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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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역사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역사도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과거의 인물을 되살려 살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은 작품들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사극 드라마도 잘 보지 않는 편이었다. 권비영의 전작인 '덕혜옹주'도 궁금해서 몇 번이나 들추다가도 결국 읽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자꾸 읽어야 하는, 보아야 하는 것들이 늘었다. 그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픽션이라고 불렀지만, 그 속에는 분명 실재했던 상처가 녹아 있었다. 아프게 스러졌던 삶을 불러내 한 번 더 이야기를 털어놓으라고, 이제는 억울하다고 소리쳐도 된다고 힘을 실어주는 작가들이 어느 때보다 고마운 시대가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가장 큰 주목을 받게 된 해는 올해가 아닌가 싶다. 우습게도 정부 덕분이다. 비록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을지라도 정부가 이 문제에 보여준 태도는 분노와 실망의 형태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어찌보면 참 수완 좋은 정부라고,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관련된 작품들도 작년과 올해에 걸쳐 세상 빛을 보게 된 경우가 많다. '몽화'도 그 중 하나다. 작가가 가슴에 품고 있되 차마 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는 '몽화'는,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 세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 사람은 출신 성분도, 성격도, 그리고 맞닥뜨릴 미래도 각기 다르다. 아버지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인은 대궐 같은 집에 살며 양갈래 머리를 땋고 학교에 다닌다. 조선에 대한 수탈과 핍박이 극에 달하는 해방 직전에도 프랑스에 유학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몽마르뜨르와 센 강을 예찬한다. 그런 정인의 모습은, 다른 두 친구에게 때로는 환멸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순진무구하다. 무풍지대의 공주 같은 정인이는, 그러나 끔찍한 짓을 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깊은 늪 같은 우울 속에 허덕인다. 안전한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지내는 와중에도, 그녀의 마음은 늘 외롭고 삶은 텅 빈 것처럼 공허하다.

   은화는 동네에서 가장 큰 기생집인 화월각에 산다. 기생집의 주인인 태선 어미에게, 그녀의 첫사랑이자 첫 남편인 박장수가 친구의 딸이라며 거두어 주기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의 총탄에 죽어간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걸까? 어릴 때부터 은화는 여자여도 나라를 위해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다짐하는 어른스럽고 차분한 아이다. 그러나 기생집에 사는 이상, 불안한 미래는 늘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태선 어미의 뜻과 달리 열일곱이 되면 너도 돈 많은 영감에게 머리를 올리게 될 거라는 주변 기생들의 조롱은 늘 은화를 괴롭힌다. 기생이 되고 싶지 않아서 화월각을 뛰쳐나왔지만, 그런 은화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모진 운명이다. 세 친구 중 유일하게 '위안부'로서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바로 꽃 같이 예쁘고 고운 은화이기 때문이다.

   영실은 친구 정인과 은화가 모두 부럽다. 둘 다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이 꿈인 영실은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본인 순사를 두드려 팬 후 만주로 도망치듯 떠났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영실만 이모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가난해도, 나라를 잃었어도, 배우지 못했어도 올바르지 못한 일은 하지 말고 자신에게 떳떳이 살아야 한다고 배운 영실은 그럼에도 세 소녀 중 가장 용감하게 자신의 삶을 헤쳐간다. 억척스럽게 국밥집을 하다 결국은 일본 상인의 첩이 된 이모의 곁에서부터 그 남자의 도움을 받아 건너오게 된 일본에서 일하기까지, 영실의 삶은 늘 고단하지만 은화처럼 절망적이지도, 정인이처럼 허무하지도 않다. 그래서일까, 영실은 늘 새로운 목표를 찾아 스스로를 다잡는다.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살아간다.

   너무도 다른 세 소녀의 삶, 그리고 그들과 때로는 얽혀들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멀어지는 주변 사람들. 일제강점기 말의 조선에서, 혹은 일본에서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들 중에는 나라를 팔아 제 뱃속을 채우는 이들도 있고, 불의에 눈 감고 생존에 집중하는 이들도 있으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신의를 지키겠다고 용감하게 나서는 이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몸이 짓밟히는 이도 있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이들도 있으며, 삶의 이유를 잃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사는 모두가 한 자락씩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정인이를 두고 은화와 영실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한 삶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칠복이를 아들 대신 강제징용에 보내고 자기 자식들은 몰래 빼돌려 프랑스에 보낸 정인이의 친일파 아버지를 생각하면, 정인이가 겪는 그깟 우울증 쯤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매일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꿈도, 희망도 놓은 채 그저 새장 속의 작은 새, 텅 빈 인형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는 정인이에게도 분명 어떤 상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은화와 영실이에게는 결코 와닿지 않을 정도의 상처일지라도.

   '몽화'의 이야기는 '위안부'를 다룬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저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성들에게만 집중하기보다는, 그 당시 십대 후반의 소녀들에게 주어졌던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각기의 방식에 스며 있던 아픔에 주목했다는 것이 더 맞다.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그 시대를 생각했다. 그 시대를 버텨내어 지금까지 살아 온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야기의 끝까지 가닿을 곳을 찾지 못한 영실이, 은화, 정인이처럼 그 분들도 해방 후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던 정당한 마무리를 여태 기다리고 계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화가 났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역사.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읽히고 있는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1940, 세 소녀 이야기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뎌진다는 것이다. 무뎌진다는 것은 천천히 스러져 간다는 것이다. 무엇엔가 저항할 힘조차 사라진, 슬픈 야합.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 p. 276


   길을 모르면서도 가야 한다. 그것이 선문처럼 머리에 남았다.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허덕거리며 가야 하는지. 

- p. 304


   잠시 깃들기로 한 집은 언제라도 비워줄 수 있다. 내 집이 아니므로. 쓸쓸한 영혼이 깃든 몸뚱어리도 언제든 포기할 수 있다. 조물주로부터 잠시 얻어 온 껍데기이므로.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

- p. 345


   가는 길도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달라서 그럴 뿐, 삶은 공평하고 무심하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혼곤한 삶에 애정이 생겼다.

   지금은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 잘 견디어 내야 한다. 광풍이 불 때는 몸을 낮추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다.

- p. 379 


   오늘은 파도가 잔잔하다. 온 세상을 삼킬 듯이 배를 덮치던 그런 바다는 아니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다는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영실은 그 바다의 고요를 믿지 않는다. 언제 또 분노한 파도가 세상을 향해 밀려올지 모르므로.


   암흑 같은 세월이,

   힘들고,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 p. 380



북폴리오 2016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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