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재이다.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13)세계시민성과 주체성 (下)  

ㆍ경쟁주의 벗고 전인류와 ‘공통·기쁨의 연대’를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마지막 편지를 드릴 때가 되었습니다. 처음 대담을 시작할 때는 한 나라의 테두리 내에서 공화국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였으나, 이제 어떻게 하면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시민적 공동체를 같이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대담을 마무리짓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세계화의 시대로서 더 이상 개별 국가가 다른 국가들로부터 떨어져 자족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세계가 온전하지 않고서는 한 국가가 온전할 수 없고, 전 인류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우리들 각자가 평안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까닭에,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진지하게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전체 세계와 인류의 운명을 더불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시민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기반한 경쟁주의에서 벗어나 인류 공동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공동선을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 담합해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허상에 사로잡힌 자유무역협정(FTA)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경제, 문화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전 지구적 조세제도(global tax system)가 필요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코스모폴리턴, 곧 ‘세계의 시민’(kosmou polites)이라는 말은 벌써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특정한 국가의 시민과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개념입니다. 기원전 7세기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폴리스를 건설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조국이나 고향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잘 살 수 있는 곳이 고향이요, 조국이라는 관념이 처음 싹텄고,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이르면 철학자들은 참된 국가란 여러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이 전 세계에 걸쳐 서로 만날 수 있는 보편적 공동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기독교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오늘날까지 인간의 초국가적이고 전지구적인 공공적 존재방식을 뜻하는 말로 굳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세계시민성이 수 천년 전부터 당연하고 자명한 이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민들이 아무리 세계시민의 이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직 세계라는 것을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참된 세계는 전체이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아직 제한된 부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시민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인류는 세계시민이 아니라 특정한 국가에 얽매인 시민의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세계시민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이상과 관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로서 주어진 것은 우리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길어야 이틀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떠나 전 지구 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인의 숫자가 약 600만명이라 하는데, 이 숫자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0분의 1에 육박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에 상응하는 숫자의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이주해 사는 것을 우리 또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나라 속에 다른 나라가 존재하고 외부 속에 내부가 있어서, 자기와 타자가 더 이상 배타적으로 구별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주체성은 지배 아닌 남과 더불어 아파하는 데서 시작

대담 내내 강조했듯이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이 오직 전체와 합일하는 것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 시대에 개별 국가의 주체성이나 개인의 주체성 역시 오직 전체 세계와 인류 공동체 속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전체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주 내가 전체의 지배자가 되는 것으로 오해되지만, 나의 정신이 내 몸 전체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몸 전체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내가 내 몸에 속한 모든 부분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내가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주체가 되는 것은 내가 모든 동료 시민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의 주체가 된다는 것 역시 전체 세계와 인류의 아픔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주체성이란 남을 대상적으로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아파하는 고통의 연대에서 시작됩니다. 전체 세계, 인류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모두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 까닭에 각자가 모두에게 좋은 것을 자기의 좋은 것으로 욕구하면서, 만남의 공동체를 확장해 나가려는 능동적인 노력을 경주할 때 바로 그런 활동 속에서 세계시민적 주체성도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이런 세계시민적 주체성이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절박한 현실적 과제로서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여전히 우리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껍질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국가에 의해 지양되어도 가족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가족이기주의가 공화국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처럼, 전체 세계와 인류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개방된 우리 시대에도 국가가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전체 세계와 인류의 공공선을 외면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주의·민족주의에 갇혀 세계시민의 공동체적 역할 외면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조화로운 인류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바로 경쟁주의입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모든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쟁주의이고 폭력주의입니다. 모든 국가와 민족은 다른 국가와 민족을 자기 밖에 전제합니다. 그리고 다른 국가 및 민족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국가의 틀 속에서 사는 동안, 남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하나의 자명한 윤리적 태도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국가 내부의 시민들 사이에서는 경쟁에도 규칙이 있어서 나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국가들 사이의 경쟁에는 그런 규칙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거기서는 힘이 곧 선이고 정의였던 것입니다. 이런 윤리는 아직 인류가 전체 세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개별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국가 모든 인류가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은 세계의 일원이 된 지금 오로지 싸워 이기는 것만이 선이라 생각하고 경쟁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의미의 경쟁이 아니라 모두를 멸망으로 이끄는 내분이 될 뿐이라는 것이 함석헌의 진단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의 개별 장기들이 자기만 혼자 양분을 독차지하겠다고 사투를 벌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경쟁원리는 인류라는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암인 것이지요.

‘힘이 곧 선’이라는 경쟁원리 깨고‘전지구적 조세체계’ 도입해야

근대에 들어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인류는 이 뻔한 이치를 온갖 궤변으로 호도하면서 자기 이익을 탐욕스럽게 추구해왔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궤변이 자본주의의 전도사들이 외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일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개인이 오로지 자기 이익을 좇아 경쟁하면 전체 사회가 저절로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돌보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장주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보기 좋게 암초에 부딪힌 지금도, 우리는 시장이 인간의 악을 선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며 개인의 탐욕이 인류 전체의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국중심주의나 자민족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는 이 어려운 세계 경제 환경을 헤쳐 나갈 수 없으니 고작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것을 통해 다른 나라와 담합하여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경쟁에서 이겨볼까 궁리할 뿐입니다. 하지만 몇 나라가 담합을 하든,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모두의 번영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각자가 모두에게 좋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불어 노력하는 만큼 전체가 좋아질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전체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염려한다면, 경쟁이 우리를 낙원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우치고 그런 윤리적 원칙 위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제도 그리고 국가를 쇄신해 나가야 합니다. 먼저 개인의 삶에서 우리는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개인의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쁜 일이듯이, 한 개인이 남보다 까닭 없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역시 심각한 악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업 역시 자본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기업구성원들의 자기실현을 위한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어도 우리 시대에 다국적화되어가는 기업은 전 지구적 착취기구가 아니라 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기능하는 기구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별 국가 역시 전체 인류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기의 주권을 스스로 제한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궤변…시장주의는 인류 번영 못 이뤄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초국가적 상상력은 상호이익의 극대화라는 망상에 기초한 자유무역협정 같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 지구적 조세 체계(global tax system)입니다. 함석헌이 말했듯이 모든 국가가 ‘기업국가’가 되어버린 오늘날 국가 스스로 자기 이익 추구를 당장 자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남에게 얻은 이익의 일부를 남을 위해 내놓는 것을 제도화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한 국가 내에서 조세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시민과 지역 사이의 불균형을 시정하듯이, 전 지구적 조세제도가 국가 사이의 경제, 문화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생각하면 국가주의는 고사하고 가족주의조차 극복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몽상에 지나지 않음을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수 천년 전 우리 조상들의 건국 이상이 홍익인간, 곧 널리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데서 시작되며, 횔덜린이 노래했듯이 위험이 큰 곳에 구원도 따라 자라는 법이니, 시대의 어둠이 깊은 만큼 또한 다가올 빛도 밝으리란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리고 더불어 성원해주신 독자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저의 어리석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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