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의 기획 기사이다. 홍기빈의 글이다.
"바보야! 자본주의는 똑같지 않아"
20세기 끝 무렵, 여러 선진국의 자본주의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다양한 자본주의의 변종들’은 최근 10년간 정치경제학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토론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발견은 ‘새롭지만 낡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라마다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1960년대부터 누누이 지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오래된 발견’이 최근에 다시 떠오르게 된 사정의 배후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시대적 도전, 이에 대한 서구 온건 좌파들의 고민과 대응이라는 맥락이 깔려 있다. 이러한 사정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원래 다양했다
자본주의가 각 나라에서 다양한 제도적 형태를 띤다는 것은 19세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자본주의는 모든 나라의 정치·경제 질서가 엇비슷하거나 엄격하게 획일적으로 통일된 모습이기를 요구했다. 당시의 국제 규범은 모든 국가의 정부가 자국 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입헌국가’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다. 국가의 모든 재정은 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고, 이를 교란할 수 있는 ‘군주’의 전횡은 입헌주의에 의거해서 원칙적으로 차단되었다. 또한 각국이 자유무역과 엄격한 국제 금본위제를 수용하면서 보호관세든 재정 및 금융 정책이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19세기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 |
 |
|
|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을 연 미국 레이건 전 대통령(왼쪽)과 영국의 대처 전 총리(오른쪽). |
이렇게 획일적인 정치·경제 시스템을 각국에 강요하는 19세기의 지구적 질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나라마다 복잡한 사회적·정치적 변동에 휘말리게 되면서 엄중한 도전에 처한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에는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 대변동 속에서 무너지게 된다. 이에 따라 각국은 자기 나라의 실정과 사회적·정치적 조건에 맞는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성된 브레튼우즈체제의 세계경제 질서는 이러한 일국적 자유를 적극 지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1950~1960년대 초, 일본과 유럽 등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사 관계, 은행 및 금융 체제, 산업 정책과 기업 지배 등은 나라마다 달랐다. 이를 관찰해서 기록한 최초의 학문적 업적은 숀필드의 <현대 자본주의>(1965)일 것이다. 숀필드는 유럽 6개 나라의 사례를 통해 국가가 경제계획이나 기업 통제 등 경제에 개입하는 방식이 보여주는 다양한 양상을 자세히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찰스 린블럼은 고전적 저서인 <정치와 시장>(1977)에서 나라마다 자본주의 조절 및 운영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과정을 이론화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국제 정치경제학계에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은 ‘확립된’ 사실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최근 다시 문제가 된 이유를 살펴보자. 그 주요한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도전이다.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지구적 자본의 흐름과 이에 발맞춘 최소국가론(외부의 침범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치안·방범·국방 부문 이외의 사회·정치·경제 영역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 탈규제, 시장 자유화, 복지국가의 종언 등은 다양한 자본주의가 공존했던 세계경제 질서의 토대를 허물었다.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부인한 신자유주의
무엇보다 금융시장이 국제화되어 자본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마음껏 드나들게 되면서 ‘국가 관리하에 잘 규제되는 금융체제’란 옛이야기로 전락했다.
이렇게 지구화된 금융자본은 모든 나라의 금융이 오직 높은 수익성 하나만을 목표로 흐르게 강제했는데, 이에 따라 노사협의·사회복지·교육 등 제반 사회제도에 걸친 국가적 개입과 조절의 능력 또한 근본적으로 잠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해 1970년대 초, 이른바 ‘케인스주의 국가의 종언’이 선언된 이후 ‘시장 지상주의’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맹렬하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에 이르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새로운 합의가 나타난다.
“이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란 없다.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경제 제도인 시장의 자유를 극도로 허용하는 ‘우월한 자본주의’와 이를 억누르고 왜곡하는 ‘열등한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후자는 하루빨리 지금까지의 과오를 청산하고 자유시장을 성립시킬 수 있는 대규모의 제도적 구조조정을 감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를 정부와 국가가 추진하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 국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구화의 물결을 전폭적으로 끌어안도록 개방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이 지구화에 실린 시장의 자연적 힘이 해결해줄 것이다. 요컨대 지구화를 통해서 모든 나라가 ‘하나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one-best way)’로 수렴하게 될 것이며 또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하나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이란 영국이나 미국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경제 영역에 강력히 개입해왔음에도 이런 과거를 은근슬쩍 지워버렸다. 국제 학계마저 미국이 태초부터 자유시장이 지배해온 교과서적 자본주의 국가였던 것처럼 간주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라는 주제가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엔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워 마구 밀고 들어오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짙게 깔려 있다.
| |
 |
|
|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모니터로 시황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뉴욕 펀드 매니저. |
제도는 ‘잘라서 붙일’ 수 없다
‘자본주의 다양성’ 논의를 부활시킨 효시는 미셸 알베르의 저작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이다. 알베르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단기 성과에 매몰되어 오히려 사회적·경제적 효율성을 해친다면서 독일 ‘라인강 자본주의’(노동자·자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의 제도적 조절을 운영원리로 삼는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경제 시스템)의 장점을 부각시켜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선구적 업적에 힘입어 ‘자본주의 다양성’이란 주제는 다시 무수한 학술 논문과 저서의 주제로 떠오르게 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프랑스판 제도주의라 할 조절이론 학파의 브와이에 등이 있다. 이들은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기업지배구조·산업정책·금융시스템·노사관계 등 각각의 영역에서 얼마나 다양한 조절 방식이 여전히 존재하며 또 여전히 생명력과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골몰했다. 유럽 사회경제학자 홀과 소스키스는 <자본주의의 변종들>에서 각 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시장에 내맡겨진 경우’와 ‘국가 중심의 조정에 무게를 두는 경우’로 크게 나눈다. 또한 특정한 제도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경제의 다른 제도들과 보완하는 관계이므로, 특정한 제도 하나만을 가지고 효율성을 따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제도든 해당 국가의 전체 사회경제 시스템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후의 논객들은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더욱 공격적으로 개진하게 된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기 전의) 일본이나 다른 유럽 국가의 경우를 보면, 경제성장과 효율성 측면에서 ‘국가 중심의 조정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시장에 내맡겨진 경우’에 못지않으며 오히려 우월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지구화의 물결이 닥쳐온다고 해도 각국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심화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국의 ‘경쟁력 있는’ 제도에 더욱 의존하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이런 논리들은 경제성장과 ‘효율성 높이기’라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시장근본주의엔 빠지지 않으려는, 서구의 온건 좌파들에게 중요한 정책적·이념적 영감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미국식 자본주의야말로 금과옥조나 되는 양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더 많이 도입되는 것이 균형을 되찾는 면에서나 실질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점에 있어서나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에도 한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결점은, 다양한 ‘자본주의의 변종’들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회적·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 극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모델이 가지고 있는 여러 좋은 제도와 관행을 마치 ‘잘라와서 붙일(cut and paste)’ 수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심을 수 있다. 특히 스웨덴·네덜란드 등 이른바 ‘좋은 모델’을 찾아 그 제도와 관행을 여과 없이 수입하는 데 급급한 편향이 곳곳에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점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욱 급한 것은 아마도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고유한 축적 메커니즘과 그 역사적 발전 경로에 대한 해명이며, ‘자본주의 다양성’ 논의의 수입도 이러한 주체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면 훨씬 더 큰 생산력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