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故鄕)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대추 한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납니다기러기떼 열지어 북으로 가고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납니다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큰댁 마님은 쇠돌 아범하고 불렀다
쇠돌 아범은 마님 도련님 하며
평생 네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큰댁 마님 시집 오기 전 머슴이었단다
그래도 서울로 유학가서 공부한 동네 아이는
쇠돌 아범 막내 아들 수근이 뿐이었다
큰댁 큰형도 쇠돌 아범이라 불렀다
큰댁 큰형은 어느 날 마을 한 가운데
동네 지키던 천살 되는 느티나무 베어
목재 만들어 팔았단다
얼마 후 자기도 저승 따라 갔다더라
큰댁 막내 딸 혜원이는 날 무척 따랐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보름달 깃들면
달덩이처럼 오빠 오빠 하며 날 보러 왔다
사랑을 알듯 말듯 둘이는 무척이나 그냥 마냥 좋아했다
시집 장가 안되는 동성동본 8촌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