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적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이인휘형은 말이 많다. 그 말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열정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안재성형은 말이 없다. 그의 침묵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열정 또한 사람에 대한 것이다. 이인휘형은 바쁜 사람이다. 처음에 그가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냉소했으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게 벌써 6년 전 이야기다. 지금 이인휘형은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자유실천위원회 위원장으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 안재성형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일상의 노동 속에 움크려있다가 어느 샌가 소설을 써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 둘은 최근 󰡔내 생의 적들󰡕과 󰡔경성 트로이카󰡕라는 책을 냈다. 하나는 일인칭 주인공시점의 경어체로 시종일관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전지적 작가시점의 냉냉한 평어체이다. 둘 다 보통 사람들이 쓰기에는 불가능한 소설을 썼다.

이인휘형이 처음 자신의 소설의 초고를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경어체의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장편소설이 나올 수 있을지 나는 의심했다. 그러나 끝까지 소설은 경어체를 지키고 있었다. 불가능한 시도지만 이인휘형은 가능하게 만들었다. 놀라웠다. 안재성형의 소설은 조선공산주의운동사의 본령을 다루고 있다.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인 이재유, 이현상, 김상룡, 이주하 박헌영 등 일제 치하의 쟁쟁한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소설을 통해 살아났다. 남부군의 이현상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박헌형을 제외하고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소설은 진행되고 있으나 일제치하의 사회주의운동사가 이처럼 총체적으로 조명되기는 아마도 이 소설이 처음일 것이다. 불가능한 시도지만 안재성형은 가능하게 만들었다. 놀라웠다.

이 두 형의 특징은 노동과 노동운동에서 한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후일담 문학이라는 형태를 통해 7-80년대의 격동기를 다루어왔느나 대부분의 소설은 사상적 퇴조기에 등장하는 ‘개인’이라는 화두에 주목했던 반면, 이 둘은 역사의 무거움을 그대로 지금까지 밀어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이 두 소설가로 인해 역사는 다시금 되살아나 우리에게 무거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세월이 변했다고? 무엇이 변한 것인가? 살기 좋아졌다고? 누가 살기 좋아진 것인가?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있고, 그로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번도 반도를 떠나지 않고 투쟁해온 사람들이 비참한 생애를 살다가 생을 마감했거나 지금도 비참한 생을 유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역사는 얼마나 변한 것인가?

두 소설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곡법을 택한다. 변방에서 변죽을 울리지 않고, 중심에서 세상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벗어날 길을 잃게 된다. 도피처를 잃게 된다. “이곳이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 보라! 여기에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추어라!”


존 스튜어드 밀은 󰡔자유론󰡕에서 “전체 일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자유의 권리는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유에는 당연히도 사상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사상적으로 자유로운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남북한을 통털어 사상의 자유를 온전하게 누려본 적이 없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의 쟁취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온전한 역사의 복원인 것이다. 권력에 의하여 조정되고 조절되는 불구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히 누려야할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싸움의 격발장치가 󰡔내 생의 적들󰡕과 󰡔경성 트로이카󰡕이다.


󰡔내 생의 적들󰡕은 김광훈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아주 평범했던 한 사람이 어떻게 국가보안법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무력하기만 했던 주인공이 어떻게 싸움의 대열에 나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적 결말의 낙관성이 치기어린 것이 아님은 싸움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삶의 현실이 주인공을 넉넉히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소망이 아니라 역사의 소망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세상은 이미 환하게 밝은 아침으로 변해 있습니다. 창 밖을 보니 나무들의 몸에서 연초록 새순들이 움트고 있습니다. 이제 곧 꽃눈처럼 활짝 피어날 저 소중한 생명들. 나는 그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내 눈이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그들의 속삭이는 소리를 듣습니다. 생명의 온기로 가득찬 노래가 아침을 눈부시게 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도 그 뜨임과 열림은 싸우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 뜨임과 열림은 아픔과 각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 아픔과 각성을 위해 우리는 󰡔경성 트로이카󰡕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생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왔던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생을 통해서 자신의 열망을 끝까지 밀고 갔던 사람들, 모진 고문과 투옥생활, 뼈를 깎는 추위와 아픔, 가난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파괴되어갔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살아있어 물리적 생애의 마감을 조용히 준비하는 그들과 손가락을 걸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경성 트로이카의 생존인물 이효정 여사(지금은 돌아가셨다)는 같은 생존자 이병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병희 아주머니, 참 이상해. 요즘 들어 그 애들의 얼굴이 더 선명해지는 건 왜일까? 보고 싶어. 내가 죽을 때가 된 걸까? 너무나 보고 싶어. 그 애들이 아직도 이북에 다 살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정말로 너무너무 보고 싶어…….”


이효정 여사가 보고 싶은 것이 옛동료만이었을까? 나는 책을 덮고 밀의 󰡔자유론󰡕을 다시 읽는다.


“거짓과는 달리 진리는, 오직 진리만이 지하 감옥과 화형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진리를 향한 인간의 열정이 뜨거운 것은 아니다. 법적 제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사회적 제재라도 충분히 가해지기만 하면 진리나 거짓을 향한 열정은 중단되고 만다. 진리가 가진 진정한 이점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생각이 옳다고 치자. 이 진리는 한 번, 두 번 또는 아주 여러 번 어둠에 묻혀버릴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때로는 좋은 환경을 만나 박해를 피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모든 박해에 맞서 싸워 이길 만한 힘을 가지게 될 때까지, 그것을 거듭 어둠 속에서 태양 아래로 끄집어내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이것이 진리가 가진 힘이라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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