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Art Guide) 11
스테파노 추피 지음, 김희정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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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랑과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불거지는 치명적인 욕망 없이 예술은 성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연이 빚어내는, 장엄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운 풍경의 감동에도 압도되어 찬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모방조차 불허하는 신의 예술에 속한다. 인간의 예술은 무엇을 어떤 형태로 창조하든 그 주체인 인간의 그림자를 온전히 배제할 수 없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생애는 찰나처럼 덧없고,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 비하면 인간의 족적은 티끌보다 보잘것없지만, 예술은 인간이 존재했던 시공을 특별하게 포착하여 영원으로 남긴다. 먼지처럼 허공에서 스러질 인간 삶의 드라마가 미술이 되고, 음악이 되고, 문학이 되어 밤하늘을 수놓는 별자리처럼 반짝인다. 스테파노 추피의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는 인간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인간의 삶에서 모든 드라마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될까? 일단 단 한 사람만으로는 어떤 드라마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얽히고설킨 관계가 드라마의 시작점이다.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바탕에는 그를 향한 보편적인 의미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 연인을 향한 에로스는 물론 자식에 대한 부모의 내리사랑, 형제와 자매에 대한 우애, 친구와의 우정부터 함께 동료애, 동지애, 전우애, 사제지정, 애국심…… 심지어 그 대상이 돈과 물질이든 영육의 파멸을 이끌든 사람을 움직여 삶의 무대에 세우는 것은 사랑뿐이다. 사랑을 자양분으로 다른 모든 욕망들이 부풀어 오른다. 사랑했기에 뜨거운 눈빛, 부드러운 키스, 숨 막히는 포옹, 강렬한 애무, 순결과 헌신을 맹세하는 충실한 서약과 결혼, 부부로 아이와 함께 가족을 이루는 연인의 미래는 달콤하고 향기롭고 장밋빛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사랑했기에 쓰라린 배신은 폭력적인 분노를 일으키고, 극심한 질투심과 수치심에 사로잡히며, 자신이 더는 가질 수 없는 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사랑의 대상이 엇갈리면 사랑의 모든 행위는 불쾌한 폭력으로 강제되고 만다.

스테파노 추피는 사랑의 두 얼굴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그림들을 소개한다. 사랑의 기쁨이 충만한 순간도, 사랑의 고통에 일그러진 순간도 인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동해 온 모든 절정의 순간순간들이 화가의 시선에 사로잡혀 붓끝으로 재탄생했다. 그 순간순간들은 화가의 캔버스에 담기지 않았더라면 시간의 무심한 단층 속에 덧없이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화가들은 사랑의 가장 밝은 빛과 욕망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포착하여 인간의 진실에 가닿으려 했다. 때론 각 시대와 문화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신화와 성서 이야기로 가장하지만 결국 사랑과 욕망에 울고 웃는 인간사를 드러내고자 했음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가 흥미로운 것은 베일, 모피, 편지, 침대 같은 소품들이 그림의 주제를 어떻게 증폭하는지를 콕 짚어준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서 사소하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들을 직접 표시하여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데, 이것은 화가가 은밀하게 숨겨놓은 상징들(혹은 기호나 코드)이라 개안(開眼)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책의 형식에 따른 한계 탓에 좀더 깊이 있는 설명이 아쉽다면 박제의 친절한 예술서를 추천한다. 스테파노 추피가 그림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디테일까지 감상자에게 환기시키듯, 박제는 화폭에 그려졌다면 크든 작든 모든 것을 성실하게 읽어낸다. 스테파노 추피는 퐁텐블로 화파가 그렸다고만 전해지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자매」를 단순히 ‘레즈비언(235쪽)’으로 설명하는 데 비해 박제는 붉은 커튼, 가브리엘이 왼손으로 우아하게 들고 있는 반지, 자매가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은 가브리엘의 젖꼭지, 가브리엘과 자매 사이로 보이는 시녀, 그 시녀의 바느질과 붉은 옷, 초록 벨벳으로 덮어놓은 관 등을 통해 앙리 4세의 정부였던 가브리엘의 비극적인 운명에 이른다(『오후 네 시의 루브르』 277~283쪽).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를 ‘레즈비언’이라는 주제에 포함한 것도 다소 억지스러워 보인다. 오히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키스」(35쪽)나 「침대」(106쪽)를 옮겨 오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도 『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가 대체로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사랑과 욕망’ 그림들을 분류한 주제어에 대해 간혹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며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와 같이 태어나고 그 존재가 본질적으로 인간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고 변화하지만 언제나 우리 삶 속에 가장 강력하고 진실한 일부로 남는다.” (21쪽)
“키스는 진실을 드러내고 서로 다른 두 존재를 조화시키는 신비로운 힘을 지녔다. 이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자 없이 서로의 사랑만이 충만한 곳으로 이끄는 문이다.” (31쪽)
“결혼은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이라는 두 가지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198쪽)
“질투의 감정은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주된 원인이 될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드라마의 토대가 된다.” (203쪽)
“뱀파이어란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의 모슨 속으로 치닫는 병적인 사랑의 전형이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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