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마지않는 우리 루시드폴님의 노래 중 '물이 되는 꿈'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자주 들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 노래를 듣는데, 노래 중간에 '내가 되는 꿈'이라는 가사가 나오자 마음이 참 새삼스럽게도 콩닥콩닥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아. 내가 되는 꿈이라니. 노래의 맥락을 생각해보면 돌이 되는 꿈, 흙이 되는 꿈, 산이 되는 꿈 다음에 나오는 '내가 되는 꿈'은 나로서의 내가 아닌, '강의 절친'이지만 강보다 좀더 작은 '졸졸졸 흐르는 내'가 되는 꿈일 것입니다.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나에게는 이미 나로서의 내가 되는 꿈,이라는 의미로 이 가사가 가슴에 콕 박혀버렸는걸요. 이정도의 오독과 오용은 잘생기고 너그러우신 시대의 훈남 루시드폴님께서는 애교로 살짝 눈감아주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국민학교(그렇습니다. 국민학교 세대인 것이죠)에 다니던 시절에 "너는 뭐가 되고 싶으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저는 제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성격이 부드러우신 5학년 때의 선생님은 "장난 치지 말고, 잘 생각해보렴"이라 말했을테고, 성격이 거칠었던 4학년 때의 선생님이시라면, "이녀석! 똑바로 말하지 못해?" 하며 군밤을 한 대 먹였을지도 모를 일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악했던 그 시절의 저는 변호사, 스튜어디스 등, 그리 간절하지 않았던, 하지만 그럴듯한 것들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에게 나 자신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 속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끊임 없이 받아온 "뭐가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을 통해, 내가 되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닌, '무엇을 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요받아 왔을 뿐이죠. 심지어 돌잡이 때부터요. (여담이지만, 요즘의 돌잡이는 좀 더 직설적이 되었더군요. 얼마 전 보았던 돌잡이에는 '칫솔'이 있기에 저는 당연히 오복의 상징인 '건치'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가 웃음거리가 되었죠. 칫솔의 의미가 치과의사인 줄을 몰랐던 건 정녕 저뿐인가요?)

어쩌면 우리 사회에 혼재해 있는 많은 문제들은 사람들이 '나 자신'이 아닌, '그 무엇'으로 도구화된 채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을테니까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면 타인의 입장에 설 수도, 타인의 마음에 공감할 수도,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불의'라 이름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내가 되는 것'을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자들, 혹은 그 꿈을 일치감치 포기해 버린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장관이 되고 싶었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고, 꿈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들을 이루었을지언정, 진정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한 자들입니다. 어쩌면 꿈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인생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순간부터, 우리는 이런 세상을 예감했어야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어떤가요? 비전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사회적 성공의 기회로 여기는 우를 범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지 않은가요? 

저는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4년차 직장인입니다. 아마 객관화된 잣대로 바라본다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도구화된 그 무엇으로 4년째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겠죠. 다행히 대학 때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던 일을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고, 그 일이 때로 재미있지만, 밥벌이의 수단이 된 이후부터는 매우 지난한 일상이 되어버렸으며, 그럼에도 이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좀 더 의미있는데 나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죠. 하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 나'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나'를 꿈꾸고 있기에, 스스로를 규정하지도, 제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바랄 것이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다운 내가 되어 있는 것, 그뿐입니다. 

'나름'에서 처음으로 필진 제안을 받았을 때, 사실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분들처럼 어떤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어설프게 여기저기에 조금씩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공연히 하나의 주제를 맡았다가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쓸 줄 아는 글이 일기와 반성문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텍스트를 접할 때 자기중심적 오독과 오용을 남발하는 저는 (당장 '내가 되는 꿈'을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용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책을 읽고 글을 써도 반성문이 되고, 영화를 보고 글을 써도 반성문이 되고, 연극을 보고 글을 써도 반성문이 되니, 이건 뭐, 어떤 전문성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이런 제게 흔쾌히 '그럼 일기를 쓰면 되지'라고 말해주신 '나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다행히,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으니, 제 자신의 삶에 놓여 있는 고민과 생각들이, 여러분 삶에 놓여 있는 고민과 생각들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는 '일기를 쓰는 아가씨'가 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 무슨 글을 써야할지에 대해서는 무계획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일기니까요.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일기를 쓰는 아줌마가 될 때까지, 많은 것들을 나누고, 공감하며 함께 이 곳을 멋진 장소로 만들어 나갔으면 합니다. 

혹시 저 쪽 한 구석에서 마우스를 내리며 여기까지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해주신 당신이 있다면, 정말 고맙습니다. 그 순간 이 글은 당신을 위한 것이 되니까요. 하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은 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루시드폴만큼이나 좋아하는 김연수님은 (아, 부디 루시드폴과 김연수 중 누가 더 좋으냐는 어려운 질문만은 제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의 책 '청춘의 문장들'에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말을 소개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만한 반 다인이나 똑똑한 에코와 톨킨을 제외하면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차마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 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물론 저는 소설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노블'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부엌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에 '키친 테이블'이라는 말을 쓸 수도 없지만, 애잔하게도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적어내려가지 않는다면 견디기 어려운 종류의 인간이니, 제가 쓰는 이 일기는 키친을 룸으로, 테이블을 베드로(그렇습니다, 저는 늘 침대에서 글을 쓴답니다 -_-) 바꾼 룸베드 다이어리 정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디 저의 빈약한 어법에는 지그시 눈을 감아주세요) 그리고 제 다이어리를 좋아해 주실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이 다이어리가 하는 일은 아마 제 자신을 치유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게 이 글을 쓰는 일은 좀 더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 없이 자신을 다그치고, 격려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저는 제 글을 좋아해 주시고, 공감해주시게 될 당신을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적어도 비슷한 색깔의 영혼을 지닌 사람일테니까요. 그런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저 역시 기대해봅니다. 

(첫 인사여서 존댓말로 글을 썼습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글들은 좀 더 편한 어투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건 저의 일기니까요 ^-^)


글쓴이 : 웬디


누가 그랬지, 누구나 삶의 시작은 작다고.
그렇게, 소리없는 작은 시작의 첫발을 내딛어본다. 이 첫발이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뻐하며, 고마워하며, 감격하며. 그렇게. 시작. ^-^ 




 

아까는, 알라딘 이미지 업로드 쪽에 오류가 있었는지 안되기에.  이제서야 주소 공개.  
아직 창간준비호라 많이 미흡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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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 2009-02-1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번에 얘기했던 웹진의 첫글인 모양이구나~
웹진 이름도 '나름' 의미가 있고 그 속의 웬디 글도 참 좋다~^^*
룸베드 일기, 기대하겠어~ 근데 웹진 주소는?
이 글 읽으니까 '꿈이 있는 자유'가 듣고 싶어진다...

웽스북스 2009-02-19 01:51   좋아요 0 | URL
네 언니 첫글이에요. 꿈이있는 자유라니. 아 영광이에요. ㅋ

다락방 2009-02-1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웬디양님. 웹진 주소는요? 무작정 검색창에 '나름' 쳤더니 아무것도 안뜨더라구요.

웽스북스 2009-02-19 01: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미지 업로드해놓았어요. ^-^

프레이야 2009-02-1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다이어리 2호,3호 계속 기대되어요.
1호 출범을 축하드려요, 웬디양님.^^

웽스북스 2009-02-19 01:51   좋아요 0 | URL
언젠가는 혜경님만큼 삶이 묻어나는 글을 조곤조곤 쓰게되길 ^-^

마노아 2009-02-1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일을 시작하셨군요. 주소를 어디에 공개하신 거예요? 못 찾고 있어요ㅠ.ㅠ
2호, 3호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웬디님 근사해요!

웽스북스 2009-02-19 01:52   좋아요 0 | URL
올려놓은 웹자보 이미지 안에 들어있어요 ㅋ

레와 2009-02-1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화이팅입니다! ^^*
으쌰으쌰~

웽스북스 2009-02-21 12:11   좋아요 0 | URL
으쌰으쌰. 감사합니다.

민정 2009-02-1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멋진걸~
앞으로도 화이팅~~!

웽스북스 2009-02-21 12:11   좋아요 0 | URL
으헤헤헤 언니. 고마워요.

순오기 2009-02-22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나름' 멋있어요~ 웬디님 글도 공감하고요.
즐기면서 하는 웬디의 나름~ 기대합니다!

웽스북스 2009-02-22 14:59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순오기님. 앞으로도 좀 더 열심히 해야할텐데 말이죵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