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하)
애덤스미스 / 김수행 / 비봉출판사 / 578쪽
식민지무역의 독점은, 독점이 없을 경우에 그부문으로 향할 영국 자본보다 더 큰 부분을 독점분야로 이동시킨다는 점에서 보면, 모든 경우에 영국 자본의 더 큰 부분을 이웃나라와의 대외 소비무역으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진 나라와의 그것으로 전환시키고, 그리고 많은 경우 직접적인 대외 소비무역으로부터 중개무역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경우 더 많은 생산적 노동량을 고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부터 훨씬 더 적은 노동량을 고용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이동시킨다. 또한 영국 상공업의 매우 큰 부분을 하나의 특정 시장에 적합하 함으로써, 식민지무역의 독점은 생산물들이 다수의 시장들을 위해 생산되는 경우에 비해 전반적인 상공업 상태를 더 위험하고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지무역의 결과와 식민지 무역의 독점의 결과를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항상 그리고 반드시 이익이 되는 것이지만, 후자는 항상 그리고 반드시 해가 된다. 그러나 식민지무역은 너무나 큰 이익을 낳기 때문에 그것이 독점되어 그 독점에서 발생하는 해로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크게 유익하다. 물론 독점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 비해 그 이익이 상당히 감소되기는 하지만.
(P. 747)
아메리카 식민지의 거대한 상업을 독점하는 것은 당연히 최고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식별력 없는 멍청한 야심가의 눈에는 이런 독점은 혼란한 정치와 전쟁의 아수라장 가운데서 쟁취할만한 가치가 있는 누부신 목표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물의 휘황찬란함이, 그 상업믜 무한한 거대함이 곧 그것을 독점하면 소내흘 보게 하는 본질인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자본의 용도보다 본질상 그 나라에 덜 유리한 용도가 그 나라의 자본을 자연적으로 그 부문으로 흘러들어갈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흡수하기 때문이다.
(P. 773)
소비야말로 모든 생산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며, 생산자의 이익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필요한 한에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명제는 더없이 자명한 것으로서, 이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중상주의에서는 소비자의 이익이 거의 언제나 생산자의 이익에 희생되고 있으며, 중상주의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의 모든 상공업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목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국내에서 생산되거나 제조되는 상품과 경쟁관계에 있는 모든 외국상품의 수입이 제한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 소비자의 이익은 명백히 생산자의 이익에 희생되고 있다. 이런 독점이 거의 언제나 야기하는 가격 상승을 소비자가 감수해야 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생산자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P. 814)
중농주의자는 한 나라의 토지와 노동의 연간생산물에 공헌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세 계급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계급은 토지소유자 계급이다. 두 번째 계급은 차지농·농업 노동자 등 경작자 계급인데, 이들은 중농주의나에 의해 생산적 계급으로 칭송되며, 세 번째 계급은 수공업자·제조업자·상인 계급인데, 중농주의자들은 이들을 비생산적 계급이라는 굴욕적인 명칭으로 그 지위를 격하시키고 있다.
(P. 819)
이 자유롭고 관대한 학설에 따르면, 농업국이 자신의 수공업자·제조업자·상인을 육성하는 가장 유리한 방법은 다른 모든 나라의 수공업자·제조업자·상인에게 무역의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농어국은 자신의 토지의 잉여생산물의 가치를 올리고, 그 가치의 계속적인 증가는 재원을 점차로 확보하게 할 것이다.
(P. 829)
특정 산업부문에 대해 특별한 장려책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많은 양의 자본을 의도적으로 이 부문에 끌어들이려 하거나, 특정 산업부문에 대해 특정한 제한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일정량의 자본을 의도적으로 이 부문으로부터 끌어내려는 어떤 학설도 실제로는 그것이 의도하는 큰 목적을 파괴하게 된다. 그것은 참된 풍요, 번영을 향한 그 사회의 진보를 촉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저지하며, 또한 사회의 토지, 노동의 연간생산물의 진정한 가치를 증대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감소시킬 뿐이다.
(P. 847)
사법권과 행정권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을 때에는, 정치라고 속되게 부르는 것을 위해 공정한 법 집행이 자주 희생되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의 큰 이익을 돌보도록 위임된 사람들은, 비록 불순한 의도는 없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필요하다가 생각한다.l 그러나 모든 개인의 자유, 개인의 안전감은 공평무사한 재판에 달려 있다. 모든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모든 권리를 완전히 안전하게 누리고 있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사법권은 행정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뿐 아니라 가능한한 행정권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재판관은 행정부의 변덕에 따라 면직되어서는 안 된다. 재판관이 규칙적으로 급료를 받는가의 여부가 행정권의 선의 또는 심지어 경제적 여유 여햐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P. 890)
현대의 가장 저명한 철학자이자 역사가의 한 사람인 데이비드 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나라의 대부분의 기술과 직업은 다음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이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킬 때에는 그것은 특정 개인들에 대해서도 유용하거나 사람들의 기분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이런 경우 정부가 항상 지켜야 할 규칙은, 어떤 기술을 처음 도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일을 그 직업에 맡겨두고, 그것을 장려하거나 진흥시키는 일은 그로부터 이득을 얻게 될 개인들에게 맡겨 두라는 것이다. 장인들은 자신들의 이윤이 고객들의 호감에 의해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가능한 한 최대로 자신의 기능과 근면을 재고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사정이 분별없는 간섭으로 어지럽혀지지 않는 한, 상품의 공급은 항상 수요와 거의 일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 나라에 대해서는 유용하고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개인에게는 아무런 이득이나 즐거움도 주지 않는 그런 직업도 있다. 최고 권력은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방식을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장려가 필요하다.
(P. 968)
우편업무는 본래 상업적 사업이다. 정부는 우체국 설치비용과 필요한 말과 마차를 구입하거나 임차하는 비용을 투하하며, 그것을 우편요금을 통해 큰 이윤과 함께 회수한다. 우편업무는 어떤 종류의 정부라도 성공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유일한 상업적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투하되는 자본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이 업무에는 어떤 비법도 없다. 자본의 회수는 확실할 뿐 아니라 즉각적이다.
(P. 1008)
자본으로부터 생기는 수입, 즉 이윤은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이자를 지불하는 부분으로서 자본 소유자에 귀속되는 부분이며, 다른 하나는 이자 지불에 필요한 부분을 초과하는 잉여분이다.
이윤 중 후자는 분명히 직접적으로 과세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부분은 자본의 사용에 따른 위험?고통에 대한 보상이며, 대부분의 경우 매우 적절한 보상에 불과하다. 자본의 사용자는 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게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 1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