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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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역사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역사도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과거의 인물을 되살려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은 작품들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사극 드라마도 잘 보지 않는 편이었다. 권비영의 전작인 '덕혜옹주'도 궁금해서 몇 번이나 들추다가도 결국 읽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자꾸 읽어야 하는, 보아야 하는 것들이 늘었다. 그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픽션이라고 불렀지만, 그 속에는 분명 실재했던 상처가 녹아 있었다. 아프게 스러졌던 삶을 불러내 한 번 더 이야기를 털어놓으라고, 이제는 억울하다고 소리쳐도 된다고 힘을 실어주는 작가들이 어느 때보다 고마운 시대가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가장 큰 주목을 받게 된 해는 올해가 아닌가 싶다. 우습게도 정부 덕분이다. 비록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을지라도 정부가 이 문제에 보여준 태도는 분노와 실망의 형태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어찌보면 참 수완 좋은 정부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관련된 작품들도 작년과 올해에 걸쳐 세상 빛을 보게 된 경우가 많다. '몽화'도 그 중 하나다. 작가가 가슴에 품고 있되 차마 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는 '몽화'는,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 세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 사람은 출신 성분도, 성격도, 그리고 맞닥뜨릴 미래도 각기 다르다. 아버지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인은 대궐 같은 집에 살며 양갈래 머리를 땋고 학교에 다닌다. 조선에 대한 수탈과 핍박이 극에 달하는 해방 직전에도 프랑스에 유학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몽마르뜨르와 센 강을 예찬한다. 그런 정인의 모습은, 다른 두 친구에게 때로는 환멸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순진무구하다. 무풍지대의 공주 같은 정인이는, 그러나 끔찍한 짓을 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깊은 늪 같은 우울 속에 허덕인다. 안전한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지내는 와중에도, 그녀의 마음은 늘 외롭고 삶은 텅 빈 것처럼 공허하다.

   은화는 동네에서 가장 큰 기생집인 화월각에 산다. 기생집의 주인인 태선 어미에게, 그녀의 첫사랑이자 첫 남편인 박장수가 친구의 딸이라며 거두어 주기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의 총탄에 죽어간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걸까? 어릴 때부터 은화는 여자여도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다짐하는 어른스럽고 차분한 아이다. 그러나 기생집에 사는 이상, 불안한 미래는 늘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태선 어미의 뜻과 달리 열일곱이 되면 너도 돈 많은 영감에게 머리를 올리게 될 거라는 주변 기생들의 조롱은 늘 은화를 괴롭힌다. 기생이 되고 싶지 않아서 화월각을 뛰쳐나왔지만, 그런 은화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모진 운명이다. 세 친구 중 유일하게 '위안부'로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바로 꽃 같이 예쁘고 고운 은화이기 때문이다.

   영실은 친구 정인과 은화가 모두 부럽다. 둘 다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이 꿈인 영실은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본인 순사를 두드려 팬 후 만주로 도망치듯 떠났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영실만 이모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가난해도, 나라를 잃었어도, 배우지 못했어도 올바르지 못한 일은 하지 말고 자신에게 떳떳이 살아야 한다고 배운 영실은 그럼에도 세 소녀 중 가장 용감하게 자신의 삶을 헤쳐간다. 억척스럽게 국밥집을 하다 결국은 일본 상인의 첩이 된 이모의 곁에서부터 그 남자의 도움을 받아 건너오게 된 일본에서 일하기까지, 영실의 삶은 늘 고단하지만 은화처럼 절망적이지도, 정인이처럼 허무하지도 않다. 그래서일까, 영실은 늘 새로운 목표를 찾아 스스로를 다잡는다.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살아간다.

   너무도 다른 세 소녀의 삶, 그리고 그들과 때로는 얽혀들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멀어지는 주변 사람들. 일제강점기 말의 조선에서, 혹은 일본에서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들 중에는 나라를 팔아 제 뱃속을 채우는 이들도 있고, 불의에 눈 감고 생존에 집중하는 이들도 있으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신의를 지키겠다고 용감하게 나서는 이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몸이 짓밟히는 이도 있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이들도 있으며, 삶의 이유를 잃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사는 모두가 한 자락씩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정인이를 두고 은화와 영실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한 삶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칠복이를 아들 대신 강제징용에 보내고 자기 자식들은 몰래 빼돌려 프랑스에 보낸 정인이의 친일파 아버지를 생각하면, 정인이가 겪는 그깟 우울증 쯤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매일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꿈도, 희망도 놓은 채 그저 새장 속의 작은 새, 텅 빈 인형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는 정인이에게도 분명 어떤 상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은화와 영실이에게는 결코 와닿지 않을 정도의 상처일지라도.

   '몽화'의 이야기는 '위안부'를 다룬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저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성들에게만 집중하기보다는, 그 당시 십대 후반의 소녀들에게 주어졌던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각기의 방식에 스며 있던 아픔에 주목했다는 것이 더 맞다.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그 시대를 생각했다. 그 시대를 버텨내어 지금까지 살아 온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야기의 끝까지 가닿을 곳을 찾지 못한 영실이, 은화, 정인이처럼 그 분들도 해방 후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던 정당한 마무리를 여태 기다리고 계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화가 났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역사.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읽히고 있는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1940, 세 소녀 이야기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뎌진다는 것이다. 무뎌진다는 것은 천천히 스러져 간다는 것이다. 무엇엔가 저항할 힘조차 사라진, 슬픈 야합.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 p. 276


   길을 모르면서도 가야 한다. 그것이 선문처럼 머리에 남았다.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허덕거리며 가야 하는지. 

- p. 304


   잠시 깃들기로 한 집은 언제라도 비워줄 수 있다. 내 집이 아니므로. 쓸쓸한 영혼이 깃든 몸뚱어리도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 조물주로부터 잠시 얻어 온 껍데기이므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

- p. 345


   가는 길도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달라서 그럴 뿐, 삶은 공평하고 무심하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혼곤한 삶에 애정이 생겼다.

   지금은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 잘 견디어 내야 한다. 광풍이 불 때는 몸을 낮추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다.

- p. 379 


   오늘은 파도가 잔잔하다. 온 세상을 삼킬 듯이 배를 덮치던 그런 바다는 아니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다는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영실은 그 바다의 고요를 믿지 않는다. 언제 또 분노한 파도가 세상을 향해 밀려올지 모르므로.


   암흑 같은 세월이,

   힘들고,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 p. 380



북폴리오 2016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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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스토리콜렉터 40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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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완독한 다른 리뷰어 분들이 한번 시작하면 놓지 못하고 끝까지 보게 되는 책이라 하여 과연, 하는 마음으로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밤 10시쯤 책을 붙들었고, 새벽 1시까지 꼬박 읽어 한 권을 끝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쉽게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분명 책을 집어들 때에는 난 귀신은 안 무서워하니까 괜찮을 거라며 호기롭게 큰 소리를 쳤는데, 결국은 혼자 자기가 무서워서 멀쩡히 제 집에서 자던 강아지를 데려다가 끌어안고 잤다. 금방이라도 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처음 뵙겠습니다, 히히노입니다, 하고 인사할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가볍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보다는, 꼭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무서운 이야기 같은 느낌. 작년 여름쯤에 네이트 판에 올라온 실화라며 떠도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글과도 느낌이 비슷했다. 그 글은 뱀장수가 살던 집에 이사 온 가족이 뱀신에 시달리는 내용이어서, 묘하게 책의 띠지에 있는 '뱀신의 저주가 도사린 흉가'라는 소개와 일치했다. 일본에도 뱀장수가 있나, 하고 장난스레 생각했을 정도였다. 큼지막한 폰트에, 깔끔하게 맺고 끊는 편집에, 극적 효과를 더하는 세밀한 묘사까지 어우러져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몰입도는 굉장했다. 이 이야기의 끝은 어디일지, 이 집에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어떻게 설명될 것인지, 진실은 어떻게 밝혀지고 이 가족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전부 다 궁금해서 자꾸만 뒷장을 들춰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읽은 독자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뱀장수 이야기의 임팩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에게는 결말이 엄청난 반전이었다. 그래서 잠들기가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뱀신이 자신을 죽인 사람에 앙심을 품고 찾아와 가족이 잠든 머리맡에서 계속 뛰어다니고 빈 방으로 아이들을 유인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그냥 죽어서도 원한 깊은 동물이 짠하기도 하고, 결국 모든 건 사람의 잘못이다 싶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새 환경보전과 세계평화에 대해 생각하다 잠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의 결말은 바로 그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히 어떤 경위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정말 무분별한 개발에 의해 파괴된 영산에 깃든 뱀신의 저주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무언가 알 수 없는 광기가 존재했다. 그건 정말 무서웠다. 특히 내게 가장 가깝던 사람이 전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들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것, 결국은 누구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반전의 반전,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쇼타의 기분이 어땠을까, 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 자꾸만 추웠다.

   호러 미스터리는 굳이 따지자면 내 취향이 아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아서 코난 도일 같은 정통 추리소설이나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편이지, 귀신 이야기는 굳이 찾아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낸 것은, 그만큼 미쓰다 신조가 훌륭한 스토리텔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책을 덮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을 법한 이야기인데도, 읽을 당시에는 그 세계에 푹 빠져 내가 마치 안라 시의 시골마을 산기슭에 살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러나 그 곳에 남아있는 가족이 걱정되어 늘 발걸음을 돌리고야 마는 쇼타의 마음에도 잔뜩 감정이입하게 되었다. 아마 책의 배경과 같은 여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무더위도 잊었을 것이다. 여름 납량특집에 제격인, 웰메이드 호러 미스터리였다.


쇼타는 겨우 열 살이다

 

   개인적으로 느낀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이야기의 화자가 열 살 소년이라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알 수 없는 감이 발달해서 위험한 일이나 끔찍한 범죄가 일어날 장소에서 미리 어떤 느낌을 받았던 것 외에는 여느 아이들과 똑같은 초등학교 4학년. 새로 이사 간 집의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기이한 일들을 목격하고,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이 책은 긴장감을 더한다. 아이는 힘이 없다.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그래서 쇼타는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가족에게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한다. 어린 아들이 악몽을 꾸었나보다고, 괜한 떼를 쓴다고 부모님이 웃어넘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집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쇼타가 여러 난관에 부딪히는 것도 어린아이이기 때문인 탓이 크다. 열 살 어린애는 정식으로 자료를 요청하기도 어렵고, 주변 사람들과 안면을 터 정보를 얻을 능력도 부족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센 할멈의 집에 끌려가 어두운 저택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도, 어찌 보면 쇼타가 어린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화자의 나이는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하고, 독자를 끊임없이 몰입하여 쇼타를 응원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책을 읽으며 서서히 쇼타와 같은 어린애의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된 독자들에게 결말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어린 나이가 이 소설의 한계점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쇼타와 쇼타가 이 끔찍한 사건을 헤쳐나가는 데에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친구 코헤이는 모두 열 살인데, 특전사 뺨치게 일을 잘한다. 아무리 코헤이가 한눈에 인정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지만, 낯선 마을에 고립되어 한 눈에 보기에도 저주 받은 것 같은 집의 비밀을 풀어가는 쇼타의 사고는 지나치게 고차원적이다. 목숨을 걸고 저택에 잠입하여 쇼타가 잃어버린 이케우치 토코의 일기를 찾아온 코헤이를 보노라면 이 아이를 훈련시켜 FBI에라도 보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쇼타와 코헤이가 내 나이쯤 되었겠거니 생각하다가, 한 순간 아, 얘네 초등학생이지, 하고 퍼뜩 생각이 나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뭐했나 떠올려 보아도 이 정도의 문제해결능력은 없었지 싶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초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흉가'는 미쓰다 월드 내에서도, 그리고 호러 미스터리라는 장르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어린아이가 귀신을 목격하는 역할로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가끔은 귀신이 어린아이의 형태를 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이야기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자주적 역할을 맡은 적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의 나이를 자꾸 되새겨본다면 좀 더 색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이 책의 관전포인트

 

   흔해빠진 귀신 들린 집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실제 이 책에는 형태가 명확한 귀신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쇼타가 목격하는 검은 형체들과 모모미가 밤마다 만나는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책 말미에 밝혀지는 그들의 정체는 요괴나 유령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을 무섭게 만드는 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다. 센 할멈, 파충류 같은 눈을 한 코즈키 키미, 히히노와 히미코의 정체, 그리고 하네타란 이름의 양. 그러니 평소 귀신 이야기에는 끄덕없다고 자신하던 사람도 혼자 있는 늦은 밤 이 책을 읽지는 말기를. 밤잠을 설치기 십상이다.

   가볍고 빠르게 읽히는 책이니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 어려우니 서너시간은 여유를 두고 읽기를 권한다. 잠깐 짬을 내서 읽으려면 자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하는 일에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펼쳤다면 내리는 정거장이나 역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책을 선물할 계획이라면 선물 받을 사람의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자칫하다가는 누군가에게 최악의 악몽을 선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호러 미스터리를 즐기는, 특히 '미쓰다 마니아'라면 이 책의 존재가 정말로 반가울 것이다. 여러모로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니, 꼭 한 번 쇼타와 코헤이의 기묘한 이야기를 따라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 북로드 2016 스토리콜렉터스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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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고양이 - 텍스타일 디자이너의 코스튬 컬러링북
박환철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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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러링북이 처음 유행하기 시작한 건 작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색칠공부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복잡하고 정교한 그림을 하얗게 비워둔 책들이 우후죽순 나타나 서점가를 장식했다. 단순히 공간을 채워넣는 데에서 나아가 음영을 넣고, 무늬를 만들고, 때로는 원 그림을 수정하는 아티스트들이 등장하며 컬러링북은 하나의 장르가 되어갔다. 꽃이나 동물 등 하나의 주제를 지정하여 관련된 일러스트를 담은 것부터 컬러링'북'이라는 걸 살려 실제 책의 삽화를 색칠하도록 한 것까지, 컬러링북도 점차 다양해졌다. 종류가 많아진 만큼 신선함은 반감되었다. 허니버터칩이 대박을 친 후 연달아 등장한 온갖 종류의 허니버터맛 과자들이 식상해졌듯, 순하리 유자맛 이후 시장을 뒤덮은 과일소주들이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되었듯 컬러링북도 그저 그런 한때의 유행으로 저무는 듯했다.

   이런 시점에 어찌 보면 후발주자로 등장한 '이상한 나라의 고양이'는 고양이들이 무지개가 뜬 맨홀뚜껑을 통해 세계여행을 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첫 몇 페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그림은 삽화처럼 한 구석을 차지할 뿐이다. 그러다 고양이들이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며 화려한 일러스트들이 지면 전체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는 새로울 게 그닥 없다. 고양이는 컬러링북의 단골소재이고, 온갖 나라의 풍경을 담는 것 역시 정석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건 작가 박환철이 텍스타일 디자이너라는 점이다. 텍스타일 디자이너, 즉 패턴을 짜는 일의 전문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컬러링북의 중심이 되는 건 여행을 떠나는 고양이도, 그 고양이들이 맞닥뜨린 세계 각국도 아닌 패턴 그 자체다. 작가가 철저히 고증하여 재현한 각국의 전통의상의 화려한 무늬, 그 배경이 되는 세계 명소의 정교한 벽화. 패턴이란 반복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 패턴을 색칠하는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의 고양이'는 무척 특별한 컬러링북이 된다.

   컬러링북을 칠하기에 앞서 가급적이면 실제에 가깝게 색을 입히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책 마지막 장에 작가가 친절하게 실어둔 출처들을 되짚어가며 구글 이미지에서 실제 전통의상과 배경이 되는 장소를 검색했다. 평소 그저 참 화려하네, 하고 넘긴 플라멩코복의 무늬를 유심히 뜯어보고 알함브라 궁전의 타일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다 보니 새삼 내가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이 책과 함께 스페인에, 프랑스에, 가나에, 그린란드에, 인도에 다녀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국으로 돌아와 간만에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마주했다. 어느 것 하나 아쉽지 않은 화려한 그림들이 재미를 더했다.

   이 책의 마지막 매력포인트는 마지막에 마련된 스티커 페이지. 컬러링북을 하나씩 채워가는 내내 고양이들의 사랑스러움에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스티커 페이지가 정점을 찍었다. 하나씩 칠해서 다이어리에, 편지지에, 일상적인 소품에 붙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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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생각 - 대중을 사로잡은 크리에이터의 창작 비결
양유창 지음 / 더난출판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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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기자는 어느날 문득 생각한다. 카메라 앞이 아닌 뒤에 선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책은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각각의 인터뷰에는 창조적인 일이 하고 싶었던,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해도 될까 망설이던 사람이 답을 구하기 위해 찾은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양유창과 마주한 그들은 영화 감독이기도 하고, 방송사 PD이기도 하며, 때로는 싱어송라이터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제각각의 직업을 가지고 각자만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기자가 한 인터뷰여서일까, 던져진 질문들은 어느 때보다도 정확히 핵심을 파고들어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낸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이 '나는 옳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독자에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게 목적인 책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때로는 그 사실이 불편하다. 누군가가 특별한 방법을 이용해서 성공했고, 그 방법을 공유하고 싶어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때로는 내가 힘겹게 구르며 얻은 교훈을 남들에게는 그런 고생 없이도 알게 하고픈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랬어, 그러니까 너도 이래야 해, 라는 전제는 언제나 위험하다. 그것은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소위 '꼰대'의 언어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던 생각'은 그런 측면에서 참 색다른 자기계발서였다. 10명이나 되는 자기 개성 뚜렷한 인물들이 등장해서일까, 이 책에는 왕도가 없다. 10인의 창작자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자기만의 노하우로 커리어를 이어간다. 때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대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생각은 전부 다르다. 모두가 각자 얻은 가장 큰 교훈을 툭툭 던져놓을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마음이 편해진다. 누구에게도 강요당하지 않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만화가 윤태호는 한번 자리에 앉으면 끝을 보기 전까지 절대 일어나지 않고 버티는 게 작품을 완성하는 힘이라고 말하는 반면 애니메이션 감독 우경민은 하루에 1%씩, 아주 조금만 해내더라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한 책에 등장하는 두 거장이 서로에게 굴복하지 않는데 책을 읽는 독자라고 그들의 이야기를 신앙마냥 따를 필요가 있을까. 그 짐에서 홀가분해지는 순간 자기계발서는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읽으며 진심으로 와닿는 메시지만 흡수할 수 있는 따뜻한 텃밭으로 변모한다. 어느 정도 바탕에 깔려있던 불편함은 사라지고 나보다 앞서 어떤 길을 걸어간 사람의 이야기에 순수한 동경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갈림길에서, 혹은 꽉 막힌 골목길에서, 또는 빛도 들어오지 않는 긴 터널 속에서 창작 작업을 하나의 옵션으로 두고 고민 중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 갈림길에서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골목길을 우회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터널의 끝이 나오는지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은 아마 어떤 답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잠시 모든 고민을 내려두고 한때 비슷한 고민을 하며 치열하게 지금의 자리까지 이른 10명의 선배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아마 마음이 조금쯤 가볍고 후련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 중 어떤 사람의 인생관이 자신과 하도 비슷해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구나, 하는 위로를 얻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런 마음가짐으로도 저런 작품을 만드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나 싶은 오기가 발동할 수도 있다. 뻔한 '꼰대질' 대신 담백하고 때로는 건조하기까지 한 인터뷰를 내세운 이 책을 통해, 나도 간만에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이 세상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글을 남기고 싶다고 혼자 생각하며 카페 창가에서 책을 덮었다.


우리는 모두 한번쯤 크레이티브했다

 

   그 유명한 '무한도전'조차 보지 않는 나도 나영석 PD의 이름은 안다. 웹툰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미생'의 윤태호 작가 역시 친숙한 이름이다. 차세정, 이라는 이름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피톤 프로젝트, 하는 소개가 덧붙었을 때는 반가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우경민의 애니메이션도 친숙했고 장유정이 연출한 뮤지컬도 여러 편 보았다. 유튜버 대도서관의 얼굴이 낯익었고, 김성훈 감독의 '끝까지 간다'도 잘 아는 영화였다. 김찬중이 설계한 한남동 오피스 건물은 내가 지난 몇년간 유일하게 길에서 우연히 보고 궁금해서 스트리트뷰를 뒤져가며 검색해본 건축물이었다. 박웅현 카피라이터는 정말 모르겠다 싶었는데 그가 쓴 카피 몇 개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이미 너무 유명해서 한 개인이 생각해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바로 그 카페에서 판매하는 보틀에 퍼엉의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었다. 참 운명적이게도.

   책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 중 모르는 이름이 과반수 이상이라 내가 참 창의적인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자괴감이 들었었는데, 의외로 읽어나가다 보니 양유창이 만난 사람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내 일상과 맞닿아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꼬박꼬박 보던 '삼시세끼', 캡쳐된 명대사를 몇번이나 읽었던 '미생', 1학년 시험기간에 반복재생해서 듣던 에피톤 프로젝트의 2집 앨범. 그런 것들을 떠올리니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더 부지런해졌다. 한장씩 넘길수록 데면데면하게 알던 사람과 더 친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의 첫인상이 내가 받은 것과 똑 닮았을지도 모른다. 참여한 사람 중 겨우 한둘의 이름만 알아보겠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마 당신의 삶과 당신이 모르는 어떤 곳에서 꽤나 긴밀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 사소한 매듭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굳이 하던 일을 때려치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려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현실이라는 벽 앞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경험이 없다고 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창의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크리에이터의 메시지

 

좋은 대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발견된다. 인물과 상황을 성숙하게 만들다 보면 언어 자체를 꾸미지 않더라도 그 순간에 맞는 적절한 대사가 나온다. 가장 좋은 대사는 의외로 아주 소박한 문장이더라.

- 윤태호, p. 33


음반을 만들 때는 장대높이뛰기 선수 같은 심정이 된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멀리, 원대하게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때는 내가 만든 것들이 장애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걸 넘어야 하니까 부담스럽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새 앨범을 만들 때마다 의지가 점점 강해진다.

- 차세정, p. 67


어떤 현상을 볼 때 '저건 왜 저러지?'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나이가 들면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잔 다르크처럼 반항하거나 앞에 나서서 바꾸자고 외치는 스타일은 아니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지'라며 받아들이는 편이다. 다만 '그 이유가 뭘까'라고 의심한다.

- 나영석, p. 86


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이루려고 할 때 밤을 새워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휴식도 취하고 즐길 건 즐기지만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금씩 열심히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롱런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하루에 1%씩만 하면 된다. 조바심을 내거나 쉽게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 우경민, p. 120


궁금한 게 많아서 그렇다. '이 정도면 됐잖아'라며 나도 모르게 안주하지 않기 위해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거다. 누구나 나를 보고 "넌 잘 할 거야"라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렇게 되면 나도 모르게 자만하게 된다.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그곳이 어디든 가보는 게 내 스타일이다.

- 장유정, pp. 133-134


내 나이에는 이미 부모가 된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아이와 대화를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도 그걸 왜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알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 <터닝메카드>를 좋아한다고 하면 나는 직접 그걸 일일이 다 본다. 장난감도 사본다. 이걸 이래서 좋아하는구나 분석도 해본다. 말을 잘하는 능력은 공감능력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아이들과 소통하려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대도서관, p. 169


예를 들어, 수십 명의 여자를 만나는 바람둥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를 가볍다며 쉽게 비난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 순간만큼은 매우 진실하다. 그는 그 많은 여자들을 한 명 한 명 다 설득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진심을 담아 고백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 상대가 넘어온다. 그 사랑이 가짜라고 느끼면 여자들은 바로 등을 돌릴 것이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짜를 이야기하면 벌써 말할 때 눈빛이 흔들린다. 한 사람 한 사람 진실하게 설득해야 한다.

- 김성훈, pp. 199-200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일탈이다. "저건 무슨 건물이지?"하며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물을 계속 짓고 싶다. ... 무표정한 도시인들이 내가 지은 건물을 보고 잠깐이라도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반려견을 보살펴주듯 쓰다듬어주고 가는 그런 건물을 짓고 싶다.

- 김찬중, p. 229


유레카를 외치는 비등점이 있다고 해보자. 일단 그 근처까지는 어떻게든 올라가야 한다. 물의 비등점은 100도다. 그렇다면 90도까지는 가줘야 한다. 30도에서 아무리 손가락을 튀겨도 유레카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걸 90도까지 끌어올리는 힘이 성실함이다.

- 박웅현, p. 244


물론 사랑이 늘 긍정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사랑은 이 그림들처럼 일상 속에서 함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힘들더라도 그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그게 사랑이다.

- 퍼엉, p. 269


* 더난프렌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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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통찰 - 위대한 석학 21인이 말하는 우주의 기원과 미래, 그리고 남겨진 난제들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4
앨런 구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이명현 감수, 김성훈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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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는 엣지 재단 소속의 지식인들이 특정 대주제에 대해 제각기 지니고 있는 지식의 파편을 모아 하나로 엮어내는, 말하자면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지금껏 다뤄진 주제로는 Mind, Culture, Thinking, Life가 있고 이번 책, Universe는 시리즈의 5번째 주자이다.

   나는 우주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정말로 그렇다. 한국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딱 그 정도, 과장을 조금 보태 지구가 자전하며 태양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는 그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반 세기가 지나 아인슈타인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다는 뉴스를 봐도 우와, 대단하다, 그렇게 솔직하게 감탄할 뿐 어떤 깊은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인터스텔라'를 보러 가기 전에는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겁이 났고 다행히 영화의 큰 줄기를 이해하며 영화관을 나섰을 때에는 역시 순수과학은 나랑은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 했다. 이 책에 기꺼이 손을 번쩍 들어본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주의 통찰이라니, 나한테 이보다 더 필요한 게 대체 뭐가 있나 싶었다.

   내 선택이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히 옳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히 틀렸다는 걸 깨달은 건 책을 받아들고 저자 목록을 훑었을 때였다. 익숙한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엣지 재단에서 글을 집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한두개쯤 출판하거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을 펼치거나 유명 대학 강단을 지키는 인물들이다. 즉, 그 분야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중 적어도 한둘은 아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실제 같은 시리즈의 '마음의 과학'을 살펴보면 저자 16인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주요 이론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스티븐 핑커, 필립 짐바르도,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마틴 셀리그먼. 심리학 전공서적에서 얼마나 자주 봤던 이름들이던지 반가울 지경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굳이 '마음의 과학'을 통독하며 그들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짤막하게 이어나가는 릴레이 같은 글을 다시 읽을 필요는 굳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주의 통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 중 어디서 흘러가듯 들어본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건, 내가 정말로 무지한 분야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를 골랐다는 기쁜 소식인 동시에 이 책을 읽는 게 세상 어떤 일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는 암울한 암시이기도 했다.

   다행히 책은 어렵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에 대한 책 치고는 어렵지 않다고 해야겠다. 사실 읽으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고민하다 그냥 에라, 하는 심정으로 넘긴 페이지들도 적지 않았다. 수학에 대한 기본기조차 없는,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이 고교 시절 사랑했다는 미적분을 2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애초에 응용수학과 우주과학을 넘나드는 이 책이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제각기 우주와 연관된 자신만의 주특기를 풀어내는 이 책의 공동저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눈높이를 맞춰주기 노력하고, 그래서 고행일 줄만 알았던 이 독서는 예상 외로 즐거웠다.

   책을 덮으며 우주에 대해 더 알게 된 게 있나 생각해 보니, 우주란 역시 내가 다 알기엔 엄청나게 넓고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결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면 좀 어때서? 코넬에서 응용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스티븐 스트로가츠 역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딧불이부터 미사일 공격까지

 

   목차를 훑으며 가장 흥미있어 보이는 제목을 고른 게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반딧물이가 뭐 중요하다고'였다. 이 장은 스티븐 스트로가츠가 자신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익살스럽게 소개하며 자신이 현재 연구하는 분야에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아가 그가 그렇게 발견한 '동기화'라는 현상이 어떻게 자연계 곳곳에 적용되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수한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발적 질서를 찾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의대전단계 과정을 들으며 힘들었다는 언급을 보고 순간 나와 정반대의 길에 서있는 사람이 아닌가 잠시 뜨끔했지만, 오히려 어떤 학문에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에게 다른 학문은 무척이나 어렵고 지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는 그를 보니 이 두꺼운 책 속에서 이해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생물학을 공부해서인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예시를 통해 동기화를 설명하는 그의 눈높이 설명에 나 역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이라크의 위성유도무기부터 난자를 향해 헤엄쳐 가는 정자, 뇌의 간질발작까지 모든 현상에 통용되는 한가지 설명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그가 케임브리지의 서점에서 발견했다는 아서 윈프리의 '생물학적 시간의 기하학'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몇년간 관찰한 자기 어머니의 월경주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의 책을 그냥 넘기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작은 우주를 만나보자


   질문을 쪼개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데 도움을 줄 또 다른 힌트는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무엇이 보이는가? 여기서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본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것은 밤하늘이 밝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놀랍다. 밤하늘이 밝지 않은 이유라니,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나 싶겠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심오한 질문이다. "왜 우리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별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질문으로 이런 것이 있다. "우주는 왜 그렇게 클까?" 기초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가 그토록 크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다. 우주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지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주가 커지기 위해 일어나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텅 빈 공간의 에너지가 작아도 아주 작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저 창문을 열고 몇 킬로미터 밖을 내다보는 행동 자체가 텅 빈 공간의 에너지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로 작은가 하니 0.000 다음에 0이 수십 개나 더 붙은 다음에 1이 나와야 한다. 그냥 창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p. 393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백 년 동안, 우리는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냈다. 그러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 뉴턴이 자신이 본 것을 수학을 통해 설명하고 나서야 위대한 '이해의 시대'가 열렸다. 특정 부류의 수학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맥스웰 방정식, 열역학, 양자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리법칙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 모든 수학에는 완벽하고 철저한 풀이법이 알려진 특정 부류의 수학 문제가 동원된다. 바로 선형적인 문제(linear problem)들이다. 우리가 비선형적인 문제(nonlinear problem)에 부딪히기 시작한 것은 불과 지난 몇십 년 전부터다. 물론 우리는 이런 문제 중에서 겨우 서너 개의 변수를 사용하는 가장 작은 범주의 문제들만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혼돈이론(chaos theory)이다. 뇌처럼 변수가 수백 개, 수백만 개, 수십억 개로 늘어나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들이 바로 복잡계가 다루어야 할 것들인데,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까마득하게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할 수는 있지만, 사실 이것은 그냥 구경만 하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pp. 473-474


북폴리오 2016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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