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 문학동네 / 282쪽
(2017. 12. 05.) 



  제이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만의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에는 무관심했다.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어른들의 말은 거의 믿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가 헛소리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는 평등하게 같은 면적을 차지하고 똑같이 먹어대지만 갇혀 있는 우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개들의 운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P.65)
​​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는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
  “세상일이 네 말대로 간단하다면 좋겠지.”
  “뭐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P.73)
​​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있어. 바로 센서야. 감각을 하는게 그것들의 목적이야. 지구 곳곳의 센서들은 기온과 습도와 바람을 측정하지. 어떤 센서는 전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시베리아 호랑이가 지나가면 반응을 하고 사진을 찍어 . 센서는 너무나도 많아. CD의 홈을 읽기도 하고 적외선으로 피사체와 렌즈 사이의 거리를 재기도 하고. 그런데 고통을 감지하는 센서는 없어.”
  “그게 너라는 거야?"
  “그래,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가는 삶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아? 너도 편하게 살고 싶을 거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내 운명이야."
(P.133)


  사람들은 슬픔에 대해서 말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그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무지에 대해 불편한 수치심을 품고 있었다. 여기 물을 담은 풍선이 있다고 하자. 풍선이 터지면 물이 갑자기 쏟아질 것이다. 그 안에 든 것이 만약 슬픔이라면 내 몸은 슬픔에 젖게 될 것이다. 그대에야 그게 무슨 색인지. 어던 냄새를 풍기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풍선을 내가 자의로 터뜨려버린다면 어떨까? 그때에도 슬픔은 그대로 슬픔일까?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죄책감이 슬픔을 덮어 버리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죄책감으로 슬픔을 '돌려막는' 자야말로 진정 강한 자가 아닐까?
(P.172)​
​​

슬픔이든 죄책감이든 다시의 나로서는 공히 멀고 고상한 감정이었다. 그 고상한 감정들을 강렬히 원하는 또다른 감정이 내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깊은 혼란을 느꼈다. 그런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내게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니 그것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마치 바텐더가 이런저런 술을 섞어 칵테일을 제조하듯, 나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낸 것을 나 자신의 계획에 따라 온전히 경험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내 마음속의 혼란은 결국 살인의 흰상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을 떠올릴 때만이 내 마음 깊은 곳의 조바심과 열패감은 사 라졌다. 태풍이 접근하면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듯이.
(P.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하다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 문학동네 / 252쪽​
​(2017. 12. 02.) 




  나쁜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이는 자신을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그럴수록 부모는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써 관계 상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했죠.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요, 사회 전체적으로도 마찬 가지예요. 예를 들면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압박면접이라고 하나요? 그 무슨 사디스트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하 겠디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거잖아요. 정확히 그건 나쁜 부모가 하는 행동이거든요. “너는 모자라다, 너는 왜 이렇게 부족해” 이런 에기를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똑같아요. 그런데도 지원자는 웃어야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자기는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처신해야 하고요. 심지어 실수로라도 반항하지 않도록 강자의 논리로 자기를 설득하잖아요.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이런 걸 스스로에게 설득시키고 받아들이는 거죠. 나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아이와 비슷한 거죠.
(P.12)


  이제는 열심히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입니다. 어떤 비관인가? 바로「비관적 현실주의입니다.」비관적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되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기도 어렵고 가족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 이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 자신이라도 바꿔라, 저는 그것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그런 책들이 그렇게 많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대책 없는 낙관을 버리고, 쉽게 바꿀 수 있디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P.22)

​​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은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P.27)


  육체의 근육도 일정한 훈련을 통해 길러지듯이 감성 근육도, '아, 오늘부터 개인적 즐거움을 깊이 추구해야지'한다고 해서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을 읽고 즐기는 것은 원래 어렵습니다.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 예를 들어 19세기의 귀부인이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는 얘기라든가, 1920년대의 미국의 벼락부자가 옛날 애인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얘기가 단박에 마음에 와닿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것은 끝까지 읽어도 주제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주제를 알기 어려운 소설일수록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능 있는 작가일수록 작품의 주제를 독자가 쉽게 찾지 못하도록 잘 숨겨둡니다. 훈련된 독자 역시 너무 간단해서 주제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소설 보다는, 지성과 감성을 충분히 사용하면서 적절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작품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을 더 좋아합니다.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화다 미술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고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입니다.
(P.31)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오감으로 글쓰기'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렸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쓰게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학생들이 시각적인 기억에만 의존해 건조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오감을 다 표현해 다시 써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함께 남해안의 해수욕장에 놀러간 기억에 대해 쓴다면, 저 먼 수평선에 갈매기들이 날고, 그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로 걸어들어 갔는데, 해초가 종아리에 미끈거리며 감기고 수영을 하며 들이킨 바닷물은 엄청나게 짰다, 이런 게 오감의 글쓰기인데요. 일단 오감을 이용해 글을 쓰면 글 자체가 좋아집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시각만 이용해서 글을 쓸 때보다 훨씬 깊게 그때의 경험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쓰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는 학생도 있 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여러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P.33)


  세상에 대해서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가지감정을 표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일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P.34)

​​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 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림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P.56)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찍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디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기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 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P.58)


  자, 이제 우리가 마음속의 악마를 잠재우고 자기 예술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이제는 밖에서 적들이 나타납니다.
배우자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회사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현실적인 이유들을 들어 여러분이 하려는 작업을 막아섭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은 묻습니다. 이건 정말 마법의 질문입니다. “그건해서 뭐하려고 그래?” 힘이 쭉 빠집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유용한 것도 생산하지 않고 우리 앞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쓰거 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직장을 얻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방치해두었던 우리 마음속의 '어린 예술가'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술과 약물의 도 움 없이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 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니까요.
(P.76)


  작가가 되는 데 책은 거의 백 퍼센트의 역할을 하죠. 오직 책만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듭니다. 경험도 아니고, 주변 사람 도 아니고, 정말 책만이 온전하게 작기를 만든다고 저는 생각 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작가는 독자였죠. 작가에서 출발해서 독자가 되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우리나라의 동료 작가 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가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다들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처음에는 특정한 소설, 특정한 작가의 열렬한 독자가 되죠. 그것을 읽다가 그보다 더 깊은 만족을 주는 다른 작가, 다른 책들을 읽게 됩니다. ​
  어느 정도 읽다보면, '나도 이런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때가 있어요. 자기 안에서 쓰고 싶은 내용과 자기가 읽어온 책들이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죠. 그게 대부분의 작가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작기들이 쓰는 소설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일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작기들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그것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가 읽었으나 백 퍼센트 동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응답 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P.84)


  최고의 소설이란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 읽으면서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걸린 데가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왠지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남에 게 요약하거나 발췌하여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런 소설 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P.92)


  예전에 토니 모리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서가를 둘러보고 거기에 없는 책을 쓴다.” 또 어떤 작가는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쓴다고 말했죠. 다 비슷한 말입니다. 내가 읽고 싶거나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지요. 저는 토니 모리슨의 말을 더 좋아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서가를 둘러본다는 거에요. 서가를 둘러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쓰인 책을 다 겸토한다는 거죠. 작가에게 독서는 그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139)


  소설을 많이, 깊이 읽는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다양한 인물을 알고 있는 사람 겪어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이들보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뉴욕 뉴스쿨 대학 심리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소설 중에서도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보다 인물 묘사에 집중한 소설을 읽는 이들이 훨씬 더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의도를 잘 읽어 낸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을 깊이 이해한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사건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러 인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건들을 맞닥 뜨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가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를 사람들을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1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 자요 (GUTE NACHT)

나 방랑자 신세로 왔으니,
방랑자 신세로 다시 떠나네.
오월은 흐드러진 꽃다발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지.
그 아가씨는 사랑을
속삭였고, 그 어머니는
결혼까지 말했지만이제 온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고,
나의 길에는 눈만 높이 쌓여 있네.

떠나가는 나의 방랑길에
이별의 때를 정할 수는 없다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네.
나의 길동무는
달그림자뿐,
하얗게 눈 덮인 벌판에서
나는 짐승의 발자국을 찾네.

무엇하러 더 오래 머물다가,
사람들에게 떼밀려 갈 텐가?
길 잃은 개들아
집 앞에서 실것 짖으려무나!
사랑은 방랑을 좋아해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네
정처 없이 떠돌 수밖에
귀여운 내 사랑, 잘 자요!

그대의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대의 단잠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발걸음 소리 들리지 않도록
살며시, 살며시 문을 닫네!
가면서 나는 그대의 방문에다
"잘 자요'라고 적어 놓네,
내가 당신을 생각했음을
보아주기를 바라며.​


얼어 버린 눈물

얼어 버린 눈물방울들이
두 뺨에서 굴러떨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던 것인가?

아, 눈물아, 나의 눈물아,
너희는 왜 그리 미지근하여,
차가운 아침 이슬처럼
얼어서 얼음이 되는 거니?

하지만 너희는 내 가슴의 샘에서
펄펄 뜨겁게 쏟아져 나온다,
온 겨울의 얼음 덩어리들을
모두 다 녹여 버릴 것 같구나.


보리수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야 했다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네.

나뭇가지들이 살랑거리면서,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내게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세차게 때렸네,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 돌아보지 않았네.

이제 그곳에서 멀어진 지
벌써 한참이 되었네,
그래도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 들리네: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거리의 악사

저편 마을 한구석에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그의 조그만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어.

아무도 들어 줄 이 업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네;
개들만 그 늙은이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고 있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손풍금을 돌린다네, 그의 악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네.


슈베르트가 한 친구를 찾아갔다가 친구는 집에 없고 그의 책상에 놓여 있는 뮐러의 시집을 무심코 읽고, 너무 좋아서 그 시집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으로 들고 와 그중 몇 편을 곧장 노래로 작곡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렇다면 작곡가 슈베르트에게 그토록 감흥을 줄 만큼 그 무언가가 뮐러의 시 속에 내재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시인 빌헬름 뮐러는 자신의 시가 노래로 작곡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일찍부터 피력한 바 있다. 막 스물한 살이 된 패기만만한 시인 뮐러는 어느 날의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악기를 연주할 줄도 노래를 부를 줄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시를 짓는다면, 그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면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멜로디를 내 힘으로 붙일 수 있으면 나의 민요풍 시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질 것이다. 그러나 확신컨대, 나의 시어에서 음률을 찾아 그것을 내게 되돌려 줄, 나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바로 프란츠 슈베르트였던 것이다.
(P. 177)


​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보다 시인의 더 많은 개인적 체험이 반영된「겨울 나그네」에서는 나그네의 실존적 몰락과 자아 상실의 과정이 잘 나타난다. 뮐러가 1821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824년에 완성한「겨울 나그네」는 사랑을 잃은 젊은이가 실의와 굴욕과 슬픔에 빠진 나머지 겨울 벌판을 정처 없이 헤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방랑자 신세로 잠시 머물렀던 마을을 떠난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을 맞으면서 눈과 얼음의 얼어붙은 세계 속을 오직
사랑했던 사람을 잊기 위해 걸어간다. 그는 절망에서 어느덧 광기의 징조까지 보인다. 죽음을 원했지만 거부당하고, 마지막에 그는 길바닥에서 걸식하는 늙은 악사와 손을 맞잡고 눈이 평평 쏟아지는 풍경 속을 비틀거리면서 사라진다.
(P.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드워드 호퍼 (Hopper)
롤프 귄터 레너 / 정재곤 / 마로니에북스 / 96쪽
(2017. 12. 01.) 


Edward Hopper
https://www.edwardhopper.net/



  대부분의 유럽인에게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말 독일과 유럽에서 있었던 대규모 호퍼 전시회는 그가 미국의 특정 예술 분파에 속하는 회화기법을 대변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호피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림의 주제 자체이고, 그의 그림에서 재현되는 '장면들'은 이중적 의미를 띤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에는 전형적인 미국의 분위기가 담겨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생활과 이로 인한 단절에 따르는 소외감이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호퍼 작품이 보이는 모호성은 미학적 개방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미국 현대회화 절정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흔히 추상적 표현주의를 추구하는 잭슨 폴록과 에드워드 호퍼 두 사람을 신(新)리얼리즘의 추종자이면서, "미국 개인주의와 예술적 완성"이라는 양극을 함께 아우르는 예술가로 평가한다.
  이처럼 호퍼의 그림은 리얼리즘적 특성이 대단히 강조되는가 하면, 단순한 현실 복제 경향과 단절을 나타내고, 심지어 현실에 상상적 비전을 부여하는 회 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호퍼의 풍경회는 19세기 이후 나다니일 호손이나 허먼 멜빌, 에드가 앨런 포와 같은 문학가뿐 아니라, 토머스 골이나 '허드슨 강 파(派)'에 속하는 미국 풍경화기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인 '경계선 경험', 즉 문명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라는 상상적 재현의
원형을 드러낸다.
(P.7)


  우리가 포나 멜빌의 글에서 보듯이 무한한 자연의 공간을 거침없이 누비고자 하는 신화적 차원은 이내 경화되고 방향감을 상실하고 마는 것처럼, 호퍼의 그림에서도 자연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변모한다. 자연은 문명의 상징물과 함께 재현되거나(그의 그림에는 길이나 육교, 등대가 집요하게 등장한다) 또는 문명의 상징물-들이 거대한 자연에 파묻혀 위협받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호퍼가 그린 거의 모든 집들은 바로 이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까닭에 호퍼의 풍경화는 전망보다는 경계의 표식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의 풍경화는 자연 대신에 창문 너머의 실내 공간이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것도 집이나 다른 문명의 상징들에 의해 구획되곤 한다.
(P.7)

(Early Sunday Morning, 1930)

(Railroad Sunset)

  호퍼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 거리를 재현하면서도 그림 내부에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 그림이 취하는 전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림의 반대편, 즉  길 건너편에 줄지어 서 있으리라 집작되는 집들을 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특히 이 그림의 집들은 <철길의 석양>에서 볼 수 있는 녹색과 적색, 황색톤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래서 이 두 그림은 서로 대칭이라도 이루듯,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는 오른쪽의 이발소 간판이 강렬한 색깔로 부각되어 있는가 하면, <철길의 석양>에서는 전철 탑이 시선을 왼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한편 〈일요일 이른 아침〉에서는 풍경의 유기적 형태와는 거리가 먼 인위적이고 기하학적 형태가 지배적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은〈철길의 석양〉에 암시되이 있는 요소들의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공간과 생명이 없는 공간 사이의 긴장감을 빛과 그림자가 직각이나 뚜렷한 윤곽을 가진 형태 위에서 펼치는 조합으로 변환시기는 호퍼의 테크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이 그림은 문명의 지배 적인 면모를 전제로 하는 지각력을 화가가 의도적인 아이러니로써 연출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공간을 압도하는 거리의 재색된 전면은 그림의 바 깥으로까지 이어지는 건물 오른편의 어두운 부룬으로 쏠려 있다. 그림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거대한 건물군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그림처럼 호퍼의 다른 그 림들에서도 집이며 건널목, 탑 등은 건축물의 일부분인 경우가 많다.
(P.35)
​​​

  호퍼는 오브제를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회화적으로 변모할 때는 언제나 그 근거를 제시하곤 했다. 그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던 랠프 월도 에머슨과 괴테를 언급하는 글에서, 그림 그리는 행위를 기억과 직접 결부시카면서 에드가 드가 의 말을 옹호한다. “눈으로 보는 바를 그리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를 그리는 것은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이는 상상의 힘 이 기억과 결합함으로써 변모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화가는 자신을 구속하 는 것. 즉 필연적인 것만을 다시 만들어낼 뿐이다. 기억과 창조성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연이 부과하는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P.65)


  얼핏 리얼리즘에 충실한 듯이 보이는 호퍼의 회화는 복제가 가능한 현실을 단순히 재현해내지 않고, 언제나 순수 경험세계를 뛰어넘는 재구성을 지향한다. 호퍼가 자주 재현해내는 그림 속 그림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전반적 회화 작업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복제해내는 대신에 빈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지각이나 지각하는 능력 자체에서 드러나는 단절을 부각시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호퍼의 작품은 침묵의 메타포로 설명되곤 한다. 말이란 말해지지 않은 부분과 침묵의 지배를 받는 부분이 있다. 호퍼의 회화도 공개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부분이 은밀하게 구심점을 이룬다. 전반적으로 호퍼의 작품은, 분명한 의미로써 해석되는 회화적 상황을 측량할 길 없는 깊디깊은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 독특함을 보여준다.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다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 문학동네 / 212쪽
(2017. 11. 30.)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시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 들일 수 있다.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지킬 것인가.
(P.15)


​  그 여름 '헝거게임'의 승자는 개량한복을 입은 팀장이었겠지만 그녀라고 언제까지 승자였을까 싶다. 그녀 위에는 그녀보다 더 독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는 또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때는 1987년 6월 항쟁 직후였지만 나와 내 대학생 동료들 누구도 이런 시스템을 바꿀 엄두도 내지않았고 바꿔 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 몫의 알량한 수당만 챙기고 달아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같은 '큰 문제'만 바뀌면 다른 소소한 문제들은 저절로 바뀌리라 믿었던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대기업이 주도하는 우리 사회의 '헝거게임'은 슬금슬금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어느새 우리 모두는 아레나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벌이면서도 이런 상황이 개선될기라는 희망 따위 는 감히 품지 않는 그런 시대에 살게 되었다.
(P.22)


  우리나라의 부자들도 이제는 집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 전세 귀족들은 고가의 주택에 거주하지만 소유하지는 않으며, 무소유의 이상에 걸맞게 대부분 차도 갖고 있지 않다. 리스회사에서 빌리면 된다. 재벌일가는 회사를 직집적으로 소유하는 대신 최소한의 지분으로 교묘하게 지배하면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재화와 용역을 무상으로 누리고 있다.
  부자들은 이제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선택의 여지 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P.30)


​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은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P.93)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리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115)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 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안나 카레니나 1』, 문학동네, 2010)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P.125)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회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개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두 시간 동안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 안의 세계가 우리들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폴 오스터,『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이야기』, 일린책들, 2001) (P.128)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입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 닙니다. 다만 힘이 들지요.”
(P.148)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쉽게 예측이 가능한 사람입니까?” 대부분은 0}니라고 답할 것이다. 나부터도 남에게 쉽게 예측되는 사람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안타깝게도,『링크』와 『버스트』의 저자인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히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한 인간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히는 행동의 93퍼센트가 예측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진실의 순간과 맞닥뜨리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직정생활을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윗사람들만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이 읽히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누군 가의 아랫사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윗사람이기도 하다.
(P.178)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P.184)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 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님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208)


  한동안 니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 피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 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주 오랜만에 고정적으로 여러 매체에 동시에 기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해진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연하게 써내도록 스스로를 강제하게 된다.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이 년 가까이 쓴 글들을 추리고 묶으면 서 생각한 것이다.
(P.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