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가 내가 가장 매료되는 씬 중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고 자신의 머리칼로 그 발을 닦아주는 부분이다.

난 이 장면이 왜 그리도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걸까. -__-; (에잇 불손한지고)

그리고, 늘 상상을 했다.

내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꼭 발을 씻어주고, 머리를 감겨주리라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성적인 환타지는

좋아하는 선배의 헝클어진 머리를 감겨주는 상상을 몰래 몰래 하는 거였다.

(하필 그 선배가 머리가 곱슬기가 있어 더 잘 헝클어졌다.)

어린 시절은 혼돈의 시절.

여성이라는 피해의식이 온갖 분노로 폭발하고,

굳센 자의식을 세워보고자 기를 박박 쓰면서도,

좋아하는 남학생들 앞에서는 어쩔줄 몰라 발끝을 감추고 동동거리면서,

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내 속에 나 스스로 칼리가 있음을, 이시스가 있음을, 가이아가 있음을 알면서도,

그 강한 어머니 여신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환심을 사고 싶은 남자 앞에서 우물쭈물 페로세포네의 모습 하나만 보이도록

내 스스로 내 모습에 재갈을 물리는 꼬락서니란.

내 첫 사랑들은 주로,

엎드려 발이라도 씻어주고 머리칼로 부비대며 닦아주고픈 지극한 굴종의 미학에서

매조키스트적 쾌락을 취하다가

내 이성의 몰매를 맞고 스스로 우왕좌왕하다

쌓여가는 갈등과 혼돈에 쩍쩍 균열하다가

스스로 사랑하는 그 남자(들) 앞에서 자폭하는 결말로 끝나버렸다.

내 속의 칼리의 얼굴을 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도망가더라.

 

내속의 칼리는 내 꿈속 커다란 블랙위도우 거미의 형상으로 나타나

거미줄 아래 분열된 내 자아들을 하나씩 낚아올려 잡아먹으며 내게

'난 절대 여기서 안 나가!'하고 음흉하게 속삭여주더라.

지금도 바비 인형을 보면 너무 사고 싶은데,

걸 사들이면 또 내속에서 살육극이 벌어질 것 같아 참는다.

그 어떤 분노가, 피해의식이 내 속에 이토록 깊게 도사려

생전 나 자신을

그 어떤 남자 앞에도 제대로 서는 것을 막는지는 나도 통탄할 노릇이다.

끝도 없이

무릎 꿇고자 하는 이 간교한 노예근성은 또 뭐란 말이며,

득달같이 달려와

노예 근성을 살육하는 이 분노의 얼굴은 또 뭐란 말인가.

 

내 인생의 문이 닫혀다고 슬피 울던 유학시절 만났던 50대 캐나다 아줌마의 얼굴이 생각난다.

연하의 애인을 십대 소녀에게 뺏기고 그 총명하고 야무진 아줌마가

칙칙한 영국 겨울 날에 매일매일을 울며 보내더라.

 

엊그제

얼굴서 주름을 발견했다. 심히 뜨악하다.

내 워낙 동안으로 지극한 오해를 받아가며 삶을 만끽하던차,

드디어 이렇게 거울 속에서 주름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구나, 싶다.

 

아이가 이제 좀 손이 덜 가니까

모성에 가려 있던 다른 부분들이 숨통을 틀라고 하나.

하지만, 의식적으로

죽여버리리라, 또 다시 노예짓을 하는 내가 고개만 쳐들어도

그렌델의 에미보다 더 잔인하게 내 속의 노예년은 내 죽여버리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하루 하루가 간다.

늙어지면 더 좋으리. 노예년도 포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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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자면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 노평자 씨.

촌지 여왕 + 새디스트 (차라리 몽둥이 휘둘러 때리는 새디스트였음 나았을 것같다. 여린 내 어린아이 감성을 모두 짓발겨 놓은 새디스트)

난 1학기 여자 반장이었다. (그땐 투표에 의한 선출이 아니라 담임이 지명하고, 교장선생님이 눈도장 찎는 방식이었다. 반장 부반장 후보들은 교장실로 다섯씩 들어가 인사하고 나온다음, 임명장을 받았으니까). 울 엄마가 안목이 있어서 울 딸 셋 옷 하나만은 튀게 입혀 다녔다. '파카'란 것도 울 국민학교서 제일 먼저 입고 다닐 정도 였으니까... 옷테를 보고 돈 많은 줄 알고 선생이 찍은 거다.

선생님 가장 먼저 시킨 것 - 잘사는 집 아이들 일곱을 줄세워놓고 매일 돌아가며 보온병에 커피 타오기. 울 엄마가 학교에 안오는 날들이 지속되는 어느날 난 내 순서를 까먹고 커피를 안타갔다. 선생이 반 전체 앞에서 노발대발하며, 반장 자격도 없는 거라고 30분을 수업도 안하고 떠들었다.

2학기 남자 반장이 된 양원규는 엄마가 지극정성이었다. 그애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되면 선생은 수업하다 말고 어젯밤 꿈에 니 엄마 봤다, 고 했다. 그러면 그 다음날 원규 엄마가 찾다왔다.

학급문고란 걸 만들어 책을 기증 받은 후 돈을 내고 빌려보게 했다. 한권에 50원. 다른 책은 학급문고 장사(?)에 방해된다고 가져오면 무조건 압수였다. 학기말에 반 전체에 한자루에 150원짜리 볼펜 한자루씩을 학급문고 수익이라고 돌려주었다. 나머지 돈은? 너무도 보고 싶었던 책을 친구한테 빌리다가 들켜서 압수당했다. 책값을 친구한테 물어붰고, 선생은 그책을 학급 문고에 꽂아두고 돈받고 다른 애들한테 빌려주었다.

2학기. 반장과 별도로 학급회장은 투표로 뽑았다. 전체 어린이 회의에 대표로 나가는 자리였다. 1학기 반장들이 주로 출마해서 뽑혔는데, 회장 선거 2틀전인가 난 아파서 결석했다. 선생 - 울 반 전체한테 절대로 날 찍지 말라고 했단다.

2학기 말. 집에 귀가 할때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서 줄반장들 인솔하해 한줄로 가야했다 (우리 반만 그랬다. 줄 반장 직함에 엄마들이 또 꽤 찾아왔을 거다...)  선생은 4충 교실 창문서 내려다보며 마음에 드는 줄을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그 줄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11월 말 겨울. 나는 엄마가 새로 사준 빨간 구두를 처음 학교에 신고 갔고, 구두끈을 매는 거 서툴러서 한참을 친구 두명과 낑낑 거리며 매다가 운동장에 나와보니 줄서있는 애들이 없었다. 먼저들 갔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갔다. 다음날 학교에 와보니 우리 셋 이름이 칠판에 쓰여 있었다. 어제 줄을 안서고 갔다고. 다른 애들은 선생님이 화가 나서 운동장을 뛰어 돌고 있었는데, 우리 셋만 못보고 갔다가 운동장 열바퀴를 돌고 가라고 했다. 눈이 왔다. 첫눈이었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서 하교시간 즈음에는 발목까지 눈이 쌓였다. 그렇게 눈이 쌓인 운동장을 열바퀴 돌아야 했다.

같은 반 남학생 중에 진수라는 아이가 있었다. 내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했던 아이였다. 아침마다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며 그애가 있어서 선생이 아무리 지옥같이 굴어도 기쁘게 학교간다고 되뇌이며 학교에 갔었다. 내 나이 그때 11살. (1년 일찍 들어갔다....학교를)

노평자 선생은 진수를 하교 후에 불러서 내가 10바퀴 운동장을 다 도는지 세라고 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운동장을 도는데, 다른 두명의 친구들이 일곱바퀴를 돌때 난 겨우 4바퀴를 마치고 있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무엇보다도 진수가 지켜보는데 헉헉거리며 운동장을 돌아야 한다는 게 죽기보다도 싫었다. 뜨거운 덩어리가 안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는데 진수 앞에서 눈물은 안보이겠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고 뛰고 있었다.

철없는 진수는 (남자애들이 여자애들보다 그 나이엔 성장이 느리니까...) 지지리도 못달리는 내 달리기를  세다가 지루하고 뻘쯤해져서 저를 기다리던 지 친구들이랑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여덟 바퀴 정도 달리고 있을 때 제딴에는 장난을 친다고 내게 눈볼을 하나 던졌다.

눈볼을 정면으로 맞은 그 순간, 정말 온몸속의 분노가 폭발했다. 난 평생 그렇게 화가 난 적이 없었다. 가뜩이나 눈이 와서 하얀 세상에, 시야가 온통 하얗게 펑, 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난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애를 팼다.

난 타고난 약골이었다. 늘상 맞고 다니고 질질 울던. 동생한테조차 늘상 맞고 울던 병신같은 약골이었는데, 그날 내 몇달을 목숨걸고 좋아했던 김진수를 신나게 패주었다. 진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던 여름의 그 환희도, 꼭 우리집 앞 도로까지 와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며 날 불러내주던 그 기쁨도....다 한순간에 다 날라갔다.

진수는 타고난 운동체질에 악발이라 누구한테도 싸워서 지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날 내 엄청난 기백에 질렸는지 울면서 패는 내 앞에 웅크리고 서서는 암말도 못하고 내 주먹을 다 받았다.

그리고ㅡ 악이 받쳐서 남은 두 바퀴를 다 돌고, 추운 겨울 신발도 다 젖고, 무릎까지 옷이 젖은 상태로 질퍽질퍽 흙탕이 된 골목길을 울며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난 말썽 한번 안부리는 모범생이었는데 말이다. 더 어린 여섯살적에도 길가다 제때 길 안비킨다고 경운기 몰던 아저씨한테 암팡지게 뺨을 얻어맞고도 엄마한테 절대 말 한적이 없는 나 였는데. 말이다. 학교서 선생한테 맞아도 죽어도 말안하던 내가 울며 집으로 돌아온 건 울 엄마도 아마 처음 봤을 거다.

벌로 눈 쌓인 운동장 열바퀴 돌았다는 것 외엔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냔 말이다.

내...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애 앞에서 벌 받았다고, 그 남자애를 먼지나게 패줘서 이젠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다고...내 어린 풋사랑이 그렇게 끝났다고, 아니, 선생이 .... 다 큰 어른이....내가 진수 좋아하는 것 알고 그토록 내 마음을 갈기갈리 찢어놨다고 ....그 긴 얘기를 다 어떻게 엄마한테 할 수 있었냔 말이다.

ㅎㅎ

진수는 그 이후에도 이따금 뻘쭉 얼굴을 내밀고 일부러 툭툭 치고 가거나, 6학년에 되어서 주번 설때 와서 빙빙 돌며 장난치거나...하며...어린 노마 한테 어울리는 어린 짓을 해댔다. 주번인 나는 매몰차게 노마의 이름을 적어내서 (사실은 내가 직접 안적고 옆의 친구한테 적으라고 사주해서) 노마가 지네 담임한테 기합을 엄청 받게 해주었다. 눈물 쏙 뺐을 거다. 그래, 너도 울고 커라, 는 심보였나? -__-;

내 노평자 선생을 필두로 사립 고등학교서 몇몇 저질 선생을 더 만났다. 아,,물론 노평자가 가장 악질이다. 내 이를 갈며 난 절대 선생질은 안한다고 결심했다.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숱하게들 하는 교직이수 안했다. 선생 절대 안한다고.

그런데....^^; 지금 가르치고 있다. 학원, 기업체, 대학...그래도 절대 정규 중고등학교에서는 교펀을 안잡는다. 스폰지와 같은 애들한테 내가 끼칠 영향에 책임 질 자신이 지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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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9-0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과 함께 '예의(사전적 정의 말고 금전적 정의 말입니다)없는 집 자식'으로 찍혀서 개 매도당하고 얼굴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넌 커서 사회의 독버섯이 될 새끼야'외치던 작자도 매너 5학년때 담임이었는데요. 둘 결혼시키면 뭔 꼴 날라나. 그러고보니 그 개새끼 마누라도 선생이었는데... 혹시? *_*

김삿갓 2009-09-1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평자 이름 참 좋다. ^^
 

내일모레 이민대행사와 계약하러 갑니다.

점수가 되기 때문에 신청하면 될 확률이 90% 넘습니다.

구구히 왜 이 나라를 뜰려고 하는지 설명하기는 힘들고

설사간다해도 1년이나 4년후 쯤 가게 될겁니다.

말만 낳은 자들이 싫습니다.

내...80년대 운동권들 옆에서 지켜봤지만

이상을 살아내 보이는 인간은 제대로 본적 없습니다.

인간 본성은 원래 그마마하게 치졸한 겁니다.

그걸 인정하면 되는데,

자기가 실현 못할 이상을 남에게 강요합니까.

자기의 기득권 포기는 못하면서

(대부분 기득권이란 것을 막연한 가정법으로 밖에 말해보지 못할 사람들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본성은

자신들이 비난하는 인간들보다 과대평가하나 봅니다.

중립, 객관? 그것처럼 사람들을 오도하는 언명도 없을 겁니다.

갈 겁니다.

내 아이를 위해서.

일하는 엄마들의 아이들이랑 놀지 말라고 시키는 전업 주부들이 있고 (엄마가 보살피기 힘들어서 아이들이 엉망이라고 내지는 낮시간에 부모없는 애들 집에 놀러가 나쁜 짓들 한다고 )

더구나

홀부모의 자식이란 낙인으로 왕따 당할까 갈 겁니다.

거기서도 물론 인종주의자들 있고, 운동 신경 둔한 울 아이는 적응하기 힘들지도 모르겟지요.

하지만, 최소한 인종차별을 공공연히 지탄하는 사회 양심이 살아있고,

선생들이 촌지도 안받고, 왕따 당하는 아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 주어섬기지 않고,

인종 차별에 bully 들에게 No! 라고 말해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있다면

나머지를 극복하는 것은 제 아들의 개인적인 몫이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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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3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답하고 (가신다니)섭섭해요.
이 나라 문제가 많은 나라인 건 확실하지만...
톡톡캔디님, 그래도 너무 신랄하게 말씀하시니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mannerist 2004-08-3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하세요. 몸도, 마음도...

땅과 사람에 적당히 묶여있는지라 아직은 생각 없지만 자식 낳으면 180도 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답답한일이 무얼까. 궁금해지신다면, 그때까지 매너를 기억하신다면 가끔 들려주시길. 진부한 말이지만 진정을 담아. 행복. 을 빕니다. ^_^o-

톡톡캔디 2004-09-0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홋 간다해도 빨라야 1년 후, 늦으면 4,5년 후입니다. 영주권받고 5년동안 안들어가도 됩니다. ^^; 일단 나이점수 깎이기 전에 영주권이나 받아놓고 다음 일을 생각해려구요. 호구지책 생각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사실. 로드님. 매너님. 그리고, 저 이민가도 인터넷 합니다. 걱정마시와요.
 
크리니크 모이스쳐라이징 로션(노란 로션) - 50ml
크리니크(Clinique)
평점 :
단종



저는 화장품을 이것저것 바르지는 않는데,

로션만은 골라 씁니다. 스킨은 어차피 식물성이 아닌 바에야 다 똑같기때문에 클리닉 스킨을 씁니다.

 (양 대비 가장 쌉니다. 저는 또 원래 로션 하나 쓸 동안 스킨 2통 씁니다.)

이 로션은 여태 3번 써봤습니다.

어릴때 선물 받아서 너무 유분이 많아 남주고

두번째 면세점서 사서 너무 얼굴이 말라서 남주고

세번째 백화점서 샀는데, 겨울이라 아무리 지성이라도 그냥 로션 써야 된다고 해서 가져와썼다가

턱에 뽀루지 우루루 나고 오일 프리로 바꿨습니다.

 

오일프리도 못씨겠더군요.

아무리 지성용이라도 어느정도 유분기가 있어야 하는데

바르면 겉돌고 얼굴이 잡아당기고 마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로션은

오일프리이면서 수분기에 유분이 적당히 있되

바르는 순간 딱, 스며들어서 번들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로션 딱, 한번 써봣습니다.

아베다 --- 98년도에. 지금은 데이로션 나이트 로션으로 바뀌었던데

데이 로션 몇개월전 다시 사썼다가 로레알 수준 (로레알은 외국서는 수퍼서 팝니다.

유학생들 쓰기 딱 좋죠. 로레알도 가격 대비 괜찮습니다.) 으로 품질이 안좋아 졌음을

확인했씁니다.

SK II나 시슬리나 사야 이전 아베다 수준의

바르면 귀신같이 스며들고 마르고 나서 만지면 아기피부같이 뽀송뽀송한

로션이 나올려나 몰겠습니다. -__-;

이거 쓰느니 로레알 쓰는 게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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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증조 할아버지 북한서 으리으리한 지주였다. 울 아버지 말로는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하루종일 걸어도 할아버지 땅이 끝이 안났다고....(과장법인것 같다. ) 일제 시대에도 그 마마한 땅을 유지하셨고, 전용 방앗간이 있었고, 소작인들만을 모아서 같이 예배드리던 교회를 세우셨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 한참 고민했다. 일제 시대에 지주면 일제에 아부했다는 소리인가? -___-ㅋ

울 할아버지 대한민국 청년단 단장이었다. 태백 산맥읽어보라. 그 찢어죽이고 싶은 염상구가 바로 대한민국청년단 단장이다. 대학시절 태백 산맥을 읽고 또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울 증조할아버지는 악덕 지주였고, 울 할아버지는 저주받을 대한민국 청년단 단장이었단 말인가?

어느날 아빠한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울 아빠는 북쪽 출신 답게 반공정신이 투철하시다. (ㅎㅎ 역설적으로 그렇다. 서북청년단만해도 봐라.) 울 아빠 왈, 곡창지대가 그리 발전하지 않은 북쪽에서는 지주들이 전라도 평야지대 지주들 처럼 악착같지 않았다,고 하신다. (그럴 수도 있다.)

나이드신 할머니께서 언뜻언뜻 해주신 기억들을 더듬으면, 순사들한테 증조 할아버지(할머니한테는 시아버지)께서 호령을 치시곤 했다고...그러시는데, 음...뭐 믿고 호령을 치셨을까, 싶다.

증조할아버지가 어떻게 황해도 지역의 지주가 되었는지는 사실 미스터리이다. 종가는 서울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지방에 선산도 있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보면) 하지만, 증조 할아버지는 고종 때 중추부사까지 하셨다. (다시 찾은 족보에 그렇게 나오더라) 어느 시점에 중추부사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__-ㅋ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기독교로 개종해서 벼슬 버리고, 집안서 쫓겨나고 항해도로 내려가서 지주가 된걸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 아무도 모른다. )

육이오 이전 개성이하는 남한 땅이었다. 그래서 울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청년단 단장이였던 거다. 그리고 육이오가 터지고, 울 할아버지는 아들 둘만 데리고 먼저 인천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줄행랑(?)을 치셨고, 울 할머니 몇달을 숨어 지내다가 남은 아이들 셋을 업고 걸려서 인천항구서 극적 상봉을 했단다. 증조 할아버지 그때까지 북한에 살아계셨단다. (울 할머니 그 이후 몰래 다시 북한 땅에 잠입을 해서 금단지 같은 재봉틀을 홀로 이고 나오신다. 그 모험담은 아찔하다 - 멋모르고 지뢰밭을 걸어서 재봉틀을 이고 탈출하셨다. 그 얘긴 나중에.)

그리고 육이오 이후 할아버지, 할머니, 울 아빠에게는 험난한 생존 투쟁이었다.

족보? 울 집은 그런 거 없었다. 증조 할아버지가 기독교 믿느라 제사 거부한다고 쫓겨날때부터 족보는 언급된 적도 없다. 아빠가 가끔씩 증조 할아버지가 손자들 불러다 놓고 신라 충신 박제상 이야기를 거듭거듭 강조하면 해주셨다는 아스라한 힌트만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울 할아버지 다섯번째이고, 울 아빠 장남이라도 딸 밖에 없어서 족보를 찾고자 하는 의욕도 별로 없었다. 울 작은 아버지가 살만해지고, 장손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족보를 어느순간엔가 찾아오셨다. 나는 영해박씨 충절공파 54대손인가? 그렇단다. 신라 제 5대 파사왕의 증손자가 시조이며, 이 시조의 손자인가가 중시조인 박제상이다. 본관인 영해 지방은 눌지왕이 아우들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박제상의 자손들에게 하사한 땅이다. 다른 박씨 본관들은 나중에 박씨가 다시 신라의 왕이 되었을때 대군들이 각각 시조가 되서 유래한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때 문하부 시중을 3대에 걸쳐 할만큼 잘나가다가, 조선 세조때 단종 편을 들다가 거의 멸문을 당했다. (박위지하고는 상관없다) 단 한사람 도망쳐서 숨어 살다가 숙종때 복권되고, 영조때부터 벼슬길에 다시 나가기 시작해서...지금에 이르렀는데, 사실 멸문의 영향이 너무커서 사람이 너무 없다. 거짓말 안하고 난 5촌까지의 우리 친척들 외엔 같은 본관을 본적이 없다. (누가 그런 사람 만났다더라만  - 딱 2번)

작은 아버지는 그 족보를 구해오셔서 당신 아들 이름을 올린다는 집념으로 우리(울 세자매)이름까지 다 올려주셨다.

사실 난 괘념치 않는다. 저 가부장 기록들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사실 유전적으로 따지면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에게서 받는 유전정보가 더 많다. 난자에 들어있는 미토콘드리아에도 유전정보가 잇기 때문이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두분 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지만, 얼마나 숨막히도록 유교적이고ㅡ 가부장적 권위를 남용한 사람들인지 말이다. 모든 걸 종교를 위해 버리기로 한 결단, 세브란스 의전을 다니다 마셔서 동란후 그나마 그런 학력이 없어서 교편을 잡다가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하신 할아버지...그분들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가 사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증조할머니께 손지검을 하셨다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아스라한 기억을 전해듣거나, 며느리들 앞에서 할머니 얼굴에 국사발을 던졌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기억을 전해들으면, 그저...그런 마쵸의 피가 내 속에 흐른다는 게 참으로 화가 날 뿐이다. 그들의 유전자가, 그들의 피가 내 속에 과연 몇분지 일만큼 이나 흐른단 말인가 말이다.

난, 아버지 집안의 유구한(?) 내력에 대해 개의치 않기로 했다.

한때 길을 가다보면 '도에 관심있으십니까?'하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툭하면 잡혔다. 실제 따라갔던적도 있지만, 그네들이 툭하면 하는 말이 조상님들이 집안에 기둥으로 나를 생각을 하고 기대려고 하는데..어쩌구 저쩌구...그런다. 그러면 내가 화를 내는 줄 미처 모르고 말이다. 난 그런 말 들으면, 난 기독교 인이에욧!하는 것보다, 내 아버지 조상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에욧!하고 반응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꿈을 꿨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뒤에 대동하고 울 집에 오셨더라. 울집 옷방에 오셔서 내 옷장에 옷을 걸어놓으신 거다. 내가 꿈에서도 마구 화를 내면서, 걸어놓은 옷들을 바닥에 팽개치며 '할아버지, 저한테 오시지 마세요. 저는 출가외인이에요. 그 애지중지 하시던 장손한테 가세요!'하고 화를 냈다. (울 할아버지, 아들 못낳았다고 울 엄마 가슴에 못박은 거 난 용서 못한다. 울 세자매 단 한번도 무릎에 앉혀주시지 않은 거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왜 꿈이라도 내게 오냔말이다.) 그리고 다음날 부고를 받았다. -__-ㅋ

친일 과거사에 대한 극렬한 분노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혹시라도 행여라도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 가정법 미래 - ) 공인이 된다면, 나 역시 친일 세력의 후손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게 될 것인가? 하는. 인터넷에 보니, 아버지가 일제시대 면장이었다는 것까지 친일 후손이라고 딱지 붙여서 매도하더만.

내가 극렬히도 부정하는 내 아버지 가계가 그런 꼬리표가 될려나 말이다. 내가 받은 교육과 내가 고민하고 애써서 쌓아올린 내 자존감과 정체성, 이 모든 것과 하등의 상관도 없이, 난 친일 후손의 딸일 수 밖에 없다는 건가?

과거사를 옳게 정립세켜야 한다고? 그런데, 선은 어디더냔 말이냐?

사실 태백 산맥 읽으며 난 그 악의 화신같은 염상구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이 있더라. 국군이 들어오면 대한민국 만세! 부르고, 인민군들 진주하면, 몇십년 같이 산 이웃을 군국부역자라고 찔러 바치는 인간들. 그래, 할아버지들이 일제 시대 면장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역사 앞에 그리도 당당한 모습들이었냔 말이다.

'왜 나만 같고 그러냐?'는 걸고 넘어지기 식 면죄부를 내가 청하고 있다고?

그건 아니다. 내 증조 할아버지가 친일 세력이었을 수도 있다. 할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 그런데, 내가 얼마나 책임을 지냔 말이다. 내 속의 얼마만큼의 피에 대해 속죄해야 하는데?

박정희? 친일 한 거 맞다.  / 일제시대 검사보? 친일 이겠지. / 그리고, 면장, 면서기, 경성 제국대학 출신들, 어디까지가 친일이란 말인가. 역사 바로세우기, 좋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올바른 평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죄는 몇대까지 할건가? 그네들 후손이 잘먹고 잘살았으니까....라는 피해 의식은, 심정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올바르지는 않다. 막상 정죄 할수 있었고, 정죄 해야만 했던 시기에 못하고 지나간 인간들의 과오는 왜 안묻는 가 말이다.

왜 그렇게들 과거에만 집착하냔 말이다. 미래는?

친일 한 사람들, 유신 시절에 밀못하고 쉬쉬했던 모든 인간들 하고 모두다 경계선 긋고 가르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내가 증조할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싫어한다해도 애 할아버지인 걸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다들 한 민족아니냔 말이다.

나는...베트남 사람들하고 얘기하면 왠지 죄스럽다.

용병의 입장으로 가서 한국군인들이 한 살육이 죄스럽다. 실제로 몇안되는 내가 만나본 베트남인들한테 한국인으로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 있다. 대만인들에게도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한순간에 칼로 끊듯이 단교하고 중국대사관 건물 중공에 넘기는 거 아니었다. 그 점 한국인으로 참 미안하게 생각한다, 고 말한다.

내 증조할아버지의 과거? 사실 분명하지도 않지만, 더이상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말이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History가 historiography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늘 역사는 파워있는 자들이 새로쓰는 픽션이기 때문이다.

과거사 재정립 좋다. 하지만,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마녀사냥하는 이념적 도구로 오용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과거 제대로 말하는 거 대 찬성이다. 하지만, 3세대 이상 지난 과거 에대해 면죄부도 동시에 줘야하지 않는가  말이다.  면죄부 없는 과거사 정립이 어떻게 화합을 낳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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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8-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죄"는 문제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좌제를 용납하지 않는 이상, '그런 놈들 자손'이라 손가락질 하는게 가능할 지언정 온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그리고 그 손가락질이 '말'이상의 의미를 넘을 수 있을까요?

문제는 '사실의 기록'조차도 인정 안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그런 사실에 대해 "사실이고 그당시 행동에 대해 사죄한다"라는 반성의 자세라도 보이지 않은 해당 친일파들, '그때 다 그랬는데 어쩌란 말이냐?'는 할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의 기록'도 부정하면서 지금의 단물은 놓치 않으려는 데다가 그에 대한 비난까지 피하려 한다면 이건 문제가 아닐까요?

다시 한 번. 문제는 '기록'입니다. 친일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그 후손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로 '친일파의 자식들'이란 말을 주워섬기는 작자들을 저는 증오합니다. 이런 말의 연장에서 '독재자의 딸 박근혜'라는 수사도 그녀를 비난하는데도 동의할 수 없고요(문제는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이를 이용한다는 거겠죠. '아버지의 이름으로'외치며 TK에서 시작한 정치생활부터 지금까지). 문제는 님이 걱정하시는'정죄'라는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기록'자체를 불허하는 게 아닐까요.

톡톡캔디 2004-08-1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실 님의 서재에 올라온 글과 답글을 보고 쓴 글입니다. '과거사 정립'의 명분은 좋습니다. 보수세력에 대한 반발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네 공주이니, 여오크이니 하는 사실 귀엽기 까지한 애칭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험한 말, 쌍욕쓰는 건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게 감정적인 대응을 보면,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배척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안읽힙니다. 아무리 생각하는 게 달라도, 아무리 정죄받아 마땅한 부정을 저질렀어도 이 한국땅서 추방하는 법률이 없는 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음...그러고 보면 바다에 던져 버린 장개석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요? ㅎㅎ) 비판은 하되 좀 더 성숙한 태도들을 견지했으면 합니다.
친일파 문제는, 사실 복잡합니다. 미당 서정주 친일 했지요. 하지만, 서정주 문하에서 그의 후원으로 큰 문학계 인물이 서정주시인이 죽자마자 서정주 친일 문학인이라고 매도하고 나서는 거 보면, 씁쓸합니다. (서정주시인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에 수긍은 하지만, 그 문학계 인물의 손은 왠지 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중립적인 역사는 없습니다. 중립적인 '기록'도 없구요. 설사 '정죄'를 한다한들 정죄 당하지 않고 끄덕도 안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 밉죠. 욕하고 싶은 심정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욕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 땅에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인터넷에 올라온 친일 세력 명단 중 가장 기가 막히는 건, 을사오적 송태준의 손자였습니다. 이 인간이 이승연 위안부 누드 동영상을 제작한 회사의 사장인 게 가장 기가 막히더이다. 단순히 그 사람이 송태준의 손자인 것 만으로 매도할 수는 없겠죠. 설사 송태준이 남긴 부로 여태껏 잘먹고 잘살았다 할지라도. 하지만, 그 사람의 행적은 참으로 그 아비에 그 아들 이라는 소리밖에 안나오게 하는 군요.

인터넷의 그 명단, 사실....아버지가 단순히 일제 시대 면장이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건 아닌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달리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mannerist 2004-08-1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립적인 '기록'은 없겠지만 자기 잘먹고 잘 살자고 다른 사람 눈에 피눈물흐르게 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한해서 욕먹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군말 하나. 서정주 문제에 대해 제가 생각한 해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학 교과서에서 칭찬하고 역사 교과서에서 박살내면 된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양반 없었다면 한국어가 얼마 정도 빈곤해졌을 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가미가제 특공대로 젊은이들 몰아 개죽음시키는데 일조했던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문학교과서에 시를 실어줄지언정, 역사교과서에서는 더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 교과서에 '그런 주제에 반성은 커녕 종천친일 이라는 언어도단까지 저질렀다'정도 실어주면 벨런스가 맞겠죠. 그의 업적을 인정하면서 행적을 비판하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후자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고, 이 점에 있어서 사람들은 분노하는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