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몽테뉴 / 민희식 / 육문사 / 640쪽
(2014. 04. 06.)
몽테뉴에게 있어 인간의 지식이란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보편적이고 영원한 절대적 진리는 신에게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의거할 기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며 진리인 것은 만인에게 통하는 보편성과 확실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절대적인 진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성과 판단력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빠지기 수윈 오류를 피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노력은 그러한 상대적 진리의 탐구에 지향되고 있다. 그 방법의 하나는 정신을 상대적 진리 탐구로 향하도록 훈련하는 것으로, 그것을 위해서는 올바른 대화법을 습득해야 한다. 몽테뉴가 대화의 즐거움을 서술하면서 거기에 동반되는 진리 의식의 효과를 열거하고 대화에 임하는 태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것을 요약하면 첫째, 자존심을 버리고 쓸데없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평무사한 태도를 일지 않도록 할 것. 둘째, 대화자의 외형에 사로잡혀 그릇된 상상에 빠짐으로써 사실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셋째, 대화의 질서와 형식을 지킬 것 등이다. 몽테뉴 자신은 성격적으로 그것들을 용이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P. 27)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특별한 호의로써 이 감정을 존중하지만 나는 이 감정을 좋아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슬픔으로 지혜와 덕과 양심을 장식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괴이한 장식인가! 이탈리아인들은 이 감정을 사념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 감정은 언제나 유해하고 광적이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이 감정을 비겁하고 저열한 것으로 보아 금하고 있다.
(P. 45)
자신이 얼마나 강한 열정에 불타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그다지 강하지 않은 열정인 것이다. (페트라르카)
(P. 48)
울창한 숲이 바람의 진행을 가로막으면 바람은 힘을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 (루카누스)
이와 마찬가지로 혼란되어 동요하는 영혼은 붙잡을 어떤 것을 제공하지 않는 한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러므로 목표를 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을 영혼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50)
고대 그리스의 격언에도 있듯이 인간은 사물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해 그가 가지는 견해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이 말이 모든 경우에 있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비참한 인간적 운명을 구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행이 오직 우리의 판단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다면 우리는 불행들을 무시해 버리거나 유익한 것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 79)
우리의 견해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사물을 평가함에 있어 사물 그 자체로서 보려 하지 않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보려 한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물들의 질이나 유용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물을 얻는 데에 소요된 노력이나 비용만을 생각한다. 마치 그것이 사물의 본질의 일부이기나 한 듯이. 그리하여 사물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을 그 사물의 가치라고 부르고 있다.
(P. 99)
인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너희가 인생이라는 무대를 선에게 제공하느냐 악에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선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악의 무대가 되기도 할 뿐이다.
(P. 138)
어린아이들의 교육에는 공부에 대한 욕구와 흥미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을 짊어진 당나귀로 만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매질하면서 아이들 주머니에 지식을 가득 넣어 주고는 잘 간직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식이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부에 간직해 두기만 해서는 안 되며, 그 지식을 정신과 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P. 266)
만일 공부를 해야만 한다면 우리 상태에 적합한 공부를 하자. 어떤 사람이 "그처럼 늙은 나이에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보다 선량한 인간으로서 보다 만족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우리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하다.
(P. 502)
나와 반대되는 견해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하며, 그들의 견해가 나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진리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쌍방 공통의 목적이어야 한다. 분노의 감정이 판단력을 지배하고 혼란에게 이성의 자리를 빼앗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P. 578)
스크라테스가 자기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항상 웃으면서 받아들인 것은 그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승리는 항상 자신의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영광을 위한 제료로서 비난을 기거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보다 뛰어난 반대자들이 우리를 경멸한다고 느끼는 것만큼 민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래서 오히려 약한 쪽이 자신을 힐책하고 바로잡아 주는 반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P. 580)
우리는 서로를 비난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어떤 일이 모순되었다고 따지고 반박함으로써 도리어 우리 자신이 비난 받고 공격받을 수 있으며,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걸려들게 된다. 이에 관해 고대인들은 많은 예를 남기고 있는데,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는 뒤에 눈이 달리지 않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백 번쯤 이웃 사람들을 비웃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비웃는 것이며 자신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면서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뻔뻔하게 그 결함들에 놀라움을 나타낸다.
(P. 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