고, 동문들에게 잡지 구독을 권유하는 것은 두 달로 끝이었다. 세 번째 달부터는 전혀 실적이 나지 않았고 결국 '잘렸다.' 마지막 달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마트 협력업체에서는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벌었지만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주중에는 각 이마트 점포를 돌아다니며 납품한 물건의 판매량과 진열 상태를 확인해야했고, 주말에는 용인에 있는 창고에 가서 물건 포장 작업을 도와야했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하다보니, 이마트에서 원하는 건 뭐든지 해야 했다. 각 점포마다 1년에 1~2회 '리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는데 그때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동원됐다. 한 점포에서는 1년에 한두 번이라지만, 납품 점포가 여러 개인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 리뉴얼을 하기 위해 밤을 샜다.

샌드위치 집이나 돈가스 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루에 12시간, 배달 일을 했던 돈가스 가게는 "오토바이 보험조차 들어주지 않았다"고 박 씨는 말했다.

"오토바이 보험료, 기껏해야 1년에 20만 원이다. 대학 때 오토바이 사고가 난 경험이 있어서 보험을 꼭 들어달라고 주인에게 여러 번 요청했는데 번번이 묵살됐다. 보험 들어달라면 '사고 나면 책임져준다'는 말만 하는데, 사고 나면 정말 다 책임져줬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다행히 내가 일할 때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나마 주차 단속 민원 처리가 주된 일이었던 서울시 교통국의 행정 서포터즈나, 한강시민공원에서 나무 심고 꽃 심는 일을 했던 기간제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경쟁도 만만치 않다.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인 셈이다.

"지방대생이 대기업, 공무원? 00학번 이후 없다"

결국 20대가 '눈높이'를 낮춰 얻을 수 있는 일자리란, 이들의 경험처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형편없는 복지, 차별과 부당한 대우가 일상인 '질 낮은 일자리'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을 중간에 그만 둔 이상호 씨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스펙 쌓기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가 나뉘게 된다. 당연히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게 돼 있다.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일 아닌가."

이 씨는 "그렇게 희박한 승률의 도박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만 할까"는 회의감에 대학을 '거부'했지만, "졸업을 했더라도 인생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취직한 친구가 있는지 물어봤다. 대답은 "없다"였다.

"같은 학교 사람 중에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은 99학번이 끝이었다. 99학번 선배 하나가 삼성전자에 취직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후로는 전혀 없었다. 과도, 동아리도 마찬가지다. 공기업도 전혀 없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는 얘기는 엄청 많이 들었는데 됐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동기들 중에 한 친구는 자동차회사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전혀 엉뚱하게 골프장에 가 있는 친구도 있다. 나 역시 학교를 계속 다녀 졸업했다면 정규직 취업은 못하고 아르바이트 한답시고 여기저기 일하러 다니고 있었을 거다."

이 씨가 증언한 지방대생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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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글을 또 옮겨 온다.  

주어진 것으로서 '있는' 사유의 샛길은 어디로 나 있을까. 

<이택광의 세계사상 지도 읽기2> - 프랑스 철학과 내재성 탐색

프랑스철학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이제 ‘철학의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프랑스에서 프랑스산 철학이 반드시 환영을 받는 건 아니다. 현실의 프랑스인들을 만나서 듣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보수주의 쪽에 가깝게 위치시켜야할 것 같다. 한국처럼 프랑스에서도 지식인에 대한 ‘단죄’는 여지없이 일어난다. 마치 친일파 문제처럼 프랑스를 지배하는 정서는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는데, 발리바르가 슈미트를 복권시킨 뒤에 친나치적인 철학자로 비난을 감수해야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이해해야 프랑스산 이론들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짐작하게 해주는 상징적 인물이 바로 사르트르이다. 그는 프랑스에 하이데거주의를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했고,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의 진리를 문학에 위임해버리는 ‘시적 봉합’을 앞서서 실천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사르트르에 대한 프랑스사회의 반감은 놀라운 것이었다. 알제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파트에 폭탄테러가 가해지기도 할 정도였으니 가히 그 상황을 짐작할 만할 하다.


   
     

오늘날 우리가 고찰해야할 이론적 지형도의 한 구석에 사르트르가 위치해야할 이유는 명확하다. 실존주의보다도 삶의 방식으로 프랑스사회를 뒤흔들었던 이방인의 이미지에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유들이 출발했다. 사르트르는 고향집에 남겨놓고 온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들뢰즈도, 바디우도 젊은 시절에 모두 ‘사르트리언’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빼먹을 수 없는 이론가로 라캉이 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와 결별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휴머니즘’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며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이 낡은 시계를 다시 찾아냈을 때, 들뢰즈는 분노에 차서 비판을 가했다.


이 들뢰즈야말로 프랑스의 작가 투르니에가 한때 ‘반체계의 악마’라고 묘사했던 젊은 들뢰즈이다. 사르트르에 대항해서 반휴머니즘은 이후 프랑스산 이론에서 밀교적 표지로 통한다. 헤겔을 밀어내면서 스피노자가 부상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변방에서 날아온 영악한 자객 지젝은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지적 지형도에서 틈새시장을 탁월하게 공략했다. 스피노자가 올라선 봉우리에서 헤겔을 이야기하고, 알튀세르의 유령이 출몰하는 곳에서 라캉을 들이민다. 물론 숨은 지젝의 라이벌은 바디우이지만, 이 사실은 종종 커다란 바디우의 덩치 때문에 별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사르트르와 라캉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언급한 적은 없지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우호적 관계는 아마도 두 ‘별종들’이 보여준 주체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젊은 들뢰즈가 비판했듯이, 일방적으로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르트르는 주체에 대해 라캉과 비슷한 반휴머니즘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체는 허상이지만 폐기할 수 없는 범주라는 공통지반에 이들은 서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르트르도 라캉처럼 데카르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출발시킨다.

라캉과 사르트르의 ‘주체의 해체’


라캉이 말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통찰은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생각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판본과 거울상을 이룬다. 물론 사르트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생각’ 이외의 존재방식 즉 감정, 상상력, 감각, 꿈같은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코기토 없는 주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휴머니스트처럼 보이지만 라캉과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빗대어 말했던 놀랄만한 반휴머니즘의 ‘교육자’였고, 레비스트로스나 푸코와 마찬가지로 현대철학사상의 창시자들 중 하나로 간주됐다. 라캉의 세례는 강렬해서 1960년대 반휴머니즘의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강화시킨 계기들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가 라캉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물론 완전히 라캉에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라캉 역시 『세미나 11: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에서 사르트르에 대한 찬사를 헌정하고 있다. 특히 시선의 문제를 논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시선을 대상소타자와 관련해서 이론화한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사르트르와 라캉의 현전성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말년에 들을 수 있었던 푸코의 고백에 오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사르트르를 일컬어 ‘침묵의 미소’로만 반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푸코는 사르트르에 대한 외경을 한꺼풀 표현한 것이다. 말하자면 푸코 역시 사르트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르트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통속적 사유로 철학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푸코를 공격하면서 푸코가 내세운 탈마르크스화가 허망한 ‘부르주아의 방어벽’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푸코가 마침내 ‘주어진 시대의 순간에 생산되는 주체’로 관심을 돌렸을 때, 하나의 결정적 문제를 사르트르와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대적 진보와 실천, 그리고 사건의 결과로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투에서 사르트르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푸코의 발언은 앞으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주체화’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sujectivation)라는 명제는 ‘나의 세분화’라는 사르트르의 기획에서 핵심적인 범주였고, 이 또한 철학에 대한 라캉의 공헌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이론들이 사르트르와 라캉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을 지금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거인의 영향력을 빼놓고 이론의 지형도를 그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들뢰즈가 익히 사르트르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디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학생시절 똑똑하긴 한데 너무 사르트르 흉내를 낸다는 지적을 받은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는 클레르 파르네와 나눈 대화에서 “다행히 사르트르가 있었다”는 고백을 쏟아놓는다. 사르트르야말로 그의 세대를 지탱시켜준 ‘외부’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외부라는 것은 사유된 것을 통해 사유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말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증언에 따르면 들뢰즈는 사르트르를 ‘마지막 철학자’로 불렀다. 20세기가 사르트르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들뢰즈의 시대가 될 수 있었다는 레비의 지적은 그래서 상당히 설득력 있다.

들뢰즈와 모든 사유의 출발점, 생명


사르트르와 라캉이 제시한 것들은 공고한 환상으로 존재했던 주체의 해체였다.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보다 훨씬 많이 나아간 이론가였다. 사르트르를 일컬어 외부라고 한 것은 데카르트, 후설, 사르트르, 그리고 레비나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지형도에 비견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달리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메를로 퐁티로 흘러내리는 계류에 발을 담그고 있다. 퐁티는 들뢰즈와 같은 지세에서 무기적 사물과 융합돼 있는 생명에 대해 고민했다. 이들에게 주체는 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허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고정점을 만들어낸 주체라기보다 주체화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 시급했던 것은 주체라기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성에 대한 탐구였다고 볼 수 있겠다. 내재성은 생각보다 그렇게 ‘내재’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모든 사유를 출발시키는 하나의 차원, 바로 생명 자체이다. 메를로 퐁티에게나 들뢰즈에게 생명은 유기체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은 무기체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주체화를 사물의 융합과 섞어버린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은 주체화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이들에게 주체화는 ‘~인양 굴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거기 사유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주어진 것(es gibt)으로서 ‘있는’ 사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하이데거로 돌아가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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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연재하는 이택광의 글이다.  

 

사상의 지세들이 뻗어나오는 물줄기들 … 슈미트와 아렌트 또는 ‘적대’와 ‘협의’  

[이택광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3> ‘정치적인 것’의 계보학 

 

오늘날 인기어가 돼버린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칼 슈미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독일어인 ‘das Politische’를 불어인 ‘le politique’로 옮기고, 이것을 다시 영어로 옮긴 것이 ‘the political’이다. 이 말을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해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글자만 놓고 본다면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하기 모호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1932년에 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슈미트의 책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다른 사회적 영역과 구별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적과 아’라는 구체적 분별에 정치적인 것의 특이성을 위치시킨다. 윤리적 영역에서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하고, 미학적 영역에서 미와 추가 대립하고, 경제적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이 대립하듯이, 정치적인 것에서도 적과 아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은 독자적인 영역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객관적 본성이나 자율성으로 인해 다른 영역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화와 범주화가 가장 강력하게 부딪히는 그 긴장의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은 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른 영역에 비해 특권적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우선성을 갖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슈미트는 이런 정치의 특권성을 설명하기 위해 전쟁을 예로 든다. 전쟁은 사회적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극단적인 비상사태를 의미한다. 이 비상사태의 국면에서 모든 것은 ‘적과 아’라는 정치적인 것의 긴장관계로 복속된다. 기존의 공동체를 구성했던 원칙들은 돌연 ‘적대’라는 분열을 통해 해체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협소하게 정치의 영역에 묶어 놓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정치철학의 서막을 새롭게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의 발명은 단순하게 ‘정치’라는 명사형을 ‘정치적인’이라는 형용사로 바꾼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슈미트는 특정한 제도적 장치에 정치적인 현상을 묶어놓지 않을 수 있는 방도를 제공했다. 정치적인 것을 고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유동적이고 편재하는 ‘장’으로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슈미트의 공인 것이다.


정치에 대한 슈미트의 재정식화는 리쾨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리쾨르는 정치라는 것이 위대한 ‘위기’의 순간에 오직 존재한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 위기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역사의 전환기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의 헝가리 침공이 서구 지식인 사회에 가져온 파장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중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 직면해서 리쾨르가 『정치적 역설』을 집필했을 때,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현실사회주의라고 불리던 ‘국가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정치를 이중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역사의 전환기와 새로운 정치의 개념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리쾨르는 구체적인 정치적 합리성과 정치적 악마성을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내장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그는 경제로부터 정치의 영역을 분리해냈다. 경제나 정치 모두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지만, 각각의 합리성은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기획은 경제결정론에 경도돼 있던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학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리쾨르는 경제적 영역과 대립하는 정치적 영역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헝가리 사태가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지위를 복권할 기회로 비쳐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정치와 다른 것으로 개념화한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리쾨르가 말하는 ‘역설’이라는 것은 결국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 더 나아가서 갈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갈등의 원인을 리쾨르는 정치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리쾨르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계급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관계를 지칭하고, 정치는 정치적 권력의 악마성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런 권력의 악마성은 ‘경제적 소외’로 환원해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는 이런 권력의 악마성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경제적 소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는 것이 리쾨르의 주장이었다.


리쾨르의 용어법에서 정치적인 것은 권력에 대립적인 ‘살아있는 관계’이자, 동시에 악마적인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어떻게 말하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를 작동하게 만드는 엔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구분법에 따르자면, 정치적인 것은 ‘정체’(polity)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정치는 정책을 만들거나 결정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은 합리적인 일치의 구현체이고, 정치는 권력의 국면이다. 물론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빚어낸다.


이후에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성’을 입법의 문제로 좀 더 구체화하지만, 초기에 정립한 분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은 헌법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한 합리적이라는 것이 리쾨르의 생각이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와 대립하지만,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상대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리쾨르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차이를 ‘역설’이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설은 서로 다른 믿음이 ‘나란히’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선구적이지만 단순한 리쾨르의 접근


이처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리쾨르의 정의는 선구적이지만, 그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그의 개념화에서 핵심적인 것은 경제적인 합리성에 대해 정치적인 합리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이런 방식은 초기 프랑스 이론에서 정치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구분해내는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리쾨르의 용어법은 한나 아렌트와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용어의 계보학에서 아렌트는 프랑스적 맥락과 다른 위치에서 정치적인 것을 정의한 이론가이다. 정치적인 것의 정의에 있어서 아렌트는 슈미트와 다르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을 자유의 공간이라고 파악했는데, 이런 관점은 정치적인 것을 권력의 공간으로 파악했던 슈미트와 일정하게 다른 관점이다. 슈미트에게 정치적인 것은 적대와 갈등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렌트에게 이 공간은 공적인 협의를 보장하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는 이론들이 아렌트적인 관점과 슈미트적 관점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렌트와 슈미트라는 물줄기를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사상의 지세들이 뻗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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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워킹푸어] '노동권 사각지대' 농어업 이주노동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00만 명이 넘는다. 인구의 2.2%에 달하는 수치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은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결과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흐름 못지 않게 국경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이동도 늘었다. 외국인들은 노동자, 결혼상대, 외국어 강사, 엔터네이너 등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한국에 들어온다. 이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소위 '3D'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1991년 산업연수생 제도 도입된 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가 한국사회의 '야만성'을 상징하는 문제로 떠오르자, 2004년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고용허가제가 도입됐다. 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 중 하나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경제도 침체에 빠지면서 노동시장의 가장자리에 있던 이들은 더욱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네팔은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다. 네팔에 살면서 평생 바다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시얌(35. 가명) 씨와 마가르(37. 가명) 씨는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건너와 어부로 일하고 있다.

이들에게 지난 5-6개월의 한국 생활은 생전 처음 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못지않게 낯설고 두려운 일의 연속이었다. 1920년대 일본 어업노동자들의 끔직한 노동 현실을 담아 최근 뒤늦게 화제를 모았던 <게공선>의 주인공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최근 천안함 수색을 돕던 금양호 선원들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어선 선원들의 열악한 생활이 알려졌다. 힘겨운 노동과 열악한 보수로 선원들을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 '빈 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뉴시스

어업비자로 들어온 이주노동자, 한국판 '게공선'

시얌 씨와 마가르 씨는 각각 작년 10월과 11월에 고용허가제(EPS)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이들은 제조업 비자가 아닌 어업 비자를 받았다. 그래서 공장이 아니라 충남 대천의 한 고기잡이배에 선원으로 취직했다. 시얌 씨가 입국할 때는 71명 중 2명이 어업비자로 입국했고, 마가르 씨가 입국할 때는 106명 중 7명이 어업비자로 들어왔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주위에서 한국이 좋다고 들었어요. 또 한국에 오기 전 두바이에서 2005년부터 2년간 호텔 종업원으로 일했어요. EPS 시험을 볼 때 서비스업종으로도 올 수 있다고 들어서 한국을 선택했죠. 말레이시아 등 다른 나라보다 한국이 경제수준도 높으니까 대우도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네팔에서는 보험회사에 다니던 시얌 씨는 한국에서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는 1지망 서비스업, 2지망 제조업, 3지망 어업, 4지망 농업을 적어냈다. 네팔에서 가구공장을 하고 있던 마가르 씨는 한국에서 연관된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왔다. 하지만 그도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어업노동자로 일하게 됐다.

이들은 한 어선에서 한국인 선원 3명과 함께 일했다. 새벽 3-4시에 바다에 나가 일찍 돌아오면 오후 2시, 늦게 돌아오면 저녁 7시까지 있었다. 하루 평균 14시간 정도 일했다. 휴일은 따로 없었다. 한달 내내 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날씨가 안 좋아 조업이 불가능한 날이 휴일이었다. 하지만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육지에 있을 때는 고기잡이 그물을 손보는 일을 해야 했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온 때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작업복만 입고 맞는 칼바람도 큰 고통 중 하나였다. 이들이 일한 배는 9월부터 12월까지는 멸치를 잡고, 1월부터 지금까지는 꽃게를 잡았다. 꽃게철이 지나면 오징어, 물메기 등을 잡는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시작하면 휴식 시간은 따로 없었다. 끊임없이 그물을 던지고 잡힌 고기로 묵직해진 그물을 끌어올려야 했다. 수십킬로그램의 그물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끌어올리는 일은 평지에 비해 몇 배 더 고된 일이었다. 자칫 그물의 무게에 중심을 잃고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실제 고기잡이 배에서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마가르 씨는 그물을 끌어올리다가 그물추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30분 정도 의식을 잃은 일이 있었다. 시얌 씨도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쿵'하는 충격에 갑판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진 적이 있다.

그물을 올리는 속도가 빨라지면 휴식은커녕 끼니를 때울 시간조차 없었다. 배에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에 속했다. 선장의 기분과 날씨와 조업 속도, 이 삼박자가 갖춰져야 라면을 먹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날엔 생으로 굶거나 빵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일이 거친 만큼 사람들도 거칠었다. 욕을 듣는 것은 일상이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뱃일에 익숙한 한국인 동료들에 비해 시얌 씨와 마가르 씨는 체력도, 체격도 형편없이 뒤졌다. 파도가 거세지면 일하는 이들의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다. 시얌 씨가 작은 실수를 하자 한국인 동료는 그의 멱살을 잡고 배의 가장자리로 끌고 가 "이대로 바다에 밀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출렁이는 배 안에서 그의 목숨도 출렁이는 것 같았다. 마음은 철렁 가라앉았다.

"그 순간 네팔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왜 낯선 한국 땅에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서글퍼졌어요. 한국인들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죠."

네팔인에게 한국음식 못 한다 타박하는 한국인 동료들

육지에서 생활도 선상에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물을 손질하는 등 업무와 관련된 일 외에 '과욋일'을 해야 했다. 바로 한국인 동료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일이다.두 사람은 항구 근처의 여인숙에 묵었다. 선장은 방 2개를 잡아 하나는 이들 둘과 한국인 두 명, 다른 하나는 고참 한국인 선원 한명이 쓰도록 했다. 육지에 있을 때 식사는 선장이 장을 봐다 주면 직접 요리를 해서 먹었다. 당연히 한국음식이었다. 익숙지 않은 한국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더 힘든 것은 한국음식을 만들어 한국인 동료들에게 바쳐야 하는 일이었다. 동료들은 식사와 설거지 등 귀찮은 일은 이들에게 미뤘다. 네팔인들이 한국음식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얌 씨와 마가르 씨에겐 또 한번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 달을 일하고 두 사람이 받는 월급은 90만 원.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시간당 4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다 받지 못했다. 시얌 씨는 2번, 마가르 씨는 1번 밖에 월급을 받지 못했다. 올해 최저임금이 올라 92만8000원을 받아야 하는데, 작년 이후로는 월급을 받지 못해 법정 최저임금이 오른 것도 몰랐다. 한국인 선원들은 똑같은 일을 하고 한 달에 300만 원을 받았다. 그래도 일이 힘들어 한두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들 일을 그만뒀다.

"네팔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선장이 임금을 주지 않으니까 아이들 학비도 제때 못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달 전에는 부인이 갑자기 맹장수술을 하게 돼서 밀린 월급을 달라고 선장에게 얘기하니까 '내일 준다, 모레 준다' 하면서 지금까지도 안 주고 있어요. 선장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니까 못 믿겠어요." (마가르 씨)

"한국에 올 때 EPS 시험도 치고 정식절차를 다 밟고 노동자로 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한텐 외국인등록증도 없고, 여권도 없어요.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난민이 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시암 씨)

▲ ⓒ이주노조

"월급이나 제때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업비자로 입국한 이들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어업 밖에 없다. 지난 2005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업종 변경을 금하고 있다. 농업이나 어업비자로 입국한 노동자들은 제조업 공장에 취업할 수 없다.

또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3회로 제한하고 있고 변경 사유도 고용주의 고용계약해지 및 갱신 거절, 회사의 휴폐업, 상해.산재 등 회사의 귀책사유가 분명할 때로 국한된다. 노동자가 원해서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경우는 '본인의 근로 계약 갱신 거절'로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나 가능하다.

시얌 씨와 마가르 씨의 앞날이 막막한 것도 이처럼 일방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고용허가제 때문이다. 선장이 순순히 계약해지신고서에 사인을 해줘야 당장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데, 선장은 사인을 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지 않았다. 임금체불이라는 고용주의 귀책사유가 있더라도 노동부 직권으로 사업장 변경을 승인해주려면 다음달 15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돈도 없고, 당장 머물 숙소도 없는 이들이 한 달 동안 일하지 않고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로 회사를 그만두면 사장이 밀린 임금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다.

"우선 밀린 임금을 빨리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일은 힘들어도 월급이 제때 나오는 회사로 옮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의 바람이다.고용허가제의 취업기간인 3년이 끝난 뒤 네팔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재취업이 가능한 3년 동안 한국에 더 머물고 싶은지 묻자 시얌 씨는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네팔에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음지의, 음지의, 농어촌 이주노동자

1996년 여름 일어났던 '페스카마호' 사건. 6명의 중국동포 선원이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 등 11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이 선상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동포 6명은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인은 우리 보고 개라 부르고 마누라 보고는 암캐라 부릅니다.…매일 욕과 몽둥이, 쇠파이프 등으로 맞아 진저리나며, 선원의 인권과 건강을 해쳤습니다. 음식 배불리 못 먹고, 눈칫밥, 하루에 작업 21시간, 흐리멍텅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1996년 10월 1심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 중)

고용허가제 이전에도 산업연수생제도로 수산업협동조합을 통해 외국인 선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선원법'을 적용받아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현재도 20톤 이상의 대형어선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해 들어온다. 시얌 씨와 마가르 씨처럼 20톤 이하의 연근해 어선에서 일하는 선원들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다.

노동부 외국인력정책과 관계자는 "지난해 농축산업으로 1000명, 어업으로 1000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힘든 일에 비해 보수가 적어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농축산업, 어업 쪽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위기를 이유로 제조업으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 규모를 대폭 줄였지만, 농축산업과 어업 규모는 유지하고 있다.

고용허가제로 제조업, 농축산업, 어업,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들어오는데, 본국에서 친 한국어시험 결과에 따라 업종이 나뉜다. 제조업이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건설, 농축산업, 어업은 커트라인이 더 낮다.농어촌의 이주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시얌과 마가르 씨는 하루 평균 14시간을 일했지만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한 법정 최저임금만을 받았다. 시간외수당을 전혀 받지 못했다. 또 휴일도 보장받자 못했다. 노동자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할 것들을 이들은 보장받지 못했다. 농축수산업이 계절과 날씨의 영향을 받는 등 근로시간이 불규칙하다는 이유로 시간외 수당과 휴일, 휴계 적용 등을 예외로 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63조 1,2호 때문이다.

정영섭 이주자노동조합 사무처장은 "농축수산업에 대한 예외조항을 고용주들이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보니 제조업은 사업장 이탈률이 6.9%인데 반해 농어업은 15.9%로 2배 이상이다"고 말했다.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농장의 경우 겨울철 등 농한기에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장을 3번 이상 옮길 경우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데, 농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중엔 사업주의 일방적인 해고로 원치 않게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외 근무 수당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2008년말 기준으로 국내 취업 중인 이주노동자는 70만 명에 이른다. 국내 총 취업자의 3%로 1991년 이후 12배 증가했다. 이들 중 체류자격이 있는 이주노동자는 전체 이주노동자의 73.5%인 51만934명이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8만4377명이다.

이들의 절대 다수인 94.9%(66만83명)가 단순기능직 노동자로 일하며, 교수, 어학강사, 연예인 등 전문기술인력 이주노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체류 자격이 있는 이주노동자 중에는 방문취업제로 취업 중인 재외동포가 절반 가량인 29만8003명, 나머지가 필리핀, 몽골, 스리랑카, 베트남, 태국, 파키스탄, 네팔 등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온 이주노동자(15만6429명)들이다. 현재 한국과 인력도입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송출국가는 15개국이다.

이주노동자들의 88.9%가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고, 나머지는 농축산업, 건설업 등에서 일하고 있다. 1만5000여 명 정도가 농어촌이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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