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얘기를 좀 해 보자.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인간인 이상 희로애락을 모를 리 있을까마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고 해야 할까.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을 배제한, 가시광선 정도의 감정의 파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고독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한계를 넘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일 것이다, 스무 살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을 혼자 사는 동안 도가 지나친 외로움을 단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는 것은.

 

혼자인 것이 자연스럽지만, 반면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내게는 별다른 결심이나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눈발 흩날리는 저녁 남동생이 가방 두 개를 들고 올라왔을 때도, 올케 될 사람에게 사정이 생겨 몇 달 간 같이 지내야겠다고 동생이 느닷없이 통보했을 때도, 사촌들, 친구들, 동생 친구들이 며칠씩 묵어간다 할 때도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러라고 했다. 동생과 같이 살던 3~4년 동안 다툼 한 번 없었고, 올케가 집에 머물 때에도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때는 문학 소녀를 꿈꾸었으나 감수성/창의성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자마자 미련 없이 포기했고, 공부를 해볼까 하던 생각은 호기심 제로에 지구력 꽝인 성질이므로 바로 접었으며, 직장에서는 성공해 보리라 다짐했으되 투지나 의욕보다는 게으름이 앞서는 인간인지라 다시 포기. 지금은 그저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이며, 그래도 가급적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슨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정의하자면 강철 신경의 소유자라고 할까. 혼자면 혼자인대로 누군가와 같이라면 또 그대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면서/못하면서 상처 받는 일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방바닥에 치약이 밟힐 일도,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바퀴벌레와의 공존을 덜컥 인정할 일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삶이다.

 

이 사람 장모씨는, 어느 날 외로움의 정도가 지나쳐서, 방바닥에서 밟힌 치약을 보며 서러워져서 바퀴벌레라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예민하고 지치기 쉬운 자아는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만나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쇼핑하고, 혼자 잠드는 게, 뭐 어때서? 맘이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마는 거지, 그만한 일로 지치고 고민하고, 도와줄 누군가/무언가를 필요로 한단 말이야? 하기야, 나처럼 무딘 감수성과 무(쇠)신경으로 무장한 채 의외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만 세상에 우글거린다면 문학이든 그림이든 예술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터다.

 

장모씨는 바퀴벌레와의 생활을 제법 즐긴다. 그(것)는 일상을 나누고 대화를 들어주는 상대니까. 그(것으)로 인해 더 이상 외롭지 않으니까.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염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게 바퀴벌레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와는 별개로 바퀴벌레는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나누어 스스로를 안쪽에 가둔다. 처음엔 야생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다음엔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분리했으며, 그리고는 같은 인간 안에서도 온갖 구분을 만들어냈다. 다른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끝자리에 지금 우리들이 서 있다. 장모씨가 공존을 인정한 바퀴벌레는, 그렇게 수없이 구분된 다양한 존재로 읽힌다. 바퀴벌레를 포함한 생태계 내의 다른 생명체 / 여성 / 외국인 노동자 / 장모씨의 또 다른 자아 등등.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 작가가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 지나치게 많은 얘기들, 넘쳐 흐르는 의미들. 

 

다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결국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경계’에 대한 문제 제기와 끝끝내 장모씨의 머리 속에서 떨쳐지지 않은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장모씨의 여자친구는 그가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장모씨가 그렇게 구분 없이 다른 영역을 넘나드는 것을, 그리하여 그 쪽 영역의 어둠이 자기들에게 전해질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장모씨는 자신의 삶의 방법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라고 소리쳐 보기도 하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에 일말의 불안함을 지울 수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나처럼 둔하고 속 편한 사람에게조차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장모씨와 나의 공통분모를 알아본다. 장모씨가 던지는 그 많은 얘기들은 실은 내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비록 강철 신경을 가진데다 잘 먹고 잘 노는 게 목표라지만 내 주위에도 엄연히 여러 가지 경계가 존재하고, 그 안/밖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동면에 빠져든 장모씨에게 여자친구는 봄이 다가온다고, 봄은 전투의 계절이라고 얘기한다. 무엇을 위한, 어떤 전투일까. 잊지 않기. 함께 살았던 바퀴벌레를 기억하기,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기, 해답을 찾기 위한 고민을 기억하기. 나에게도 올 봄은 전투의 계절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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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1-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한 글인걸요. 추천을 강요하는 블.루.님.
감정의 폭이 유난히 심하지만 또한 가끔은 무쇠신경같은 저와는 참 다르군요..

happyant 2006-01-1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개 끄덕이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문득 블루님에게 '전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런지 궁금해지네요. 물론 묻지는 않겠습니다.ㅋ

urblue 2006-01-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음음...왜요? 뭐가 너무한가요? 흑흑..(소심 모드..)

개미님, 그런 거 물으셔도 대답 잘 못합니다. 그러니 물론 묻지 마셔야죠. ㅎㅎ

반딧불,, 2006-01-1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칭찬이예요. 너무 잘 쓰셔셔..지금 질투하는중.

blowup 2006-01-1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존재에 지나치게 예민한 저로서는 그 강철 신경이 부럽습니다. 문학적 의미를 읽어내시는 데에는 그토록 예민한 분이 생활에서는 무디다는 건데...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이라고 여겨집니다.
전 어째서 반대인 거냐구요?

urblue 2006-01-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가급적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슨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다" 라고 했지, 언제 "그저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고 게으르게 사는 것이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이다" 라고 했습니까? 그런 식으로 비약하면, 요즘은 황우석스럽다는 말 듣습니다. 흥. ;b

나무님, 음, 그걸 부러워하실 필요가... ^^;

반디님, 아우,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고맙지요. 헤헤

로드무비 2006-01-19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에게도 올 봄은 전투의 계절이 될 듯하다니 흥미진진합니다.
전 6개월여 쌩판 타인이랑 좁은 자췻집에 함께 기거해 본 적 있는데
그때 마음의 움직임이 가관이 아니더라고요.
아무튼 웬 감수성, 웬 변덕 들에 하도 치여서
블루님의 자칭 강철신경이 아조 유쾌해 보입니다그려.ㅎㅎㅎ

바람돌이 2006-01-1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과 저와의 공통점이 엄청나군요. 저 한때는 문학소녀를 부터 무딘 강철신경의 소유까지 말입니다.... 저에게 다행인건 그나마 경쟁이 주가 아닌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는 거겟죠(이 바닥이라고 왜 경쟁이 없겠습니까만 그래도 출세에 딱 신경꺼버리면 남과의 경쟁같은건 하나도 안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니까요?) 안그러면 밥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거라구요. ^^

merced 2006-01-1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근데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고 게으르게 사는 것이 대략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 이지 않아요? 앞뒤 바꾸면 말이 되는데...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건강한 삶은 잘 먹고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고 게으르게 사는 것 (직장에서는 성공하겠노라는 투지나 의욕 없고 = 신자유주의가 노동자에게 바라는 거에 게기고, 또 놀이가 일상으로 구현된 완결된 삶을 지향한다) 이다. ㅎㅎ

urblue 2006-01-1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rced, 내가 생각한게 그거라구!, 라고 말하기는 좀... ㅋㅋ 뒤집으면 말 되지. 어쨌거나 앞으로도 쭉 투지/의욕 없이 살거니까.

바람돌이님, 오~ 반가워요. ^^ 저도 지금 직장 같은 곳에 다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경쟁없고 널럴하고 칼퇴근할 수 있고. 돈에만 욕심 안 부리면 만사 오케이랍니다.

로드무비님, 실은 슬슬 전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몸도 마음도 말을 잘 안 듣네요. 날이 좀 풀리면 기운을 낼 수 있겠죠. ^^ 쌩판 남이랑 6개월을 살다니, 님의 경험은 참 알수록 흥미진진합니다. 언제 그 얘기도 좀 들려주세요.

바람구두님, 하하, 황우석스럽다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본인은 어느 쪽에 해당한다고 보시는지? 설마, 삐쳤을까...흥

따우님, 감사. ^^

비로그인 2006-01-20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이 안다물어지는 글이예요
그래도 손은 움직일 수 있으니 추천..^^

urblue 2006-01-2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오마나~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서 다행이어요. =3=3
(다시 돌아와서, 고맙습니다~ ^^)

sudan 2006-01-2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만화, 리뷰 쓸까 했지만 어렵더라구요. - 2006-01-11 13:02]
로드무비님 리뷰에 댓글로 붙은 얼블루님의 저 말을 기억해두고 있었는데.(이렇게 잘 쓰실 거면서!)
얼블루님 리뷰는 다른분들 리뷰와는 다르게 분석적인 경향이 있어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분만이 쓸 수 있는 리뷰라고나 할까. 이 점이 좋아요.

그리고 전 새벽에 나타난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에 그날 당장 세스코에 가입했는데요, 저 장모씨는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바퀴벌레와 동거하나 싶어 괜히 좀 울컥하네요. -_-

urblue 2006-01-2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세스코에 가입까지 하셨단 말이에요? 전 어쩌다 바퀴벌레가 출몰해도 조용히 잡아서 버리고 잊어버리는 정도. 글쎄, 얼마나 외로우면 바퀴벌레와 동거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감도 안 잡히네요. -_-
그니까, 원체 감정이 메말랐다구요, 제가. ㅎㅎ

urblue 2006-01-2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련을 하시옵소서. 수련이 끝나면, 잘 생긴 바퀴벌레 하나 들여 같이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3=3

이쁜하루 2006-01-2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감동먹었습니다. 책 사기전에 꼭 땡스투도 누를께요...잊지 않는다면..
제 머릿속에 지우개가 엄청 큰게 있어서리..^^;; 정말 멋진글 잘 읽었습니다. 아차! 추천은 이미 꾸욱~~ 눌렀습니다.

urblue 2006-01-2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쁜하루님, 감동이라니, 님의 그 말씀에 제가 감동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