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 ..두덴이 독일 파더보른대학에서 한 시학 강좌 내용을 읽어보면 Schrei(슈라이, 외침)와 Schreiben(슈라이벤, 쓰다)이 나란히 있다. 소리를 봐도 뜻을 봐도 외침과 쓰기는 복잡한 관계에 있다. 하지만 실제로 외치는 소리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조금은 유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뿐이다. 자기가 받고 싶은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소설과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드물다. 많은 사람은 소리 지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눈만 크게 뜬 채 인간이 부서지는 모습을 목도하며 들리지 않는 외침 속에서 죽어가기만 한다. 또 글로 쓰는 대신 정말로 소리를 질러대면 주위에서 정신병 환자로 취급한다. 글이 곧 외침은 아니다. 그러나 글이 외침과 완전히 떨어져버리면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글과 외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두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어원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과정에서 이제는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결합된 것이다.
91~92p. ..유럽도 오래전부터 유럽 문명 밖에 있는 인간, 소위 ‘야만인‘에게는, 잔혹하고 무서운 이미지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평행으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어느 쪽도 아님을 확인하고 ‘문명인‘의 도장을 스스로에게 찍는다. 지금 일본인이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아시아인을 ‘일찍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따뜻한 인간미를 아직 가지고 있는 뒤처진 사람들‘로 단정지으며 사실은 자신들이 차가운 선진국 인간이 됐음을 확인하고 싶을 뿐인 건 아닌가. 나아가 자신들이 했던 식민지 침략, 파괴, 살해의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그들의 ‘따뜻한 인간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슬며시 죄의식을 진정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106p. ..문학을 쓰는 건 항상 귀에 들어오는 말을 이어 붙여서 계속 똑같이 쓰는 것과 반대다. 언어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극한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러면 기억의 흔적이 활성화되어 모어의 오래된 층이 지금 쓰는 언어를 변형한다.
128p.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은 외국어는 언어와 뇌의 관계가 다르다는 점, 시적 발상이라면 일부러 언어의 분류와 배치를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나에게 독일어는 외국어라서 ‘Zelle‘(세포)와 ‘Telefonzelle‘(공중전화 박스)가 같은 장소에 있다. 어원이 같으므로 별로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독일어가 모어인 사람은 대체로 ‘세포‘는 생물학 분야에, ‘공중전화 박스‘는 일상생활 분야에 분류된다. 따라서 뇌에서 둘 사이에 연결선이 없다. 어린 시절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생활에 쫓기고 세상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어른이 되면 연결선이 사라지고 없다.
164p. ..문학이 원본이라 해도 오역처럼 뒤틀림과 공백이 가득하고, 그 공백이 문학을 유동적으로 만든다. 만약 번역이 필요악이라면 문학 역시 필요악이다. 아니, 번역은 필요하지도 않은 악, ‘불필요한 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마노가 쓴 대로 악은 악만의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은 때로는 선 이상이다. 불필요한 악이라면 더욱 좋다.
192p. ...모어 관용어는 레스토랑에서 나온 식사 같은 것이라서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외국어 관용어는 말이 만들어진 과정이 생생히 보이기에 재료가 다 보이는 반찬 같은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무를 넣을 수도 있고 후추를 뿌릴 수도 있다....
197p. ...물론 지금도 해와 달은 있지만 시간을 알리는 도구는 아니므로 때를 뜻하는 ‘나날‘은 일종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나날‘을 ‘해와 달‘로 풀이하듯, 오역으로 느낄 정도로 직역을 하는 것은 우리를 말의 원점으로 되돌린다. 또 오랫동안 비유로만 쓰여서 원점에서 멀어진 노쇠한 말을 다시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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