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시선 442
백무산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무산시인은 나에게는 적어도 예언자였(). 대학시절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시대의 징후를 감지하였다. 1988년에 쓴 만국의 노동자여(청사)1990년에 쓴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를 읽으며 노동운동의 앞길을 상상할 수 있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이후, 당시 전위적 운동권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에도, 90년대 그 운동권의 몰락기에도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버팀목 중 하나가 백무산의 시집이었다.(1996인간의 시간(창비), 1999길은 광야의 것이다(창비) ) 그후 삶의 나침반 같은 것이 필요할 즈음에 내 손에는 백무산의 시집이 들려있었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 어느덧 2020, 백무산의 첫시집으로부터 32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는 백무산의 시를 신뢰한다. (,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이 시기에 몰락하거나 변절하거나 지지부진해졌던가?) 그의 시는 늘 갱신되며 진화(?)한다. 초기 자본의 폭력성과 노동의 전망을 노래한 시들은 이제 삶의 근원과 생태적 문제로 확장되어 커다란 울림을 준다. 이번에 5년만에 출간된 신간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 2020)도 예외는 아니다. 몰락한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아니라 치열하게 탐구하는 생명사상을 예감하게 한다. 백무산은 65세가 된 나이에도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며 변방에서 새로운 시간의 축을 구축하고 있다.

시집을 요약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기에 이번 시집에 나와 있는 시간과 관련된 구절만 살짝 언급하자면, 그는 인류 최초의 문자를 외상 장부라고 말한다.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은/하늘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도/지모신에게 올리는 기도문도/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도 아니다/곡몰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였다시집 처음에 쓰여진 이 시를 읽으며 화들짝 놀란다. 원시의 시간을 지우고 글을 쓰는 문명의 시간으로 돌입하게 된 순간이 바로 우리가 노예가 된 시간이다. 그 시간은 시간과 강요된 망각과 말살의 힘과/역사가 지워버린 허공의 시간이기에 그는 이 시간을 이길 수 있는 늑대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러한 망각과 말살의 시간은 멈추어야 하고, 새로운 축의 시간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 전환을 위해 우선 해야할 일이 멈춤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회개(悔改, 메타노이아)인데, 잘못된 시간의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행위가 바로 메타노이아이다. 왜 멈춰야하는가? (해석, 문법, 언어)로는 깨어나게 할 수 없는 알을 품어야 하기 때문이다. 품는 행위는 질주가 아니라 멈춤이고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지의 힘에 도달한다. 새로운 생명을 꿈꾼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정지의 힘> 전문.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축의 시간> 부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