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에 오래전에 실린 글인데 관심있는 주제다. 선동, 프로파간다, 사기극 말이다.  

민주정치, 선동(선전·홍보), 사기극  

[철학으로 세상읽기] 플라톤의 ‘배의 비유’ 

                                                  우기동 경희대 교수 webmaster@mediaus.co.kr

우리 사회의 역사적 현실

역사적으로 볼 때, 1960~70년대 우리의 희망은 ‘잘살아 보세’였을 것이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노랫말의 구호는 한국전쟁 이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 땅의 민중들에게 유일무이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잘살아 보기 위해서는 ‘하면 된다’라는 세뇌된 신념을 갖추어야 했다. 그리하여 개발독재에 의한 원시적 자본 축적은 제법 거대한 독점 자본을 탄생시키면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이른바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참한 ‘인간시장’의 젊은 시절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잘산다는 것을 경제적 요인과 물질적 가치로만 인식하고 평가하는 사회적 통념이 지배적인 사회의식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이기적 인간관계가 전면화하여 ‘함께 나누는 정(情)’과 같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내재적 가치가 실종되고, 급기야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는 해체되어 계급사회로 전이되고, 결국 인간 소외 문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970년대 초 개발독재 권력과 자본, 이들의 고급 정보에 밀착된 상층 기득권층은 부동산 개발을 통한 한탕주의 의식을 갖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의식이 서서히 중류층에까지 파급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는 건전한 노동 의식마저 상실하였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를 확대 심화시켰다. 이때부터 시작된 부동산 투기는 서서히 전국토를 투기시장으로 바꾸고, 전 국민을 투기꾼 내지 잠재적 투기꾼으로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의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고, 우리의 사회적 의식은 극도로 왜곡되었다. 이러한 투기 의식 만연의 결과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전 국민을 정신적 패닉 상태로 몰아넣기도 하였다. 홍역을 치렀음에도 낫지 않고 어떠한 처방도 듣지 않는 만성적 집단 양심 불량증이 되었다.

투기와 물신주의 앞에서 공동체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린 때, 먹고살 만하지만 비교 욕망의 망상으로 건강한 욕망을 망각한 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잘살아 보세’의 희망을 현실로 성취하여 우상이 된 기업인 장사꾼을 우리는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어떤 종류의 도덕성도 문제되지 않았다. 거부(巨富)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결코 과거를 묻지 않았다. ‘탐욕’ 수준에 가까운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이념이 문제인 듯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수와 진보도, 좌파와 우파도, 이념도, 사상도, 철학도, 그 어떤 것의 문제도 아니다. 좋게 보아 이념이라는 당의정(糖衣錠)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다. 오로지 ‘상식’과 ‘몰상식’의 차이밖에 없다. 양아치 수준의 ‘몰상식’이 권력을 장악하여, 어떤 경우에는 이념의 탈을 쓰고, 어떤 경우에는 종교의 가면을 쓰고, 어떤 경우에는 자유민주주의의 구호를 내세우고, 또 어떤 경우에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구실로 삼고, 가히 몰상식의 가면 무도회장이다. 물론 총론격인 안무 연출은 당연히 ‘경제 살리기’가 맡고 있다.

요컨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교묘하게 내세우고 이용하면서 선동하는 현실 정치 앞에서 우리는 인간 본래의 보편적 가치, 인권, 자유, 평등, 정의 등 민주주의의 정신과 가치를 어느덧 망각하고 있다. 국가권력과 자본이 결합하여 왜곡된 희망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시점에 민주주의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어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demokratia는 원래 민중(demos)의 지배(kratia)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한 사람이 지배하는 군주정이나 소수가 지배하는 귀족정과는 달리 민중 전체가 지배하는 국가 형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모든 정치적 행위와 권력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한 듯이 보인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정치적 행위는 오히려 국민들을 ‘통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국가를 실질적으로 누가 지배하느냐라는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가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자.

“우리의 정체(政體) 권력이 소수의 수중이 아닌 전체 민중의 손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개인적 분쟁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한 사람을 공적 책임을 갖는 지위로 등용하고자 할 때는 그가 어느 특정 계급의 구성원인가를 따지지 않고, 그가 소유한 실질적 능력에 따라 결정한다. 그가 국가에 기여하는 한, 어느 누구도 빈곤 때문에 정치적 망각 속에 묻어 두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국가의 공공 업무에도 관심을 가진다. 자신의 일에만 주로 몰두해 있는 사람들조차 일반 정치를 소상히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특징이다. 우리는 정치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아테네에서 전혀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과 행동에 어떠한 불일치점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아테네인들은 직접 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정책을 올바른 토론에 회부한다. 가장 나쁜 일은 결과를 올바로 토의하기도 전에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직접 통치하는 민주주의, 즉 참여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민중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은 민회, 평의회, 법정 등 여러 제도로 보장되어 있었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는 노예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수의 노예들에 의해 산출된 잉여 생산물 때문에 자유민의 여가를 창출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플라톤은 우민정치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적 정신을 부정한 것일까? 그의 《국가》에 나타나 있는 철인정치와 이상국가론을 살펴보자.

민주정치의 문제점과 철인정치


   
  ▲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플라톤은 부정적인 정체와 긍정적인 정체를 다루면서, 부정적인 정체로 명예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 참주정치 등을 언급한다. 이 네 가지 정체에 대한 분석은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 안에서 발견되는 현실적 통치 유형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민주정치에 대해 부정적이었을까? ‘배의 비유’를 통해 당시 아테네의 정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배의 비유’에서 선주, 선원, 키의 조종 등의 비유를 들고 있다. 여기서 선주는 민주 정체의 주인인 민중, 선원은 민중선동가인 현실정치인, 키의 조종은 나라의 경영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당시 아테네의 민주 정체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의 민주 정체에 대한 비판은 ‘민중’보다 ‘민중선동가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민중을 상징하는 선주를 ‘덩치나 힘에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지만, 약간 귀가 멀고 눈도 마찬가지로 근시인데다 항해와 관련한 다른 것들에 대해 아는 것도 고만하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선원들(민중선동가들, 현실정치인)은 ‘점잖은 선주를 최면제나 술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한 다음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배를 지휘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선원들을 항해에서 결정적으로 위험한 존재들로 비판한다.

한편 이 비유에서 항해술이나 조타술에 능한 사람은 참된 철학자들을 가리키는데, 플라톤은 정치를 일종의 기술, 즉 치술(治術)로 간주한다. 이런 기술은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철인정치의 이념에서 지식의 중요성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배의 비유에서 조타술을 배운 적도 없으면서 날뛰는 선원들에 의해 지배된 배는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의미한 것이고, 참된 키잡이(철인정치)에 의해 인도되는 배는 ‘이상국가’의 훌륭한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전체 철학의 틀 속에서 보면, 플라톤은 이데아 이론에 근거하여 정의의 이데아를 국가 안에서 실현하는 이상국가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데아를 아는 사람만이 이데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은 이데아를 인식하는 철학자들이다. 그리고 참된 키잡이로서의 조타술과 항해술이라는 치술이 지식과 경험의 형태로 부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이상국가의 모형이 성립하게 된다.

결국 플라톤의 철인정치에 의한 이상국가의 근저에 깔려 있는 정신은 ‘사회적 정의(좋음, dikaiosynē)는 올바른 사람의 내면적 덕(훌륭함, anthrōpeia aretē)으로 산출한다’는 언명이리라.

민주주의와 민중의 행복한 삶

앞서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당시의 민주정치를 부정적으로 본 이유는 민중선동가에 의해 움직이는 현실 정치를 매우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철인정치와 이상국가는 현실 정치의 풍토와 그런 풍토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 형태에 대한 대안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내면의 덕을 갖춘 정의로운 철학자(가장 뛰어난 현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상국가는 정의로운 사회이다. 결국 철인정치의 이상국가에서의 정의는 ‘배의 비유’에서 보듯, 선량한 선주(민중)의 행복한 삶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는 심화되고,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진 자들(물론 이들은 비리 백화점의 주인들이다)이 더욱 살기 좋아지는 세상을 목도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물질의 가치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불확실한 미래의 희망으로 선동하는 현실 정치를 일상으로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경쟁을 통해 소수의 승리자만을 위한 정책이 난무하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떡볶이집의 대통령, 고추 따는 대통령, 방송신문과 지하철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정부 정책의 선전 홍보에 우리의 귀는 멀어지고 눈은 어두워지고 있다. 플라톤이 우려했던 우민정치가 거의 현실에 가깝다. 사기극에 놀아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망각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인권, 자유, 평등, 정의가 실종되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는 선동 정치의 대안으로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정치와 이상국가에서 배울 것이 있다. 선동정치에 좌우되는 절차상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의가 살아 숨쉬고 민중의 삶이 행복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그 출발은 선동, 선전, 홍보, 사기에 놀아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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