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연재 기사이다.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공화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 이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가 어떤 역사적 유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신 글은 제게도 많은 배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헌법이 쓰인 뒤에 여러 차례 헌법이 개정되어 왔지만,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것처럼 그리도 일관되게 나라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이라 천명한 것은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성향과 무관하게 민주공화국에 대한 온 겨레의 요구와 열망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민주공화국의 기틀이 이 나라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말뜻뿐만 아니라 그 괴리를 사유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헌법 제1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으니 이번 편지에서 저는 헌법 제1조의 뜻을 생각하되, 그 조항이 표현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시작하려 합니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밤새 토론하고 있다. 참된 민주공화국은 시민들이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어야 하고, 서로의 행불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모든 일에 대해 같이 알고 더불어 생각하면서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근본에서 보자면 국가는 인간의 본질로부터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모두 미완성의 존재, 가능성의 존재로서 세상에 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하나의 과제인 바, 한갓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성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몫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고 창조해 나가는 활동이 바로 인간의 자유입니다. 자유란 탈주나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형성에 있는 것이지요.
국가는 만남통해 형성된 공동체…헌법의 이상·현실 ‘괴리’ 살펴야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자기 혼자서는 자기가 될 수도, 자기를 형성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오직 너를 통해서 세상에 오며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됩니다. 모든 나는 누군가의 너로서 존재하며 너와 함께 우리를 이룰 때만 나도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립된 홀로주체가 아니라 만남과 인연의 교차점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자기를 형성한다는 것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 개인이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온전함 역시 너와 나의 만남의 온전함에 존립합니다. 만남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나의 자유의 범위도 넓어지고 그 만남이 참되고 온전한 만큼 나의 삶, 나의 자유도 온전해지는 것이지요.
국가 역시 그런 만남을 통해 생성되고 형성되는 공동체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람의 만남이 일정한 외연과 형식 속에서 전체를 이룬 것이 국가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첫 번째 편지에서 국가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만남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문제가 만남의 문제인 한에서, 국가의 참됨 역시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참됨에 존립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국가를 생각하는 것은 참된 만남이 무엇인가를 묻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일방적 주제·객체 아닌‘서로주체성’ 가져야 참 국가
만남이란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참된 만남의 현 실태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도 일방적으로 주체가 되거나 객체가 되지 않고 너와 내가 서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가리켜 서로주체성이라 불러왔습니다만, 이것은 구체적으로 세 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감성의 서로주체성은 너와 내가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데서 시작됩니다.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될 때, 우리는 감성의 차원에서 서로주체성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둘째로 의지의 서로주체성은 너와 내가 서로에게 책임을 느끼고 의무를 다하려 할 때 성립합니다. 이를테면 너와 내가 서로의 고통을 단순히 공감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의무의 대상이라고 느끼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윤리적 의지의 차원에서 서로주체성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의 서로주체성이 있는데, 이는 너와 내가 고립된 홀로주체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불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주 말해지는 집단적 지성은 바로 서로주체성 속에서 생성되는 지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도덕적 이념과 결합하면 한갓 지성에서 머물지 않고 공공적 이성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서로 고통·책임·생각 나누고 모두를 위한 나라가 공화국
만약 한 나라가 참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전체라면 저 세 가지 요소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즉 시민들이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어야 하고, 서로의 행불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일에 대해 같이 알고 더불어 생각하면서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눈물에 무관심한 사람들,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책임도 못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만사를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같이 나라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근본 원인도 바로 이 국가의 바탕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지난번 용산참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구체적인 잘잘못을 따지는 일을 제쳐두고 근본에서 생각하자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동과 무책임 그리고 반대의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독단적 사고방식이 낳은 참사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국가권력만이 문제라고 할 수도 없으니 우리들 자신이 자기의 고통에만 예민하고 만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홀로주체성 속에 빠져 있는 까닭에, 밀려오는 시대의 파도 앞에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는 것이 지금의 세태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온전히 나라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 나라의 시민들이 고통과 책임과 생각을 더불어 나누면서 나라를 같이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 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상태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서로주체성 속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국가는 단순히 시민들의 개별적 주체성의 총합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을 초과하는 전체입니다. 전체는 여럿의 하나가 모여 다시 새로운 하나를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 사람의 의지가 하나의 의지가 되고 만 사람의 생각이 하나의 생각이 될 때 그것이 전체로서의 나라입니다. 물론 이 전체는 언제나 개별적 주체들의 전체이니, 그 자신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주체입니다.
그런데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국가가 개별적인 주체성을 초과한다고 말씀드린 까닭은 국가가 개인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모두로부터 있으며 모두를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모두에게 있음과 모두를 위해 있음이라는 국가의 공공적 존재방식을 가리켜 우리는 공화국이라 부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를 위해 있는 우리 모두의 나라가 바로 공화국인 것입니다.
숭례문 화재와 용산 참사…나라 태우는 불길 보여준 사건
그러므로 민주공화국이란 개별적 시민의 주체성과 나라의 공공성이 온전히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이런 나라를 이루는 것은 시민의 과제입니다. 시민이 국가 속에서 태어나는 한에서 국가는 시민적 삶의 전제이지만, 시민이 국가를 끊임없이 참된 나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에서라면 국가는 시민적 삶의 과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이 말했듯이 전체도 자라는 것인 까닭에 시민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낡은 것의 부정이요, 지양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의 헌법전문이 3·1운동과 4·19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말은 밖으로는 나라의 독립과 주체성을 보존하고 안으로는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3·1운동과 4·19를 사건 자체로서 본다면 그것은 민중이 당시의 국가기구를 부정하고 지양한 사건이니, 대한민국의 헌법이 그 사건의 정당성을 승인하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은 참된 나라,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해 시민이 현존하는 국가기구를 부정하고 지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요구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87년 유월항쟁의 성과로 이 헌법이 제정된 이래 다시 한 세대가 흐른 지금, 그때의 눈부신 희망은 사라지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가 이대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낡은 집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둥인 민주주의는 흔들리고 나라의 지붕인 공공성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 우리를 추위와 비바람에서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낡은 집에 누전과 합선으로 불이라도 나면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사람들은 속절없이 불길에 타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은유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해 숭례문이 불탄 것이 전조였다면 올해 용산참사는 나라를 태우는 불꽃이 실제로 타오르기 시작했음을 알려준 사건입니다. 서로를 잠에서 깨우고 함께 모여 불을 꺼야 합니다. 하지만 공연히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집이 낡을 대로 낡아 불이 난 것이니, 이제 우리는 이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헌법 제1조를 생각하는 뜻은 씨알들이 그렇게 낡은 국가를 부정하고 지양해 끊임없이 새 나라를 만들어 나가라는 헌법정신을 생각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베트남 하이퐁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가 어디나 위기에 처한 시대여서, 여기서도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와 가톨릭 주교회의가 공동으로 나라 안팎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초대해 공산혁명의 주역이었던 호찌민 아저씨(여기서 그렇게 부르는군요)의 흉상 아래 모여 앉아 과연 시장경제와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요, 교회에 공산당은 적그리스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들이 사이좋게 사람의 일을 같이 염려하는 것이 그렇게 놀랍고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제 다시 회의장으로 갑니다. 다시 뵐 때까지 평안을 빕니다.
<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