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1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윤희기.박찬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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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1924년) 

 프로이트는 인간은 긴장, 흥분량을 감소시켜 안정을 추구하는 쾌락원칙을 따르고 있지만, 고통 그 자체가 목표인 것 경우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조히즘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생활 감시하는 파수꾼이 마약을 먹고 행동 불능이 된 상태, 즉 쾌락원칙이 마비된 상태를 본 논문에서 탐구한다.  쾌락원칙에 반하는 비경제적 심리가 있다는 얘기다.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에 대해 죽음본능과 생명본능인 쾌락원칙과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페이너는 '열반원칙'을 들어 흥분의 상태를 무로 돌리는 것, 다시 말하면 유기체의 생물성이 무기체로 돌아가는 것이 안정성을 유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곧 죽음본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본능이 어떠한 변형을 일으키는데, 이 변형의 원천은 리비도이다. 프로이트는 열반원칙이 변형된 것이 쾌락원칙이며, 이 변형의 요소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 요소의 투입으로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질적 요소란 '리듬', '시간의 변화', '자극량의 부침'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전에는 쾌락원칙을 양적요소만 고려했다면 이제는 질적 요소들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요소들을 리비도의 요구를 반영하여 쾌락원칙이 되고, 외부세계의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원칙이 도입된다고 보았다. 

 열반원칙, 쾌락원칙, 현실원칙은 각각의 목적에 따라서 작용할 뿐이고, 열반원칙은 자극의 양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쾌락원칙은 질적인 특성을 고려하고, 현실원칙은 자극의 방출을 지연시키고 긴장으로 인한 불쾌감을 잠정적으로 묵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조히즘의 세 가지 형태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이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먼저 <성감 발생적 > 마조히즘이다. 

이는 보다 생물학적이고, 체질적인 측면의 마조히즘으로 고통과 불쾌로 인한 긴장이 있을 때 리비도의 공감적 흥분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유기체 속에서 리비도가 죽음이나 파괴본능을 만나 무기체적 안정상태로 만들고자 리비도가 파괴 본능을 해롭지 않은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그러한 본능을 외부의 대상으로 돌리고자 한다고 보았다. 그 본능이 정통 사디즘이고, 그 본능의 다른 일정량은 내부에 남아 성적 흥분의 도움으로 리비도적으로 묶이게 되면 그것이 최초의 성감 발생적 마조히즘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성감발생적' 마조히즘은 성적취향의 유래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 여성적 마조히즘 > 의 형태는 주체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성감발생적 마조히즘의 발전 단계에 따라 정신적으로 변한 다는 것을 연구했는데, 그는 그 기원을 토템(아버지)에게 잡혀먹힐 것 같은 공포에 기원하고,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싶은 욕망은 그 공포 뒤에 오는 사디즘적 단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거세공포 후에 '성기기 조직의 침전물'로 마조히즘적 환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성적 마조히즘은 자신을 여성으로 위치시킨다. 남성의 경우 자신을 작고 무력한 어린아이와 같이 취급받기 원하는 환상이 작용한다. 또한 그들은 거세당했고, 성교를 당했으며, 어린 아기를 낳았다는 의미로 여성적 자리에 위치시킨다. 

 세 번째 형태는 <도덕적 마조히즘>이다. 

도덕적 마조히즘은 성감발생과 여성적 마조히즘이 대상을 있는 것과 달리 '고통'그 자체가 문제시 된다. 프로이트는 죽음본능이 내부로 투사된 것이라고 말하고 끝내고 싶지만, 연구를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에게 <무의식적 죄의식>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무의식적 죄의식이란 우리가 '병' 속에 머무려는 고집, 즉 신경증의 고통은 마조히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 “ 한 형태의 고통이 다른 형태의 고통에 의해 대치”되고 있으며, “고통은 일정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깡의 '증상은 다른 증상'에 의해 대체될 뿐이라는 언명은 프로이트의 위 와 같은 언급에 기반하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죄의식'을 '처벌에 대한 욕구'라고 환자에게 말한다면 저항이 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자에게 고통은 그냥 고통이 아니라 주이상스이다. 라깡은 이러한 측면을 환자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힘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적 죄의식을 '양심의 기능'을 하는 초자아의 속성과 연결시킨다. 초자아는 외부세계와 이드의 대변자이지만, 탈성화되면서 직접적인 성적 목표는 벗어나 양심의 기관으로 활동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극복된다고 보았다. 초자아는 감시, 힘, 엄격함, 벌주는 태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분열로 인해 그 가혹함이 증대된다. 초자아는 마치 외부세계의 인물들 처럼 강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대변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개인적 윤리의식, 도덕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배후에는 부모가 있다. 부모의 개인적 의미는 사라지지만 부모의 남겨놓은 이마고는 선생님, 권위자 등의 인물들과 결부되고, 이러한 과정 끝에 내투사가 아닌 외부의 마지막 인물이 세워진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신'과 결부되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 본다면 인간은 '신'을 부모의 이마고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한편, 도덕적 마조히즘은 강력한 억압 속에서 오히려 <죄가 되는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죄를 지어 속죄를 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도덕적 마조히즘은 초자아의 사디즘과 자아의 마조히즘의 결합하여 자신에게 해가되는 일을 수행한다. 탈성화된 초자아는 도덕적 마조히즘의 귀환으로 성애적 요소가 도입되는 것이다. 도덕적 마조히즘의 위험성은 그것이 죽음 본능에서 나온 것이며, 파괴본능이 외부로 향하지 않고 내부에 있는 죽음 본능의 일부와 일치하기 때문에, 주체의 자기파괴 행동 역시 리비도의 만족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마조히즘의 청산 

도덕적 마조히즘은 증상인가? 내 증상의 중심은 마조히즘과 새디즘이 교차 발생이다. 마조히즘의 목표는 결국 리비도의 만족, 주이상스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의식은 고통스럽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 주체가 자신의 고통을 즐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착과 신경증의 경계에 선 인간일 것일까? 잉여향유의 노예인 것일까? 

마조히즘적 경향은 언제나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른 생각이 든다. 내 무의식이 목적하는 바가 자기 파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 뒤에는 자기파괴를 통과해 살아남은 일상의 영웅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언제인가,,, 꽤오래전 <무의식적 죄의식> 에 대해서 생각을 종종했었고, 결론은 원죄가 없다는 것이였다. 나는 이때 부터 초자아와 즉, 양심과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양심이라는 것이 터무니 없게 느껴질 때도 많았고, '내부검열자를 위반하기', 벌은 타자가 줄 수 없다.. 등등의 논리를 만들어 내전이 일어나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결국 자아의 탈을 쓴 초자아가 아니였을까. 자아이상과도 같을 수도 있겠다.  

이제 이 매저키스트 생활도 청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리비도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얘기다. 인생이 많이 남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지도 모르는 일인데 언제까지 내상을 입히면서 나홀로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전을 선언한다. 어쩌면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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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사랑에 관한 정의 중 "사랑은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의 의미를 비로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해석이 완전히 들어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한다.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전환이 라깡의 이 문장에 숨겨져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때 왜 그를 사랑하는지 알지못한다. 그 사랑은 자신의 결여 때문이고, 그 결여를 사랑받는 자가 채워줄 것 같은 것 때문에 욕망하게 된다. 그것은 상대방의 결여를 자신의 결여로 포개는 경우도 마찬가지 일 듯하다. 왜 사랑받는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침내, 사랑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이 곤궁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이 생각한 그 불일치의 결여, 즉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준다. 그것은 환상의 응답이기도 할 것 이다.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거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켠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 P55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그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그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 P56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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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횡단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

  우리는 주이상스를 상실했다와 함께 주이상스를 억압하기 위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가정은 라깡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대전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억압된 주이상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그것이 회귀하는가. 주이상스의 회귀는 우리 삶 속에 구멍을 통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증상' 이 그러하다. 

정신분석과정에서 우리는 증상을 구성해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골몰한다. 기존의 담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구멍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새로운 의미가 분출될 때까지  내담자는 말을 해야 한다. 라깡 정신분석이 기존의 상담과 다른 지점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 구멍을 봉합하지 않는다는 것. 

내담자의 고리타분한 서사가 끝이 나면, 기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이 우리는 꼼짝없이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공백에 마주함은 분석의 시작점이 된다. 여기서의 공백이란 앞서 말한 구멍과는 좀 다른 듯 하다. 환상을 횡단한 내담자가 마주하는 공백은 '무의미'의 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기표연쇄들이 힘을 잃고  무의미로 추락하는 사태이다. 공백의 아가리 속에 우리는 들어간다. 내담자의 실어증은 공백을 마주한 댓가로 우울증을 가져오지만, 분석과정에서 우울증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증상의 원인으로서 대상a에 대한 무의식의 지식을 어느정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간주하는 주이상스를 대타자에게 빼았겼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면, 

대타자는 이미 죽은 대타자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팔루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증상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죽은 대타자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대타자 역시 우리를 심대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볼 수 있는 어머니대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상a 역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욕망의 문제들이 이 두 측면의 대타자와 비롯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공백과 마주함'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즉, 대타자의 억압이 없으면 주이상스도 없으므로 우리 설정 이전의 상태는 공백이 아닌가?

공백의 이동 

  위에서 말한 공백은 환상의 횡단 끝에 만나는 공백이고, 지금 말하는 공백은 우리 삶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으로 구멍과 같다 .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개인이 대타자와의 설정된 관계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데, 이러한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라깡은 말한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조 속에서 공백의 이동이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처럼 기표의 위치에 따라서 상황이 변화하듯이, 우리는 공백을 이동시킨다면 의외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해결 될 수 있지 않을까? 공백의 이동은 나의 구멍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증상의 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어떻게 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될까? 

다시 기표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 없다. 결여의 기표를 도입하여 대타자의 말들로 오염되지 않은 기의들을 생산하는 것이  소소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공백을 지켜야한다. 곧 증상을 사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체의 非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공백의 불안을 견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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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그 사람의 비의미를 의미로 바꾸려는 시도속에 놓여있다.  수많은 욕망의 대상들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의식의 논리에 따른 대상의 선택이지, 의식적 수준의 대상은 아니다. 팔루스로서 파트너는 욕망의 리스트 속에 있지만, 공백의 파트너는 무의식의 욕망의 대상이며, 그러한 욕망의 발생에 대해 의식적 주체의 설명은 빈약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왜 대상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의 의미도 자신의 왜 그 파트너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대상의 무의미는 곧 자신의 무의미와 맞닿아 있다.  


사랑의 매몰은 상상계적 관계 즉 대타자의 주이상스 였던 그 세계에 대한 강한 복귀의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증상으로서의 사랑은 양가감정 속에서 고통스럽고, 일상이 마비될 정도로 집착하기도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것을 멈출 방법을 모른다. 그와 같은 현실은 무의식적으로는 증상을 향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멈추지를 못하고, 그것을 해결할 어떤 언어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통스럽기에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대타자의 언어(팔루스)를 끌어당긴다.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그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그에게 나는 욕망이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며, 참혹할 것이라고.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대사일까? 대타자의 언어인가. 무의식의 논리인가?  이렇게 부인과 억압과 흔들림 속에서 주체의 욕망은 어디에 있는가?  주체는 파트너의 욕망이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행복할까?  우리의 그 공허가 채워질까?  주체는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상대방을 분절한다. 다시 세상의 규범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히스테리증자는 언어로서 사랑이라는 기표를 믿지 못한다. 또 다른 주체는 사랑을 할 때 자신을 마조히즘적 구조를 밀어넣는다. 도착적 사랑의 마조히즘적 구조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대타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랑의 구조는 매우 고통스럽다. 의식적으로는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으면서 무의식은 증상으로 이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에, 벗어나기가 어렵다. 누군가 매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조히즘과 죽음충동의  관계가 나는 밀접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규정을 버리고, 다시 사랑이란 기표를 공백의 기표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랑은 수많은 오염된 말들에, 대타자의 생각에 맞서서  그의 非의미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에서 함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은 정신분석의 사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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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타자의 부흥 

  라깡의 성도착의 구조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자 부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대타자를 살려내는 부흥의 가공을 통한 주이상스의 소환이 도착증자가 목적하는 바이다 . 

도착증자가 부흥 시키려는 대타자는 상징계 대타자가 아니라, 거세 이전의 빗금없는 대타자A이다. 언어의 거세이전 다형적 충동의 세계에서 유아의 신체는 쾌락이 전부인 신체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주이상스의 대상이고, 이 팔루스와 아이는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의  개입으로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와 아기는 서로를 쾌락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야 하고, 아이는 법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어머니 대타자도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거세된다. 죽은 대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머니대타자를 주이상스의 화신으로 만든다. 

신경증자의 상실한 주이상스는 유령과 같은 대상a가 된다. 대상a는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돌출될 뿐, 상실한 것의 보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실패할 뿐이다.  그러나 성도착자는 상실한 주이상스를 불러내는데 성공하여, 쾌락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적극적으로 대체하려고 일종의 '설정'을 마련한다. 페티쉬는 대타자주이상스의 절편을 소유함으로써 살아있는 대타자를 소환하기 위한 미끼다. 빼앗긴 주이상스를 소환하려면 죽은 신을 살려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가 설치하는 무대의 소품은  '스타킹'과 같은 어머니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무한쾌락은 어쩌면 대타자의 장난감이 되고자 하는 협소한 쾌락일 뿐이다. 신경증자에게 대타자는 죽은 신이지만, 도착증자에게 대타자는 존재하는 신이 된다.  

신경증자와 도착증자 사이 

   신경증자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채 욕망 속에 던져진다. 도착증자는 욕망의 환유를 차단하는 기예를 발휘하여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자리에 가고자 한다. 

신경증자에게 관음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도착증자에게 관음증은 수치심을 초과하는 쾌락이다. 신경증자는 '응시'의 충동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승화 될 수 도 있고, 불안을 야기하는 공포일 수도 있지만, 도착증자는 관음을 관음하거나, 노출증을 통해서 대타자의 응시를 적극적으로 불러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응시' 즉, '여고생들의 눈들' 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 신체의 생물성(신체사물의 존재감)'이다. 

  신경증자들도  흔히 '관종'이라 불리는 형태로 응시의 쾌락을 즐기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버지에 법에 위반되지 않기에 도착증자의 쾌락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자에게 "도착적이다"라는 말은 수치심을 초과하여 적극적으로 '물신'을 향유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도착증자는 '법'을 초과해야만 그들의 쾌락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거세되지 않은 대타자가 살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이상스는 누구의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대타자에 의해 그들 역시 소외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쾌락은 그들의 것이 아닌 대타자의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라깡적 윤리에 비추어 보면 도착증자의 역시 대타자에 종속되어 있는 비주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신경증자도 도착증자도 모두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해서 그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타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우리 모두는 '도착증자'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우리가 '문명'을 물신처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자들은 대타자의 팔루스를 물신으로 삼는다. " 신경증자는 문명(아버지판본)을 통해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므로 우리 모두가 도착증자(백상현 강의)"라는 의미이다.  팔루스의 차단으로 보자면 성도착자가 월등할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성도착자가 세운 물신이 전례없는 새로운 팔루스라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끊임없이 죽은 대타자의 망령과 살아있는 대타자를 왔다갔다하는 불안속에서 가끔 정박하여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이 멈춘듯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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