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기억의 대안물로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을 텅비게 한다.
모서리.
기술은 설계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기술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설계자들의 의도를 넘어선다. 왜냐고 묻지만, 답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설계자의 의도를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긍정적인 영향만 의도적으로 부풀릴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기술에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문화, 심리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술에 과도한 혜택을 받은 연유로 기술만 도드라져 보일 뿐 기술의 뒷그림자로 사라지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아 보인다. 기술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영화비평, 문학비평은 있어도 기술비평은 부족하거나 없는 시대의 흐름이 어쩌면 이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싶다. 기술이 목적인데, 그것에 동의하는데 어떻게 비평을 할 수 있겠는가? 자동화가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에 머무르게 한다. 2차원에서 3차원이 되는 접점. 원근법의 발명처럼 사람과 대면은 없다. 자동화기술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안심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기술과 사람의 인터페이스, 계면에 대한 긴장을 늦추게 만든다. 긴장을 없애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통찰력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전문가의 위세에 눌려, 누적된 지식의 양에 압박되어서 통째로 보려는 사고나 습관이 바랬는지도 모른다. 삶은 늘 통으로 있다. 삶이 하나하나 분해되고 찢겨나간다면 그것이 어떻게 삶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통으로 존재한다. 하늘을 품고 우주를 품고, 우주를 발견하는 만큼 사람은 같은 속도로 커진다. 통합적인 시선을 놓쳐버린 지금,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전문가의 의견을 빌린다. 기술을 너무 놓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비대해지고 커져 인간의 손목에 매였있던 끈을 풀고 포효하는지도 모른다.
기술이 문화와 사회, 사람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지점을 천천히, 확대경으로 미시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쩌면 더 인문의 접점일지도 모른다. 피부에 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불쑥 발라져 나간 기술이 어떻게 문화를 흔들고, 사회를 덜거덕거리게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멸시하거나 뒤트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컴퓨터는 우리의 신실한 벗이자 친근한 친절한 도우미가 되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의 정체성을 정확히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를 보다 면밀히 검토하는 게 현명해보인다. 13
니콜라스 카가 자동화 테크놀로지에 대해 비판적인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만족감, 그리고 몰입감을 빼앗아 갈 수 있어서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과 만족은 실제로 세상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직접할 때 벌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중의 집중이 온통 스크린과 스마트폰 액정에 향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행복과도 멀어지는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반복된 일상이 주는 안정감, 땀 흘린 노동이 주는 즐거움, 훈련과 연습이 주는 몰입감, 애써 노력한 결과가 주는 보람, 몸을 움직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나르는 삶이 주는 행복감을 우리는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을 디지털 문명이 주는 공허함으로 채우게 될지 모른다고 니콜라스 카는 경고한다. 9
현명하게만 사용한다면 자동화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힘들고 단조로운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보다 도전적이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매진하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자동화에 대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 혹은 '이제는 잠시만 멈춰'라고 말해야 할 시기를 모른다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자동화의 장점에만 흠뻑 빠져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9
화이트헤드처럼 우리는 대부분 자동화가 인간에게 무해하며, 우리가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주지만 인간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바꿔놓지는 못할 거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잘못된 가정이다. 그 가정은 자동화를 연구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대체 신화'에 불과하다. 노동력을 줄여주는 기계는 일만을 대체해주는 역할만 하고 끝나지 않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 태도, 기술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일의 성격을 바꿔놓는다. 자동화는 인간이 하는 활동을 대신해주기만 하기보다는 기계의 설계자들의 의도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활동을 바꿔준다. 자동화는 일과 노동자를 모두 바꿔놓는다. 108-109
전문가들은 소프트웨어에 의존할 때 특정 암들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 아울러 컴퓨터의 결정 지원 기능들로 인해 생긴 미묘한 편향들은 단서와 경고에 대응하기 위한 인간이 가진 인지 기능의 일부일지 모른다. 이런 지원 기능들은 인간의 초점을 조정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왜곡한다. 114
자동화는 우리를 행위자에서 관찰자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조종사가 조종간을 조작하지 않고 스크린만을 응시하게 되는 식이다. 그런 변화로 우리는 전보다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전문지식을 배우고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은 손상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일 처리 능력을 높여주는지 낮추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동화는 장기적으로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기술력을 약화시키거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방해할지 모른다. 116
정신적인 생성 활동은 교육학자인 브릿 호건 챙의 말대로 "개념적 추론과 심도 깊은 인지적 처리 능력"이 수반되는 활동 수행 능력을 개선시킨다. 쳉은 "머릿속에서 생성한 재료가 복잡할수록 생성 효과가 더 커지는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118
우리는 혼자 어떤 과제나 업무를 수행할 때 컴퓨터의 도움을 받을 때와는 다른 정신적 과정을 밟는 것 같다. 소프트웨어로 인해 일에 대한 참여도가 낮아지고, 특히 소프트웨어 때문에 관찰자나 감시자 같은 보다 수동적인 역할을 맡게 됐을 때 우리는 생성 효과의 핵심인 깊은 인지적 과정에서 벗어난다. 결과적으로 노하우를 얻는 풍부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된다. 생성 효과를 내려면 자동화가 줄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힘든 수고' 가 필요하다. 119
문제풀이 같은 인지 과제를 자동화할 경우 정보를 지식으로, 그리고 지식을 노하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우리의 지적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실제 세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회계감사관의 전문회계프로그램 등) 122
우리는 검색엔진과 다른 온라인 자원들을 갖고서 과거 전례가 없던 수준으로 정보 저장과 검색을 자동화했다. 우리가 본래 타고난 것 같은, 기억하는 작업을 떠넘기려거나 '외재화'하려는 경향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빠져나간 사실들을 빨리 상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정신노동의 자동화로 인해서 기억하고 이해하는 일을 쉽게 피할 수 있게 되면 이런 외재화하려는 경향은 병적으로 변할 수 있다. 127
우리가 생성 작업을 하기 위해서 애써 머리를 쓸 가능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배우고 알게 되는 게 줄어들고, 우리의 능력 또한 감퇴할 것이다....인터페이스가 인간의 능력을 더 많이 대체할수록 새로운 상황에 대한 사용자의 적응력은 그만큼 더 떨어지게 된다. 컴퓨터 자동화는 우리에게 생성효과와 반대되는 '퇴화 효과' 를 일으킨다. 128
인간의 마음이 통하는 기술
모든 도구들이 인간과 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도구들은 우리가 숙련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자동화라는 디지털 기술들은 우리를 세상으로 초대하고, 우리가 지각 범위를 확대하고, 우리가 가진 가능성들을 늘리는 새로운 재능들을 개발할 수 있게 권장해주기보다는 종종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 도구들은 우리의 참여를 막을 목적으로 설계됐다. 그 도구들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어낸다. 이것은 다른 어떤 관심보다도 편안함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지배적인 기술 중심의 디자인 관행들이 빚어낸 결과다.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우리의 관심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게 공들여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런 결과를 반영한다. 321
수공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우리가 수공구들을 우리 몸의 연장, 우리 자신의 일부로 느끼기 때문에 그들이 야기하는 윤리적 선택들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긴 낫은 꽃다발을 자를지, 자르지 않을지 선택하지 않는다. 제초 작업자가 선택한다.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는데 전문가가 될수록 자연스럽게 우리의 책임감도 강해진다. 초보 제초 작업자의 경우 손에 쥔 낫이 이질적인 물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전문 제초 작업자의 경우에는 손과 낫이 하나가 된다. 326
기술이 자애롭고, 자기 치유력이 있는 자율적인 힘이라는 믿음은 유혹적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느끼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에서도 벗어난다. 이런 믿음은 특히 자동 시스템들과 그들을 통제하는 컴퓨터들로 인해 생긴 노동 절약적이고 이윤 추구적인 활동을 통해서 더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한다. 333
역사가 상기시켜주듯이 근로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며 떠드는 거창한 말 뒤에는 노동에 대한 경멸감이 감춰져 있다. 일자리를 잃은 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아실현을 위해 여가시간에 쓸 돈을 지원해주기 위한 광범위한 부의 재분재 계획 등에 동의하는, 자유주의자적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조바심을 내는 기술 분야 거물들이 오늘날 등장하리라곤 상상하기 아주 힘들 것 같다. 334
현재 시점에서 기술이 노동의 고역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인류의 일관된 바람을 이뤄준다는 시각은 왜곡됐다. 기술은 우리를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가득한 지옥 속으로 더 깊숙이 던져버릴 것이다. 아렌트는 "자동화로 인해 우리는 노동, 즉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일도 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가득한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에 직면하게 됐다. 분명 그보다 더 나쁜 사회는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유토피아적 이념을 갈구한다고 했다. 334
"컴퓨터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사용하기도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컴퓨터의 편의성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부주의하고 무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다른 보다 중요한 고려 사항들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컴퓨터의 조작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더 깊숙이 파고들어 연구해야 한다." 337
저항은 결코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우리의 활력원인 "활동적인 영혼"이라면, 우리의 고귀한 의무는 제도적, 상업적, 기술적 힘 중에 우리의 영혼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어떤 힘에라도 저항하는 것이다. 340
볕뉘. 새벽 책장을 넘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와 달리 이 책에서는 저자를 사상가를 꼬리를 달아두었다. 인터넷에서 좀더 확장하여 자동화 기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전체를 염두에 둔다면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어느 하나로 인해 전체는 흔들리고 변한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나머지가 움직여야 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은 너무도 강하다. 사회단체 활동을 한다고 의식의 저변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철벽같은 대중의 인식에 균열을 내는 일은 너무도 힘들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환상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달나라 예산에 목을 매이게 만든다. 미친 짓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짤랐던가? 사무자동화, 공장자동화 하지만 누가 말했던가? 말하더라도 들은 척이라도 하는가? 대중의 직관만큼 세상의 걸음마를 한다. 기술만 발라낼 수 없다. 기술만 발라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라는 시각과 인간이라는 무게중심을 놓치지 않고 사유하는 기술비평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이 아주 작은 밑거름이나 기술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연구윤리, 생명윤리 못지 않게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력과 통찰력이다. 인문사회학자들 또한 기술과 과학이 접근하지 못할 영역이 아니라 삶과 사회와 문화와 호흡하는 사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문외한이라 이름붙이는 순간 정말 문외 한이 된다. 과학과 기술을 품을수록 좋은 비평이 좋은 글이 나올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너무 멀리와 있다. 돌아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 ...
인간의 마음이 통하는 기술, 우리의 영혼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제도적, 상업적, 기술적인 어떤 힘이라도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 다시 남는다. 그렇게 다시 돌이켜봐야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경제, 상업, 기술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의 뫔으로 다시 짚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