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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ㅣ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때론 한 사람의 목소리가, 열 편의 글을 대신한다.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기록을 담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그랬다.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은 유가족의 생생한 인터뷰로 남아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읽어내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완독해낸 건 목소리가 주는 힘 덕분이었고, 이 책을 기억하는 것 또한 목소리 덕분이라 생각한다.
2015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 또한 목소리로 이루어진 책이다. 아니, 목소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한 책이다.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은 나는, 이 책의 장르가 낯설다는 것을 핑계 삼아 책장에 꽂아두고 한참을 멀리했다.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장르가 아니라 이 책의 배경이 된 1990년대를 낯설어했음을. 동시에, 부끄러웠다. 얼마 전, 영화 <사울의 아들>을 봤을 때처럼. 나는 극히 일부를 알고 있었고, 어쩌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응답할 추억을 쌓아가던 1990년대. 정확히는 1991년,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20년 동안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상실감,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등의 정신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는 책. 나는 이 주제가 다소 어려워서, 이 책을 이렇게 읽기로 했다. ‘무엇에 대한’ 책이라고.
독재의 아름다움과 시멘트에 박힌 나비의 비밀에 대해, 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신을 위해 일한다고 믿고 있는 시대에 대해, 행복과 매우 닮은 외로움에 대해, 모두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치는 사람들에 대해, 용감한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는 곧 그들의 일상이었고, 삶이었다. 1990년대에 그곳을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작가는 무려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인터뷰 끝에, 작가에게 남은 목소리 하나하나. 그것을 그저 활자로 녹여낸 책이었다면 이 책은, 일부에서 평하는 것처럼 르포일 뿐이며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결과론이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알렉시예비치는 목소리를 그냥 옮기지 않았다.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최대한 살려, ‘목소리 소설’을 구현해낸 것이다.
앞서, 때로 한 명의 목소리가 열 편의 글을 대신한다고 썼다. 이때 ‘한 명의 목소리’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고 그것을 정리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로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렉시예비치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왔고, 그 길은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그 끝엔 옛 소련도, 사회주의도, 희생도 아닌 ‘사람’이 있으니까.
영화 <사울의 아들> 리뷰에 이런 글을 썼다. ‘기억은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 《세컨드핸드 타임》에서는 크세니야-다니야 자매의 엄마를 기억하고 싶다. 2004년 2월 6일, 모스크바 지하철 자모스크보레츠카야 선, 아프토자보드스카야 역과 파벨레츠카야 역 사이에서 테러가 자행되었던 그날, 그 악몽 같은 곳에 있었던 한 사람.
“제 인생의 소원은 그 어떤 것 하나 이뤄진 것이 없어요.” (p.498)
“전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제게 신앙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다만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한번은 신부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인간은 큰 고통을 만나게 되면 신에게 가까워지든지 아니면 오히려 멀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하셨어요. 인간이 만약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걸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그건 슬픔과 아픔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요. 그건 저에 대한 얘기였어요.” (p.503)
“예전에 저는 제 안에 있는 것과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았었죠. 그런데 전 지금 광산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요. 걱정하고 고민하고 늘 새로운 잡생각으로 저 자신을 괴롭히죠. ”엄마, 마음을 좀 감춰요!“ 아니, 사랑하는 내 딸들아, 난 말이지, 내 감정들이 내 눈물들이 그냥 이렇게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는단다. 흔적도 없이, 표시도 없이……. 전 그게 제일 큰 걱정거리예요. 제가 겪은 모든 일을 내 아이들에게만 남기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을 전해서 이 일들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면 좋겠고, 그래서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게끔 하고 싶어요.” (p504)
이 책이 내 품에 들어온 순간 알았다. 신간평가단 활동이 아니면, 읽을 엄두도 못 냈을 책이라고. 읽어내기 쉽지 않고, 글 쓰는 건 더 어려워서 결국 마감일을 넘겨서야 온전히 책장을 덮는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몇 번이고 인상 깊었던 목소리를 다시 찾아 읽었다.
“보통 사람은 역사를 위해 살지 않아요. 그보다는 훨씬 단순하게 살아요.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지으며 살아요.”
“슬픔을 겪다 보니 좋은 일들을 잊고 살았어요. 우리도 젊었을 때는 사랑이란 걸 했는데 말이에요.”
그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역사를 위해 살지 않는 보통 사람인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슬픔을 겪다 보니 좋은 일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