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기업독재·시장전체주의 넘기 위한 대안 찾아야
김상봉 선생님
가정의 달을 맞아 평안하셨는지요?
가족이라는 1차적 관계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 경제위기의 순간 더욱 절감하는 시점입니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개별 구성원 모두에게 고루 적용되어야 할 공통의 집합가치 체계로서의 국가의 역할이 실종되면서, 개체적 존재의 최소 집합단위인 가족의 경제적 역할이 더욱 막중해지는 한국 현실입니다.
공화국과 경제는 불가분관계…구성원의 삶이 국가본질 좌우
‘경제는 시장에 맡기라’는 주장은 ‘시장지배자인 기업에 맡겨라’ ‘국가는 손을 떼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런 주장에 따라 국가가 기본 역할을 포기하면 시장의 지배자는 공동체 전체의 지배자가 되고, 시장의 불평등은 공화국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지난 3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영국 런던에서 시위대가 빈곤·실업대책 수립, 기후변화 대응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런던 |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대담주제인 ‘경제와 공화국의 관계’를 말씀 나누려니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패배와 경쟁탈락, 그리고 그로 인한 궁핍은 인간적·가족적·사회적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상황에 도달해 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는 이제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돈유일주의, 경제지상주의, 금전만능사회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결혼, 출산, 교육, 부부관계와 이혼, 질병치료, 노후대비와 같은 1차적 인간문제가 가장 먼저 포함됩니다. 소수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과 자녀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만인 불안시대’ ‘만인 불안상황’인 셈입니다.
경제와 공화국에 대한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저희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근대국가를 포함한 공화국의 본질은 체제의 경제문제 접근과 분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즉 공화국과 경제문제는 분리 불가능하며, 공화국이 어떤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고, 어떤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체제 및 구성원들의 삶의 성격과 안정성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의 ‘구체적 실체’를 말합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강부자 정부, 경제정책 기조, 중심 수혜 및 저항계층이 연쇄고리를 갖는 건 명백한 근거가 있는 것이지요. 근대 이래 좌우 경제학의 고전들의 근본주제가 ‘정치경제’ ‘정치경제학’이었던 이유는 정치와 경제, 공화국과 경제문제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며, 구성원들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국가의 본질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고래로 통치계급 재산의 과다 여부를 체제분류 기준의 하나로 삼았던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와 국가의 불가분성을 명확하게 인식해, 과두정치가 빈민정치(ochlocracy)보다 더 위험하며, 중간계급으로 구성되는 정치체제가 가장 안정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그는 국가의 어느 일부분이 불균형하게 팽창하면 혁명이 발생한다고 했죠. 중세의 교회, 군부독재의 군대,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의 불균형한 과대팽창과 그로 인한 혁명과 체제붕괴를 볼 때 이는 균형·중용·중간계급을 강조하는 그의 혜안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수량적 평등이나 비례적 평등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에게는 곧 정의의 문제로 그가 말한 ‘분배적 정의’로 연결됩니다. 국가의 분배역할을 통한 불평등의 극복을 정의로 보았던 것이지요.
선생님. 지난번 한국에서의 민주공화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보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 헌법연원이 시장경제체제가 아니라 균등사회 건설이었음을 상세히 말씀드린 바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등·형평·공화의 개념은 좌우를 넘어 당시 모든 정치세력과 헌법초안들의 공통 합의였다는 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김구의 건국정신과 노선을 존경하는 세력조차 오늘날 그들의 평등, 분배, 국유·공유 주장과 정신은 전면 거부하지요.
재산분배 역할 상실한 한국, 공공지출·불평등 개선 최악
기실 한국에서 국가의 공적 역할을 통한 형평과 균등사회 사상은, 근대로의 여명 시점부터 명확했습니다. 전통과 근대 기로의 정점인 다산 정약용은 지도자와 공직 노릇을 제대로 수행한 자를 “재산을 고르게 마련해서 다함께 살린 자”라며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자에게 보태주어 그 살림을 고르게 하는 것”을 그들의 긴급임무라고 주장합니다. 즉 재산분배 역할이 국가의 근본임을 밝힌 것이지요. 핵심인 토지소유제의 경우 그는 ‘일정한 가구의 공동소유 및 협동영농’이라는 급진제도를 제안합니다. 그의 주장은 오늘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꼭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바른 국가역할과 평등, 분배, 토지공동소유에 대한 선견은 주목됩니다.
저는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체제가 갖는, 인간의 기본욕구 충족기능과 긍정적 재화생산 기능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근대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문명과 삶의 질의 개선을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우린 공산주의의 대실패를 통해 인간 욕망의 부인과 절대적 평등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시장경제 자체가 아니라 극단적인 시장만능주의, 기업제일주의, 돈유일주의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정부와 기업, 보수 담론이 말하는 ‘경제문제’는 사실 체제성격과 평등을 포함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시장문제’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공동체 내의 특정 이해당사자인 ‘기업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업의 무한자유 요구를 시장자율문제로 확대하고, 또 시장문제를 국가 전체의 경제문제로 간주하는 주술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는 시장에 맡기라”는 시장유일주의는 결국 시장지배자인 “기업에 맡겨라” “국가는 손을 떼라”는 얘기인데 그것은 국가의 공공역할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시장 지배자를 공동체 전체의 지배자로 만들고, 시장의 불평등을 공화국의 불평등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술은 마침내 현실이 되어 정부·언론·교육·의료·종교 등 공동체의 모든 영역이 기업논리를 추수하고 대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문·방송·병원·학교·교회… 거의 모든 핵심 사회구성요소가 독립적 존재논리와 양태를 상실한 채 마치 기업질서처럼 최상위 거대 소수가 해당 영역을 과점하고 있는 과두상태로 진입해 있습니다. 그리곤 이들 사이에 기업을 정점으로 상층 과두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국가로부터의 자유’가 ‘기업에로의 예종’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예종을 통해 공화국가가 아닌 기업국가·과두국가가 된 것이지요.
앞서 상세히 말씀드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이어 금번에 공개된 ‘2009년도 OECD 통계연보’를 보면 한국은 이미 철저한 기업국가·시장국가가 되어 기업독재나 시장전체주의의 단계로 진입해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적 공공지출과 정부역할에 의한 불평등 개선, 둘 모두 OECD 최악입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적 공공지출은 OECD 평균(2006년)의 3분의 1입니다(20.5% 대 6.3%). 정부의 재분배역할에 의한 소득불평등 개선지표, 즉 지니계수 개선효과는 OECD 평균의 7분의 1입니다(0.078 대 0.011). 즉 한국은 정부에 의한 분배효과는 거의 없는 셈입니다. 실제로 소득 재분배액이 가계 가처분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6분의 1입니다(21.4% 대 3.6%). 분배에 관한 국가의 역할이 이토록 없기 때문에 개인과 가족의 시장에서의 패배는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과 같은 심각한 양극화·소득격차·불평등 사회에서 국가역할의 부재, 또는 부자들을 위한 정부는 고래의 통찰이 주장해왔듯 공화국의 기저를 위협하는 저항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과두체제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 체제나, 특정 부분이 전체 사회를 장악한 걸 독재나 전체주의라고 한다면 한국은 분명 기업독재나 시장전체주의로 근접하고 있습니다. 뉴딜 개혁을 성공시킨 루스벨트는 사회주의를 정부사회주의와 사적 사회주의(기업사회주의)로 나눈 뒤, 소수에의 경제권력 집중을 통해 다수 시민을 예종시키는 후자에 대해 전자 못지않게 단호히 거부합니다. 명령경제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정부사회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사회주의의 해체는 필수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공산독재를 피하기 위해 기업독재가 허용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 기업에 맡기라” 외치는 부자를 위한 정부 저항 불러
이제 기업독재, 시장전체주의를 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입니다. 저는 세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는 국가(정부)·시장(기업)·사회(시민)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과 사회협약입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한 네 유형, 즉 국가가 시장과 사회를 모두 탄압한 유형(사회주의), 국가가 시장과 결탁해 사회를 억압한 유형(개발독재), 국가가 사회와 연합해 시장을 압박한 유형(민중주의체제), 시장·기업이 국가와 사회를 장악한 유형(기업독재·시장전체주의)을 모두 극복하고 새로운 3자균형을 위한 협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화와 체제의 안정을 위해 상대적 평등을 위한 국가의 독립적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저는 그것을 시장화(경쟁)와 사회화(연대)의 결합을 통한 인간화(공화국시민)의 길로 이해합니다.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체제나 사회적 시장국가, 또는 사회국가를 상정해봅니다. 반 인간화로 치닫는 시장만능주의를 보며 아렌트가 말한, 전체주의를 향한 유혹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간적 방식을 통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고통을 완화시킬 것을 깊이 상념합니다. 그 길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사회와 정치의 확장과 국가의 공적역할 회복입니다. 아렌트는 “자유는 복수성(plurality)을 전제로 하는 정치라는 독특한 매개적 영역에서만 존재한다”면서 “정치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상대적 평등의 관점에서, 그들의 상대적 차이에 대비(對比)해 조직한다”고 언명합니다.
둘째는 민주주의를 통한 통제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드렸던 4권분립을 통해 검찰·감사원·공정거래·금융감독기구를 완전히 분리시켜 권력과 시장의 과두화·독재화를 확실하게 견제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시민의 직접 참여와 저항입니다. 공정거래, 공정무역,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시민단체에의 참여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끝으로는 평등주의의 표상인 1인1표가 갖는 위력을 통해 시장의 불평등을 정치적으로 교정해내는 주체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정부·기업·시민 사회협약 필요 ‘창조적 자본주의’에 주목을
셋째는 자본주의 자체의 창조적 변혁입니다. 이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업과 자선사업의 상징적 성공을 보여준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제안입니다. 정부-시민단체-기업의 역할분담과 연대를 통해, 기업에도 유익한 방식을 통해 극소수에 집중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이윤수혜의 대상을 빈곤계층에까지 획기적으로 확대하자는 것입니다. 자선이라는 개인윤리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사회구조 문제에 주목하는 그의 제안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도 말씀하신 인간의 가치창출능력-노동-경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입니다. 저는 조금 온건하게, 독일 메르켈 총리의 신선한 발상 이래 독일과 이탈리아, 미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제안되고 있는 최고경영자(CEO) 연봉제한의 도입을 생각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한 글로벌 기업의 임원과 직원의 임금격차는 이미 100배를 훨씬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한두 사람이 기업의 명운을 결정할 결정권한 대가로서의 초고액 연봉 수혜의 논리라면 이것은 인간의 평균적 근로가치, 재화창출능력, 기업의 집합적 의사결정… 어디에도 맞지 않는, 루스벨트가 말하는 명령체제로서의 사회주의일 뿐입니다. 게다가 대부분 기업의 몰락은 이들 고액 CEO나 임원들의 오류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발상의 근본적 전환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이 어렵고 힘든 삶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대안모색에 나서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 여러 문제에 대해 말씀 나누다 보니 내용이 복잡해져 죄송한 마음입니다. 건안하시길 빌며,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연세대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