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과 타자성 -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로렌초 키에자 지음, 이성민 옮김 / 난장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의 독자들에게 9-10P 

2.

 주체성과 타자성은 여전히 내가 라깡과 그 너머에 대해 행하고 있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따. 돌이켜 보면 애초 해석적 차원에서 전개한 이 책의 세 가지 상호연관된 쟁점이 내게는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변즈업을 통한 초월론적인 것의 사후 발생, 기표의 물질성, 빗금쳐진 실재로서의 죽지는-않은 것. 

 당연히  이책은 이 모든 물음이 수렴되는 교차점인 듯한 욕망과 충동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라깡, 그리고 라깡에게 고무된 사유로부터 '초월론적 유물론'을 끌어내려한 용감한 시도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틀거렸다. 이른바 욕망에 대한 충동이 그 어떤 우선성도 유물론적인 의제를 손상시킬 수 밖에 없다. 셸링에 대한 반-관념론적 독해에 기반한 이론으로는 라깡의 진정한 유물론을 정당하게 대우할 수 없다. 언젠가 본인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라깡만이 철학에 공헌한 혁신이 있다면,

 

"기표, 그것은 언어안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물질이다. "

라는 언어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다. 달리 말해서 이른바 죽지는-않은 자연 자체( 그 불균형한 무근거성에서 실재의 원초적 근거를 구성할 셸링 식의 절대자)의 잠재성에서 곧바로 충동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런 입장은 후자가 인간의 로고스가 지닌 잠재성의 사후 효과를 통해서만 하나의 잠재성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과 (궁극적으로 언제나 죽음충동인) 충동은 서로 관계하는가?

 이 책은 욕망이란 상징적 질서 속의 실재적 결여인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 즉 욕망이란 상징적 가능성과 그 외연이 똑같은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에 자주 기댄다. 죽음충동도 이와 똑같은 실재적 결여를 마주한다. 스스로 되돌아가려고 열망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죽지는- 않은 실재의 잔여물로서 말이다. 이런 조건은 환상 속에서 욕망을 지탱하는 끈질긴 반복과 등가적이다. 

세미나5권에서 라깡이 말했듯이 충동은 욕망에 주어지는 전문용어이다.... 말이 욕망을 고립, 파편화시키며, 욕망으로 하여금 그 목적과 비절합적 문제적 관계를 맺도록 하는 한 말이다. 
  이 책에는 이질적이만 그 이론적 틀을 충실히 보존한는 용어법을 채택해 본다면 욕망과 충동의 정확한 중첩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정식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욕망이 일관적인 '상징의 세계'(인간의 유사-환경으로서의 언어)에 내속적인 존재론적 비일관성의  둘레를 선회한다면, 충동은 선-상징적 실재(즉, 죽지는 -않은 자연)의 선-존재론적인 순수 비일관성과 연계된다고 말이다. 그것도 단, 존재론적 비일관성을 통해서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지같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때는 나의 배설물이였던 글들, 그리고 cartel에 참여하면서 쓰게된 발제문들, 많은 메일, 짧은 리뷰들, 그리고 수많은 업무페이퍼.. 

사실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환유한다. 그 생각들을 지면에 옮기는 작업을 하게되면 아무것도 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머리 속의 쓰레기를 받아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발화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오물을 정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이다. 내 손은 오물을 거른다.  생각이 말이 되기 전에 글을 쓰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이 지면에 놓이게 된다. 그 글들은 무의식적으로 발화 속에 섞인다. 나는 내 글을 모방하여 말하는 것 같다. 생각이 먼저 있고, 글이 나중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발화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말보다 글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맴도는 생각을 쓰면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진전된 생각들을 발화하게 되니, 이것 역시 무의식을 바꾸는 좋은 방도가 되지 않을까. 말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먼저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글을 쓰는지.. 나는 그냥 쓰면서 생각을 한다. 생각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쓰다보면 써지는데, 이렇게 스크린을 마주하기 까지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또 떠오른 생각은 나의 글과 말투의 갭차이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말투를 그대로 글로 옮길 수가 없고, 글의 투를 현실로 옮기기도 어렵다. 평소 농담반 진담반의 어법을 사용하지만 글은 제법 진지하다. 여기서 분열의 상황이 드러난다고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그런데 정신분석은 어쩌면 글이 말이 되는 경험과 비슷한 듯 하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하나의 무의식'만 그 공간에 존재하는 듯 했다. 말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의 분열를 하나로 수렴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이 글이 아니라 말을 하는데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마치 자신이 한덩어리와 같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그때의 덩어리가 흩어졌지만, 글쓰기라는 임상이 나에게 남아있다. 다시 쓰기와 읽기에 집중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1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윤희기.박찬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1924년) 

 프로이트는 인간은 긴장, 흥분량을 감소시켜 안정을 추구하는 쾌락원칙을 따르고 있지만, 고통 그 자체가 목표인 것 경우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조히즘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생활 감시하는 파수꾼이 마약을 먹고 행동 불능이 된 상태, 즉 쾌락원칙이 마비된 상태를 본 논문에서 탐구한다.  쾌락원칙에 반하는 비경제적 심리가 있다는 얘기다.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에 대해 죽음본능과 생명본능인 쾌락원칙과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페이너는 '열반원칙'을 들어 흥분의 상태를 무로 돌리는 것, 다시 말하면 유기체의 생물성이 무기체로 돌아가는 것이 안정성을 유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곧 죽음본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본능이 어떠한 변형을 일으키는데, 이 변형의 원천은 리비도이다. 프로이트는 열반원칙이 변형된 것이 쾌락원칙이며, 이 변형의 요소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 요소의 투입으로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질적 요소란 '리듬', '시간의 변화', '자극량의 부침'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전에는 쾌락원칙을 양적요소만 고려했다면 이제는 질적 요소들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요소들을 리비도의 요구를 반영하여 쾌락원칙이 되고, 외부세계의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원칙이 도입된다고 보았다. 

 열반원칙, 쾌락원칙, 현실원칙은 각각의 목적에 따라서 작용할 뿐이고, 열반원칙은 자극의 양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쾌락원칙은 질적인 특성을 고려하고, 현실원칙은 자극의 방출을 지연시키고 긴장으로 인한 불쾌감을 잠정적으로 묵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조히즘의 세 가지 형태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이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먼저 <성감 발생적 > 마조히즘이다. 

이는 보다 생물학적이고, 체질적인 측면의 마조히즘으로 고통과 불쾌로 인한 긴장이 있을 때 리비도의 공감적 흥분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유기체 속에서 리비도가 죽음이나 파괴본능을 만나 무기체적 안정상태로 만들고자 리비도가 파괴 본능을 해롭지 않은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그러한 본능을 외부의 대상으로 돌리고자 한다고 보았다. 그 본능이 정통 사디즘이고, 그 본능의 다른 일정량은 내부에 남아 성적 흥분의 도움으로 리비도적으로 묶이게 되면 그것이 최초의 성감 발생적 마조히즘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성감발생적' 마조히즘은 성적취향의 유래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 여성적 마조히즘 > 의 형태는 주체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성감발생적 마조히즘의 발전 단계에 따라 정신적으로 변한 다는 것을 연구했는데, 그는 그 기원을 토템(아버지)에게 잡혀먹힐 것 같은 공포에 기원하고,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싶은 욕망은 그 공포 뒤에 오는 사디즘적 단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거세공포 후에 '성기기 조직의 침전물'로 마조히즘적 환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성적 마조히즘은 자신을 여성으로 위치시킨다. 남성의 경우 자신을 작고 무력한 어린아이와 같이 취급받기 원하는 환상이 작용한다. 또한 그들은 거세당했고, 성교를 당했으며, 어린 아기를 낳았다는 의미로 여성적 자리에 위치시킨다. 

 세 번째 형태는 <도덕적 마조히즘>이다. 

도덕적 마조히즘은 성감발생과 여성적 마조히즘이 대상을 있는 것과 달리 '고통'그 자체가 문제시 된다. 프로이트는 죽음본능이 내부로 투사된 것이라고 말하고 끝내고 싶지만, 연구를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에게 <무의식적 죄의식>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무의식적 죄의식이란 우리가 '병' 속에 머무려는 고집, 즉 신경증의 고통은 마조히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 “ 한 형태의 고통이 다른 형태의 고통에 의해 대치”되고 있으며, “고통은 일정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깡의 '증상은 다른 증상'에 의해 대체될 뿐이라는 언명은 프로이트의 위 와 같은 언급에 기반하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죄의식'을 '처벌에 대한 욕구'라고 환자에게 말한다면 저항이 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자에게 고통은 그냥 고통이 아니라 주이상스이다. 라깡은 이러한 측면을 환자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힘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적 죄의식을 '양심의 기능'을 하는 초자아의 속성과 연결시킨다. 초자아는 외부세계와 이드의 대변자이지만, 탈성화되면서 직접적인 성적 목표는 벗어나 양심의 기관으로 활동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극복된다고 보았다. 초자아는 감시, 힘, 엄격함, 벌주는 태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분열로 인해 그 가혹함이 증대된다. 초자아는 마치 외부세계의 인물들 처럼 강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대변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개인적 윤리의식, 도덕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배후에는 부모가 있다. 부모의 개인적 의미는 사라지지만 부모의 남겨놓은 이마고는 선생님, 권위자 등의 인물들과 결부되고, 이러한 과정 끝에 내투사가 아닌 외부의 마지막 인물이 세워진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신'과 결부되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 본다면 인간은 '신'을 부모의 이마고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한편, 도덕적 마조히즘은 강력한 억압 속에서 오히려 <죄가 되는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죄를 지어 속죄를 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도덕적 마조히즘은 초자아의 사디즘과 자아의 마조히즘의 결합하여 자신에게 해가되는 일을 수행한다. 탈성화된 초자아는 도덕적 마조히즘의 귀환으로 성애적 요소가 도입되는 것이다. 도덕적 마조히즘의 위험성은 그것이 죽음 본능에서 나온 것이며, 파괴본능이 외부로 향하지 않고 내부에 있는 죽음 본능의 일부와 일치하기 때문에, 주체의 자기파괴 행동 역시 리비도의 만족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마조히즘의 청산 

도덕적 마조히즘은 증상인가? 내 증상의 중심은 마조히즘과 새디즘이 교차 발생이다. 마조히즘의 목표는 결국 리비도의 만족, 주이상스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의식은 고통스럽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 주체가 자신의 고통을 즐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착과 신경증의 경계에 선 인간일 것일까? 잉여향유의 노예인 것일까? 

마조히즘적 경향은 언제나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른 생각이 든다. 내 무의식이 목적하는 바가 자기 파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 뒤에는 자기파괴를 통과해 살아남은 일상의 영웅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언제인가,,, 꽤오래전 <무의식적 죄의식> 에 대해서 생각을 종종했었고, 결론은 원죄가 없다는 것이였다. 나는 이때 부터 초자아와 즉, 양심과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양심이라는 것이 터무니 없게 느껴질 때도 많았고, '내부검열자를 위반하기', 벌은 타자가 줄 수 없다.. 등등의 논리를 만들어 내전이 일어나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결국 자아의 탈을 쓴 초자아가 아니였을까. 자아이상과도 같을 수도 있겠다.  

이제 이 매저키스트 생활도 청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리비도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얘기다. 인생이 많이 남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지도 모르는 일인데 언제까지 내상을 입히면서 나홀로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전을 선언한다. 어쩌면 휴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깡의 사랑에 관한 정의 중 "사랑은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의 의미를 비로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해석이 완전히 들어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한다.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전환이 라깡의 이 문장에 숨겨져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때 왜 그를 사랑하는지 알지못한다. 그 사랑은 자신의 결여 때문이고, 그 결여를 사랑받는 자가 채워줄 것 같은 것 때문에 욕망하게 된다. 그것은 상대방의 결여를 자신의 결여로 포개는 경우도 마찬가지 일 듯하다. 왜 사랑받는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침내, 사랑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이 곤궁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이 생각한 그 불일치의 결여, 즉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준다. 그것은 환상의 응답이기도 할 것 이다.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거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켠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 P55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그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그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 P56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의 횡단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

  우리는 주이상스를 상실했다와 함께 주이상스를 억압하기 위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가정은 라깡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대전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억압된 주이상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그것이 회귀하는가. 주이상스의 회귀는 우리 삶 속에 구멍을 통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증상' 이 그러하다. 

정신분석과정에서 우리는 증상을 구성해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골몰한다. 기존의 담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구멍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새로운 의미가 분출될 때까지  내담자는 말을 해야 한다. 라깡 정신분석이 기존의 상담과 다른 지점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 구멍을 봉합하지 않는다는 것. 

내담자의 고리타분한 서사가 끝이 나면, 기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이 우리는 꼼짝없이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공백에 마주함은 분석의 시작점이 된다. 여기서의 공백이란 앞서 말한 구멍과는 좀 다른 듯 하다. 환상을 횡단한 내담자가 마주하는 공백은 '무의미'의 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기표연쇄들이 힘을 잃고  무의미로 추락하는 사태이다. 공백의 아가리 속에 우리는 들어간다. 내담자의 실어증은 공백을 마주한 댓가로 우울증을 가져오지만, 분석과정에서 우울증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증상의 원인으로서 대상a에 대한 무의식의 지식을 어느정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간주하는 주이상스를 대타자에게 빼았겼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면, 

대타자는 이미 죽은 대타자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팔루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증상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죽은 대타자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대타자 역시 우리를 심대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볼 수 있는 어머니대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상a 역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욕망의 문제들이 이 두 측면의 대타자와 비롯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공백과 마주함'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즉, 대타자의 억압이 없으면 주이상스도 없으므로 우리 설정 이전의 상태는 공백이 아닌가?

공백의 이동 

  위에서 말한 공백은 환상의 횡단 끝에 만나는 공백이고, 지금 말하는 공백은 우리 삶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으로 구멍과 같다 .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개인이 대타자와의 설정된 관계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데, 이러한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라깡은 말한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조 속에서 공백의 이동이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처럼 기표의 위치에 따라서 상황이 변화하듯이, 우리는 공백을 이동시킨다면 의외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해결 될 수 있지 않을까? 공백의 이동은 나의 구멍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증상의 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어떻게 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될까? 

다시 기표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 없다. 결여의 기표를 도입하여 대타자의 말들로 오염되지 않은 기의들을 생산하는 것이  소소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공백을 지켜야한다. 곧 증상을 사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체의 非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공백의 불안을 견디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