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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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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여행은 한 자락으로 기억될 때가 있다. 친구와의 남원 여행이 그랬다. 남들처럼 코스를 밟아 여행했던 전주를 뒤로하고, 남원으로 넘어온 우리는 남원에서의 하루를 종일 자전거를 타며 보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빌린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한참 오른 끝에 방문했던 남원랜드. 영업시간은 지나 있었고, 아쉬운 마음에 남원랜드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우리는 10분 넘게 올라간 그 길을 1분 만에 내려왔다. 여행의 한 자락은 그 1분 사이에 찾아왔다. 넓게 펼쳐진 남원의 풍경 위로 저물어가는 노을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차는데, 우리는 이 노을을 보려고 여길 이렇게 올라왔나보다 했다. 그 풍경은 그렇게 지난 여행의 전부가 되었다.

 

이렇듯 한 자락은 어떤 풍경이 되는가 하면, 한 사람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알타이를 여행한 배수아에게는 한스가 있었다.

 

나는 한스가 그렇게 걸어 식탁에 와서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침마다 반드시 홍차를 마셨으나 그날은 식탁 어디에도 홍차 봉지가 없었다. "한스, 이제는 차가 하나도 없어" 하고 누군가가 말해주자 한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평원으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는 그가 조각을 위해서 돌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신중한 태도로 몇 송이의 노란 들꽃을 꺾었다. 그리고 그 꽃송이를 식탁으로 가져와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차였다.

세상과 반쯤 격리된 듯한 한스의 몸짓과 태도에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 그의 말없는, 변함없이 주변과 무관하던 표정과 몸짓을 잊을 수가 없다. (p.186)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도저히 저항하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몽골로 떠나 약 한 달 간 머물렀다는 서북부 국경 지대인 알타이를 떠올렸다. 사진으로 접한 알타이의 풍경보다,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노란 들꽃을 띄워 그의 차를 마시는 한스가 눈에 선했다. 내가 그곳 알타이에 있었고, 그날 차를 마시는 한스를 보았어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유르테에 불을 피울 야크똥을 모으고, 3주 내내 양고기를 주식으로 먹고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많은 경우 자신의 감정과 언어 안에서 오직 혼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플 때조차도 가장 많은 미소를 지으면서 유목민으로 거듭난 그녀. 책의 시작부터 그녀의 책이었으나, 저 구절을 읽으면서 이 책은 온전한 그녀의 책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여기서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 도대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또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그건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p.138)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치렁치렁한 양털 스커트를 입고, 손에는 양치기 막대를 들고 걸어다녔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그녀가 아니었으면, 알타이와 울란바토르 그 어디쯤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노란 들꽃을 뜨거운 물에 띄워 마시던 한스가 하나의 시였다면, 유목민으로 산 한 달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내게 하나의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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