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반양장) 렘 걸작선 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 자신이 이 고난의 근원인 것이다. 바다는 우리의 사고에 대한 일종의 증폭 장치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다.




타자를 마주치는 순간, 인간(혹은 존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날카롭게 경계점을 설정해낸다. 차이점을 대두시키고 그 차이점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겸손한 척 할 때도 있지만, 사실 인간은 우리가 최고등 생물이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려 애쓴다. 꼭 종의 문제가 아니라 개체의 문제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데-쉽게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운전을 그리 오래 하지 않았지만 저 놈보다 내가 몇 배는 낫다고 다른 택시 기사가 좀만 실수를 해도 말하곤 한다-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합리화하며 인간은 생명을 유지시켜 나간다. 동물이 되어보지 않아서 동물도 구차하게 살기 위해 자기 존재의 합리화라는 기능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과 마주칠 때마다-통상 미쳤다고 부르는 이들조차 늘 자기 합리화를 위해 노력한다, 내가 옳아, 내가 맞아, 이를 발설하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인간 존재의 끔찍함과 위대함은 바로 이 합리화에 있는 게 아닐까. 오욕의 역사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능력.

지금으로서 나의 이해 수준이 올바르다고 생각되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솔라리스』는 이런 인간 종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우리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고 하며.

불안 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자. 그 불안 리스트는 그동안 잊고자 했던 자신의 치사함과 언행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본성을 까발릴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처음엔 한두 개, 그러다가 적을 수록 배가될 것이다. 그 중 무엇이 치명적일지는 자기자신조차 모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무의식이라는 철저한 장벽이 한 겹 두텁게 쳐져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가장 치명적인 기억을 지워내며 생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다. 동물의 지독한 자기보존 본능으로서.

솔라리스의 캘빈에게는 지독한 기억으로 사랑하던 아내-자신의 실수인지 잔혹함 때문인지 우연인지 모를 일 때문에 자살한-가 나타난다. 물질적으로 그녀가 죽기 전 열아홉 살의 모습을 복원한 채로. 스테이션 안의 또다른 인물인 사토리우스에게는 밀짚모자가, 죽은 기바리안에게는 덩치 큰 흑인 여자가 찾아온다. -밀짚모자가 치명적으로 느껴지려면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토리우스의 허세스러운 성격과 맞는 상관물인 듯 하긴 하지만- 스노우에게는 누가 찾아왔는지 모르며, 이들의 치명적인 과거, 이들이 그 방문자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들을 아무런 틈도 없는 스테이션에 들여보낸 것은 누구일까? 소설 초반부부터 그것이 행성 솔라리스의 유일한 생명체 바다라는 것은 드러난다. 2장에서 솔라리스의 젤리 같은 느낌이 나는 바다에 대한 여러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열되며 이 바다가 생명체 혹은 지성체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자는 로켓으로 발사해 보내도 다시 돌아오며, 자신을 기억하는 상대방의 기억이 투사된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자신의 목적-방문한 이를 따라다니려 한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괴력이 발휘되고 자신도 왜 그렇게 행동한지 논리적으로 혹은 합리성을 가장해서 설명할 줄 모르며, 죽지 않는다. 현미경으로 이 방문자의 표본을 들여다본 결과 그 궁극 요소는 미세한 소립자로 인간의 궁극적 요소를 이루는 원자보다 훨씬 작은 뉴트리노(중성미자)이며 탁월한 재생 기능이 있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들을 여기에 보낸 걸까? 헐리우드 서사에 익숙해진 결과, 당연히 이 스테이션 내에 자체 교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왜 이다지도 복잡하게 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 막막함이 시작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괴롭히는 이유는 무언가. 사실 소설도 이 질문을 도입하고 바라볼 때부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한 지성체(?)는 인간들이 납득할 만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목적 없이 어떤 학습의 단계로서 이 방문자를 보낸다.

이전에 솔라리스의 바다를 탐사하던 중 한 명이 실종되었고 이 인간을 통해 인간의 시스템 체계를 빠르게 학습한 바다는 거대한 아이를 만들어 인형을 다루듯 인간의 여러 동작을 만들어보고는(베르통이라는 탐사원의 임상기록에서 나타난다. 그의 임상기록은 위원회에서 정신착란으로 취급받는다) 인간의 무의식에 투사된 어떤 기억까지도 물질화시킬 수 있는-먹거나 자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좀 더 성능이 좋은- 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8장에서 솔라리스의 바다가 의태 능력으로 반경 8~9마일 내의 것을 모방해 다양한 형상을 만들고-여기에 대칭이 어쩌고 비대칭이 어쩌고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상태가 좋지 않아 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넘겼다- 지워내고 있음이 나타나며 이 바다의 능력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솔라리스는 자연은 모방하지 않고 기계만 모방한다. 기제라는 솔라리스학 연구자는 ‘완전한 성숙을 위한 과정’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방문자는 기계와 같은 존재일까? 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 시스템 상에서 몇몇이 인간과 다르지만, 그 방문자 중 한 명인 레아는 점점 자아에 대한 의식을 쌓아가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급기야 캘빈에게 “그러면 당신은 여기 있는 사람이 그녀(죽은 부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앚지 않을 테니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스스로 소멸을 택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지? 과역 그녀의 소멸을 도운 스노우는 자살 방조인가, 아닌가? 저 정도로 자아에 대한 개념이 완벽하며 자살할 수 있는 생물체를 과연 인간이 아니라 해야 할까. 인간은 이기적으로 종족 보존을 위해 그 경계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지만(물론 각종 말들이 있긴 하나 완벽히 믿을 수는 없는) 자기 종에 대한 경계를 친다. 자신보다 우월해도 안 되고 하등해서도 안 된다.

레야의 소멸 뒤로 힘들어하던 캘빈은 스노우와 이야기 도중 ‘불완전한 신’이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스노우는 이 의견이 또 다른 솔라리스에 대한 가설-쌓이고 쌓이며 결국은 구원을 위해 손을 내미는-이라고 말한다. ‘속죄나 구원의 목적이 아닌, 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며 ‘차츰 성장해가며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있는 신’이며 ‘물질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스노우의 말에 따르면 인간과 닮았으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인간과는 다른.

솔라리스를 떠나려던 캘빈은 솔라리스와 직접 촉각적으로 접촉한 뒤 솔라리스에 남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 채 소설이 끝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아주 미약한 희망을 남긴 채.

이것은 혁명에 대한 희망인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사회주의 체제의 소설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맑스의 혁명적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나의 일천한 지식으로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솔라리스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며칠 전에 읽은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쓴 리어왕의 질문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하는 존재론적 질문을 다른 행성을 탐험하는 과학소설 형식을 빌려 하고 있는가 하면-실제로 꿈에서 만난 기바리안과의 대화에서 이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기도 한다. “아니. 너(기바리안)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렇지만 그 사실을 너는 몰라.”/ “그럼 자네 자신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이 존재론적 질문을 개체뿐 아니라 종의 개념으로 끌어올린다. 우리의 이해 능력의 한계 지점에 대해서.

인간의 감각과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극대와 극소의 영역에서, 수천, 수백만의 변화가 마치 수학적인 대위법에 의해 연결된 음악의 악보처럼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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