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기만 했던 10분간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단잠을 방해하는 종소리가 울려퍼지면, 고개도 못 든 채 서랍 속에서 다음 교시의 교과서를 꺼내며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내가 얼른 여길 뜨던지 해야지... 원..." 까칠한 불만투성이의 여학생이었던 내게 학교란 기필코 떠야 할 곳이었고, 언젠간 지루한 학교를 뜨기 위해 힘내서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의 팔자라는 것이 또 아이러니하여 이제는 오나가나 학교와 학교종을 떠나 살 수 없게끔 되어버렸다. 베토벤이 사랑하는 테레제를 위해 지은 이 아름다운 곡이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종이라는 고루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골은 메아리가 크게 울린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중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학교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터울이 많이 져서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오빠는 벌써 중학생이었는데 학교가 파하고 일찍 집에 돌아온 나는, 중학교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오빠가 돌아올 시간을 헤아리곤 했다. 물론 오빠가 집에 온다고 해서 내가 덜 심심하거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던 일을 멈추고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야 했기 때문에 숙제가 많은 날엔 오빠가 좀 늦게 왔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으니까. 귀가하는 오빠의 행보에 관해서는 당시에 키우고 있었던 '해피'라는 발바리가 가장 먼저 알아채곤 했다. 해피는 하루 종일 언덕배기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앞발을 모으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무한질주를 하며 신작로 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멀리서 오빠의 장난스런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해피가 요란법석을 떨며 환영하는 몸짓이 언덕을 울려대면, 나는 슬리퍼를 끌고 나가 오라버님, 오셨쎄여? 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성의, 없는 성의를 다하여 오라버니를 맞이했다. 일단 자전거 뒤에 묶인 참고서부터 풀어드리고, 무거운 가방 쯤은 반짝반짝 방으로 들어다 드리고, 손잡이에 매달린 도시락을 꺼내서 설거지통에 넣는 등, 그 정도야 네추럴 본 무수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일 터. 단촐한 네 식구에 형제라곤 오빠 뿐이었던 나는 나날이 반복되는 육체적 피로(?)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위해 이것저것 해줌으로써 나름 기쁨과 보람을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점점 머리가 커지면서 내가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어릴 적에 주입되거나 세뇌된 것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온 '엘리제를 위하여'도 나의 본능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거겠지만. 작년에 이사온 이 동네도 어찌된 우연인지 학교가 둘러싸고 있는지라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지 않고 흘러가는 하루란 없다. 종소리에 맞춰 와와-하는 아이들의 북적거림이 들려오고 조금 후에 이어지는 종소리에 맞춰 주변엔 다시 정적이 감돈다.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는, 이 또한 직업병인가 싶다가도, 가끔 그 안의 일상들이 그립기도 하다. 잠시 학교를 떠나 온 지금, 미니홈피의 일촌평에 '보고싶음'이라는 말이 뜨면 '보고싶어요'라고 쓰지 않은 그 짖궃음을 헤아리며 웃음이 나는 동시에, 문득 아이들이 보고싶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엘리제가 커피 좀 한 잔 마시라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자리에 앉기만 하면 하염없이 쏟아지는 공문에 한숨 짓는 찰나, 아무 때고 벌컥벌컥 문 열어젖히며 "쌤~ 저희 체육복 갈아입어야 하니깐 5분만 늦게 들오삼~ 정 보고싶으심 갠적으로 연락하삼~" 요렇듯 느물거리는 녀석들이 소중한 5분을 잡아먹고, 머잖아 엘리제는 앙칼지고도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재차 울려퍼지는 것이다.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깐선생, 커피홀릭인것 같어! 수업 들어가야지이! 나는 사실 클래식에 거의 문외한이다시피 한데 학교와의 질긴 인연 덕분에 엘리제를 위하여 만큼은 통달한 듯 싶다. 비록 앞부분만이긴 하지만.         

 다 자란 어른도, 그렇다고 코찔찔이 어린애도 아닌, 어정쩡한 연령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사실은 무척 힘이 들었다. 축적되는 테트리스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종종 감기에 걸렸고,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면 쑴풍쑴풍 빠져대는 머리카락 때문에 또 다시 테트리스가 쌓이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자질과 능력을 의심했고 어쩌면 이 길이 내 길이 아닌지도 모른다고, 더 늦기 전에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며 남모르게 방황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새롭게 발견한 사실 하나는, 나란 인간은 그렇듯 힘들다고 징징대면서도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숨 쉴 구멍을 찾아내고 긴장의 물고를 터서 그럭저럭 적응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 혼자의 힘으로 통째로 갈아엎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외면했고, 욕심껏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어느만치 체념하고 들어갔기에 가능했던 바. 호흡은 편해졌는데 마음은 편하지 않은, 참으로 찝찝한 날들이었다.

 결국 낙서장 같던 머릿속을 말끔히 비우고 도망치다시피 찾아온 곳이 또 학교. 깐따삐야 네가 뛰어봤자 도우너고 튀어봤자 투니버스지. 다시 학생으로 돌아와 공부를 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고 이젠 졸업시험까지 신청하고 오는 길, 서른 살이 되는 해에 나는 다시 반인반수의 교사들과 아이들로 북적대는 학교로 돌아간다. 공부를 하게 됨으로써 지적인 충족감 면에서도 만족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부재'를 느낌으로써 그리움과 고마움을 새로이 깨달았다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엘리제가 흘러나오면 사뭇 반가워지는 것도 일상에 스민 익숙함 때문일텐데, 새로움만을 좇느라 항상 거기 있어주는 소중한 일상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보아야겠다. 살가운 표현에 서투른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사실은 우리 오라버니를 좋아하고 아이들도 종종 보고싶다. 어쩌면 오늘의 태그, 엘리제를 빌미 삼아 수줍은 사랑고백을 하고 싶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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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12-2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빼빠를 학교 게시판과 오라버니 메일로..!!
익명으로 올려야겠지만, 과연 누군지 모를까..^^;

요즘 깐따비야님의 빼빠는
고리타분하고 삭막한 업무속에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입니다.
감사를..!


깐따삐야 2007-12-20 14:37   좋아요 0 | URL
저는 바로! 그런 일에 서툴답니다.-_-

갑자기 행복해지네요. 구정물이 되지 않게끔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레와님도 힘내시구요.^^

물만두 2007-12-20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의미심장합니다^^

깐따삐야 2007-12-20 22:34   좋아요 0 | URL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물만두님의 백문백답에 비하면야 너무 얄팍하죠.^^

미미달 2007-12-20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가인 줄 알았어요. 엘리제를 위하여, 응원가 있는데 ㅋ

깐따삐야 2007-12-20 22:36   좋아요 0 | URL
아, 미미달님 그 학교에 다니시는군요? 그만큼 멜로디가 친숙하기에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거겠죠.^^

Mephistopheles 2007-12-20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종으로 쓰였던 그 클래식이 요즘은 잘 안들리지만 자동차 후진할 때 혹은 정화조차 등장할때도 울려퍼지곤 합니다..^^

깐따삐야 2007-12-20 22:39   좋아요 0 | URL
정화조차에서 꽈당~ 넘어갑니다.ㅋㅋㅋ
이거야 원. 내 인생의 OST라기엔 넘흐 흔한걸요.-_-

웽스북스 2007-12-2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토벤 연주회 들으러 가서 잠깐 했었어요 그런 생각
엘리제를 위하여,는 비운의 곡일까 행운의 곡일까
근데 오늘 결론이 났네요
깐따삐야님의 오에스티라니 행운이네 행운!

깐따삐야 2007-12-21 01:19   좋아요 0 | URL
베토벤 연주회라니. 부럽소! 나 '비창'도 좋아하는데.
댓글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가장 대중화된 클래식곡이 아닐까 싶네요. 베토벤 자신은 비운의 작곡가였지만 '운명'을 비롯, 행운의 곡들을 참 많이도 썼다는.^^

순오기 2007-12-21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애들 피아노 배울때 지겨우리만치 두둘겨 대는 엘리제 ^^
근데 이게 무슨 영화에서도 분위기 있게 나왔는데, 뭐였더라~~~~~~~ ?
깐따삐야 선생님의 엘리제는 테트리스와 함께 감동이었어요!

깐따삐야 2007-12-21 01:2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ㅋㅋ 생각해보니 초인종 소리도 있어요!
'불멸의 연인'인가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양한 영화 속에서 많이 나왔을 거에요.
테트리스는 언어유희의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