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 사람의 비의미를 의미로 바꾸려는 시도속에 놓여있다. 수많은 욕망의 대상들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의식의 논리에 따른 대상의 선택이지, 의식적 수준의 대상은 아니다. 팔루스로서 파트너는 욕망의 리스트 속에 있지만, 공백의 파트너는 무의식의 욕망의 대상이며, 그러한 욕망의 발생에 대해 의식적 주체의 설명은 빈약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왜 대상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의 의미도 자신의 왜 그 파트너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대상의 무의미는 곧 자신의 무의미와 맞닿아 있다.
사랑의 매몰은 상상계적 관계 즉 대타자의 주이상스 였던 그 세계에 대한 강한 복귀의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증상으로서의 사랑은 양가감정 속에서 고통스럽고, 일상이 마비될 정도로 집착하기도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것을 멈출 방법을 모른다. 그와 같은 현실은 무의식적으로는 증상을 향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멈추지를 못하고, 그것을 해결할 어떤 언어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통스럽기에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대타자의 언어(팔루스)를 끌어당긴다.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그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그에게 나는 욕망이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며, 참혹할 것이라고.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대사일까? 대타자의 언어인가. 무의식의 논리인가? 이렇게 부인과 억압과 흔들림 속에서 주체의 욕망은 어디에 있는가? 주체는 파트너의 욕망이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행복할까? 우리의 그 공허가 채워질까? 주체는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상대방을 분절한다. 다시 세상의 규범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히스테리증자는 언어로서 사랑이라는 기표를 믿지 못한다. 또 다른 주체는 사랑을 할 때 자신을 마조히즘적 구조를 밀어넣는다. 도착적 사랑의 마조히즘적 구조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대타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랑의 구조는 매우 고통스럽다. 의식적으로는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으면서 무의식은 증상으로 이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에, 벗어나기가 어렵다. 누군가 매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조히즘과 죽음충동의 관계가 나는 밀접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규정을 버리고, 다시 사랑이란 기표를 공백의 기표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랑은 수많은 오염된 말들에, 대타자의 생각에 맞서서 그의 非의미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에서 함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은 정신분석의 사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