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처음 접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천재는 많지만 꾸준한 인간은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유고집입니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은 출판되지 않았을 테죠. 이 책은 '김현의 독서일기'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책이죠. 그때 제가 그의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요. 어째서 대단하다고 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하다는 건 변함없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 동안 난 뭘 했나 하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충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렇듯 흘러가듯 글을 씀에도 대상의 핵심에 접속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대한 감탄에서 오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저는 10여년 전 대학에서 저보다 나이어린 동기들과 공부했습니다. 그때 저보다 나이가 서너살 어린 동기 중 하나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형 나이가 되면 분명 형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거라"고. "그래, 그렇겠지."라고 말하며 저는 웃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 저는 그 사실을 잊었는데 그는 그걸 잊지 않았더군요. 10여년이 흐른 어느날 우연히 그 녀석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지금 나는 그 때의 형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때의 형보다도 책을 읽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잘난 척이나 하기 위해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책을 읽는가? 누군가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겁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러다보면 읽는 법이 생길 거다."라고요. 그렇게 답해주면 질문한 이는 마치 제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으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양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합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러다보면 읽는 법이 생길 거다."란 말의 핵심이 어디에 있을까요? "닥치는 대로" 혹은 "읽는 법" 아마 아는 분들이 다 아실 겁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읽다"에 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애써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 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일인지... 깨워놓고 돌아서면 또 드러누워 버리는 게 애들이지요. 하지만 일요일 아침 명작 만화라도 할라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 TV 앞에 앉는 것이 또한 애들입니다.

좋아서 하는 일도 힘든 법이지요. 하지만 즐기면서 맘 편하게 하는 일은 그만큼 덜 힘듭니다. 책을 읽는 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제가 책의 맛을 알게 된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 때문이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처음 읽었던 삼국지에 빠져들게 된 것은 삼촌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그 무렵 삼촌은 삼국지를 3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세상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며 삼국지를 권했습니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어린 제 손으로는 들기도 어려운 삼국지를 벗삼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삼국지를 100여번 가량 읽은 것 같습니다. 재미로 읽다가 중독되어 버린 것이죠. 지금도 삼국지를 붙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시 읽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이 삼국지의 매력이겠지요.

책은 무엇보다 재미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책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요. 가령, 롤스의 "정의론" 같은 책은 재미로만 읽기엔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게 '정의론'이 다른 책들 가령,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배배꼬인 문장을 읽는 것보다 고통스럽거나 재미없었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다시 앞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서 책을 읽는다. 그 행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읽을 것인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아무 곳에서나 책을 읽고, 아무 곳에나 책을 두고, 특별한 자세 없이 읽습니다. 그렇게 읽어도 기억에 남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실험을 햇다고 하더군요. 1500명의 학생들에게 30장 분량의 역사책을 읽게 하고, 20분이 지난 뒤에 읽은 책에 대해 요약해보라고 시켰더니 단지 15명의 학생들만이 기본적인 주제에 대해 이해하고 있더란 겁니다.

저는 책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한 책을 기억하기 위해 읽지도 않습니다. 기억하려고 일부러 공을 들여 읽지도 않습니다. 다음은 책 읽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많은 독서가들이 지적한 공통의 내용입니다.

1) 책 속의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한다.
- 앞서 분명히 오해라고 말했음에도 벌써 까먹은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수록된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 긋고 요약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핵심이 무엇이고, 이것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책도 역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장은 다시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단락이 모여 하나의 주제 아래 소단원이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한 장을 이루고, 1부가 됩니다. 그것을 역순으로 풀이해보면 모든 문장, 모든 단어가 중요할리 없겠지요.

2) 한 번만 읽으면 충분하다.
- 저는 극장에서 본 영화는 반드시 집에서 다시 비디오로 봅니다. 인간이 사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50분이라고 합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죠, 영화의 평균 런닝 타임은 2시간 30분 가량합니다. 그런데 제 경우는 전자오락 할 때를 제외하고는 10분 이상 집중을 못합니다. 영화는 한 장면에 때로 책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저는 종종 영화를 보다고 남들은 다 봤다는 중요한 장면을 기억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한 번 본 영화를 두 번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시간 낭비를 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책을 샀다면 반품하셔야 합니다. 몇 장 안 되는 동화책도 다시 읽으면 다시 새로운 장면이 등장하곤 합니다.

3) 건너뛰거나 너무 빨리 읽으면 이해력이 떨어진다.
- 계단을 걷다보면 때로 두 개씩 오를 때도 있습니다. 다리 길이만 충분하다면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법은 없지요.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보면 중요한 대목과 그렇지 않은 대목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100미터를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들도 스타트 순간과 스퍼트 순간, 골인 지점에서 힘을 안배한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힘의 안배는 필요한 법이죠.

4) 내가 책을 읽지 못하는 건 빨리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 종종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꼭 그들의 탓은 아니지만 러시아인들의 악명 높은 이름 때문에 등장인물조차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제 집사람과 영화를 볼 때 제가 짜증내 하는 부분 중 하나는 저도 처음보고, 자기도 처음보면서 왜 저래?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매우 친절하게 스토리 라인을 짜맞춰 가기 때문에 제가 답하고 있는 동안 혹은 물어보고 있는 동안 다음 대목에서 작중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장면으로 충실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읽다보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다음 어느 순간엔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책은 종류에 따라 읽는 템포와 방법을 달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김성동의 천자문을 읽는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꾸준하게 정독하는 방법도 맞을 것이고, 어느 특정 부분부터 읽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하지만 죄와벌을 건너뛰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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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9-1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퍼가겠습니다.

하얀마녀 2004-09-1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 한 번만 읽으면 충분하다에서 푹! 찔렸습니다. 전 대부분은 한번만 읽거든요 어려운 책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바람구두 2004-09-1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굼님/ 예, 나중에 시간 되는 대로 2탄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얀마녀님/ 예... 저도 한 번만 읽은 책도 많아요. 흐흐.... 많이 실패하면 많이 성공하는 법이죠.

하이드 2004-09-1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탄맞은것 같이 바쁜 와중에, 끌리는 제목이 있어서 들어와서 후다닥 몇자 남깁니다.
찬찬히 나중에 다시 읽어볼테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거, 러시아 작가들 글이요. 정말 단순히 어려운 이름때문에 헷갈리는걸까요? 제 경우도, 러시아 작가들 글 읽는데, 속도가 무지무지 느린데, 뭔가 다른 심오한 이유가 있고 싶다구요-.

갈대 2004-09-1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 3번. 강박장애인지 저는 한 단어, 한 문장도 안 놓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서 늦게 읽는 것 같아요.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껴야 넘어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2번. 읽은 책이 얼마 없어서인지 거의 한 번만 보고 말았습니다. 다시 들춰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마냐 2004-09-14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두 책 한번 읽고 끝내기 싫은데요....읽을 책이 너무 많아 잘 안되요. 이럴땐 어떻해야 하나요, 바람구두 선생님.
그리구요. 러시아 책..으하하. 전 다행히 그들의 길고 복잡한 이름을 볼때마다 쾌감 내지는 우월감을 느낀답니다. 키루룩.

_ 2004-09-1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뜻깊고 좋은 글입니다. 항상 책읽는 상황에서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저에게 정말 주옥같은 글이군요.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언제나 좋은글 많이 훔쳐보면서도 이렇게 인사를 늦게 드리다니요. 정말 반갑습니다. ^^

아영엄마 2004-09-14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두 번 세 번 읽어 보아야 한다는 부분에 공감... (저는 이해력이 딸려서 영화도 두번 세번 봐야 이해가 되는 족속이어요..ㅜㅜ)

프레이야 2004-09-14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우도 한번 읽고 안 읽게 되는 책이 많네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여유있게 즐기며 하는 단계를 넘어서 강박적으로 하게 되면 부작용이 오나봅니다. 요즘 괜히 좀 쫓기는 기분이라...^^ 바람구두님 언제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탄 기대하겠습니다.^^

. 2004-09-15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닥치는대로 읽다보면 나름대로 읽는 법도 생기고..안목이 생기죠(하하...그 안목 언제 길러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