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건과 정치: 사건의 양식은 문제 제기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여러 가능태에의 입구이다. 11 ˝인간은 답할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할 수 있다˝는 맑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건에서 출발하여 구축된 문제는 처음부터 그 답을 문제 안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 12 사건의 철학은 세계와 주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정의하기 위해 처음부터 주체(혹은 노동)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서 출발한다. 15 세계란 혼(높은 차원의 단계) 안에 현실화하고 신체(낮은 차원의 단계) 안에 구현화한 하나의 가능태다....들뢰즈에 의하면 세계란 잠재성이고, 관계의 다양체이다. 세계는 언표의 집단적 배치안에서 (즉 혼안에서) 표현되어 가능태를 창조하는 다수의 다양한 사건으로부터 성립된다. 16 우리가 가능성을 ‘가능태/실재화/라는 체제에 의거하여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자연/사회, 어른/아이, 지적인 것/육체적인 것 등)에 의거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과 기호, 정동, 욕망, 역할, 가능 등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서 이항 대립의 틀내에 있게 된다....그와 반대로, 만약 우리가 가능성을 ‘가능태의 창조와 그 달성‘이라는 형식 아래 사고하면, 가능태는 이미 알려진 것들의 양자택일에 의거한 사고와 행동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표현하는 가능세계이다. 16, 17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는, 눈앞에 있는 것의 정당화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행위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8

[ ] 가능태의 현실화와 달성은 (자연과 타자를) 변형하는 활동이 아니라 세계를 실효화하는 것이다. 가능태의 현실화는 생산하는 것...이중의 개체화, 이중의 창조, 이중의 발명 과정으로 향하는 것이다. 20 기성의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그와 같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은 사건을 경험할 기회를 놓쳤다....사건은 집요하다. 결국 사건은 계속 활동하고 있고 여러 가지 효과를 계속 산출하고 있다. 24, 25 모든 개체는 무수한 다른 개체로부터 합성된 것이고, 각자가 다른 정치형태를 뒤따르면서 믿음과 욕망을 기반으로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관계의 짜임새는 무수한 다른 개체의 포획에서 이루어진 위계에 따라 구성된다. 31 역사란 ˝똑바로 뻗어 있는 곧은길이 아니라 매우 깊고 갈림길이 무수하게 있는 도로망이다...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다른 길로의 교차로가 나타난다. 32

[ ] 모나드의 활동은 어느 행위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개시하는 것과 실효화라는 것에 귀착한다...세계를 창조하고 실효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욕망, 그리고 의지와 지성에 대해 작용하는 것, 즉 정동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에 기반한 관계의 다양체다...세계의 창조와 실효화는 무엇보다도 느낌에 관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구축이나 보급과 동일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서 생기는 감각 양식의 변화는 우리에 의해 ‘실재‘ 세계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4, 35존재는 자신 속에 차이화를 일으키는 내적 요인을, 즉 잠재력의 차이를 품고 있다. 그래서 존재는 항상 하나의 통일을 넘어서는 것이다. 36 감각 양식의 표현과 구축은 생산양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커녕, 경제의 노동보다 이전에 있다. 36 타르드의 모나드는 보편적인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낳고 있다. 모나는 열리고, 문도 창도 지니고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유물론이 점(원자)의 연속에 한정해서만 보려고 할 때, 타르드는 상호 침투하는 작용영역, 즉 믿음과 욕망의 흐름을 확인했다....20세기 사건의 철학에서 각각의 모나드는 하나의 잠재적인 우주이고, 하나의 가능세계이며, 상호 교류하고 만나는 복수의 가능세계이다...우리는 예정조화에서 다성악적인 조합으로, 초월적인 조직화의 과정에서 내재적인 구성 과정으로 이행한다. 38, 39

[ ] 사회 혹은 차이의 공존, 그것은 ˝매우 다채로운 형태로서의 각자에 의한 전원의 상호적인 소유˝이다. 사회는 동료를 소유하고 그리고 동료에 의해 소유되는 방법에 따라 정의된다. 설득에 의해, 사랑에 의해, 두려움에 의해 믿음과 욕망의 공통성에 의해, 그리고 부의 생산에 의해 ˝사회의 제요소는 무수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되고 끌어당긴다.˝..사람들은 존재의 다양한 단계의 목록을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유의 다양한 단계를 분류하는 것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40 각각의 모나드가 서로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 모나드들은 많든 적든 서로 전유할 수 있고, 또 더욱 높은 정도의 소유를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 모나드들은 점점 집중해 간다. 또한 모나드들은 무수히 다른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를 전유할 수 있으며, 각각의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를 전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41 결국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행동의 방향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42 주체의 철학은 다만 하나의 세계만 가능하다는 전제에 서 있기 때문이다. 44

[ ] 결국 사회적 조정 원리는 시장과 가치법칙, 국가, 변증법 등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모나드에 내재적인 구성적작용 안에 있다. 45 각각의 기관은, 그리고 각각의 기관 내의 각 세포와 각각의 세포 내의 각각의 요소는 자신 안에서 자신을 위해 작은 은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6 개인의 등질성과 획일성은 개인의 유동성과 유연성의 또 다른 측면이고, 보다 풍부한 특이화와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47 이 전체(결국 사회와 제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모나드들이 이 전체를 재생산하려는 믿음과 욕망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49 모든 발명은 (위대하든지 사소하든지간에) 사건이다. 그 사건은 그 자체 안에는 어떠한 가치도 포함하지 않지만, 가능태를 새롭게 창조하기에 모든 가치의 전제조건이 된다..발명은 일종의 구성적인 힘이기도 하다...발명의 시원에서는 모두가 이 복수의식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후에 발명은 단수-의식을 통해 드디어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다양한 모방의 흐름(관념, 습관, 몸짓, 지각, 감각) 사이에 일어나는 마주침이고 잡종형성이며 협력이다. 51 발명도 사회적 보급도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구성 과정은 바로 차이와 반복으로부터 성립한다... 모든 발명은 개인과 사회에 정해져 있었던 규범과 규칙, 습관으로부터의 단절이다. 발명이란 그것을 성취한 자를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 두고 그 자를 사건의 시간 안으로 파고들게 하는 행위이다. 52 발명의 작용은, 노동의 작용과는 달리 그 자체로 공공적인 것이다. 이 작용은 만인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발명의 작용은 만인의 눈에, 정동에, 지성에, 의지에 미치기 때문이다. 54 발명에서 가치의 구축으로, 미시에서 거시로, 로컬에서 글로벌로의 이행은 전체를 성립시키는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그 능력은 패치워크들과 네트워크들을 서서히 편성하는 능력이다. 또한 타르드의 어휘를 가져오자면, 그것은 (믿음과 욕망의) 흐름과 집합체를 편성하는 능력이다. 55

[ ] 언어와 과학도 또한 사회적 양과 마찬가지로 추상과 전체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소의 구축주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발명을 무시한다면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재생산밖에 없다. 59 모나드들 사이에는 명령과 복종, 포획의 관계밖에 없다. 시장, 증권 거래소, 자본, 사회는 포획의 포획이다...전체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61 모나돌로지, 혹은 무한소의 관점에 따라, 우리는 사회적 영역의 구성 과정을 의인론적으로서가 아니라 우주론적으로 사고하도록 유도된다. 62 모든 관계가 생기는 것은 사건으로부터이고, 본질로부터는 아니다. 맑스와 타르드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62 자연은 항상, 그리고 이미 주체와 인간 내부에 있다. 무한의 존재 - 즉 무한의 유기체적 모나드와 무기적 모나드, 모든 의지하는 것, 믿는 것, 생각하는 것 -의 투쟁과 협동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64 이념형 - 혹은 개인 -은 무한의 괴물성을 일시적으로 안정시켜 봉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한 괴물성이란 각자의 힘을 그 자체 안에, 그리고 다른 힘과의 관계 안에 은폐하여 간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의된 괴물성은 예외적인 형이 아니라 자연(본성) 그 자체다. 주체화의 모델은 괴물이다. 67

[ ] 통제사회에서 삶과 생명체의 개념: 자본주의에 관한 ‘유일한 드라마‘ - 헤겔에게서의 정신과 맑스에게서의 자본의 드라마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드라마의 다양체‘를 생각해야 한다. 70 모순의 논리를 ‘유일한 드라마‘의 원동력이지만 그것은 너무 빈곤하고 무력하다. 71 경제구조와 공장은 이미 규율훈련의 메커니즘이 영혼과 신체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71 감금의 기술(규율훈련)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다양체를 공간에 다시 배열하는 것(바둑판처럼 분할, 감금, 정렬 등) 다음으로 다양체에 시간의 순서를 붙이는 것(몸짓의 분해, 시간의 세분화, 행위의 프로그램화) ..다양체를 특정한 공간-시간 안에 다시 틀 지우는 것. 이상 세 가지다. 생명정치의 기술(공중위생, 가정정책...)은 삶을 관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다양체에 대해 행사된다. 이 경우엔 규율훈련의 제도와는 달리, 다양체는 다수 (전체 인구) 가 되고 공간은 열린다. (인구의 한계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다) 73

[ ] 들뢰즈는 권력관계와 제도를 구별한다. 권력은 여러 힘 사이의 관계이지만, 제도는 여러 힘을 통합하고 계층화하는 심급이다. 제도는 여러 힘의 관계를 명확한 형식 안에 정착시켜 그 힘들 및 힘 관계에 대해 재생산 기능을 부여한다. 74 다양한 권력관계의 현재화는 ˝하나씩 돌을 쌓아 올리˝듯이 진행된다...통합이란 네트워크와 패치워크 또는 흐름과 응집체를 하나로 정리하기 위한 기술이다....일반화, 추상화를 통해 이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통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적분계산을 모델로 하여, 사회유형과 사회적 양을 미소한 차이와 변용의 통합(적분)으로 이해했다. 75 남성/여성이라는 대치는 무수한 성으로의 생성변화 가능성을 분리하여 그 가능성을 이성애라는 규범의 이원론 속으로 결정화했다. 다양체를 계급으로 변환하는 것과 무수한 성을 이성애로 변환하는 것은 특정한 유형을 구성하고 다양체를 억압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 규범을 구성하고 코드화하며, 다른 생성변화를 향한 다양한 잠재성을 무력화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사회는 그 생산양식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표현하는 언표와 그 사회를 현실화하는 가시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76, 77

[ ] 기계적 배치 또는 신체적 배치는 그 형식(감옥)과 실체 (수인)를 갖추고 있다. 표현기계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 형식(형법)과 실체(범죄)를 갖추고 있다. 77 규율훈련이란 ‘몸짓의 잠재성‘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이며, ˝잠재성이 현실로 생성변화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간섭하는 권력˝이라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78 규율훈련과 생명권력이 외부 혹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차이화하는 차이‘의 역동성으로부터 모든 힘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확실히 제도는 과거(전통), 현재(지금 여기서의 다양한 권력관계의 관리), 그리고 미래(진보)를 손에 넣고 있지만, 생성변화와 변용을 결여하고 있다. 사회과학은 이와같은 제도의 구성과 작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균형(정치경제학)과 통합(뒤르켐), 재생산(부르디외), 대립(맑스주의), 생존경쟁(다위니즘), 또는 경합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회과학들은 생성변화를 무시하고 있다. 79 규율사회는 라이프니츠의 신처럼 작용한다. 결국 규율사회는 단지 하나의 세계만을 현실로 이행시킨다. 그 관점에서 말하자면, 규율사회는 생산적이라고 간주되어도 좋다. 규율사회는 규율사회의 세계를 위해 여러 모나드를 구성하는데, 그 세계는 감금 기술과 생명권력의 기술을 통해 각각의 모나드 속으로 함입된다....균형의 이론(정치경제학과 사회학) 또는 모순의 이론 (헤겔주의와 맑스주의)에서도 또한 그 이론들이 인정하는 실천은 하나의 동일한 공통 지평을 보여 준다. 즉, 단 하나의 가능세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다. 81닫힌 공간 안에서 주체성을 규율훈련할 필요는 없게 되고, 열린 공간에서 주체성을 변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종래의 규율훈련 위에 통제가 새로이 중첩되었다. 82

[ ] 생명권력은 삶의 특유한 과정 전체 (삶, 죽음, 생산 활동, 병 등)를 포괄하는 것이다...생명정치는 ˝생물학적 과정 전체 안에 신체를 위치 짓는다˝..생명권력의 목적은 삶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단지, 생명권력이 인구의 존속 조건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에 있다. 85 타르드는 ‘미래의 사회집단‘은 군중도 계급도 주민도 아니라 공중(또는 다양한 종류의 공중들)이라고 주장했다. 공중이라는 개념을 통해 타르드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공중, 신문이 만들어 낸 독자로서의 공중이다. ˝공중이란 원거리에서 서로 정신적인 작용을 끼치는, 여기저기 흩어진 군중이다.˝...규율훈련 기술이 기본적으로는 공간에서의 조직화인 것에 비해, 통제 기술과 공중을 구성하는 기술은 시간과 잠재성에 최대한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공중은 시간 속의 현전을 통해 구성된다. 86 통제사회에서 제도는 기계적인 테크놀로지(왕권사회)와 열역학적 테크놀로지(규율사회)가 아니라 원격작용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88 공중에게서 발명과 모방은 ˝정말 한 순간에, 마치 완전히 탄력적인 환경 속으로 파도가 밀려˝오듯이 보급된다....사회는 여러 공중으로 분할되어 간다. 그 분할은 ˝점차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더구나 강력하게, 종교에 의한 분할, 경제에 의한 분할, 미적 가치관에 의한 분할, 정치에 의한 분할로 거듭된다.˝ 89 습관의 지배에 이어 유행의 지배를, 전통의 시대에 이어 혁신의 시대를 수립하고 있다. 90 통제사회의 노예화 기술은 규율사회의 노예화 기술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중첩되면서 점차 넓어졌다. 92 ˝생명체의 본질은 기억이고, 그것은 현재에서 과거의 신체를 지속하는 것이다. 생명의 형태는 자기의 재생산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결합하고 미래를 위해 메시지를 기억한다.˝ 94

[ ] 뇌의 협동에 의해 움직이고, 새로운 제도(여론 등)에 의해 포획되는 모든 힘은 기억과 주의력이다. 그것은 베르그손이 ‘지적 협력‘이라고 정의하고 타르드가 ‘뇌의 코나쿠스‘라고 정의한 힘이다. 95 기억과 주의력은 다양한 관계 안에서 현재화하고, 그들 관계와 함께 사회적 경제적 힘들이 된다. 96 통제사회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신체적 기억보다도 정신적 기억을 둘러싸려고 한다...통제사회에서는 인간정신이 더욱 주요한 대상이다. 97 기억으로서의 삶과 인간이라는 종으로 생물학적으로 특징지어진 삶(죽음, 탄생, 병 등)은 구별되어야만 한다.. 기억과 그 코나투스(주의력)를 대상으로 하는 이 새로운 권력관계를 인지정치라고 정의하려고 한다....(통제기술의 총체).. 98 규율훈련은 신체를 틀에 넣는 일(감금, 학교, 공장 등)을 수행하고, 생명정치는 삶의 관리(복지국가, 건강의 정치 등)를 조직화하며 인지정치는 기억과 그 잠재적인 역능의 변조(전파네트워크, 음향 영상 네트워크, 정보통신 및 여론과 집단적 지각 지성의 구성)를 제어한다. 이들 각각에 대응하는 사회학적 개념은 (감금양식의 하나로서의) 노동자 계급, 인구, 그리고 공중이다. 99

[ ] 사회적 리스크 (실업, 퇴직, 병)를 보장한다는 예전 방침은, 현재 모든 개인의 삶에 개입하고 예속노동에의 종사를 강제한다는 방침으로 변했다. 인지정치의 새로운 모든 장치는 정보기술과 통신기술의 발달에 수반하여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100 냉전기 사회주의 정책과 자본주의 정책의 계획경제는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예정조화‘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102 20세기란 자기와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노동과 주체가 장기에 걸친 불가역적인 위기를 맞이한 시대였다고. 2차 세계대전 후, 주체/노동의 패러다임을 조절 시스템으로 잘 기능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정치적인 결정을 거듭 쌓아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이다. 105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고용의 대안이다. 노동에서 고용으로의 이행은 노동운동이 쇠퇴해 간 역사의 또 다른 슬픈 페이지다. 노동이 규율사회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은 바로 규율사회가 쇠퇴하던 시기였다.(포디즘) 그에 비해 고용은 통제사회에서 조절의 기본적 형태 중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106

볕뉘

0. 진로집이었다. 오랜만의 연락에 차 한잔이 술 한잔으로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의 영화대본을 푹 빠져 읽으니 벌써 도착해버렸다. 그 뒤 몸이 일주일을 앓는 듯했다. 친구는 물었다. 다 괴물이지, 그게 맞는 거지라고 물었다. 주저없이 답했다. 맞아.

1. 어제는 정규뉴스가 끝나갈 쯤 잠이 들었는데, 곧 다시 깨었다. 지진멀미를 하는 것인지 아무 일이 없어도 뱃사람이 육지에 걸음을 떼고 울렁거린다니...타첸의 고야를 보았다. 귀족의 세상과 귀족들이 단두대에 거침없이 사라지거나, 집시의 패션을 부러워하는 일이거나....성직자이거나 거의 게으르거나 시대의 당연한 것들은 이내 그 시간의 흐름에 벗겨지거나 지쳐버리는 모습이었다.

2.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거나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둘로 나누는 습관과 그 둘에 걸려 아무 것도 어쩌지 못하는 주춤에 있는 건 아닐까. 둘로 나누고, 또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말을 새로 만들지 말 것. 그러니 늘 낡은 단어를 써야 한다. 이것이나 저것의 세계. 이 것의 삶과 저 것의 삶만 있다. 우리 삶의 양식은 붕괴되지 않는다. 뭐라고 하지 않는다. 진리는 찾는 게 아니라 책을 천의 결로 독해해내듯 달리 읽어내서 펼치는 것. 사랑은 진리가 아니고 목적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항이 다항의 음을 내지 못할 때, 그 현물이 눈 앞에 있지 못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속의 괴물성이 드러날 때만 가시화되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만들어진다는 건 공감과 느낌, 따스함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낡은 단어와 표식은 다 지워진 것으로 없는 것으로 사유해내도 되지 않을까.

3. 사람을 겉의 표식으로 다양한 존재로 나누는데만 익숙하지, 속에서 들끓고 있는 소유의 다양한 결로 사람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는 답답하다. 사건도 없는 무미, 아무 맛도 없는 삶, 그 삶의 외부를 곁들여보려는 안타까움이 없다.

4. 늘 등장인물들은 물고 물린다. 덥썩 물었다 싶으면 꼬리에 다른 이가 꼭 물고 있다. 물고물려 어느 것이 새것이고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마에 눈이라는 것이 생겼다면, 그것이 시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서서히 눈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갇혀있어도 주장하고 더 장황하게 서술하는 저자의 단순을 품어본다. 어째서,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여기까지라고... ... 이 책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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