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눈 쿠이루
이시구로 켄고 지음, 아키모토 료헤이 사진, 이화정 옮김 / 대산출판사(대산미디어)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맹인안내견으로 12년을 살다간 쿠이루(쿠짱)의 일대기라고 할까.
사실 이 책은 텍스트를 읽는 의미로서의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강아지 사진집에 글이 덧붙여진 형식이라고나 할까.
그건 이 책의 태생이 그렇기 때문이다.
쿠짱이라는 맹인안내견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찍고 있던
사진작가 아키모토 료헤이가 낸 쿠짱의 사진집을 보고
감명을 받은 작가 이시구로 켄고가 뒤이은 취재를 하면서 엮은 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에는 현장성이 느껴지지만
글에는 그런 감동이 전혀 없다.
역시 의도적인 글쓰기에는 이런 맹점이 나타난다.

글은 무슨 시사잡지를 읽는 것처럼 무미건조하다.
게다가 사진 위주의 책이라 꼼꼼히 읽어도 1시간이면 다 볼 수 있다.
맹인안내견의 일반적인 삶의 과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작은 정보를 주는 의미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책도 아니다.
단, 더 이상 善할 수 없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쿠짱의 눈빛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선
어떤 텍스트로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다 담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여러모로 <다이고로야, 고마워>(이 책의 리뷰도 곧 올릴 예정^&^)와 비교된다.
다이고로 책도 물론 사진 위주에 글이 첨가된 책이지만
그건 다이고로와 함께 살았던
아빠가 사진을 찍고, 엄마가 글을 썼던 책이라
의도적인 사진찍기와 글쓰기를 했던 이 책과는 다분히 비교된다.

쿠짱을 만나며 난 예전에 만났던 보름이를 생각했다.
맹인안내견이 되기 위해 퍼피워커와 살고 있던 보름이.
보름이를 취재하고 근 1년이 됐을 무렵
우연히 보름이를 교육시키던 분을 만났는데
보름이는 맹인안내견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며 “보름이에게는 잘 된 일이지요.” 그렇게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보름이는 사람을 좋아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놈이라
훈련 중에도 사람만 보면 달려가고
하니스만 풀면 눈알이 팽팽 돌 정도로 사방을 뛰며 난리를 치던 녀석이었다.
그런 성격이니 어쩌면 맹인안내견이 되는 과정이
무던히도 힘들고 곤욕스러웠을 것이다.
치료견 훈련을 다시 받고 있다고 했는데 그 과정은 잘 통과했는지 모르겠네..
그때 맹인안내견을 비롯한
흔히 service dog이라 불려지는 개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인간을 위해 길들여지는 아이들.
이유를 모르는 잦은 이별과 힘든 훈련…
이런 이유로 처음엔 조금 부정적이었으나
요즘은
어차피 이 아이들이 인간과 함께 살 운명이라면
이런 특별한 인연 맺기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려 하고 있다.
최근엔 치료견 등으로 활동하는 녀석들을
유기견 보호서에서 데려와 훈련시켜 선발한다니
어쩌면 이건 인간과 개가 공존하는 또 다른 하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얘기가 많이 샜지만
이 책은 쿠짱의 무심한 듯한 두 눈에 위로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권한다.

또,
이 내용은 작년에 영화 로도 만들어져(재일동포 감독 최양일 씨가 감독이다)
일본과 홍콩 등지에서 호평을 받고 미국에서 리메이크도 한다는데
울 나라엔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전 O.S.T는 들어온 걸로 알고 있는데.
불법으로 다운받아 보기는 싫고
어서 울 나라에서도 DVD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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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무의 고양이방
달나무 지음 / 북키앙 / 200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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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구청에서 집집마다 나눠줬다는 음식물쓰레기 용기를 보면서
길고양이들은 이제 어디서 밥을 얻나?
사는 게 더 고단해 지겠구나
싶었다.
물론 음식물쓰레기 봉투에서 얻는 음식이
양질의 음식도 아니고
가끔 상한 음식으로 배앓이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린 배를 일단 채우기엔
그만한 음식창고도 없을 터였을텐데….

여기 ‘훔친’ 고양이 한 마리와 ‘길’ 고양이 한 마리,
이렇게 두 마리 고양이 가족과 사는
만화가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스노우캣에 열광하지만
(나도 가끔 들러 다이어리를 훔쳐 보고, 그 캐릭터를 좋아라 하긴 하지만^^)
그건 고양이 캐릭터 몸을 빌린 권윤주라는 만화가 자신의 이야기라
스토리엔 별반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달나무라는 만화가의 이야기엔
인간과 고양이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또 자신의 이야기라
솔직하고, 감성적이고, 현실적이면서 때론 비현실적이다.
그게 이 만화의 매력일지니.

비천한 계급 출신인 두 고양이와
‘미유’와 ‘초코봉’의 하녀가 된(이건 자발적인 계급하락이다!) 달나무.
뭐 별반 특별한 이야기기 있는 건 아니다.
엄마들의 인간 아가 키우기 육아일기장처럼
그 두 놈들 때문에
웃고, 울고, 가슴 아팠다가, 속상했다가, 감동 먹는,,,
그저 생활적인 사는 얘기가 전부인데
그게 순정만화식 구성과
작가의 멜랑꼴리한 감성이 합해져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래서 고양이를 만나는 순간이라곤
울 찡이와 산책하다가 골목에서 만나는 길고양이뿐인 나 같은 사람도
순식간에 책을 섭렵하게 만드는 지 모른다.

그리고,
‘생명에 우선 순위가 없는 세상이면 좋겠다..’
는 달나무의 말에도 절대공감!!!하면서.

애묘인이 아니더라도
동물과 더불어 살맞대고 살아본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what’s Michael》의 마이클,
《묘한 고양이 쿠로》의 쿠로.
《동물의사 닥터 스크루》의 나비,
《스노우캣》의 스노우캣
《아즈망가 大王》의 길고양이
……
와는 또 다른 고양이를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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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간 고양이
피터 게더스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개나 고양이,

자기의 인생을 바꿔준 동물들과 살았던 이야기를

글이나 만화로 쓴 책은 많다.

그런 책은 많고,

우리집엔 그런 책들이 가득하며,

많이 읽는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책에 좀 심드렁했는데…



이 책을 또 집어든 이유는

저자가 피터 게더스이기 때문이다.

작가이고, 게다가 방송, 시나리오 작가이면서 랜덤하우스의 편집장이기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상황을

기가 막히게 다르게 표현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기대감은 어느 정도 맞았고, 어느 정도 틀렸다.



그의 글은 솔직하고,

그래서 cool하고, 마치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스피디하게 책장이 넘어간다.

또한 중간중간 예의 그 촌철살인의 메타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터 게더스라도 별 수 없는 게 있었다.

동물들과 살면서 느끼는 감정이란

누구나 종이 한 장 차이였고,

그래서 어떤 표현은 다분히 상투적이고 신파조다.

그런데 그게 더 와 닿은 이유는 뭘까?



게다가

그의 고양이 노튼 시리즈의 천번째인 《파리에 간 고양이》는 

한 마디로 야옹이판 《섹스 앤 더 시티》이다.

사람들이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화려한 뉴요커의 생활을 꿈꾸고,

그 화려한 명품들의 향연을 보며 침 흘리면서도

결국은 네 여자의 우정과 연대감에 감동하는 것처럼,

《파리에 간 고양이》도

뉴욕서 상류층에 속하는 저자의 생활을 엿보는 재미,

그의 쿨한 러브러브 스토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친구인 이야기,

저자를 따라 비행기를(그것도 퍼스트 클래스에!) 밥 먹듯 타는 고양이 이야기는 역시 아무나 들려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허나, 역쉬나 결론은 그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

노튼과 어떻게 사랑했고,

그 사랑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얘기에선 감동이 넘친다.



‘침대에서 손을 뻗는 곳에 노튼이 없는 밤이면 나는 내가 노튼에게 뭐 잘못한 게 없는지 정말로 걱정한다’

‘고양이는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다고 말하면, 그에게 아픈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서 밤을 새보라고 하라’



뒤이어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와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가 나와 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나이 들어 피터를 떠나는 노튼 이야기를 어찌 읽을 수 있을까?

용기가 생기면 그때는 볼 수 있을까?

열두살 찡이와 살아서 그런가, 아직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내 용기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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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기르다 청년사 작가주의 1
다니구치 지로 지음, 박숙경 옮김 / 청년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일본 만화계에서 작가주의 작품을 하는 사람, 다니구치 지로
그의 만화다.
개를 만나고, 기르고, 나이 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그렸다.

단편이다.
짧은 내용 속에 탐탐의 얘기가 있다.
그러나 작가 부부가 개 탐탐을 만나
크고 성장하고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은 이 책에 없다.
이 책에선 오롯이 늙고 죽어가는 탐탐의 모습만을 기록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를 모르지만
그들이 늙어가는 탐탐을 돌보고, 뒷바라지 하는 모습에서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충분히 탐탐과 행복했었는지를 짐작한다.

인연을 맺음은 곧 고통의 시작이다.
사랑은 이별로 가는 시작이고,
소소한 감정의 문제가 모여서 사랑을 이룬다.
생명과 생명이 만나서 이루는 인연은 다 비슷하게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도
사람과 개가 만나도
별반 달라지는 건 없다.

개와 만화가 만나면
주로 스토리는 행복하다
보기만 해도 행복한 객체인 개와
행복을 그리기에 안성맞춤의 기제인 만화가 만났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개도 생명이고
늙고 죽어감은 당연한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다니구치 지로의 시도는 옳았지만
탐탐을 보내는 태도엔 그리 동감되지 않는다.
이 작가에게 탐탐이 어느 정도의 의미였는지가 그대로 느껴지는데
그걸 탓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결국 관계의 문제일진데…작가에겐 책임으로의 관계가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반려동물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의 차이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삶의 각각 다른 위치에 반려동물의 의미를 짓는 법이니까.
그래서 탐탐의 죽음을 보며 둘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씬이 없다는 건 나로선 아쉬운 부분이었다.

“좀처럼 죽어지지가 않아. 좀처럼 갈 수가 없어.”
늙은 탐탐을 보며 이런 말을 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거기에 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할머니도 그렇게 말은 하지만 죽고 싶지 않은 것처럼
건강하게 더 살고 싶은 것처럼
탐탐도 가족들과 더 ‘살아 있고’ 싶었을 게다.
사랑했던 가족과, 행복했던 가족과,,,,,자연이 목숨을 허락할 때까지.

몇 년 전 《뽀삐》라는 독립영화를 봤다.
강아지가 죽고 끝도 없이 슬퍼하는 아들을 보며 엄마가 한 마디 한다.
“개 하나 죽었다고 언제까지 이럴래, 응??”
그러자 아들의 대답.
“뽀삐가 왜 그냥 개야. 뽀삐는 뽀삐지. 엄마는 엄마 죽었는데 그냥 사람이 죽었다고 그러면 좋겠어?”

이런 문제인 게다.
그저 하나의 몸짓이 나에게로 와서 꽃의 되듯이
개는 그냥 개지만
함께 살면 탐탐이 되고, 뽀삐가 되고,,,,,그리고 찡이가 되는 것이다.
울 찡이도 열두살, 나도 두렵지만
내가 내 죽음을 기다리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의 생명이 다른 곳으로 옮아감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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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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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벌써 언제 다 읽은 책인데 이제야 겨우 리뷰를 올린다.
이유는?
아무 생각 없이 후다닥 읽었고,
읽은 후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훈 선생의 책 치고는 이러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이 책은 우화다.
진돗개 보리와 보리가 속한 사회를 통해
사실은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로운 개 보리를 통해
김훈 선생은 인간의 자유로운 삶에 대해 교훈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2005년 한국의 개들이
보리처럼 자유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우화의 은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동화를 좋아하지만
같은 이유로 또 동화를 싫어한다
동화에는 사랑스런 소와 돼지와 개가 등장하지만
현실 속의 소와 돼지와 개는
인간의 식탁에 맛있게 올려지기 위해 학대당하고 살해된다
소와 쇠고기, 돼지와 돼지고기, 개와 개고기를
이분화시키는 동화의 뻔뻔함이 싫다

김훈 선생은
보리 발바닥의 굳은 살을 동경하지만
2005년 한국의 개들은
안락한 집안에서만 자라 굳은살로 단련될 기회가 없던가
식용으로 자라 미처 단련될 틈도 없이 잡아 먹히거나
반면 단단한 굳은 살을 가진 유기견들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선처를 구걸해야 한다.
이는 비단 도시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골개의 운명도 소수를 제외하곤 도시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실이 이렇기에
김훈 선생의 이번 글은 불편했다.
우화를 우화로 볼 줄 모른다고 누군가 핀잔을 줄 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실에서
‘개=자유’의 메타포는 성립되지 않는다.
보리의 모습이 좀 더 현실적이었다면
혹 더 아름다운 은유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중간중간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김훈 선생의 눈부신 문장을 본다. 
개의 눈을 통한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
그 깊이가 부러울 뿐이다.

보리가 말한다
“내가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려있을 때도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고.
나도 진정
인간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아름다운 인간이길 바란다.

역시 예술은 사람을 좀 불편하게 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김훈 선생의 이번 작품은 조금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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