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춤출 때마다 홍학이란 걸 잊어요


묘사 – 좀더 자라서는 묘사하는 걸 즐기지 않게 됐다. 아무도 묘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 바빠서 묘사에 귀기울일 시간이 없다는 것도. 게다가 묘사는 비경제적이다. 묘사는 감정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묘사는 논리적이지 않다. 철학적이지 않다. 묘사는 피곤하다. 묘사는 피곤하다. 묘사를 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살 만한 세상이다...홍학이 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특별히 묘사를 의식하지 않는다. 106

이 글에서 내가 언급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홍학이다. 홍학이 아니라도 홍학이 되는 중이거나 홍학에 가까운 상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숨기고 싶어한다. 110

저는 춤을 출 때마다 홍학이라는 것을 잊어요. 저는 배우예요. 저는 무대에 서요. 저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해요. 저는 인간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춰요. 저는 타고나길 그랬어요. ....저는 역사. 저는 몸과 햇빛. 115-116

사육사는 나를 훑어보더니 툭툭 두드리고는 돌아간다. 나도 홍학들 틈으로 돌아간다. 홍학들은 그사이 모두 잠들어 있다. 나도 눈을 감는다.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밤이다. 그 가운데는 새벽이다. 124

게으른 홍학을 처단하자. 사육사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몸을 긁기 시작한다. 곧 몸이 붉게 부풀어오른다. 인공 호수 위를 걷듯 사뿐사뿐 방안을 돌아다닌다. 네 춤을 떠올리며 비슷하게 몸을 놀린다. 네 울음소리를 따라 내본다. 128

그때 나는 논리의 결론은 항상 선이라고 생각했거든, 네 말대로 나는 순진한 사람이었어. 근데 살다보니까 생각이 변하더라. 선이 항상 이긴다는 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더라. 이 세상엔 논리적이지 않은 게 너무 많아. 142 로로. 내 사랑 로로. 내 친구 로로. 너는 갓 ㅌㅐ어난 강아지야. 흰 털 뽀송뽀송한 강아지. 나는 마흔다섯 살이 됐지만 너는 여전히 ㄱㅏㅇ아지야. 143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지. 나와 ㄴㅓ, 너희들 모두. 그는 온몸으로 피의 시를 쓰고 있었다. 일하지 않고 사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햇빛이 닿으면 따뜻하고 그늘지면 춥고 당연한 건가. 153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 외로움을 즐기기도 해. 저는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닥불이, 모닥불이, 모닥불이 존재합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아. 158



홍학아, 홍학아, 무슨 소리가 들리니? 암소의 눈물이 들려요. 165



볕뉘.

0. 건축이냐 혁명이냐? 금정연, 아날리얼리즘...이런 소설의 행간에 오한기가 자주 언급되어 궁금하던 차에 이리 접하게 되었다.

1. 작품이란 무엇일까? 사울의 아들과 그 영화를 비평한 어둠에 벗어나기. 그 영화는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종 클로우즈업된 상태로 관객을 그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지금도 그렇다. 여백을 팔할 정도를 두는 작품. 이 또한 최정례의 시에서도 많이 느꼈다.

2. 이 작품은 중반부터 몰입을 하게 만들었다. 시인들이 자신만의 개념어를 써서 자신의 의도를 형상화하듯이 계속 궁금하게 만들다가 그 고비를 너머서니 긴박감을 느끼게 해버렸다. 홍학이 무엇이어도 좋을 것이다. 해설에서 문학으로 읽히던지 목없는자들의 삶으로 읽던지 또 다른 무엇으로 읽던지 여전히 궁금한 것 투성이인채로 물음을 발산한다. 그래서 물수리는 왠 시위. 원자력발전소의 둥지를 홍학의 숲으로 한 건 왜. 디럭스버거는 왜. DB는 왜. 왜. 왜.

3. 애틋함이 읽히고, 회자가 되는 한. 그것이 작가의 의도인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다르게 읽고 나누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작품으로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ㄷㅐ한 시적 형상화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