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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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말이었어요. 눈을 밟으며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종종 어디로 가야만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 위에 가만히 서 있는 토끼와 마주치곤 했습니다. 보이는 모든 곳이 길이었는데도 토끼는 길을 잃었더군요" -28쪽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32쪽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그녀와 현의 가족들이 바비큐를 먹으며 집값에 대해, 혹은 골프 코스에 대해, 곧 닥쳐올 대입시험에 대해 끝도 없는 얘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계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자신에게 떠날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바다를 바라본 것은 단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54쪽

언제라도 그녀를 매혹시켰던 고통이었건만 맛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끌렸던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59쪽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63쪽

서쪽 하늘은 검은 빛이었고 어떻게는 푸른 빛이었고 또 달리는 하얀 빛이었는데 그게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가만히 서서 한동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 전체를 뒤덮은 구름은 빠른 속도로 밝아지고 있었고 지평선에서 한 뼘 정도 위쪽으로는 날이 개리라는 걸 암시하는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구름이, 그다음에는 바람이, 그리고 저녁이, 또 계절이, 그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는 것 같았으므로 오히려 나는 숨이 편안해질 때까지, 바람이 젖은 내 몸을 차갑게 만들 때까지,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져 내릴 때까지 그리하여 그 구름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이 엿보이게 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73쪽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81쪽

그런데도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극한의 절망과 다른 선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강하고도 그만큼 멍청한 확신 사이를 한없이 오가면서 그 무엇도 아닌 존재에서 세상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 시시각각 변하는, 그러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얼굴을 지녔찌만, 결국 단 하나일 수밖에 없는 얼굴들. 그와 비슷하게 이 도시에서는 깊은 밤의 퇴근길 한강을 따라가면서 지친 얼굴로 바라보는 밤의 또렷한 풍경과 멀리 내몽고의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먼지로 뿌옇게 뒤덮인 낮의 풍경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맞이하는 하루 1440개의 순간들을 모두 똑같이 아름다웠다. 60초든, 1,000분의 1초든 모든 풍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는 청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7쪽

저는 외롭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고독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쓸쓸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눈이 내리는 밤에 짖지 않는 개와 마찬가지로 저는...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등의 불빛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흘러든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닮아, 내 귀가 자꾸만 여위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므로. 그게 그 해변의 제일 마지막 겨울이라서 파도 소리를 듣는 일이 그토록 외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두 눈을 감고 나는 가만히 들어본다. 지금은 그간 여러 해가 흘러갔듯이 그렇게 또 한 해가 흘러가는 12월의 마지막 밤이고, 그 자동차 소리를 배경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친구는 막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하지만 아직까지는 음정이 불안정한 피아노를 연주하며 먼 나라의 말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141쪽

그의 사진들은 결국 그가 살아가는 동안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들의 목록일 뿐이며 그가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했던 것들은 결국 그가 찍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181쪽

착해지지 않아도 돼, 경석군.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182쪽

제 아무리 인생을 깊이 들여다본다 해도 모두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221쪽

결국 인생이란 리 선생의 공책들처럼 단 한번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고쳐지는 것. 그러니까 인생을 논리적으로 회고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으로 예견할 수는 없다는 것. -224쪽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우리는 하늘을 봤고 우리는 별을 봤고 우리는 바다를 봤지.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자신이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너만을 이해했을 뿐이야. -225쪽

아직 벚나무에 벚꽃은 가득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꽃들 모두 져버리리라는 걸 아는 마음 같은 것도 세상에는 있지 않을까?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되려 슬퍼지는 그런 마음 말이다. -235쪽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237쪽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아. 이 사람은 지금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만은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있구나. -258쪽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저자의 말 중)-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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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9-10-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도 올려줘요 ㅎㅎ

웽스북스 2009-10-15 01:35   좋아요 0 | URL
역시 영물이야. 고양이는.
졸려서 몇개 스킵한 건 귀신같이 아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10-1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6쪽 이야기를 저도 밑줄그어 놓았지요.

웽스북스 2009-10-15 01:36   좋아요 0 | URL
아아. 역시 그럴 수 밖에 없는거죠?

꿈꾸는섬 2009-10-15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을게 많은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