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정치는 국가형성을 위한 시민들의 ‘참된 만남’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그동안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우리가 전체적으로 너무 입장이 비슷해 보여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는데, 지난 두 번에 걸쳐 주신 글을 보고 선생님의 생각이 저와 다른 부분들이 좀 드러나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오늘은 저도 정치에 대해 말씀드릴 차례인데, 선생님과 생각이 같고 다른 점을 드러내면서 말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민이 나랏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저도 선생님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공적인 일과 무관한 사적인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같은 뜻에서 자유는 탈주가 아니라 형성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던 것이고, 거류민이 아닌 시민의 자유를 말했던 것입니다. 형성이란 당연히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고, 시민의 자유는 이를 위해 국가권력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국가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시민적 자유의 실현 안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며, 나아가 국가권력에 참여해야 하는 까닭도 국가가 고정된 전제가 아니라 열려 있는 형성의 과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국가의 중요성을 말하더라도, 국가가 개인보다 더 소중하다거나, 개인은 전체를 위해 무조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의 의견이 현실정치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정당운동이 필요하다.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본격화된 진보정당 운동은 민주노동당에 이어 진보신당을 탄생시켰다. 경쟁체제를 갖춘 진보정당의 향후 과제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을 통해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사진은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그런 점에서 저는 지난번 편지에서 선생께서 말씀하신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란 표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선생님의 선의를 존중함에도 그 표현은 국가주의자들에 의해 너무 쉽게 악용될 수 있고 또 악용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도 개인에게 헌신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공동체는 그 본질에서 보자면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오직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서로주체로서, 너와 나의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만남이 있는 곳에서만 있는 것이요, 오직 참된 만남의 표현이자 실현에서만 참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실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만남이라는 본질에 기초한 현상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는 실체화된 만남 또는 사물화된 활동으로서, 만남을 통해서만 생겨나고 만남에 근거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국가가 시민에게 현실적으로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것들은 결코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나타난 현상의 바탕에 있는 시민들 상호간의 만남에 의해 지지되어야만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국가가 공동체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할 때,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서 강제로 얻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강도나 도둑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시민이 국가에 참여해야 하는 까닭은 적극적으로는 국가를 스스로 형성하기 위해서지만, 소극적으로는 그처럼 시민들에게 주인 노릇 하려는 국가의 월권을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나랏일에 참여해야 하는데, 정치란 그런 참여를 뜻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저는 지난번 편지에서 선생께서 정치를 가치배분의 예술이라고 정의하신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가치배분 또는 재화의 합리적 배분이 정치라면, 정치는 재화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일로서 사람과 사람의 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물 사이의 일이 되고 맙니다. 만약 이처럼 정치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계산일 뿐이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위해 본질적으로 참여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나서 시끄럽게 토론을 한다고 해서, 더 정확하게 계산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처럼 정치를 가치배분의 기술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계산은 복잡한 일이요,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정치가 계산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남이 대신 해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계산을 가장 잘 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기계입니다. 그리하여 정치가 배분을 위한 계산이라면 가장 유능한 정치가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일 것입니다.

정치는 그 본질에서 보자면 재화를 얻거나 배분하는 일도 아니고 권력을 행사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그저 표면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본에서 보자면 정치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활동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주체들이 만나 서로주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정치에서 참여가 중요한 까닭은 이처럼 만남이 정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남이 참여입니다. 이 만남의 총체가 나라인데, 국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만남의 총체인 나라가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이처럼 사회적 실체로 정립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공동의 의지와 주체성이 추상적 의지에 머물지 않고 현실적 권력으로 정립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권력의 주체로서 국가는 이제 거꾸로 시민들의 삶을 규제하는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것이지요. 정치의 모든 위험은 이 제3의 주체, 곧 국가라는 거대주체가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홀로주체로 퇴행하려는 경향성을 지닌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사물화되고 실체화된 서로주체성으로서 주체성과 사물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국가는 시민들의 서로주체성의 표현이자 실현으로서 주권체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주체성이 사물화된 것으로 일종의 기계와도 같은 국가기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기계가 홀로 굴러가는 법은 없으니 누군가는 그 기계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시민들이 생동하는 만남 속에서 국가권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언제라도 찬탈자들의 손아귀에서 수탈과 착취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선생께서도 우리 정치의 사사화를 말씀하셨듯이, 이 땅에서 국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치배분 기술로 간주한 정치는 사람과 사물의 기계적 계산일 뿐
시민의 참여가 중요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수의 찬탈자들이 저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기구를 도구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국가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옛 중국의 고복격앙가의 신화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선량한 임금이 있어 나라를 대신 다스려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일 뿐입니다. 시민들이 국가를 남의 손에 내버려두면 그것은 예외없이 시민을 노예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력기구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시민의 자유는 오로지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에 참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국가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까? 넓은 의미의 정치적 참여가 문제라면, 한국인들처럼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온 사람들도 흔치 않습니다. 우리는 동학농민전쟁이나 광주항쟁에서처럼 폭정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기도 했고, 3·1운동이나 4·19처럼 평화적 시위를 통해 민중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비단 그런 대규모 민중봉기가 아니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시민운동 그리고 환경 및 생명운동과 여성운동을 비롯하여 온갖 소수자 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정치참여에 속한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량한 임금’의 옛 신화 버리고 정당정치 통한 국가권력에 참여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모든 것이 무언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열정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긋남의 절정이 지난해 촛불항쟁이었습니다. 시민의 선량한 참여의 열기가 그렇게 오래 그렇게 평화적으로 분출되었음에도 변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촛불을 드는 것 그 자체가 국가권력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시민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아무리 오랫동안 촛불을 든다 하더라도 이 정부는 ‘명박산성’ 뒤에서 시민들이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전처럼 다시 화염병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정당을 통해 국가권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현대국가에서 정치가 원칙적으로 정당에 의한 대의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풀뿌리정치도 중요하고, 대의정치의 한계가 다양한 직접민주주의적 실천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도 백번 지당한 말이지만 그것이 정당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정당은 개별자로서의 시민을 국가라는 보편자와 매개하는 도식과도 같아서, 현대국가에서 시민은 정당을 통해 국가권력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편에 서서 일하는 개방적 대중적 진보정당 키워야
생각하면 한국인들은 다른 모든 정치참여는 다 할 줄 알면서 지금까지 꼭 하나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정당운동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현실정치의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시민이 능동적으로 정당에 참여하지 않는 까닭에 정치꾼들과 지역토호들이 정당을 장악합니다. 정당은 타락하고 다시 시민들은 그런 정당에 등을 돌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실패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낡은 정당들을 대신할 미래의 정당을 만들지 못한 데 있습니다. 독재 권력을 떠받치던 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재벌을 편들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추진하는 정당도 아니며,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말로만 진보일 뿐 실제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이비 진보정당도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일하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만들지 못한 것이 지금의 비극적 상황을 초래한 원인인 것입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또한 빠른 때입니다. 그동안 우리 역사 속에서 분출되었던 모든 진보적인 운동의 열정을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지금 한국정치의 가장 절박한 현실적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대적인 정당 가입운동이라도 벌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고견을 기다리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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