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자본권력에 ‘시민의 평등한 참여’ 제도화 해야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의 주제는 공화국과 경제입니다만, 이 주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린 대로 경제가 공화국 또는 공공성과는 상극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우리의 대화를 시작하는 글에서 저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이 가정과 국가를 구별하고, 돈을 버는 일을 국가의 정치적 관심사가 아닌 가정관리에 속하는 일로 치부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확실히 낯선 이런 구별의 바탕에는 경제에 대한 관심이 본질적으로 사사로운 관심이라는 통찰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내가 베토벤의 음악을 내 지갑에 넣을 수는 없지만 돈은 혼자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구는 그 자체로서 자기를 위해서도 좋고 남을 위해서도 좋은 공공적 욕구인데 반해, 돈에 대한 욕망은 철저히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적 욕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돈에 대한 욕망에는 아무런 공공성의 계기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자본에 눈이 먼 사회에서는 공공적 관심은 사라지고 사적인 욕망들이 충돌할 뿐이니, 그것이 공화국과 공공성의 무덤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공공적 소유란 ‘같이 가짐’의 의미 공산주의 ‘국가에 의한 독점’ 오류 


하지만 김선욱 선생께서 우리의 대화에 대해 지적했듯이, 경제의 반공공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시대는 아테네나 로마와는 달리 경제적 문제가 개인은 물론 나라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버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축적과 증식을 위한 사회적 공동체를 회사 또는 기업이라 부른다면, 지금은 국가가 기업이요, 기업이 국가가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함석헌은 이처럼 기업화된 현대 국가를 비판하여 자주 “기업국가”라 불렀는데,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이른바 근대적 국민국가는 고대 국가와는 달리 그 성립의 뿌리에서부터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었고, 그런 만큼 경제적 관심이 국가의 근본 관심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국가가 한번 기업국가가 되고 나면 국가의 모든 일이 그 뿌리에서부터 경제적 관심에 의해 본질적으로 규정되는 까닭에, 국가를 아예 해체하지 않고서는 경제의 문제를 국가 공동체 밖으로 밀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의 문제를 국가나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으로는 공화국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의사소통의 공공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와 공공성의 대립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20세기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말해 온 공공성이란 대표적으로 원칙적으로 의사소통의 공공성이었습니다. 국가와 시민사회 내에서 어떻게 하면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의사소통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공공성에 대한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시민들이 아무리 개방적이고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토론하는 대상이 그들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토론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두 소녀가 아이스크림을 앞에 두고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아무리 잘 토론하고 결정한다 하더라도 만약 그 아이스크림이 남의 것이라면 토론 자체가 쓸모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시민의 운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국가는 과거 국가에 공공적으로 속했던 많은 일들을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공공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를 사적인 문제로 만들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소통의 공공성만을 말하는 것으로는 시민적 삶의 공공성을 결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참된 공공성의 실현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의 공공성에 대해 말하는 일입니다. 생각하면 20세기에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치열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공산주의자들은 소유의 공공성을 국가에 의한 소유의 독점과 같은 것이라 생각함으로써 또 다른 오류에 빠져들었습니다. 공공적 소유란 ‘서로 같이 가짐’을 뜻합니다. 이를 가리켜 소유의 서로주체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고립된 개인에 의해 소유되던 것을 다 빼앗아 국가의 손에 쥐여주는 것은 개별적 홀로주체에 속하던 것을 국가라는 또 다른 홀로주체의 손에 쥐여주는 것과 같아서 참된 의미의 ‘같이 가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민적 삶의 공공성을 위해서는 개인에 의한 사적 소유의 원리도 아니고 국가에 의한 독점도 아닌, 소유의 공공성의 원리를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본의 축적과 증식을 위한 사회적 공동체를 회사 또는 기업이라 부른다면, 지금은 국가가 기업이고 기업이 국가가 되어버린 시대다. 사진은 삼성·LG·SK 등 대기업의 위용을 자랑하는 첨단 사옥들(왼쪽부터), 그리고 경제적 분배의 사각지대에 놓인 일용직 근로자들의 모습(아래). 경향신문자료사진

정치 자체가 경제적 욕망에 종속경제의 정치적인 통제는 불가능
더 나아가 경제의 정치적 통제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분별한 경제적 욕망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제가 정치 외부에 있다는 전제 위에서 경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국가 자체가 기업국가가 되어버린 오늘날 경제는 더 이상 정치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 이성 자체가 경제적 욕망에 종속된 도구적 이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자 만들어 주고, 잘 살게만 해준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겠다는 것이 우리 시대 시민들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것은 지난번 대선과 총선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를 경제로 둔 채 그것을 단지 정치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몽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소유 및 경제적 권력 자체를 민주적으로 해체하고, 경제적 활동 그 자체를 공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가가 모두 기업국가가 된 까닭은 본질에서 보자면 돈이 권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로마가 주변의 부족들을 정복해 나갈 무렵, 부유하기로 소문난 삼니움족이 로마의 장군 덴타투스를 매수하기 위해 금은보화를 들고 찾아 왔을 때, 그는 자기가 그 보물을 받고 부자로 사는 것보다, 부자들을 지배하는 삶을 택하겠노라며 그들을 쫓아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생각하면 이는 아직도 권력이 돈과 엄격히 구별되었던 시대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돈이 곧 권력입니다. 그러므로 돈의 외부에서 돈을 지배하거나 통제하겠다는 것은 허황된 발상입니다.

국가 권력이 시민에게서 나오듯기업 경영권 노동자로부터 나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국가권력이 유일한 권력이었던 시대에 아테네 시민들은 수백 년에 걸친 노력과 투쟁 끝에 모든 시민이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처럼 모든 시민이 권력에 참여하는 공동체를 폴리스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으나, 국가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인민의 보편적인 권리로 인정받는 데 다시 수천 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 권리는 명목상으로만 인정될 뿐 아직도 실질적으로는 소수에 의해 국가권력이 독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한 술 더 떠 이제 권력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본이 권력이라면, 이제 모든 시민이 자본이라는 권력에 평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제도화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일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가 기업이 된 시대기업들을 폴리스로 만들어야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인간의 세 가지 권리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소유권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적으로 소유된 재산은 헤겔이 말했듯이 의지가 작용하는 외적인 영역으로서, 개인의 자유의 첫번째 외적 표현이자 실현입니다. 이로부터 자유가 신성하듯이 사유재산도 신성하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첫째 원리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나의 자유가 고립된 홀로주체의 자기형성이 아니라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온전히 생성되듯이, 소유 역시 고립된 홀로주체의 일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 속에는 이미 타인의 노동과 자연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의 권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타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이지, 고립된 홀로주체의 절대적 처분권일 수 없습니다. 이 근본 전제 위에서 소유의 윤리를 다시 생각하고 소유에 대한 법적 정의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둘째로 경영권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자본이 자기를 주체로서 실현한 것이 기업입니다. 그런데 자본의 사적 점유를 당연시하는 사회에서는 기업을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당연한 것도 자명한 것도 아닙니다. 경영권이 노동자로부터 소외되어 기업주에게 귀속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군주에게 속한다는 생각이 철석 같은 믿음이었으나 사실은 허황된 생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근거 없는 믿음입니다. 근대에 이르러 군주가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았다고 거들먹거릴 때 시민 혁명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시민에게 되돌린 것처럼, 이제 우리는 기업이 사사로운 소유물이라며 배타적인 경영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모든 권력은 위임받은 권력이며, 이는 경영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평범한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의 권력이 시민에게서 나오듯, 기업의 경영권 역시 오로지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는 기업 그 자체를 모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폴리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국가가 기업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에는 이처럼 기업을 폴리스로 만듦으로써만 인간의 참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이 노동권의 의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권이란 노동자가 기업주에게 노동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명한 진리는 아닙니다. 노동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의 자기실현일 수 있으려면 노동권이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것은 자기를 상품화하고 사물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상실입니다. 오직 노동이 공동체에의 참여로서 발생할 될 때만, 그것은 서로주체성의 실현으로서 인간의 자기실현이 될 것입니다.

생각하면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모든 새로움은 낡은 눈으로 보면 허황된 것입니다. 그래도 새로운 것을 꿈꾸지 않는다면 세상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어려운 이야기는 선생님께 떠밀면서 저는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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