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페에 관해서는 잘 몰랐는데 이 기사를 통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에서는 적대감이라는 요소가 중요했다. 그리고 민주적 삶의 양식을 가진 개인을 말하는데 그런 삶의 양식은 우리의 지형에서 어떤 것일 수 있을까. 그러나 신생 민주주의라니 ㅠㅠ

 

“민주주의의 절차적 형태를 수립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민주적 시민성, 민주적 정서를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 같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은 특히 그렇다.” 
 

 

 

 

 

   

1985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국내에는 1990년 <사회변혁과 헤게모니>란 제목으로 번역)이란 책으로 서구 좌파학계에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을 촉발시킨 샹탈 무페(66·사진) 영국 웨스트민스터대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가 지닌 불완전성과 한계를 꼬집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펴내는 계간 <아세아연구> 가을호 특집 대담을 통해서다.

무페 교수는 곽준혁 고려대 교수(정치학)와 한 대담에서 “민주적 개인성이 있어야 규칙과 절차가 뒤따라올 수 있다”며 “민주주의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고, 한국 같은 국가들에선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보돼 있어도, 시민들이 그 절차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올바른 절차가 확보된다면 어떤 사회적 대립이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합리주의적 합의 모델에 대한 비판인 셈인데, 민주주의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는 오늘 한국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무페 교수는 대담에서 정치에 대해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현대 사회는 ‘조화로운 전체’가 아닌, 갈등의 요소를 필연적으로 내장한 다원성의 사회인 만큼, 불일치의 여지를 봉쇄한 채 이성적 합의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페 교수가 밝힌 자신의 이론적 목표는 “(정치·사회 구조 안에) 적대감의 여지를 남겨두면서도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페 교수는 이것을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기획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쓰던 1980년대 초와 오늘날의 상황을 비교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페 교수는 말한다. “시민적 권리들은 공격받고 사회적 권리들은 박탈당했다. 1980년대 초반보다 지금 상황이 더 나빠졌다. 퇴보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급진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지난해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를 “특정한 자본주의 조절양식의 위기”로 파악하는 그는 ‘위기 이후’ 눈앞에 나타난 국가 역할의 재조정과 관련해 “두 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시스템을 고쳐 시장을 좀더 규제하는 신자유주의 이전 형태로 상황을 되돌리는 것”이거나 “한층 평등주의적인 조절양식으로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는 상황”이다. 물론 그는 첫 번째 경우가 현실화할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대담자 곽준혁 교수는 “지금의 한국사회는 법적 절차 이외에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기제도 없는 것 같다”며 “특히 최근의 정치상황은 갈등이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에서 불가피하다는 인식,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원칙을 찾기 위한 심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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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니컬러스 로즈 Nikolas Rose

니컬러스 로즈(62)는 현재 영국의 런던 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생명과학, 생명의학, 생명공학과 사회 연구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는 사회학자다. 유대계 후손으로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줄곧 사회학 분야에서 이론적 작업을 펼치고 있다. ‘영국 통치성 학파’의 좌장으로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바탕한 서구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에 진력하여 왔다. 최근에는 생정치, 다시 말해 생명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들이 생산하는 효과와 권력에 이론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통치성 개념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


니컬러스 로즈는 흔히 통치성 연구로 알려진 푸코주의적 사회이론을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가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강의노트에 등장한 ‘통치성’이란 개념은 일종의 이론적 프로그램처럼 받아들여졌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푸코주의적 사회이론 그룹이 만들어진다. 통치성 학파라고 알려진 이론가들은 실은 ‘현재의 역사’라는 연구자 네트워크에 참여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공동작업의 결과는 여러 저작으로 출간됐고, 이는 현재 ‘통치성 연구’라고 불리는 흐름의 바탕을 닦은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즈는 이 그룹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로즈


 

» 니컬러스 로즈
 
는 영국에서 특히 강력했던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속에서 이론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병리학과 정신의학에 관한 푸코 초기 저작에 영향을 받으면서 <심리학 복합체>, <영혼을 통치하기>와 같은 초기 주요 저작을 완성한다. 이는 영국의 정신병리학 기관이던 타비스톡 연구소에서 민속지적 방법을 통해 정신병리학 제도의 권력과 작용을 분석했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로즈의 이론적 관심을 전환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푸코의 통치성에 관련된 글과 그의 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제자들의 논문들이었다.

그는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하고 그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저널 <경제와 사회>를 통해 그 성과를 소개했다. 이 시기 그의 이론적 성과를 묶은 것이 피터 밀러와의 공동 저술 논문을 묶은 <현재를 통치하기>와 그의 신조어인 ‘선진자유주의’란 개념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권력을 분석하고자 시도한 <자유의 권력들>이다. 아마 로즈의 이론적 성과를 집약하고 있을 <자유의 권력들>은 신자유주의라 알려진 정치권력을 분석한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통치성 개념을 권력 분석의 이론적 도구로 다듬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이라는 이론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돌출한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철학의 주권론과 국가론 혹은 경제적 결정을 은폐하는 허구적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권력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탐색 과정에서 출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왕의 목을 베기’라는 푸코의 유명한 표현은 점차 ‘국가의 통치화’에 관한 분석으로 다듬어졌고 그는 이를 자신의 작업을 망라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개념이라 공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통치성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의 작업 역시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에게서 특기할 점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는 통치성 혹은 그가 선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 합리성’을 크게 세 가지의 성분으로 나눈다. 그것은 첫 번째 지식과 언어,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무엇보다 그것이 행사되는 대상을 구성하고 창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디까지가 경제적인 삶의 세계이고 무엇이 사적인 삶의 세계인지는 전연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경제적인 삶이라 할 때, 성장·효율·능률·합리성·진보·성과·이득 같은 것 역시 무엇을 가리키고 그것은 어떻게 판별되고 측정하며 평가해야 할지 전연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무한히 다양한 삶의 세계들은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빚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다양한 지식과 언어를 생산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테크놀로지를 들 수 있다. 권력은 단순히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효과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도구·계산방식 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성장·진보·안녕·안전·교정·개선 같은 다양한 목표를 충족하고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문적 지식들을 생산하고 그에 관련된 인물·기관·제도·자격·보상 같은 것들을 끌어들인다. 세 번째로 권력은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뤄진다. 그것은 자유주의 권력의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권력은 무엇보다 자유를 동원하면서 작동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행복·안전·건강·성공 등 다양한 포부와 욕구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때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타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련된 다양한 규범과 행위의 코드에 관련을 맺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

로즈는 이 세 가지의 성분으로 구성된 권력의 해부학적 도구를 이용하여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역사적 변전을 분석한다. 그는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를 크게 자유주의·복지주의·선진자유주의라는 단계로 나눈다. 자유주의란 18세기에 형성된 초기 서구 자유주의 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된 특징은 권력이 초월적인 원리나 임의적인 의지를 통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즉 그것이 행사되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특히 정치경제학)을 배경으로 신중하고 또한 효과적으로 행사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더불어 권리를 행사하는 법적 주체라는 겉모습에도 실제 삶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개인들을 통치받는 대상 혹은 주체로 만들어낸다.

이런 초기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등장, 개인주의의 만연과 같은 위험에 직면하면서 혹은 로즈가 강조하는 개념을 빌리자면 숱한 ‘문제화’를 통해 복지주의로 변이하게 된다. 복지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사회를 통한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복지주의는 무엇보다 ‘사회’를 발명하고 그를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과 주체를 전연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기술로서 사회보험사회복지를 동원한다. ‘연대’란 개념을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은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의무와 책임을 나눠 가지는 사회적 시민 혹은 국민으로 변형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혹은 로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진 자유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종말’이란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연대라는 이상 속에서 책임과 의무를 나눠 가진 사회적 시민은 이제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특정한 친화성과 정서적 유대에 기반한 ‘공동체’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는 위험의 관리를 둘러싼 테크놀로지 역시 감사, 책무성, 성과 측정과 같은 것으로 바꾼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예는 복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복지로부터 노동 연계 복지로 혹은 능동적 복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런 변화는 자신을 돌보는 개인을 겨냥하고 그들의 책임 부여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 분석을 위한 유용한 이론적 틀로 통치성 개념이 각광을 받으며 1990년대에 서구 학계에 일약 통치성의 이론적 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일어나고 로즈와 동료들의 작업 역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작업은 자유주의 권력에 관한 치밀한 분석에도 권력이란 개념을 특권화하면서 현실에 관한 통치를 분석하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위상을 제거하고 정치를 사회학화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것은 로즈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푸코를 경유하여 정치를 사고하려 했던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동진/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 서동진/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서동진은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푸코적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입장을 통해 한국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편성을 분석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당비의생각>이란 사회비평 무크지의 기획주간을 맡고 있고, 계원디자인예술대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디자인 멜랑콜리아>,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등이 있고, <섹슈얼리티, 성의 정치>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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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안토니오 네그리는 1933년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났다.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68혁명 이전까지 인식론, 철학, 정치학, 국가론 등에 관해 연구하고 책을 썼다. 1959년 이후 자율주의적인 좌파잡지(정치집단)에 참여했다. 1970년대에 일어난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감명을 받으면서 자율주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고, 1970년대 말 이탈리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와중에 그의 대표 저작인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가 출간됐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가타리를 비롯한 탈근대이론가들, 이탈리아 망명자들과 함께 연구와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1997년 마이클 하트와 <제국>의 집필을 끝낸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수감됐다가 2003년 자유의 몸이 됐다.

 

 

 

 

 

 

 

 

   

근대적 주권은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 새로 등장하는 ‘다중’은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소통을 통해 공통성을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주체다. 21세기 변혁운동의 중요과제는 다중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절대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 안토니오 네그리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이클 하트와 공동으로 저술한 <제국>(2000)과 <다중>(2004)의 저자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두 저작은 1970년대 이래로 일관된 연속성을 갖고 전개돼온 그의 오랜 작업의 결실이다. 네그리는 또 하나의 지배 장치로 변질된 공산당과 종래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곧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적 지배체제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체성의 측면에서는 노동자를 축으로 한 ‘계급’ 주체성에서 다양한 주체들의 배치로서의 ‘다중’으로 이행했다고 파악한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네그리는 <제국>에서 국민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이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인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몇 가지 측면에서 부연될 수 있다.

근대적 주권에서 제국적 주권으로의 이행은 우선 영토적인 국경 안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기반으로 구성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들과 그 국가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인 제국주의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제는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초국적인 자본과 그러한 자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국제기구들(유엔·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세계무역기구 등)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지배하는 제국의 시대가 됐다. 따라서 국민국가 시대에는 국경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중요했지만, 제국적 주권하에서는 국경과 외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이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며, 모든 전쟁은 제국 안의 시민전쟁, 즉 내전이 된다.

제국의 시대에도 위계와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정밀하게 강화된다. 위계와 차별은 생물학적 차이나 가시적 차이에 의존하는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더욱 유동적이고 유연한 일상적인 체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잔인해지는 일상적인 실행체제 속에서 관철된다. 제국적 주권은 하나의 중심적인 갈등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갈등들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되는 것이다.

제국의 또다른 특징은 생산의 성격 변화다. 네그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이전과 달리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거대 공장의 노동력이 차지했던 중심적 역할이 쇠퇴하고, 비물질적이고 소통적인 노동력이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 비물질적 노동이란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왜 이러한 변화가 중요할까? 그것은 이런 노동의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곧 비물질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상호작용과 협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이 더 이상 자기 외부의 적대적 타자인 자본에 의해 가치증식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서 제국의 질서에 이미 내재해 있는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제국 권력의 지배가 결코 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네그리의 말로 요약하자면, 제국 권력의 효율성은 폭탄에 의한 파괴에, 화폐에 의한 판결에, 소통에 의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중, 소통하는 자율적 집합주체의 등장

<제국>이 지배에 대한 분석이라면, <다중>은 부제인 ‘제국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의 와중에 등장하는 다중과 그에 따른 사회운동의 방향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multitude)은 무차별적인 무리로서 ‘대중’(mass)이 아니라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소통을 통해 공통성을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다.

네그리는 이전에도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 대신에 주변층이나 실업자, 여성, 학생 등을 포괄하는 사회적 노동자 개념을 사용해 왔다. 다중은 이 개념을 좀더 확장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다중은 군중, 인민, 대중, 국민, 계급 등과 같은 종래의 정치적 주체 개념과 대비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이다. 다중은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종족, 젠더, 성적 지향 및 상이한 노동형태와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과 같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다중은 계급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직접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주민층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의 등장과 함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 방향도 변화한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게릴라 투쟁 모델은 집중제의 마지막 표현이었으며, 네트워크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네그리에 따르면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자율운동에서 나타난 네트워크 투쟁은 이후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널리 확산됐고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대의제를 넘어 절대적 민주주의로

이러한 네그리의 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고로 이어진다. 그는 민주주의가 진전하는 데 가장 주요한 장애를 대의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대의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다중의 역능구성 과정을 통해 기존 권력을 혁신해 나가는 구성권력 전략을 사고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대표를 만들어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표화를 막으면서 다중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조직화해 나가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21세기 변혁운동의 중요과제는 바로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대의제를 파괴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대안구성은 대안 제도를 만드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관련 주체들이 아래로부터 욕망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사회관계를 구성해가는 것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했던 절대적 민주주의다.

네그리의 이런 주장은 많은 쟁점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좌파 운동에 대해 비판점을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는 당 형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네트워크 형식의 운동을 강조하고 대안 세계화 운동, 다양한 소수자 운동과 자율운동의 활성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분석했지만 노동을 구성(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려고 했듯이, 네그리는 제국을 분석하지만 대중을 구성(구성권력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윤수종/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 윤수종/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윤수종은 서울대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자율주의) 사상을 한국에 소개해 오고 있으며, <진보평론> 편집위원으로 있다. 현재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자유의 공간을 찾아서>, <다르게 사는 사람들>(편저)이 있고, 역서로 <분자 혁명>, <기계적 무의식>, <세 가지 생태학>, <카오스모제>, <성혁명>, <제국>, <야만적 별종>, <맑스를 넘어선 맑스>, <정치의 전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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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잔니 바티모 Gianni Vattimo

잔니 바티모는 193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해석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종교와 사상의 문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탈근대적 사고로 연역하면서 해석학의 기초 위에 이른바 ‘약한 사고’의 이론을 주창했고, 이를 통해 대중문화와 인터넷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좌파 정치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1964년부터 2008년까지 토리노대에서 철학과 미학을 가르쳤으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진실에 대한 예술의 주장>, <기독교 이후>, <허무주의와 해방>, <해석학적 공산주의> 같은 책들을 썼고, 국내에 <투명한 사회>와 <근대성의 종말>이 번역돼 있다.

 

 

 




바티모는 ‘약한 사고’의 개념을 빌려 형이상학적 진실과 이별하는 우리 시대에서 해석이 지니는 실천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모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실들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해석의 실천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 잔니 바티모
 

이탈리아의 철학자 잔니 바티모는 탈근대성이라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약한 사고’라는 사유와 실천 형식을 마련하는 것으로 우리 시대의 철학의 역할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바티모가 말하는 탈근대성은 근대성을 폐기하거나 이어받는다기보다, 심화하고 비틀고 치유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한층 복잡한 사고를 가리킨다. 바티모는 ‘약한 사고’의 개념을 빌려 형이상학적 진실과 이별하는 우리 시대에 해석이 지니는 실천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중문화와 매스컴, 인터넷이 날로 번창하는 현대 세계는 무수한 입장들이 가로지르는 네트워크로 짜인다. 그런 상황은 새로운 좌파의 철학과 정치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모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실들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해석의 실천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티모는 탈근대성을 다원주의로 파악한다. 다원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할 때 발생한다. 반면 절대적인 진리는 민주주의를 저지한다. 절대 진리가 있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와 이별하는 시대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한껏 높이는 시대다. 바티모에 의하면, 진리가 단단하고 영속적인 객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존재론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진리를 재해석과 재맥락화, 재서술에 의해 새로 구성되는 어떤 것으로 선별하고 채택해야 하는 해석학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철학은 세계를 묘사하기보다 해석해야 한다. 탈근대적 해체가 통일된 역사서술에 종말을 고한다면, 그를 위한 철학은 ‘차이의 모험’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존재를 사건으로 인식함으로써 진실의 개념에 해석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진실은 없고 해석만이 있으며, 따라서 진실의 가치는 해석들의 차이들에 따라 결정된다. 바로 여기서 해석하는 주체의 자리가 중요하게 떠오른다. 진실이나 존재는 주체의 해석 행위에 따라 가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티칸과 같은 종교 기관이 의도적인 설교를 하고, 미국과 같은 정치적 제국이 자본주의를 선전하며, <엔비시>(NBC)나 <시엔엔>(CNN) 같은 텔레비전 네트워크가 선택된 뉴스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정의한다면, 철학은 진실이란 단지 해석들의 게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철학은 논증적인 담론보다는 일종의 교화하는 담론이며, 지식의 발전과 진보보다는 인류의 교화를 향한 담론이다. 철학자의 임무는 영원을 이해하도록 인류를 이끄는 플라톤 식의 어젠다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보다 인류가 역사를 향해, 역사와 함께 나아가도록 만든다. ‘약한 사고’는 결코 사고의 약함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고는 더는 논증적이지 않고 교화적이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약한 사고’에 근거한 철학은 주장이 아니라 호소이며 선언이다. 주장은 응답을 기대하지 않거나 거기에 대처하려 하는 반면, 호소와 선언은 응답을 기대하며 그 응답과 함께 커나간다.

바티모는 오늘날 정치와 철학이 이해하고 구성해야 할 진실의 유일한 지평은 사회적·문화적 대화의 인식론적 조건들을 재검토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진실이라는 주제를 사회적 분배와 참여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일반 대중이 가장 잘 이해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진실과의 이별과 그에 따른 ‘약한 사고’는 민주주의의 시작이며 토대다.

이런 식의 ‘약한 사고’를 펼치는 바티모는 ‘좌파에 대한 좌파의 철학자’라고 불릴 만하다. 그것은 여전히 절대적 토대를 전제로 하는 좌파에 비해 바티모는 ‘좌파 철학’을 토대의 붕괴와 재구성을 통해 추구하기 때문이다. 좌파의 정치는 무조건적인 도덕적 의무, 보편타당성의 주장, 초월적인 합리적 전제들을 회의하고 비틀고 재구성함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철학은 좌파 정치에서 부수적이지 않다. 바티모와 같은 좌파에게 철학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사회정치적 주도권을 지닌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약해진 마르크스’를 주창하면서 ‘약한 사고’를 정치적 차원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바티모는 68혁명에 참가한 학생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수감된 그의 학생들이 보낸 편지에서 바티모는 형이상학적 주체를 주장하는 폭력적 논리를 발견하고, 절대 원칙을 생산하는 철학은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했다. 그의 급진성은 원칙을 세우기보다는 회의하고 비판하며 끊임없는 재사고의 대상으로 올리면서 이루어졌다. 그런 입장에서 바티모는 1970년대 이래 좌파 정치에 관여했고, 바티모를 위시한 철학자들이 급진적이지 못하다는 붉은 여단의 압력을 폭력으로 간주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 이탈리아 정치에서 혁명과 같았던 ‘탄젠토폴리’(뇌물도시) 사건에서 정치적 열의를 보였다. 그 뒤 많은 지식인들이 관심을 접은 상황에서 바티모는 언론 기고를 통해 논쟁을 지속시켰고, 그와 함께 베를루스코니 체제를 비판했다.

바티모는 1999년부터 5년 동안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인권과 문화, 교육, 매체와 같은 분야에서 활동했다. 바티모의 유럽의회 활동은 다원주의의 확립으로 두드러진다. 유럽연합 헌법에 ‘기독교적 가치’라는 용어를 삽입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 바티모는 유럽은 다원주의적이어야 하며, 단일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유럽의 기독교적 전통과 가치를 부정하고 망각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기독교적 가치는 세속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자신을 포기하는 방식의 사랑이라는 가장 기독교적인 개념에 토대를 둔다. 그런 면에서 세속주의는 다양한 종교들이 제한 없이 스스로의 신앙을 추구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통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교적’ 힘은 세속주의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제공해준다. 유럽연합 헌법에 기독교 개념을 넣으려는 바티칸의 압력은 바티모의 눈에 유럽의 다원성을 좀먹는 교조적 형이상학의 발현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세속주의로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종교성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바티모가 유럽에서 본 것은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의 꿈이다. 유럽연합은 초국가적 국가가 점령이나 침공, 전쟁이 아닌,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해 구성된 최초의 경우다. 바티모는 유럽연합을 진지한 정치적 진보의 표상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자연스러운 기반이 아니라 다양성들의 자발적인 기초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단 하나의 언어와 종교, 인종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종교, 인종에 의해 구성되었기에, 무한하게 뻗어나가고 적용될 수 있을 공동체라고 바티모는 굳게 믿는다.

바티모의 좌파적 사고와 정치 실천은 사회주의가 인류의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회적 가치와 권력의 민주화가 펼쳐지는 우리의 집단적 삶을 국가적으로 조절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는 ‘투명한’ 민주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투명한 민주 사회란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공통의 결속된 원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공간을 남기는 사회다. ‘불투명한’ 사회에서 폭력은 형이상학적 구조와 그것이 빚어내는 궁극적 진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반면, 진정한 인간 존엄성은 기존의 자연스러운 형이상학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비틀고 재고하는 개인들의 자유에서 나온다.

이제 보편적 전통이 와해되고 절대적 진실이 붕괴하는 세속화의 근대 역사 끝자락에 서 있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이러하다. 우리에게 형이상학적 구조와 궁극적 진리는 무엇인가. 그들에 맞서 다양한 해석과 의미의 소통을 이루는 공간은 어떻게 건설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에 대한 답과 함께 새로운 체제의 구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나름대로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약한 사고’는 그를 위한 강력하고 근본적인 사유와 실천의 형식이다. 박상진/부산외대 교수




 




 

» 박상진/부산외대 교수
 
박상진은 한국외대에서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학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와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열림의 이론과 실제>, <에코 기호학 비판> 등의 저서와 <근대성의 종말>, <대중문학론>,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신곡> 등의 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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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재이다.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3)세계시민성과 주체성 (下)  

ㆍ경쟁주의 벗고 전인류와 ‘공통·기쁨의 연대’를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마지막 편지를 드릴 때가 되었습니다. 처음 대담을 시작할 때는 한 나라의 테두리 내에서 공화국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였으나, 이제 어떻게 하면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시민적 공동체를 같이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대담을 마무리짓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세계화의 시대로서 더 이상 개별 국가가 다른 국가들로부터 떨어져 자족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세계가 온전하지 않고서는 한 국가가 온전할 수 없고, 전 인류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우리들 각자가 평안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까닭에,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진지하게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전체 세계와 인류의 운명을 더불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시민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기반한 경쟁주의에서 벗어나 인류 공동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공동선을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 담합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허상에 사로잡힌 자유무역협정(FTA)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경제, 문화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전 지구적 조세제도(global tax system)가 필요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코스모폴리턴, 곧 ‘세계의 시민’(kosmou polites)이라는 말은 벌써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특정한 국가의 시민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개념입니다. 기원전 7세기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조국이나 고향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잘 살 수 있는 곳이 고향이요, 조국이라는 관념이 처음 싹텄고,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면 철학자들은 참된 국가란 여러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이 전 세계에 걸쳐 서로 만날 수 있는 보편적 공동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기독교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오늘날까지 인간의 초국가적이고 전지구적인 공공적 존재방식을 뜻하는 말로 굳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세계시민성이 수 천년 전부터 당연하고 자명한 이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민들이 아무리 세계시민의 이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세계라는 것을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참된 세계는 전체이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아직 제한된 부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시민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인류는 세계시민이 아니라 특정한 국가에 얽매인 시민의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세계시민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이상과 관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로서 주어진 것은 우리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길어야 이틀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떠나 전 지구 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인의 숫자가 약 600만명이라 하는데, 이 숫자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0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에 상응하는 숫자의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해 사는 것을 우리 또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나라 속에 다른 나라가 존재하고 외부 속에 내부가 있어서, 자기와 타자가 더 이상 배타적으로 구별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주체성은 지배 아닌 남과 더불어 아파하는 데서 시작

대담 내내 강조했듯이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이 오직 전체와 합일하는 것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 시대에 개별 국가의 주체성이나 개인의 주체성 역시 오직 전체 세계와 인류 공동체 속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전체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주 내가 전체의 지배자가 되는 것으로 오해되지만, 나의 정신이 내 몸 전체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몸 전체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내가 내 몸에 속한 모든 부분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내가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주체가 되는 것은 내가 모든 동료 시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의 주체가 된다는 것 역시 전체 세계와 인류의 아픔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주체성이란 남을 대상적으로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아파하는 고통의 연대에서 시작됩니다. 전체 세계, 인류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모두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까닭에 각자가 모두에게 좋은 것을 자기의 좋은 것으로 욕구하면서, 만남의 공동체를 확장해 나가려는 능동적인 노력을 경주할 때 바로 그런 활동 속에서 세계시민적 주체성도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이런 세계시민적 주체성이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절박한 현실적 과제로서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여전히 우리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껍질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국가에 의해 지양되어도 가족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가족이기주의가 공화국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처럼, 전체 세계와 인류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개방된 우리 시대에도 국가가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체 세계와 인류의 공공선을 외면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주의·민족주의에 갇혀 세계시민의 공동체적 역할 외면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조화로운 인류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바로 경쟁주의입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모든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쟁주의이고 폭력주의입니다. 모든 국가와 민족은 다른 국가와 민족을 자기 밖에 전제합니다. 그리고 다른 국가 및 민족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국가의 틀 속에서 사는 동안,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하나의 자명한 윤리적 태도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국가 내부의 시민들 사이에서는 경쟁에도 규칙이 있어서 나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는 그런 규칙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거기서는 힘이 곧 선이고 정의였던 것입니다. 이런 윤리는 아직 인류가 전체 세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개별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국가 모든 인류가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은 세계의 일원이 된 지금 오로지 싸워 이기는 것만이 선이라 생각하고 경쟁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의미의 경쟁이 아니라 모두를 멸망으로 이끄는 내분이 될 뿐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진단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의 개별 장기들이 자기만 혼자 양분을 독차지하겠다고 사투를 벌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경쟁원리는 인류라는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암인 것이지요.

‘힘이 곧 선’이라는 경쟁원리 깨고‘전지구적 조세체계’ 도입해야

근대에 들어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인류는 이 뻔한 이치를 온갖 궤변으로 호도하면서 자기 이익을 탐욕스럽게 추구해왔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궤변이 자본주의의 전도사들이 외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일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오로지 자기 이익을 좇아 경쟁하면 전체 사회가 저절로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돌보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장주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보기 좋게 암초에 부딪힌 지금도, 우리는 시장이 인간의 악을 선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며 개인의 탐욕이 인류 전체의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국중심주의나 자민족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는 이 어려운 세계 경제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없으니 고작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것을 통해 다른 나라와 담합하여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경쟁에서 이겨볼까 궁리할 뿐입니다. 하지만 몇 나라가 담합을 하든,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모두의 번영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각자가 모두에게 좋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불어 노력하는 만큼 전체가 좋아질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전체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염려한다면, 경쟁이 우리를 낙원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우치고 그런 윤리적 원칙 위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제도 그리고 국가를 쇄신해 나가야 합니다. 먼저 개인의 삶에서 우리는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개인의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쁜 일이듯이, 한 개인이 남보다 까닭 없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역시 심각한 악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자본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기업구성원들의 자기실현을 위한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어도 우리 시대에 다국적화되어가는 기업은 전 지구적 착취기구가 아니라 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기능하는 기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별 국가 역시 전체 인류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기의 주권을 스스로 제한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궤변…시장주의는 인류 번영 못 이뤄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초국가적 상상력은 상호이익의 극대화라는 망상에 기초한 자유무역협정 같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 지구적 조세 체계(global tax system)입니다. 함석헌이 말했듯이 모든 국가가 ‘기업국가’가 되어버린 오늘날 국가 스스로 자기 이익 추구를 당장 자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남에게 얻은 이익의 일부를 남을 위해 내놓는 것을 제도화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한 국가 내에서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시민과 지역 사이의 불균형을 시정하듯이, 전 지구적 조세제도가 국가 사이의 경제, 문화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생각하면 국가주의는 고사하고 가족주의조차 극복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수 천년 전 우리 조상들의 건국 이상이 홍익인간, 곧 널리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데서 시작되며, 횔덜린이 노래했듯이 위험이 큰 곳에 구원도 따라 자라는 법이니, 시대의 어둠이 깊은 만큼 또한 다가올 빛도 밝으리란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리고 더불어 성원해주신 독자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저의 어리석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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