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Art Guide) 11
스테파노 추피 지음, 김희정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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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랑과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불거지는 치명적인 욕망 없이 예술은 성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연이 빚어내는, 장엄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운 풍경의 감동에도 압도되어 찬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모방조차 불허하는 신의 예술에 속한다. 인간의 예술은 무엇을 어떤 형태로 창조하든 그 주체인 인간의 그림자를 온전히 배제할 수 없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생애는 찰나처럼 덧없고,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 비하면 인간의 족적은 티끌보다 보잘것없지만, 예술은 인간이 존재했던 시공을 특별하게 포착하여 영원으로 남긴다. 먼지처럼 허공에서 스러질 인간 삶의 드라마가 미술이 되고, 음악이 되고, 문학이 되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스테파노 추피의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는 인간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인간의 삶에서 모든 드라마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될까? 일단 단 한 사람만으로는 어떤 드라마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히고설킨 관계가 드라마의 시작점이다.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바탕에는 그를 향한 보편적인 의미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 연인을 향한 에로스는 물론 자식에 대한 부모의 내리사랑, 형제와 자매에 대한 우애, 친구와의 우정부터 함께 동료애, 동지애, 전우애, 사제지정, 애국심…… 심지어 그 대상이 돈과 물질이든 영육의 파멸을 이끌든 사람을 움직여 삶의 무대에 세우는 것은 사랑뿐이다. 사랑을 자양분으로 다른 모든 욕망들이 부풀어 오른다. 사랑했기에 뜨거운 눈빛, 부드러운 키스, 숨 막히는 포옹, 강렬한 애무, 순결과 헌신을 맹세하는 충실한 서약과 결혼, 부부로 아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는 연인의 미래는 달콤하고 향기롭고 장밋빛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사랑했기에 쓰라린 배신은 폭력적인 분노를 일으키고, 극심한 질투심과 수치심에 사로잡히며, 자신이 더는 가질 수 없는 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사랑의 대상이 엇갈리면 사랑의 모든 행위는 불쾌한 폭력으로 강제되고 만다.

스테파노 추피는 사랑의 두 얼굴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순간도, 사랑의 고통에 일그러진 순간도 인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해 온 모든 절정의 순간순간들이 화가의 시선에 사로잡혀 붓끝으로 재탄생했다. 그 순간순간들은 화가의 캔버스에 담기지 않았더라면 시간의 무심한 단층 속에 덧없이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화가들은 사랑의 가장 밝은 빛과 욕망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포착하여 인간의 진실에 가닿으려 했다. 때론 각 시대와 문화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신화와 성서 이야기로 가장하지만 결국 사랑과 욕망에 울고 웃는 인간사를 드러내고자 했음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가 흥미로운 것은 베일, 모피, 편지, 침대 같은 소품들이 그림의 주제를 어떻게 증폭하는지를 콕 짚어준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서 사소하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들을 직접 표시하여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데, 이것은 화가가 은밀하게 숨겨놓은 상징들(혹은 기호나 코드)이라 개안(開眼)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책의 형식에 따른 한계 탓에 좀더 깊이 있는 설명이 아쉽다면 박제의 친절한 예술서를 추천한다. 스테파노 추피가 그림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디테일까지 감상자에게 환기시키듯, 박제는 화폭에 그려졌다면 크든 작든 모든 것을 성실하게 읽어낸다. 스테파노 추피는 퐁텐블로 화파가 그렸다고만 전해지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자매」를 단순히 ‘레즈비언(235쪽)’으로 설명하는 데 비해 박제는 붉은 커튼, 가브리엘이 왼손으로 우아하게 들고 있는 반지, 자매가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은 가브리엘의 젖꼭지, 가브리엘과 자매 사이로 보이는 시녀, 그 시녀의 바느질과 붉은 옷, 초록 벨벳으로 덮어놓은 관 등을 통해 앙리 4세의 정부였던 가브리엘의 비극적인 운명에 이른다(『오후 네 시의 루브르』 277~283쪽).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를 ‘레즈비언’이라는 주제에 포함한 것도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오히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키스」(35쪽)나 「침대」(106쪽)를 옮겨 오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도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가 대체로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사랑과 욕망’ 그림들을 분류한 주제어에 대해 간혹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며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와 같이 태어나고 그 존재가 본질적으로 인간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고 변화하지만 언제나 우리 삶 속에 가장 강력하고 진실한 일부로 남는다.” (21쪽)
“키스는 진실을 드러내고 서로 다른 두 존재를 조화시키는 신비로운 힘을 지녔다. 이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자 없이 서로의 사랑만이 충만한 곳으로 이끄는 문이다.” (31쪽)
“결혼은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이라는 두 가지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198쪽)
“질투의 감정은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주된 원인이 될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드라마의 토대가 된다.” (203쪽)
“뱀파이어란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의 모슨 속으로 치닫는 병적인 사랑의 전형이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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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김영사 모던&클래식
존 스타인벡 지음, 안정효 옮김 / 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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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인터넷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말 중에 천조국이라는 것이 있다. 원래 의미대로라면 제후의 나라가 천자(天子)의 나라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었겠지만 인터넷상에서의 천조국은 미국을 말한다. 국방 예산이 천조가 넘는다―실제 천조가 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청난 금액이다―는 것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핏 세계 경찰국가임을 자임해 왔던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중 하나이겠지만 다른 것에서도 미국, 아메리카에 대한 세계의 동경―현재는 많이 줄어든 것 같지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최대의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는 바로 미국 그 자체이다. 아름다운 나라가 아닌 아메리카 합중국인 미국이 만들어지면서 흘린 피의 역사를 아는 것, 즉 미국의 과거를 이해해야만 미국의 현재 모습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의 삶은 그 형태만 바뀐 채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는 약속의 땅 아메리카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은 과거 아메리카의 역사로 현재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아메리카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이 책이 50여년전에 쓰여졌을지라도 현재의 미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의 첫 장 ‘E Pluribus Unum(여럿에서 하나)’는 아메리카의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알려준다.

“아메리카는 그냥 생겨나지 않았다. 400년에 걸친 고된 노동과, 피 흘림과, 외로움과, 공포가 이 땅을 창조했다. 우리들은 아메리카를 생산해 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온갖 인종에 뿌리를 박고, 온갖 피부 빛깔로 얼룩지고, 겉으로 보기에는 인종상의 무정부 상태를 이루는 새로운 종족 아메리카인으로 태어났다. () ‘여럿에서 하나’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했다.”


아메리카의 역사는 투쟁과 피의 역사다. 토착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피를 흘렸고, 연합체의 국가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남과 북이 흘린 피 위에 세워진 것이 아메리카다. 현재의 모습이라고 다를까. 인종에 상관없이 총을 든 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고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아메리카인들은 서로 힘을 모으면서도 경계하고, 평등을 외치지만 어떤 민족보다도 차별이 심하고 넘치는 풍요 속에서도 빈곤은 극심하다. 존 스타인벡은 아메리카를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우리나라를 대입해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피의 역사, 불평등, 차별. 과거의 아메리카나 현재의 아메리카나 현재의 한국이나 본질적인 모습이 다를 것이 무얼까. 작가는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서로에게 피를 흘리고 실수를 할지라도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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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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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무심코 엄마 손을 내려다봤다. 코끝이 시큰하게도 내가 알던 손이 아니었다. 내가 어른으로 성장한 시간만큼 엄마 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이 불시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내가 철없이 깨닫지 못한 그 세월이 훌쩍 지나도록 가중된 노동의 고된 흔적도 오롯이 아로새겨졌다. 엄마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면 손을 감추느라 여념이 없다. 거무튀튀하게 그을고 까칠까칠하게 메마르고 손마디마다 옹이가 져서 뒤틀린 손이 남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손은 가족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느라,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집안을 일으키느라, 두 어머니를 모시고 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느라 안 해본 일이 없다. 얼굴에 짙게 팬 주름은 화장으로 옅어지게 위장할 수 있지만, 손에 새겨진 삶의 이력은 감출 수 없다. 자기 손이 그토록 거칠고 앙상해지는 줄도 모른 채 엄마가 고단하게 감당해 온 생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얼굴이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손은, 그래서 슬프고 가엾고 마음의 뿌리까지 뒤흔든다.

『16인의 반란자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을 사비 아옌이 인터뷰하고 킴 만레사가 그 장면을 흑백사진으로 남긴 책이다. 이 책이 훌륭한 점은 사비 아옌의 인터뷰가 공식적, 형식적, 의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생활에 밀착하여 작가가 한 개인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작가의 일상을 뒤따르며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어떻게 문학적인 배경을 형성했는지, 작가가 자기 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인지, 작가의 문학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인터뷰집의 한계 내에서 충실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책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손을 담아낸 킴 만레사의 흑백사진 덕분이다. 작가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포착한 양질의 사진들 중에서도 손 사진은 유난히 마음을 울린다.

작가들마다 특유의 무의식적인 손짓이 그 순간 영원히 멈춘 듯 흑백사진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어렴풋하게 떠올라 망막에 또렷하게 각인된다. 그 손은 반지를 끼고 있기도 하고, 술잔을 들기도 하고, 담배를 쥐기도 하고, 깍지를 끼기도 하고,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주름으로 자글하기도 하고, 푸르스름한 정맥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까만 털북숭이이기도 하다. 어쩌면 별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손일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 손처럼 작가들도 그 손으로 마침내 자기 문학을 언어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문학의 자양분이 되어준 인생의 모든 일도 그 손으로 기꺼이 겪어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손을 들여다본다고 용한 점쟁이처럼 손 임자의 다사다난한 삶을 단번에 읊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어떤 손 앞에서 마음이 절로 울리는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리라. 손에는 낙인처럼 지울 수 없는 인생 편력이 올올이 새겨져 있다. 손은 그 삶의 지문을 감추지 못한다.


열여섯 작가들의 손끝에서는 삶의 신념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한때 작가 지망생으로 단편 몇 편을 끼적거리곤 했다. 그동안 읽고 보고 들었던 소설, TV 드라마, 자극적인 스캔들의 그림자가 구태의연한 신파로 드리워진.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기서 한 문장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절실하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나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한 그들은 어떤 형태의 이야기에 담아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가 세상을 변화시키길 기대했다. 그들을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존재에 미치는 영향력이 문학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작가의 충만한 재능이나 기발한 상상력, 화려한 기교에 기대지 않는다. 존재를 울리고 흔들어 변화시키는 것은 문학이 담고 있는 진실, 즉 작가의 진심이다.


작품만 문학적으로 빼어나다면 작가의 삶과 이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글을 썼다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인격까지 훌륭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례로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신문학과 근대문학을 배우면서 몇몇 작가들의 파렴치한 친일 이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비판도 품지 못한 채 그들이 이룩했다는 문학적 성과를 주입받았다. 그러나 작가의 진심이 '약'이 아니라 '독'으로 스며 있는 작품은 아무리 그럴듯한 당의를 입혀놓아도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행간에 스민 작가의 진심이 약인지 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실천'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자기 신념을 말이나 글로만 떠벌리는지, 행동으로도 실천하는지는 작가가 이제껏 걸어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자명해진다. 『16인의 반란자들』의 열여섯 작가들이 크고 대단한 사람으로 다가온 것은 노벨문학상의 세속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책장을 뛰쳐나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맞서는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반하는 용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 길들여지고 안주하여 제자리걸음으로 고꾸라지고 있을 때도 세상의 거짓 논리와 불합리한 이면에 반기를 들어 목청껏 일깨우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느릿느릿하게라도 나아진다고 믿는다. 우리를 현혹하고 기만하는 목소리를 걷어내고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애쓰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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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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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책은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사게 된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를 뒤적이니 도무지 어느 책장 사이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또 내 편집된 기억의 착각일까. 아무튼 이 책을 찬찬히 다시 읽어가며 그 구절을 기필코 찾아내리라는 결심을 해두고, 최성일의 『한 권의 책』을 읽은 감상을 남기는 일로 돌아온다. 그러나 최성일이라면 이런 나의 무책임한 태도를 마뜩지 않아 했을 것이다. 그는 사소한 인용 하나도 허투루 간과하지 않고 그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는 일에 철저했다. 그러니 자신이 평하는 책의 부정확한 출처에도 눈감을 수 없었으리라. 그는 잘못된 출처를 정확하게 바로잡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이 읽은 책에도 엄격하고 성실한 전문 서평가였다.

『한 권의 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앤 패디먼(?)이나 “책을 다룬 책을 워낙 좋아한” 최성일처럼 책에 관한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마추어 독자의 욕심 덕분이다. 세상의 무수한 책들 중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진흙 속 진주’ 같은 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다른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지, 혹은 같은 책을 읽고서 어떤 느낌을 받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보고 싶은 호기심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국 공통의 뻔한 이유일 뿐이다. ‘최성일’이라는 이름이 『한 권의 책』을 펼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전에 그의 책 하나 변변히 읽지 못한 채 이름자 정도만 귓결에 얻어듣고서 이제야 남편을 대신한 아내의 감동적인 머리말에 이끌린 나의 얄팍한 동기(아내는 『한 권의 책』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문장부호 하나하나에서 남편의 소중한 숨결을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는 그 하나하나를 얼마나 무수히 어루만졌을까)가 고인에게 부디 누가 되지 않길 바란다.

『한 권의 책』은 최성일이 생전에 여러 매체에 기고했으나 미처 책의 형태로 묶여 나오지 못한 ‘서평’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담은 모음집이다. 그는 두 쪽 남짓의 짧은 분량으로 어떤 책이든 그 책의 알맹이를 개관하고 자신의 분명한 호오(惡好)와 시비(是非)로 장점은 칭찬하고 단점은 지적하여 바로잡으면서 자기 견해까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감정의 낭비도, 쓸데없는 사족도 끼어들 여지없이 그 책을 매개로 다른 책과 작가뿐만 아니라 출판 뒷이야기도 두루 언급하면서 이해와 판단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전문가의 ‘서평’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전문 서평가가 아니지만, 나도 책을 읽고 나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저 책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책을 읽은 그때 불현듯 떠오른 나의 느낌과 생각을 좀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지극히 사적인 되새김질이다. 1999년 겨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난쟁이가 하는 말』부터였다. 다섯 줄 남짓으로 책에 대한 인상만 간략하게 남기던 버릇은 십여 년이 흐른 후 나 홀로 과잉된 감정과 나에게만 애틋한 추억과 무심결에 곁가지로 흐르는 사념으로 쓸데없이 말만 길어졌다. 어차피 공식적이 아니라 자족적인 기록에 불과하므로 전문가의 책임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너무 엄격하다고, 내 취향에 기반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내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어차피 호오를 드러내고 시비를 ‘판단’하는 일에 ‘100퍼센트 객관성’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걷어내긴 하지만, 인터넷의 개인 공간에 그 기록을 흩뿌리기 시작한 후 단 한 명이라도 그것을 읽을 가능성이 있다면 책임의 정도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전문 서평가의 잣대를 아마추어 독자에게 똑같이 들이대는 것은 글의 목적에 따른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최성일의 서평을 읽다 보면 자기 판단을 뒷받침하는 폭넓은 근거들이 욕심나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자신감과 책임 의식이 부러워진다. 정혜윤의 책 이야기는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잡혀 있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마음을 울리지만 때론 그녀의 모호한 감정선을 따라잡기 힘들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에 비해 최성일의 책 이야기는 자기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채 책을 소개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 명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쉬운 문장을 구사하며 어떤 판단을 내린다면 그의 박식한 지식과 식견이 엿보이는 근거를 제시하여 훨씬 설득력 있다. 책임을 전제한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힘인가. 지금까지도 구구절하긴 했지만, 이것은 최성일의 성실한 서평을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끝없이 이어질 사념은 그만 늘어놓고,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흥미롭게(?) 다가왔던 사실들만 몇 가지 더 기록하겠다.


『몬테크리스토 백작』(민음사) 완역본은 무려 다섯 권에 이르는데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136쪽)고 한다. 『지적 생활의 발견』(위즈덤하우스, 『지적 생활의 방법』(세경멀티뱅크)의 개정판)은 ‘나만의 도서관’을 이야기해서 읽고 싶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가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240쪽)라는 것을 알고서 그럴 마음이 싹 달아났다. 코난 도일은 “강직한 식민주의자”였다(241쪽). 마리아 몬테소리는 교육학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롬브로소의 선천적 범죄이론을 지지했다”(325쪽). 그가 소개한 책들 중에서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책광석 번역, 페이퍼로드)은 몹시 읽고 싶어졌다. 그가 다른 책을 소개하면서 언뜻 이야기한 ‘웬델 베리’가 떠올라 지금 그의 『온 삶을 먹다』를 읽고 있다. 법에 대한 그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법질서나 법과 원칙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들이 제멋대로 살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짙다. 나는 실정법의 구체적 내용에도 관심 없으며, 내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법에 당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172쪽).” 요사이 국회의 어이없는 날치기 통과를 생각하면 그의 생각은 결코 과하지 않다. 이런 일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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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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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제'라는 이름을 기억해 둔 것은 어디선가(아마도 출판 잡지 『기획회의』였을 것이다) 읽었던 그의 또 다른 책 『그림 정독』에 대한 출판 뒷이야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가 얼마나 세밀하게, 섬세하게, 꼼꼼하게 그림을 읽어내는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가가 화폭에 담은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디테일일지라도 무심히 간과하지 않고 그것이 그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되찾아준다고 말이다. ‘정독’이라는 제목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는 편집자의 진심 어린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림 정독』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여섯 점의 명화를 이야기하는 데 무려 496쪽에 이르는 분량을 할애했다. 명화들에 대한 감각적인 감성 에세이나, 시대와 사조별로 되도록 많은 명화들을 보여주기 위해 얕게 훑어보는 예술서들이 흔했던 만큼 『그림 정독』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두에만 두었을 뿐 아직 그 책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오후 네 시의 루브르』에서 ‘박제’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반갑고 기뻤다. 그의 진가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리라. 먼저 그의 이력부터 살펴봤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독자의 기부터 꺾지 않는, 달랑 세 줄에 불과한 그의 소박한 이력이 마음에 든다. 프랑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파리에 살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오후 네 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길을 산책한 칸트”처럼 루브르 박물관에 들른다는 사실을 서문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부당한 경로로 예술품을 입수한 과거의 오점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모두 44만여 점에 이르는 예술품을 소장하고 지금도 새로운 컬렉션을 수집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발굴․보수․복원에 힘쓰고 있으니 루브르 박물관은 가히 세계 최고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짧은 일정의 프랑스 여행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의 먼지조차 다 돌아볼 수 없다고 했던가. 박제는 분명 루브르 박물관을 무수히 들락거렸을 테지만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방대한 그림들을 욕심껏 일별하고 말기보다, 이 책에는 그의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감동의 눈물을 쏟게 한 명화들을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누드화를 포함하여 에로티시즘이 강렬하게 배어 있는 그림, 성화(聖畵)로 분류하여 소개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 생경한 화가의 낯선 그림까지 44만여 점 가운데 그가 직접 보고 읽고 느낀 그림들 중에서도 단지 67점만을 고르고 또 골랐으니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펼치는 일은 큐레이터 박제가 친절하고 성실하게 작품을 설명해 주는 작은 루브르에 들르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박제의 꼼꼼한 성실성은 과히 놀랍다. 그는 역시 이 책에서도 그림에 그려져 있다면 여린 풀포기 하나, 작은 돌멩이 하나, 모자를 장식하는 깃털, 그리고 그것들의 색채와 그림자, 붓질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설명해 주는데, 실망스럽게도 조악한 품질로 인쇄된 이 책으로는 그의 디테일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모두 원화로 직접 마주했으리라는 것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박제 특유의 성실한 정독과 사유와 통찰로 가슴 벅차게 느꼈을 감동을 온전히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심히 절망스러워진다. 심지어 극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허나 내가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에 산다 한들 그림을 정독하는 그의 섬세한 눈과 깊이 사유하는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그를 만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이제 『그림 정독』을 당장 만날 때이다. 그에게 그림 읽는 법을, 그리하여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보련다. 그것이 어설픈 흉내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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