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상)

아담 스미스 / 김수행 / 비봉출판사 / 664쪽

 


<역사 서문 (개역판)>


스미스는 마르크스 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 모두의 원조이다. 그의 주저인 <국부론>을 읽으면서 경제학의 나아갈 길과 한국경제의 나아갈 깅를 다시 한 번 고민하는 것은 지금의 혼돈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으로 믿는다.
(김수행)

 

 

<역자 서문>


  내가 <국부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책이 바로 <국부론>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국부론>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경제학체계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스미스가 차옺한 경제학의용어와 개념을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하고 수정하면서 자기의 '혁명적인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내가 역자 주에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국부론>과 <자본론>사이의 이론적 계승과 단절을 언급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스미스가 말하는 '노동의 자연가격' 또는 '자연적인 임금수준'으로부터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라는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노동과 노동력을 구별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이윤의 원천인 잉여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자본축적과 노자대립의 숨은 비밀을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국부론>에는 경제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스미스의 진지한 조사와 탐구의 노력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그 당시 유행한 중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지만, 이를 위해 스미스는 중상주의의 핵심적인 명제들을 하나하나씩 논리적 일관성과 현실적 타당성에 의해 과학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셋째, <국부론>이 강조하는 자유경쟁은 부르주아경제학이 예찬하는 시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지적하는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은 <국부론>에서 단 한 번 상권 552쪽에서 언급되었을 뿐이고, 개인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어 사회의 이익도 증진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스미스가 말하는 '자연적 자유'는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자연스럽게 노력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의미이지만,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몇몇 개인의 자연적 자유의 행사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스미스는 강조한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은유나 '자연적 자유'에 의해 스미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회철학은, 사회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한도 안에서 개인에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점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연적 자유는 제한되어야 하고, 독점자의 사적 이익은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현재의 부르주아경제학은 독점자본이나 다국적자본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엄청나게 훼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스미스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P.2)

 

 

  분업은 노동의 효율을 최대로 제고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노동생산력을 최대로 개선·증진시키는 것은, 그리고 노동을 할 때 발휘되는 대부분의 기능·숙련·판단은 분업(division of labour)의 결과인 것 같다.
(P.7)

 

 

  분업은 인간성에 내재하는 교환성향에서 생긴다.
  수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원래, 그것이 낳은 일반적인 풍족을 얘상하고 의도한, 인류의 지혜의 결과가 아니다. 분업은 그와 같은 폭넓은 효용을 예상하지 못한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비록 매우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곧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바꿔 갖고, 거래하고, 교환하는 성향이다.
(P.17)

 

 

  재화를 화폐로 교환하거나 또는 한 재화를 다른 재화로 교환할 때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준수하는 법칙이 무엇인가를 이제부터 고찰하려 한다. 이 법칙들이 이른바 재화의 상대가치 또는 교환가치를 결정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가치(value)라는 단어가 두 개의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즉, 때로는 어떤 특정한 물건의 효용을 표시하고, 때로는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다른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표시힌다. 전자를 사용가치(value in use), 후자를 교환가치(value in exchange)라 부를 수 있다.
(P.34)

 

 

  한 상품이 보통 판매되는 실제의 가격은 그 상품의 시장가격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그 상품의 자연가격보다 높거나, 낮거나, 또는 그것과 똑같을 수 있다.
  어느 특정 상품의 시장가격은 실제로 시장에 출하되는 상품의 양과, 그 상품의 자연가격을 지불할 뜻이 있는 사람들, 즉 그 상품을 시장으로 가져오는 데 지불되어야 하는 지대·임금·이윤의 총가치를 지불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의 수요의 비율에 의해 조절된다. 이러한 사람들을 유효수요자라 부르고, 그들의 수요를 유효수요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요는 충분히 그 상품을 시장으로 가져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73)

 

 

  내가 관찰할 수 있었던 바에 의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 사정들은 어떤 직업에서는 금전상의 수익이 적은 것을 보상해 주고, 다른 어떤 직업에서는 금전상의 수익이 큰 것을 상쇄시키는 주요한 사정들이다. 첫째, 직업 자체가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가 불쾌하게 하는가. 둘째, 그 직업을 습득하기가 쉽고 비용이 저렴한다, 어렵고 비용이 많은 드는가. 셋째, 취업이 안정적인가 불안정적인가. 넷째,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신임, 곧 그의 책임이 큰가 작은가. 다섯째, 그 직업에서 성공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P.130)

 

 

  자본이윤은 그 자본을 사용하여 생산되는 상품들의 가격에 따라 변동한다. 상품가격이 보통수준 또는 평균수준 이상을 등귀하면, 그 상품을 시장에 출하하는 데 사용된 자본의 이윤은 적당한 수준 이상으로 증가하고, 가격이 보통수준 이하로 하락하면 이윤도 적당한 수준이하로 감소한다. 모든 상품은 대체로 가격의 변동을 겪으며, 어떤 상품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자주 겪는다. 인간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모든 상품의 경우, 연간 고용되는 노동량은 필연적으로 그 상품에 대한 연간 수요량에 의해 규제도며, 이리하여 연간 평균생산량은 연간 평균소비량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P.151)

 

 

  분업이 존재하지 않고 교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 각자가 모든 물건을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원시사회 상태에서는, 사회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재고도 미리 축적하거나 저축해 둘 필요가 없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수시로 발생하는 자기 자신의 수요를 충족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일단 분업이 완전히 채용되고 나면 자기 자신의 노동 생산물은 수시로 발생하는 각자의 수요 중 매우 작은 부분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수요의 대부분은 타인의 노동생산물에 의해 충족되는데, 그것을 자기 자신의 노동생산물, 또는 같은 이야기지만, 노동생산물의 가격과의 교환으로 구매한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생산물이 이미 완성되어 판매되기 전에는 그것을 구매할 수 없다. 따라서 이렇게 될 때까지 자기를 먹여 살리고 자기에게 작업의 원료·도구를 공급하기에 충분한 양의 온갖 재화의 재고가 어디엔가는 비축되어 있어야 한다.
(P.333)

 

 

  자본을 사용해서 수입이나 이윤을 얻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자본은 재화를 생산·제조하는 데, 또는 재화를 구입해서 다시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데 사용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자본은, 사용자의 수중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또는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한, 수입이나 이윤을 낳지 않는다. 상인의화물은 돈을 받고 팔리기 전에는 어떤 수입이나 이윤도 낳지 않는다. 그의 자본은 끊임없이 한 형태로 그를 떠나 다른 형태로 그에게 돌아오며, 이러한 유통, 또는 계속적인 교환을 통해서만 자본은 그에게 이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본은 아주 적절하게도 유동자본이라 부를 수 있다.
  둘째, 자본은 토지의 개량에 사용되거나, 유용한 기계·생산도구의 구매에 사용되거나, 소유주를 바꾸지 않고 또는 더이상 유통하지 않고 수입이나 이윤을 가져다 주는 물건들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본은 매우적절하게도 고정자본이라 부를 수 있다.
(P.338)

 

 

  노동에는 그것이 가해지는 대상의 가치를 증가시키는 노동이 있고, 그런 효과를 갖지 않는 노동이 있다. 전자는 가치를 생산하므로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ur)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비생산적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제조공의 노동을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 대상인 원료의 가치에다 자기 자신의 유지비의 가치와 고용주의 이윤의 가치를 부가한다 반대로 하인의 노동은 안=무런 가치도 부가하지 않는다.
(P.404)

 

 

  모든 자본은 생산적 노동의 유지에만 쓰여질 것으로 예정되어 있지만, 동일한 양의 자본이 가동시킬 수 있는 생산적 노동의 양은 자본의 다양한 사용방식에 따라 매우 다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사용방식에 따라 그 나라의 토지·노동의 연간 생산물에 부가하는 가치도 달라진다.
  자본은 네 가지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첫째,그 사회의 해마다의 사용·소비를 위해 요구되는 천연생산물을 획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둘째, 그 천연생산물을 직접적인 사용·소비를 위해 가공하고 제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셋째, 천연생산물 또는 제조품을 그것이 풍부한 지역으로부터 부족한 지역으로 운송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넷째, 위의 상품들 각각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그때그때의 수요에 맞게 작은 묶음으로 나누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첫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토지·광산·어업의 개량·개발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본이고, 둘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제조업자의 자본이며, 셋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도매상의 자본이고, 넷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소매상의 자본이다. 자본이 이상의 네 가직 방식 중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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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
강수돌 글 / 박정섭 그림 / 너머학교 / 128쪽
(2014. 06. 18.)

 

 


 우리가 가진 말들, 우리가 가진 개념들이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세계입니다. 또 그것이 우리 삶과 세계의 한계이지요. 따라서 삶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일은 항상 우리 말과 개념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하고 또 그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깨우침과 우리의 배움이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나타납니다.
(P. 6)

 

 

 사람들이 잘 살려면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흔히 하죠? 그런데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게 과연 어떤 뜻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남기고 생산을 많이 하며, 주가가 오르는 것일까요? 가게마다 사람이 많고 장사가 잘 되는 것일까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소비나 저축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P. 23)

 

 

  "과거엔 유리잔이 흘러넘치면 가난한 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유리잔이 가득 차면 마술처럼 잔이 더 커져 버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신 말씀이에요. 정말 정확한 비판 아닌가요?
  '트리클다운 효과'와 대비해서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가 있어요. '펌핑업 효과'라고 하지요.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서 샘물을 뽑아 올리던 펌프처럼 아래쪽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같아요. 2004년 이후 우리나라 부자의 생성 속도가 세계 1위를 달릴 때 가난한 사람이 가장 많이 늘어났다는 보고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지 않나요?
(P. 34)

 

 

  원래 경제란 말은 한자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예요. 중국 수나라 때 왕통이라는 사람이 쓴 <문중자>라는 책에 나오지요.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다. 즉 세상을 잘 경영해서 사람들이 잘 먹고살도록 만든다, 이런 뜻이랍니다. 더 쉽게 말하면 경제란 백성(국민)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일이에요. 아주 옛날부터 경국(나라를 다스리다), 제세(세상을 구제하다.), 제민(백성을 구제하다.)등의 말이 쓰였어요. 모두가 '세상의 평화로운 살림살이'를 뜻한 말이었어요.
(P. 57)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돈벌이만 중시하는 기업들이 경영 효율화를 위해 구조 조정을 한닶히고 사람들마저 마치 쓰레기처럼 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반복되면서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외적인 사람이 되고, 반면에 비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상인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P. 92)

 

 

  나 자신과 세상의 참모습을 숨김없이 파악하려면 '진실에 대한 두려움'부터 없애야 해요. 사실, 진실을 알기가 두렵기도 해요. 왜냐하면, 진실을 알고 나면 나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거든요. 나 자신도 이미 잘못된 체제에 적응해 살고 있고 은연중에 이미 기득권층이 되어 버렸거나 그렇게 되고자 발버둥 치며 살고 있으니까요.
(P. 93)

 

 

  아, 세상살이는 왜 이렇게 복잡할까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탐욕이나 환상을 과감히 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우리 주변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꼬였던 문제가 하나씩 풀리거든요.
  이 모든 문제의 근본 뿌리는 우리가 본심을 잃고 '나 혼자'만 잘 살려고 탐욕에 빠져 인간적인 공동체의 그물망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쓰레기 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지요. 모두 탐욕이 만들어 낸 부산물에 불과해요. 그러니 우리가 끈끈한 정이 흘러넘치는 인간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관계들, 우애와 환대, 연대와 협동, 소통과 공감 등을 회복하기만 하면 그렇게도 꼬였던 문제의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P. 95)

 

 

  소비로 돈을 많이 쓸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해요. 다시 말해, 소비 중독이 일중독을 조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일중독과 소비 중독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맞물려 서로서로 부추기고 있어요. 그 사이에 자본가는 계속 돈을 벌 수 있지만, 노동자나 소비자는 갈수록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죠.
(P. 100)

 

 

  이제 '잘 산다는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관한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군요. 어때요? 잘 사는 것이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란 말,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나요? 굳이 이것을 부자라는 말로 표현하자면, 돈이나 권력이 많은 물질적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소박하고 따뜻하다는  뜻에서 내면의 부자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진정 잘 살기 위해서는 여태껏 사람들 대부분이 믿어 온 잘못된 가치관을 훌훌 털어 내고 우리 내면이 깊은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경청하고 제대로 느끼면서 거기에 충실하며 살아야겠죠.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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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토마스 홉스 / 신재일(옮긴이) / 서해문집 / 264쪽
(2014. 06. 16.)

 

 

  인간의 기술은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훌륭한 창작품인 인간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인간은 국가라 불리는 위대한 리바이어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리바이어던이란 인조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자연인보다 크고 강하며, 자연인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국가의 통치권은 몸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인공적인 '혼'이며, 행정부와 사법부의 관리들은 인공적인 '관절'이다. 그리고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이로, 모든 관절과 기관을 국가 통치자의 지위에 묶어서 각자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모든 구성원의 부와 재산은 모여서 '힘(국력)'이 된다. 그리고 구성원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임무'가 된다 조언자들은 '기억'에 해당하는데 인조인간이 잘 알고 있어야 할 모든 일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형평과 법은 인공적인 '이성'이자 '의지'다. 평화는 '건강'이요, 선동은 '질병'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마지막으로, 이 정치공동체의 각 부분이 처음 만들어직 결합되고 하나가 되게 한 협정과 약속은,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P. 18)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동반할 때 욕망은 '희망'이라 부르고,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동반하지 않을 때에는 '절망'이라 부른다. 어떤 대상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반된 혐오는 '공포'라 부르며,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해로움이와도 저항을 통해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을 동반할 때 혐오는 '용기'라 부른다.'
  항상 변하지 않는 희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이며, 항상 변하지 않는 절망은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이다.
(P. 54)

 

 

 자연은 인간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평등하게 창조했다. 비록 때때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인하다거나 정신적으로 더 기민하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인간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다지 크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의 강인함이란 면에서 볼 때,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다름 사람들과 연대하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를 죽이기에 충분함 힘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기에 정신적 능력의 경우 육체의 힘보다 더 평등하다. 분별력이란 것은 경험과 다를 바 없고, 경험은(모두 다 똑같이 집중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P. 93)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국가로의이행을 사회계약으로 설명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이기적 욕망과 더불어 이성의 역할도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애 따라 자신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일으키지만, 인간의 이성은 평화를 이끌어 준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 하더라도, 각자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천부의 자연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연권으로 프기하고 사회계약을 체결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그 국가의 절대적 힘에 의존하는 방법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홉스의 사회계약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맺어진 것이다.
(P. 118)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을 대표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떤 사람 혹은 합의체에 주자고 의견을 모으고 계약을 맺었다면, 그 계약에 찬성했든 반대했든 모든 사람은 그 사람 혹은 그 합의체의 모든 행동과 판단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야만 한다.그래야만 그들이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고, 타인의 침약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국가를 설립함으로써,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 통치권이 부여된 사람의 모든 권리와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P. 125)

 

 

  인간은 자유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현혹되기 쉽다. 그리고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적인 권리를 자신들의 개인적인 상속 재산과 천부적인 권리라고 오해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이 주제에 관한 저술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권위가 이와 같은 오류를 뒷받침하게 될 때, 그로 인해 반란이나 정치적 변혁이 초래된다 할지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P. 149)

 

 

  통치자에 대한 백성의 의무는 통치자의 힘이 지속적으로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 스스로를 보호할 선천적인 권리는 그 어떤 계약의 의해서도 폐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치권은 국가의 영혼이며, 백성이 통치권에 복종하는 이유는 보호를 받고자 함이다.
(P. 151)

 

 

  백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계층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재판을 행해야 한다. 상층계급 사람들에 대한 편파성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초래하는데, 우선 죄의 면제는 오만을 낳고, 오만은 증오를 낳는다. 그리고 이 증오는 국가의 파멸을 초래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억압적이고 오만불손한 상층계급을 타도하려는 노력을 낳게 된다.
(P.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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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2)
몽테스키외 / 권미영 / 일신서적 / 390쪽
(2014. 06. 08.)

 

 


  기술을 단축시킬 것을 목적으로 개발된 기계라고 해서 항상 유익한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공작품의 값이 알맞고 그것을 사는 사람에게나 제작한 노동자에게나 똑같이 적합한 것이라면 그 제조를 간단히 하는, 즉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그러한 기계는 유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차가 도처에 설치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그것을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유익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차는 무수한 일손을 놀게 하는 결과가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물의 사용을 빼앗고 많은 토지에 풍요를 잃게 했기 때문이다.
(P. 114)

 

 

  종교나 시민법은 주로 인간을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데 노력해야 하므로, 양자의 어느 하나가 이 목적에서 벗어날 때에는 다른 하나는 더욱 이것을 지향해야 함은 명백하다. 종교가 억제적이 아니면 아닐수록 시민법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P. 147)

 

 

  인법으로써 규정해야 할 것을 신법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면 신법으로써 규정해야 할 것을 인법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 두가지 종류의 법은 기원과 목적, 성질에 있어 서로 다르다.
  인법이 종교의 법과 성질을 달리 하는 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바이며, 이것은 일대 원리이지만 이 원리 자체가 다른 약간의 원리를 좇는 것이다. 그것을 탐구해야 한다.
  인법의 본성은 모든 우발사에 의해 지배되며 인간의 의지가 바뀜에 따라 변화하는 데 있다. 이에 반하여 종교의 법은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데있다. 인법은 선에 대하여 규정하고 종교의 법은 최선에 대해서 규정한다.
  종교의 주된 힘은 사람이 그것을 믿는 데에서 생긴다. 반면에 인법의 힘은 사람이 그것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생긴다.
(P. 176)

 

 

  인간은 자연적 독립을 포기하고 정법 밑에서 생활하듯이 재산의 자연적 공유를 포기하고 시만법 밑에서 생활한다.
  정법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고 시민법은 소유권을 주었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자유의 법에 의하여, 소유권에 관한 법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할 일을 국가의 지배자가 결정해서는 안된다. 사익은 고익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폭론이다.그것은 국가의 지배가 문제되는 경우 즉 시민의 자유가 문제되는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재산에 소유권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가 시민법이 그에게 주는 소유권을 불변적으로 보지하는 것이 항상 공익이기 때문이다.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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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 (1)
몽테스키외 / 권미영 / 일신서적 / 388쪽
(2014. 06. 07.)

 

 


나는 나의 원리를 결코 나의 편견에서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을 사물의 본성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대부분은 그것과 서로를 연결짓고 있는 다른 진리와의 연쇄 관계를 이해한 뒤라야만 알게 될 것이다. 세부적인 것에 관하여 숙고하면 할수록 원리의 확실성이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 세부적인 것에 관해서 나는 모두를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한심할 정도로 따분하지 않고서야 누구라도 그 모두를 이야기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 6)

 

 

백성들이 계몽되었는가 되지 못했는가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위정자가가 갖는 편견은 국민이 갖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무지 몽매한 시대에는 가장 큰 악을 행할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의혹을 품지 않는다. 계몽된 시대에서는, 가장 큰 선을 행하는 마당에서조차 사람들은 겁을 먹는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폐해를 감시하며 그 교정을 이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위에 교정 자체의 폐해도 알아차린다. 최악을 두려워하여 악을 방치하고 최선을 의심하여 선을 방치한다. 오직 총체를 판단하기 위해서만 부분을 고찰하고, 결과의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서만 원인의 모두를 검토한다.
(P. 6)

 

 

  가장 넓은 뜻에서 법이란 사물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뜻에서는 모든 존재가 그 법을 가진다. 신은 신의 법을 가지고, 물질계는 물질계의 법을 가지며,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존재도 그 법을 가지고, 짐승은 짐승의 법을 가지며, 인간은 인간의 법을 가진다.
  맹목적인 운명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 사람들은 심한 부조리를 말했던 것이다. 지적 존재가 맹목적인 운명의 소산이라는 것보다 더 한 부조리가 또 있겠는가? 따라서 원초적 이성이 있는 것이며, 법이란 그것과 여러 가지 존재 사이에 있는 관계, 그리고 이들 여러 가지 존재 상호간의 관계이다.
(P. 12)

 

 

  인간은 사회 생활을 영위하게 되자 곧 열약함의 감각을 잃는다. 일찍이 상호간에 있었던 평등은 끝나고 전쟁상태가 시작된다. 각 개별 사회는 그 힘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그 사실은 민족 사이의 전쟁 상태를 조성한다. 각 사회에 있어서의 개인은 그 힘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그 사회의 주된 이익을 자기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돌리고자 애쓴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전쟁 상태를 조성한다.
(P. 16)

 

 

  이 두 가지 전쟁 상태가 인간들 사이에 법률을 제정케 한다. 이처럼 광대하고도 서로 다른 민족의 존재가 필연적인 듯한 이 유성의 주민으로서 고찰한다면, 인간은 그 민족들이 상호간 사이에서 가지는 관계이 있어서의 법률을 갖는다. 그것이 만민법이다. 하나의 유지되어야 할 사회에서 생활하는 것으로서 고찰한다면, 그들은 통치하는 자가 통치당하는 자와의 사이에서 갖는 관계에 있어서의 법률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정법이다. 그들은 또 모든 시민 상호간에 갖는 관계에 있어서도 법률을 갖는다. 그것이 시민법이다.
(P. 16)

 

 

  군주 정체나 전제 정체가 유지되고 지지받기 위해서는 청렴 독실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전자에서는 법의 힘이, 후자에서는 항상 쳐들고 있는 군주의 팔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억제한다. 그러나 민중 국가에는 다른하나의 태엽이 필요한데, 그것은 덕성이다.
(P. 32)

 

 

  타락하는 것은 탄생되어 가는 국민(젋은 세대)가 아니다. 그것이 망하는 것은 어른들이 이미 부패해 있을 때뿐이다.
(P. 49)

 

 

  공화 정체 속에 사치가 획립됨에 따라 사람의정신은 개인적 이익 쪽으로 향한다. 생활에 필요한 것 외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사람들은 조국의 영광과 자기 자신의 영광밖에 바랄 것이 없다. 그렇지만 사치에 의해 타락한 영혼은 다른 많은 요구를 가진다. 얼마 안 가 그것은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법의 적이 된다.
(P. 121)

 

 

  민주 정체에 있어서는 국민이 자기가 바라는 바를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란 바라는 바를 행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국가, 즉 법이 존재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자유란 바라는 것을 행할 수 있고 바라지 않는 것을 강제당하지 않는 데에 있다.
  독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시민이 법이 금하는 바를 행할 수 있다면 다른 시민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가능성을 가지게 될 터이므로 근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P. 185)

 

 

  입법부가 한 번 부패하면 병폐를 고칠 수단이 없다. 다른 입법부가 연달아 뒤를 이을 경우엔, 국민이 현재 있는 입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면 당연히 다음에 오는 입법부에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항상 같은 입법부일 것 같으면, 국민은 한번 그것이 부패하였음을 알았을 때 그 제정되는 법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분노하든가 무관심에 빠지게 될 것이다.
(P. 193)

 

 

  군주는 조롱에 관해서는 극도로 삼가야 한다. 그것이 조심성 있게 행하여 질 때는 친밀해지는 수단을 주므로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나 신랄한 조롱은 최하급의 신하에 대해서보다도 군주에 대해서 훨씬 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치명적으로 사람을 손상시키는 사람은 군주된 자이기 때문이다. 또 더욱이 군주는 노골적인 모욕을 신하의 한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된다. 군주는 용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그 지위에 있는 것이지 결코 모욕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P. 247)

 

 

  국민의 정신이 정체의 원리에 어긋나 있지 않을 경우에, 입법자는 국민의 정신에 따라야 한다. 우리들은 자유로이 자연의 천분에 따라서 일을 할 때 바로 최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본래 쾌활한 국민에게 현학의 정신을 주어봤자, 국가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하등 얻을 바가 없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진지하게, 또 진지한 일도 쾌활하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P.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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