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동적 삶이란 그 활동성의 관점에서, 그 충일함의 관점에서, 몸의 존재력이나 잠재력의 항상 더 많은 것을 표현하려는 욕구의 관점에서, 단순화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외부 세계의 유도성과 맺는 조율 속에서 파악된다. 7

[ ] 정동은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기 때문에, 틀어질 수 있고, 삶의 부정으로 반전할 수도 있다...우리는 존재역량의 긍정이 증오라는 극단으로 치우치면서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부정과 반동의 힘으로 이행하는 정동적 전환을 보게 된다...이로 인해 결국 우리는 정동이 본성상 긍정적이라고, 단일한 원자가를 가진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9

1.

[ ] 인터뷰의 목적은 삶의 흥망성쇠를 가로질러, 삶을 채우고, 삶을 형성하는 느낌의 강렬도를 통해 생각하는 흐름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정동의 파도를 타는 것이다. 정동은 시행으로 이해될 뿐이다....독자들을 초대하고 자극해서 자기 자신의 시야 밖을 넘어 도표-이탈의 사유 경험을 유도하는 것이다...언급하는 사상가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세계를 계속 진행 중인 변형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철학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10, 11

[ ] 정동하고 정동되기는 세계로 열리는 것이며, 세계 안에서 적극적(능동적)이 되는 것이며, 세계의 귀환활동을 견디는 것이다....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13 정동은 물론 느낌의 강렬도들이지만, 그 느낌의 과정을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혹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것으로 특정할 수는 없다. 14

2.

[ ] 정동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머금은 몸체 안에 축적된 힘-질의 표현이다. 307 삶의 무의식적 느낌이다. 정동의 불특정성은 특정된 이미지의 형태로 의식에 떠오르는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기억이 아니라, 구체적 경험들이 잠재화되어 몸체에 내재하는 ˝과거일반˝, 즉 시간 전체의 기운(힘-질)에 대한 무의식적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과거일반을 구성하는 ‘정동적 잠재태‘는 시간 속에서 육체에 의해 말해지거나 행해지는 모든 것이 잠재태로 쌓여 끊임없이 지속하는 몸의 찌꺼기이다...살결. 308

[ ]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른 정동은 관계적인 결합체에 가깝다 할 것이다. 즉 정동은 현상학적 환원 같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 관계의 장 안에 있다. 관계는 사건을 만든다. 310 감각은 최초가 아니며 대상을 변형시키지 않은 채 느껴지는, 감각보다 더 근원적인 지작의 존재를 언급한다...감각에 포착되기 이전의, 의식 이전의, 타자와의 관련성 속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경험론자들이 말했던 판명하고 생생하고 구체적인 지각이 아닌, 맹목적인 정서에 사로잡힌 몸체의 모호한 느낌이다. 바로 충격과 사건으로서의 정동이다. 311 실제로서의 삶은 미세한 충격과 사건들의 과잉으로 채워지낟. 312 정동은 주관/객관, 정신/육체, 남/여, 인종의 개념들을 넘어서 그 경계들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구분의 가능성을 연다. 즉 정동과 그 개념은 ‘횡단적‘이다....정동은 거대한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상정하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서 더 강렬하게 삶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스피노자의 관계 윤리학에 따르면 정동은 정동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몸체의 능력이다. 정동적인 영향을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주면, 동시에 나는 그로부터 정동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여는 것이다. 315

[ ] 생명은 열려 있기 때문에 외부의 난입을 피할 수 없으며 외부와의 관계로부터 형성된다...정동이 영향 관계라면 그것이 강렬해질수록 우리는 더 크고 넓은 생명의 장 속에 접속해 있다는 감각을 가질 것이며, 그에 따라 귀속감은 고조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동은 비개인적이다. 정동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정동 안에 있는 것이다. 316 육체는 그 자신과 동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언제나 다음으로 넘어가는 중이고, 동시에 자기 자신 위에 이중으로 접히어, 자신의 과거, 기억, 습관, 반성 등, 시간 전체가 다중화되어 현재로 갱신한다. 317

[ ] 걷기란 제약들과 유희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20 항해운동은 지배적 패러다임에 기대어 경험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실려 파도를 타거나 이로운 방향으로 그것을 비트는 것...그에 따르면 경험은 대상이 아니다. 경험 자체가 우리 자신이며 우리 자신의 형성이다. 321 비판에는 도덕화의 저의가 있으며, 이로써 생생한 차원의 다른 경험과 접촉을 상실한다. 반면에 정동정치는 지배나 판결과는 무관하게 정동적인 연결을 통한 참여와 실행에 주목한다. 322 비결정성이 개입한 세 개의 장이 중첩될 때, 관계하는 모든 잠재성들이, 정밀한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복잡한 간섭 패턴을 형성한다. 비결정성 자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23 반전이 단독으로 또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관계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개체 간의 간섭과 공명 패턴을 비틀고 뒤집는 것은 전적으로 관계적이다. 324

[ ] 권력이 단지 외부에서 우리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경로를 설정한다. 권력이 가하는 제약들을 따르는 법을 우리 스스로 배워가며 그 경로를 따른다는 것이다. 또는 우리는 정체성을 통해 권력의 효과를 실천한다... 권력이 우리를 내적으로 형성하듯이, 우리는 권력을 외적으로 현실화한다. .효율성을 통해 사람들을 규율화하는 자본주의....권력은 육체의 움직임과 동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하고, 육체들의 추진력을 산출하며, 보다 더 다양하게 변칙적으로 발전해 왔다....이제 시장권력은 이데올로기나 규율을 넘어 느낌의 지대 속으로 파고든다. 325 자본주의의 시장권력은 정동을 심화하고 다양화하면 할수록 이윤이 되는 방식으로 오로지 잉여-가치를 뽑아내기 위한 것으로서 작동한다....정동을 납치한다. 이로써 정동에는 예컨대 상품의 형식으로 가격과 등급이 매겨진다. 326

[ ] 물건은 대량생산이 아니라 서비스나 기능을 사용할 권리의 무한생산으로 이윤을 창출한다. 저작권. 구매자는 더 이상 제품의 기능적 가치를 넘어 그 제품이 환기하는 정동적 가치들을 구매한다. 예컨대 자동차를 구매한다면 그것은 라이프스타일과 계급 정도 즉 계급의 느낌을 구매하는 것이다...과시소비를 넘어 이제는 상품이 경험 그 자체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모든 과정이 문화적이고 경험적이고 집단적인 수준에서 작동한다. 327 소비자들은 설득이 아니라 감염의 형식으로, 합리적 이성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정동적 수준으로 정향된 아비투스로 이윤 창출에 기여한다....자본주의의 사회화 과정....자본주의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가 되려는 잠재적 경향을 정찰하고, 포획하고, 생산하고, 다중화한다. 328 삶과 자본과 권력은 검문-등록-입력-처리-피드백-구매-이윤 등의 하나의 연속적인 회로 안에서 유통하고 순환한다. 329

[ ] 권력은 정동적이 되었다. 미디어가 생산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나 분석이 아니라, 정동의 조절, 정동의 채록, 그리고 방송과 배포를 통한 정동의 확산이다. 9.11 330 급진적인 사유가 다른 종류의 정동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거나, 실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우파는 희망이나 공포 같은 정동적인 방식들을 동원한다. 우파는 사람들의 ‘상상‘을 포착해서 애국주의 감정과 경향성을 생산한다...정동을 배제하거나 제한하고, 처벌하며, 훈육하는 식의 낡은 전통의 유물일 뿐이다.332 주체는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자유란 관계의 양태에 상응하는 능력과 역량의 정도이다. 333 분노나 동정은 근본적인 것을 건드리지 못한다...일관된 세력들의 일정한 대립과 충돌뿐만 아니라 그들의 중간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334 그는 특정 지위나 정체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관계와 ‘어울림‘ 그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작은 개입만으로도 섭동을 일으켜 접속 망을 넘는 증폭이 가능하며, 이러한 세계에 대한 믿음은, 신학적인 장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관계적인 장에서만 가능하다. 335

[ ] 습관은 자신의 힘을 상실하고, 세상에 대한 놀라움도, 조정 능력도, 변주할 능력도 없는, 한마디로 말해 정동의 역량을 잃어버린 몸체의 니힐리즘이다. 337 의식과 사유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비의식적 정동의 과정이 사유가 탄생하는 정초가 된다. 정동은 사유의 배아로서, 다가오는 행위 안에서 존재의 역량을 표현하도록 하는 시간의 강요에 의해 사유를 여는 사유의 발생이라 할 수 있다. ...정동적 반복은 미래성이 그 동력으로서 작용한다. 정동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조율, 조정, 변주 가능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338

[ ] 대비는 양적이거나 기능적인 상대성이 아니라, 내적이고, 질적이며, 절대적인 상대성, 다시 말해 배타적인 것들이 동일한 장 안에서 상호 포함하게 되는 사유의 강렬화이다....상대성이 아니라 관계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강렬한 대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미적인 것이다...진부한 습관이나 삶의 필요에 의해 묵살되어 버린 질적 현존들의 강렬한 대비(차이의 지각)를 통해 세계를 그 자체로서 직접 경험하는 역량을 실천한다. 340 정동정치는 잠재성의 부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마수미는 정동정치 또는 미학정치가 우유부단한 태도라고 말한다. 왜냐면 강렬한 대비나 창조적 긴장은 일정한 행위의 가상적 불완전성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341

[ ] 정치의 문제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결책이나 해법을 찾을 것인가가 아니라, 다음에 일어날 일 안에 어떻게 강렬도를 머물게 할 것인가이다...갈등과 차이 그대로 모체의 다중성을 미분적으로 구별하고 조율해 가며 그 강렬도를 함께 유지하는 것이다.....공생은 차이의 공유이지 공통의 언어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 언어는 지배 권력의 일종의 조건 형성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공통 언어는 결국 표준화된 소통으로 이루어진 진부한 정도, 마취되어 무감각한 반사운동과 습관화, 그리고 탈-강렬화된 합의로 귀결될 뿐이다. 342 모든 것을 동시적 시각으로 단숨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343

[ ] 실천의 생태학 - 삶의 잠재적 가능성을 다양화하는 미학이다. 마수미는 이 다양성의 미학이 자본주의에 이미 던져진 삶의 형태들을 계속해서 질적으로 차이화하고 그 가능태를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그것을 전복시킬 반-자본주의 정치학의 동력을 찾게 해 준다 343 상황이란 복잡한 관계들의 망이며 그 망 내부에서 거시적 위치설정의 한계를 인식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가해지는 제약들을 구성적인 수준에서 조절할 수가 있다....자유가 문제의 완결이나 도피가 아니라 주어진 제약을 이용해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인 한에서. 344

[ ] 미시정치는 사건의 구성에서 내재적 변조를 일으킬 만한 소요를 생산하고, 삶의 배아 또는 상황의 발생적 조건으로서의 잠재태에 재접속하는 방법을 찾아 자기-갱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먹지 않고 자유를 말할 수 없듯이, 또 정동의 현실적 원인이 물질이나 사물에 있듯이.... 345 이데올로기는 보편의 이익이라는 불분명한 합리성으로 수용된 지배계급의 이익이 일상 속에서 정동적 차원으로 실행될 때 작동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유되지 않고 일상에서 실행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348 기존 이데올로기 비판이 이 관계 항들을 바꾸는 데 만족한다는 것이다. 관계를 과정으로 보지 않고 결과로 보는 이러한 추상적인 접근법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맑스가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자본가 또는 그들의 대립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이다....그들이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자본가와 노동자는 자본의 숙주들이다. 그들은 자본을 구성하는 긴장과 경향성의 지표이며, 자본이 가동될 때의 관계의 역동을 그리는 그 과정의 산문들이다....그는 구조가 아니라 관계가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조는 폐쇄적인 것이고, 기능을 할당하며, 불변하는 항들을 전제한다. 그러나 관계는 자기 확산적이고, 열린 전체를 구성한다. 350, 351

[ ] 각도, 기울기, 접점....이를 즉흥 음악 연주에 비유한다...간섭하고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한다...그것은 합리성이 아니라 사유가 가미된 행동으로 붉어진 정동성이다. 354, 355 정동정치적 민주주의란 생각하기 - 느끼기를 통해 함께 모여 미분적으로 조율된 생성에 참여하는 몸체들이 구현하는(된) 자유이다. 356

[ ] 권력 구조는 항상 정동적인 운동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경로에 따라 그들을 수렴하여 흐르도록 포획한다. 합리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경로화 논리‘의 하나일 뿐이다. 합리성 자체가 이미 정동적인 것 안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정동의 산물로 배태되는 것이다. 359

[ ] 지배당하는 자만이 지배하고 싶어 하며, 지배를 원하는 자가 또한 예속을 원하는 것이다. 361 권력의 구조가 그 자신을 빠져나가는 정동적 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포획하고 지배하려는 경향 못지않게 그것을 비틀고 빠져나가려는 반-경향성 역시 존재한다. 361

[ ] 자본주의는 사회와 동연적으로 작동하는 열린 체계 또는 열린 구조이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인 자기-변조 때문에 차라리 ‘과정‘이라고 불러야 하지 구조나 체계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363 자본주의의 생체 권력하에서 몸체들은 오로지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적인 삶에 집중하고, 몸체들로부터 존재 역량의 증대의 흐름이 낯설어져가고, 몸체들 주변엔 불균등의 과정과 그 흔적이 축적된다...자본주의적 과정에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내재적 비판이 아니면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없다...비판은 우리의 몸체들 안에, 집단적 장의 미시적인 틈새들 안에 있다. 364

[ ] 이익은 이해관계나 흥미와 같은 개인화된 정향성을 내포하는 나쁜 개념이다. 그것은 분리에서 시작하고, 구분을 넘어서는 역량의 수단을 주지 못한다. 이익은 본질적으로 분열적 개념이다. 376 관계적 생성 안에 자기 돌봄을 끼워 넣어야 한다. 377

볕뉘.

늦어진 읽기를 새벽에 일어나 마저 읽다. 자본주의를 구조나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그 본질을 벗어나거나 벗어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독립된 개체로 개인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자유 또한 그러하다. 관계는 자기 자신과 고스란히 연루되며 미학이 아니라 윤리라는 정향으로 삶과 이어진 존재이다. 몇 가지 사유를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로서 사유한 베르그송, 개체화가 아니라 초개체화의 개념을 이끈 시몽동....화이트헤드도 언급이 많이 되어 살펴봐야 할 듯싶다. 여러 준비로 어수선한 독서가 자리를 찾은 듯하다. 가을이다. 구월의 며칠이 지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