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한국 사법, 권력엔 종속·시민엔 독립 외치는 ‘이중성’
김상봉 선생님 평안하신지요. 오늘은 법에 대해 말씀 나눌 차례이지만 제기하신 중요한 정치문제에 대해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한 사회에서 정치의 존재이유는 대화에 바탕을 둔 공준창출을 통해 갈등해소·가치배분·사회통합 역할의 수행에 있습니다. 정치의 근본역할은 대화·소통·타협을 통해 합의 가능한 공통가치의 창출과 배분인 것이지요. 자유·평등·복지·성장·인권·환경·교육 중 무엇을 ‘필수’가치, ‘핵심’가치, ‘주요’가치, ‘부차’가치로 추구할 것인가 역시 정치를 통해 결정됩니다. 그런데 정치와 정치 이외의 것의 결정적 차이는 정치에는 권력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적 인격적 만남을 통해 국가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최선이지만 가치와 재화의 제한성은 권력을 정치의 필수요소로 불러들입니다. 이 점이 정치의 기본속성이지요. 우리가 정당을 결성하거나 투표에 참여하는 이유 역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을 제어하거나 자기와 동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려는 정치행위입니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다를 때 일정한 배분 노력은 필수적이며, 거기에서 가치배분의 예술로서의 소통·대화·타협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국 사법부와 검찰은 독립과 자유를 통한 공공가치 수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권력과 기득이익에 종속돼 정치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흔들리는 검찰 깃발을 배경으로 한 대법원의 정의의 여신상과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에 항의하는 시민단체의 모습.
정치의 역할왜곡으로 인해 공준창출은커녕 사회갈등과 공동체 해체가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 한국현실입니다. 정치를 위한 정치, 권력을 위한 권력으로 인해 정치본연의 존재이유는 실종되었습니다. 정치는 인간적 가치실현을 위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목적으로 전도되면서 갈등증폭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정치가 공준창출기능을 상실하자 이율배반적 현상들이 함께 등장하고 있지요. 내적으로는 사익추구에 몰두해 부패와 향락에 쉬이 무너지며 외적으로는 다른 영역, 즉 기업·언론·사법·종교·시민단체의 역할이 급증합니다. 정치과소화이지요. 또 정반대로 가치배분·공준창출을 위한 한시 위임에 불과한 공직수임, 정부구성 권한을 마치 무한권력을 장악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영역, 즉 언론·학교·종교·법률은 물론 민간기업인사에까지 개입합니다. 사적 영역의 자율성과 인간관계마저 파괴하는 정치과잉화로서 자율·독립·공화의 가치를 앞서 무너뜨리는 것이지요.
사회 공통가치 창출·배분의 정치
역할왜곡으로 이념대결·갈등조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폄하나 정치회피가 해답일 수 없는 것은, 공동체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치를 대체할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 역시 정치의 바른 역할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정당문제에 대해 저는 이중참여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정부공직·정당결성·투표를 포함한 ‘제도에의 참여’는 물론 ‘제도 자체의 변경을 위한 참여’ 역시 중요합니다. 특히 현행 헌정구조와 대표체제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정당참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당체제와 헌정제도의 근본개혁이라는 점을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대대의(代代議)제도로서의 공천제도 문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정당체제의 근본문제는 추가하지 않을 수 없군요.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단 두 번의 여야정권교체를 거치는 동안 모두 8번의 여당을 갖는 반면, 대통령의 탈당으로 인해 네 정부 모두 여당-야당 없는 비정당 정부를 반복해왔습니다. 게다가 88년 이후 총선의 유효정당 수는 평균 3.7개에 이르러, 단순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는 양당제로 귀결된다는 정당이론조차 무화시키고 있습니다. 단임 헌정구조, 하향공천제, 지역정당체제가 결합한 극히 불안정하고 왜곡된 헌정체제·대의제도·정당체제이지요.
현행 헌정구조와 대표체계의 결합은 지역에 따라 경쟁의 의미는 물론 공동체 차원의 시민자격·참여·대표의 등가성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헌정체제개혁은 제외하더라도, 선거제도만이라도 변경할 경우 표의 등가성과 대표의 왜곡은 현저히 개선되어 정당체제의 민주화와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를 도입하면 민주노동당은 17대 총선에서 10석이 아닌 40석을 획득, 상당히 유의미한 정당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헌정구조와 정당체제의 혁신이 보수세력으로 인해 불가능하였다고 하더라도 정치역량의 중요성은 여전히 남습니다. 한국의 자유-진보 정당들은, 자유-노동 연합이나 시민-민중 연합은 고사하고, 자유-진보 독자 공준창출이나 연합공준의 제시는커녕 각각 내부의 차이조차 극복 못하고 분열을 반복하면서 다시 합당(열린당+민주당)과 연합공천(민노당+진보신당)을 시도합니다. 이 분열을 볼 때 공준창출은 국가공동체 차원에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정치 및 정당을 이해하는 데서는 몇몇 차이를 드러내었지만 저는 말씀드린 참여와 대의,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결합을 통해 ‘가능한 최선’의 공화국을 향한, 말씀하신 인간적 만남으로 형성되는 공동체를 향한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때에 민주성과 공공성의 실현을 위해 정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을 저는 법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법만이라도, 공정과 형평을 위한 최소 준거라는 자기역할을 수행하였다면 우리 공동체가 오늘날 이 정도로 격조와 자기규율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습니다. 권력과 시장을 포함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키케로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자유롭기 위해 법에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지금 우리는 이른바 정치와 삶의 ‘사법화’ ‘법률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도이전, 탄핵, 의원선거 당선 여부, 대선과정, 부패와 같은 공동체 문제는 물론 병역거부(의무), 호주제(가족관계), 종부세(세금)를 포함한 개인적 사회적 삶과 공동체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검찰·법원·헌재를 포함한 사법기구의 직접적 자장에 놓여 있습니다. 법문(法門)에 덜 갈수록 좋은 삶이요, 법이 적은 사회일수록 좋은 사회임을 고려할 때, 법원과 사법의 비중이 크고 넓어진 만큼 정의와 형평의 수호자로서의 본래의 존재이유와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법은 지금 합의된 어떤 승복기준과 일관성을 갖고 있나요? 본래부터 법적 판결은 최고 법원에서조차 자주 바뀔 만큼 최종적, 궁극적, 무오류적 결정은 전혀 아닙니다.
‘형평 최소준거’ 법이 자기역할 못해
개인·공동체 삶 모든 문제가 사법화
우리사회에서 법률은 진실의 존재 자체보다는 진실의 공개과정을 문제 삼고(법률가들은 피의사실을 공개해 법을 위반하면서도요), 범죄의 내용보다는 늘 범죄 주체와 권력의 거리 및 범죄내용 공개시점을 문제삼습니다. 어떻게 같은 행위에 대해 시점과 주체에 따라 이토록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까? 정권에 따라 진실이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권력의 논리이지 법률과 정의의 논리는 아니지요. 이 때문에 ‘사법의 정치화’는 진실·정의·진리의 수호자로서의 법률과 법원의 존재의의를 기득이익과 권력논리에 복무하게 합니다. 권력과 정의, 정치와 진실이 충돌할 때 법은 의당 후자에 서야 하나 한국에서는 늘 전자에 서왔습니다. 따라서 정치의 사법화와 형사화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법원·검찰·헌재를 포함한 사법의 정치화, 권력화입니다. 권력견제, 형평성, 인권유지의 보루인 사법이 권력논리를 따르면 3권분립은 기저에서부터 무너집니다.
또 사법은, 경제발전기여를 명분으로 기업총수에 대한 법률적용을 철회하는 데서 보듯 스스로 법률외적 요인-경제적 사회적 지위-을 의식하여 판결하고 있습니다. 법의 사사화이지요. 수백만원의 개인 절도사범과 수천만원의 정치자금 위반, 수백억원 기업총수의 위법은, 전혀 상이한 처벌과 면책 기준을 통해 검찰과 법원 스스로 법의 존재 이유를 파괴합니다. 또 사법독립을 말하나 지금의 독립은 지극히 이중적입니다. 자신들의 독립을 가능케 해준 시민(적 공준)으로부터는 독립되려하면서, 권력과 기득이익에는 종속되는, 즉 “시민으로부터의 독립, 권력에의 종속”, 이 이중특성이 한국사법의 특징입니다. 특히 권력과 기득이익에 대한 종속은, 대형로펌의 사례에서 보듯, 이익의 일치 수준까지 치닫고 있습니다.
법률외적인 경제·사회요인 의식
법원 스스로 법의 공공가치 파괴
누가 오늘의 사법독립을 가능케 하였나요? 권력인가요, 시민인가요? 인권을 포함한 인간적 문제에 관한 전향적 판결 역시 전체 사회의 민주화의 산물이었음은, 즉 사회의 민주화가 사법으로 흘러들어간 효과였음은 재론을 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사법의 독립성을 말할 단계가 되자 권력·시장·언론의 압력에 대해서는 알아서 배려하면서도 시민적 압력과 요구에 대해서는 떼법이라며 사법독립과 간섭배제, 자율을 외치고 있습니다. 고래로 법률은 권력과 기득이익에 대한 독립과 자율을 통한 공공가치 수호가 존재이유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사회에서 법의 지배는 시민과 민주주의로부터 독립된, 사법관료주의와 사법전문성에 기초한 법률가의 지배(rule of lawyer)로 전이하고 있습니다. ‘법의 지배’와 ‘법률가 지배’는 전혀 같지 않습니다. 이젠 ‘법률가 국가’(nation under lawyer)라는 언명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해왔으나 이 점은 민주주의냐 헌정주의냐, 다수결이냐 법치냐의 범주를 넘어 공화국 자체의 본질을 흔드는 문제입니다. 즉 ‘법률’이라는 원칙·제도에서 법률가라는 사람·인물로의 전이, 곧 ‘법치’에서 ‘인치’(rule of man)로의 역전이기 때문입니다. 통치자의 자의, 즉 인치를 견제하려 나온 원칙이 법치이나 사법의 역할증대와 함께 다시 인치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법률가의 지배가 갖는 근본위험이 있습니다.
통치자와 입법자는 물론 “법률가조차 법 위에 존재해선 안된다”는 것이 법치의 기저원칙입니다. 선출되지 않은 법률가의 해석·적용의 재량과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로 제한되어야 합니다. 즉 공동가치를 향한 집합행위로서의 입법적 지혜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시민대표이자 입법자로서 선출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시민공준=집합의지가 입법과정을 통해 비선출직인 법률가의 해석을 제약해야 하는 연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배의 배제’ ‘간섭의 금지’ ‘자유의 확보’라는 민주공화국 구성의 최소 원리는, 법률가가 지배하는 인치 단계에서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법률가이건 정치인이건 인치의 위험은 그만큼 큽니다. 이 때문에 저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서 카시우스가 브루투스에게 한 “나도 시저처럼 자유인으로 태어났소. 당신도 그렇고요”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치로 인해 ‘자유의 위축’ ‘지배의 확대’를 초래하는 시저에 대한 저항의지의 표현이지요.
민주주의와 법은 보완·긴장관계
人治뿐 아니라 ‘법의 지배’도 제약을
법의 지배조차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존하거나 그에 제약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초기 헌정주의 확보단계를 지나면 민주주의와 법치는 상호보완적일 뿐만 아니라 늘 긴장된 관계를 보여왔습니다. 법치만능을 주창하는 사법통치사회(juristocracy)는 공화국의 발전에 결코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체주의·공산체제·군부독재 등 다양한 형태의 독재들은 법치를 통해 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유린해왔습니다. 즉 법치와 민주주의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법이 정의와 자유, 공화국 공통가치의 수호자로 바로 서기 위해서라도 사회공준과 민주주의 원칙의 사법으로의 확산과 침투는 필수적입니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지혜를 기다리며 여기서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명림 연세대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