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 보이지 않는 과학기술의 곁들

 

1. 양치기 소년과 늑대라는 이솝우화에서 양치기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외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자 키득키득 웃는다. 또 양치기 소년은 거듭되는 따분함을 녹이려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마을사람들이 늑대를 쫓아내기 위해 모여든다. 여전히 재미있어한다. 결국 늑대는 나타났고 양치기 소년의 외침에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었고 양들을 모조리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거짓과 거짓, 거짓의 다음은 진실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과학, 신경과학의 발달의 진전과 성과는 활발하고 빠르다. 행동경제학을 비롯해 많은 응용분야를 낳고 있다. 경제학은 사람들이 합리적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면 수십종류가 되는 상품을 고르려면 하루종일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충동적이고 쾌락적이기도 하다. 감성과 직관을 바탕으로 선택하고 움직이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대중의 직관을 쓴 저자 존 L. 캐스티는 말한다. 역사상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면서 사회적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미래에 일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주장한다. “사건이 대중심리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건을 조종한다.” 곧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사건을 만든다는 것이다.

'과학은 무엇인가' '기술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과학기술에 드리운 그림자를 응시하기를 주저한다. 과학기술이 몇세기동안 누렸던 호사와 혜택에 경도되어 여전히 지난 추억처럼 기억하고 떠받든다. 대중은 이성적이지 않다. 황우석사태를 비롯해, 온갖 과학기술의 악몽이 드리워져도 자본과 과학기술의 세기를 살아남은 대중은 여전히 과학기술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먹을거리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험은 멱급수로 커져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어도 낙관을 버리지 못한다.

아프리카와 북한 등 세계 곳곳의 인류가 굶어죽고, 삼림이 황폐해져도 그것은 남의 일이고 지금여기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은 여전히 과학기술을 쉽게 알리고 이해하는 대중화에 관심이 있지, 반대편에 튀어나오는 검은 그림자를 살피지 못한다. 어쩌면 한 세기를 넘어 어두운 사건이 지근거리에서 직접 피해를 입는 지옥을 몇차례 접하고 나서야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유전자는 조금 변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쿠시마의 원자력 재앙에도 대중은 놀라서 대오 각성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건들은 오히려 점점 더 교묘하게 묻히고 덮힌다. 합리적인 이성과 환원론에 집착하는 과학의 도식은 우리 문화를 잠식한지 오래다. 그 문화와 습속에 배여온 지금 여기의 대중은 합리적일 수 없다. 과학은 합리적이성과 객관적인 사실을 기초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어한다.

 

2.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우화를 보는 시각을 달리해보자. 양치기 소년의 역할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위험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하자. 마을사람들은 첫번째 거짓말에 속고, 두번째 거짓말에도 속았다면 소년을 혼내고 돌아갈 일이 아니었다. 모여서 양의 안전에 대해 논의하고 대비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가올 위험을 막아내기 위해 사회에서 바꾸고, 고치고, 대안을 마련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 결국 늑대에 의해 양들은 희생당하고 만다.

리차드 세넷은 68혁명이후 절대성과 확신이 세상을 별반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지금의 거대도시가 지나치게 계획적이라는 것에 문제삼는다. 상업지구, 주택지역, 녹지지구를 통해 모둠별로 모아놓아 도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나 다른 삶과 섞이지 않는다. 사회의 위험이나 고충에 대해서도 더 이상 피부로 와 닿는 것이 없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무질서와 고통스러운 어긋남을 겪어내지 못해 청소년의 정체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적 차이를 겪어내면서 성인의 복잡다단함을 얻어내지 못하는현대도시의 자발적 노예의 삶을 그리고 있다.

14세기 역사학를 학문으로 정립한 이븐할둔은 전야(田野)생활과 도회 생활을 비교한다. 도시 시민은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짓고 바꾸어나가는 용기와 저항정신이 전야생활의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법률과 규정에 의해 움직이도록 체계가 만들어지고 도시 시민의 영혼에 무력함과 나태함생겨 약하디 약한 인간으로 퇴화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인간은 대부분을 제도에 일임했기에 더 이상 문제와 시스템과 싸울 능력마저 잃어버린다고 밝히고 있다.

참사라는 끔직한 재앙으로 이어지는 현실 속의 세상 사람들은 계급과 계층에 상관없이 유사한 위험의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 기존의 자본에 수혈을 하던 과학기술, 제도와 시스템은 다른 국가의 선진 사례를 이땅에 적용하기를 몸소 거부한다. 거대도시를 꿈꾸던 자본의 관성은 더욱더 시스템을 꼭 움켜쥐려 버티는 것이다. 제도와 제도, 규정과 규정 사이 지뢰처럼 걸려있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용기도 없다.

한편 모든 산업과 관계들의 탄탄한 배경역할을 하는 자동화 기술 또한 숨겨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편리성의 이면에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가진 재능, 그리고 우리의 삶에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동장치가 긴급한 위험시 오히려 가속시킬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목적지에는 도착하게 해주지만 왜 그런지 상상하는 수고로움조차 잊게 만들어 기본적인 능력조차 감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는 기술의 역할을 살핀다. 기술은 경제 속에 함침되어 팽창과 신축의 탄력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 진보가 민주적이고 능력주의적인 합리성을 향한 진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공익에 기초한 더욱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구축하려면, 이렇게 변덕스러운 기술에 의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정치적인 힘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비코는 사회가 인간에 의해 창조됐으므로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보다 인간사회의 원리를 찾지 않는 것을 개탄한다. 당대의 인물인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유명한 명제에 출발한 원리는 수학과 자연학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제외한 역사나 실천적인 지혜, 수사, 시학 등은 도리어 인간에 의해 가장 잘 인식될 수 있는 영역이기에 인간사회의 원리는 그렇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는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인간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코는 오직 추상적 진리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지적으로 뛰어나도 '합리적 미치광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승리처럼 보였던 지난 몇세기는 오히려 과학과 경제를 앞세우고 힘없는 인간과 자연을 지운 역사였다. 자본주의를 치켜세운 경제의 쌍두마차인 과학은 인간의 역사에서 튕겨 나와 오히려 사람과 삶을 거꾸로 짓이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사회의 원리와 자연계의 원리를 분기한 시점인 그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비코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학문의 성과를 되살필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은 왜곡된 현실에서 더 이상 경제의 해결사로만 자리매김을 해서는 안된다. 경제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애초의 인간을 위한 과학기술과 멀어지게 된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 예술을 함유하면서 공명하는 과학기술의 시선이 필요하다. 사회문제의 중심에서 여러 맥락들이 살아움직일 수 있도록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대과학기술이 응축해놓은 문제의 그늘을 살펴야 한다. 국가의 신민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에서 살아움직이는 과학기술로 몸을 한껏 낮추면서 내려와야 한다. 분야의 우물만 독립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얇은 과학이 아니라 두루 살피고 그 그늘의 영향이 겹쳐 어떻게 위험을 낳을지 미리 살피는 제도적 혜안, 정치적 혜안도 미리 감안해야 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국경이 없어야 한다. 3세계의 기아라는 국경선을 넘으며 해결하는 적정기술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를 보살피고 선순환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권계급, 특권국가의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노동을 요구하는 과학기술의 결과물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자본만의 융통을 바라는 시간에 약한 기술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내구성에 강한기술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또한 사회문제, 지구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와 문화에 관여하여야 한다. 그 해결책으로 지역과 함께 공존하는 중간기술, 적정기술, 강한기술들이 생동감있게 어울려야 한다. 이런 조화로 인해 지역과 문화, 삶에 자리매김하는 역할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과학만이 살아남을 수 없다. 미래세대의 몫을 빼앗아 불꽃처럼 써버리는 축제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과학기술은 물신화하여 숭배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야생동물을 길들이듯이 고삐를 쥐고 조련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손을 벌리고 또 다른 손을 마주잡아야 한다.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 인문의 결로 삶 속에서 호흡하여야 한다. 결과물이 아름답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예술적인 감각도 가져야 한다.

 

 

 

 

 

 

 

 볕뉘. 참터 10주년 기념 문집이다. 곧 10주년 행사다. 멀리서 가지 못하지만 마음도, 문집에 게재한 글도 남겨 적적한 마음을 달래본다. 앞으로 10년 잘 되길 바래본다.

참터 창립10주년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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