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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 핸드 타임>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찾아온 인간의 자유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육성기록으로 담아낸 책이다. 소비에트인으로 살아간 이들 중 핍박받은 생존자들의 증언만을 담은 게 아니라, 붕괴 이후의 세대가 보는 어떤 전환과 아이러니에 더 집중하게 되는 면이 어쩌면 이 책의 진면모라는 생각이 든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역시 내부자의 시선이기 때문에 적나라하고 날카로운 지점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문 어디에서고 명확한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관을 내비치는 일이란 없었다. 다만 작가가 갖는 경향과 뜻을 모르겠는 것도 아니어서, 책의 의도와 방향에 대한 충실한 독자이고 싶을 따름이었다.

 

 

 

작가는 소비에트 시대를 네 세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스탈린 세대부터 고르바초프 세대에 이르는 장장 70여 년 동안의 시대의 구분이다. 그 중 작가는 마지막을 관통한 인물이다. 아울러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연방이라 불리게 된 지금의 이전 네 세대와는 또 다른 20년이 흘러서, 격동의 시절을 가장 오래 살아내고 있는 유일한 세대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새로운 인간의 유형인 호모 소비에티쿠스들의 증언을 통해 그야말로 이전과 현세대의 극명하고도 혹은 복합적인 사유의 충돌을 담아내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 거의 막힘없이 말을 늘어놓는 서사적 유려함에 놀라게 되는데, 이는 흡사 소설인 듯이 거침없고 윤색되지 않은 면이라 흥미로운 지점이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도 즉 이 책이 소설이었다고 해도 에세이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이 점이 작가의 고유한 방식이다

육성을 그대로 전하는 식의 작법을 채택한 것은 전직 기자출신 다운 작가의 기록방식에서 유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책이 끝나도록 개입을 줄이고 릴레이처럼 이어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인터뷰처럼 집요하게 묻거나 어떤 방향성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대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화자의 계획했거나 혹은 무계획적인 발화의 진실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식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즉 이 책의 탄생과 존재의 이유는 작가의 세계관과도 맞물린 점이 클 텐데, 오랜 세월 우여곡절을 견뎌낸 개인의 삶이 별 편집 없이 들려지면 좋겠다는 열망이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벨상을 받은 소설을 비롯 작가의 소설 화법들이 이와 같은 목소리 소설의 형식을 띤다고 하는 점은 그녀 작품 세계의 가장 큰 부분이자 핵심일 것 같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다 개인적 체험이 주 내용이다 보니 읽다보면 여러 가치관과 잣대로 인해 혼란이 증폭되기만 한다. 그 안은 개개인의 역사관이 극대점을 향해 달려가는 옳거나 그름, 다름과 같은 생각들로 산발적 충돌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소용돌이이다

작가의 개입이 너무 없기 때문인지 이걸 고스란히 다 듣고있어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내내 있다. 증언들을 듣고 어떤 생각으로 이어나갈지는 독자들 개개인의 몫일 일이라는 듯, 작가는 후일담 같은 말만 조금 거들 뿐이다. 단지 이런 식으로 조금씩 모아진 언급들로 결국 어떤 긴 여운 같은 것이 생기고, 마침내 어떠한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정 가운데를 관통하는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토록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았을 때 좀 놀라웠다. 마침내 주어진 자유를 각자의 삶의 방편과 잣대로 영위하였을 법한데, 정작 예상 밖의 말을 듣게 될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안타까운 일이다.

가령 스탈린 수용소에서 스스로 살아남은 자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잔인한 인간의 끝 모를 저열함으로 몸서리치게 만든다. 또한 지금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상 좋은 이웃이 과거 자신을 죽음으로도 몰아넣을 수 있었던 밀고자였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그가 갖는 감정이란 증오이기는커녕 오히려 상대가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이상한 심리이다. 공포의 시대는 개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힘들게 왜곡하고 일그러뜨렸다그래 듣다 보면 악과 선이 뒤엉켜 도무지 구별할 수도 없게 된 불치의 단면을 보게 되는 것 같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는 공포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는 심리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체념하고 정의한다. 사랑이 곧 공포일 수 있다는 체득을 진실인 듯 말하고, 공포로 인한 여러 감정을 왜곡하고 변형시켜 안착시켰다. 억압적 상황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정서적 아이러니는 사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 많은 생각이 드는 지점이고 이는 매우 안타까운 지점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것 또한 맞물려 생각할 수 있는 주요한 지점이다. 떠올리는 과거의 영광이 고작 나에게 잘해준 사람의 온화한 미소라는 회상 장면은,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의 한 단면 같았다. 미미한 온정을 사랑이라는 거대한 희망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시대의 면모인 것이다.



이 밖에 흥미로웠던 증언이라면 과거 문화적 부흥기를 누린 영광의 나라답게 소설의 언급이 종종 등장한다는 점이다. 러시아 문호들의 소설들이 본인의 안위적 체험과 낭만 속 재료로 공포정치를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가를 이해하게 해준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경험 안에서 결국 그 개인의 사상과 생활태도가 만들어 질텐데, 이러한 사소함이 슬픈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두고 치를 떨며 증오하는 반면 그리워하거나 칭송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분명 당시 증오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안위에 오히려 무기력해진 아이러니도 목도할 수 있다. 냉전이 끝나고 그야말로 밋밋해져 버린 자유를 어떤 이는 여전히 바깥이라고 정의하며, 여전한 과거 속을 헤매는 불응적 유형으로 존재한다.

알다시피 이들의 지나간 시대는 분명히 실패한 체제였고, 지금을 더 잘 살아가야 하는 당위로서 자신의 과거를 충분히 비판하고 버려야 마땅했을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중이라는 것을 어린 세대들의 모습에서도 보게 되는 게 이 책의 마지막이다.

소련 붕괴 이후 태어난 시대를 세컨드 핸드라 명명하는데 이들의 현재는 이전 세대들과는 얼마만큼 멀어졌을까를 보면, 유감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아슬하게 지켜보게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은 자유주의적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개인의 본질적 측면이 개인성으로 존중될 수 있을 때, 자유는 존립할 수 있다

때때로 자유는 개인의 선택적 자유로 간주되곤 한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밀고자에게 갖는 연민 같은 것을 품을 자유가 이러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 감정은 인간의 성질을 좀 더 사실적이게 보이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도 단단히 묶여있을 영역, 인간이 이 영역을 어떻게 침범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경계는 기필코 소중하다. 바로 이러한 삶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침범하지 않는 정신적 무사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든다.

 

 

소련과 러시아는 극명한 구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가를 이 책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판이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미지수라는 걸 여러 인식의 차이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러시아는 전통적 가치와 위배된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력을 가행하는 세력이 존재하며, 그것을 경찰이 묵인하는 뉴스도 들은 적 있다. 야만이 지금의 이념에 부합되지 않는 극단적 세상으로 잘도 헤집어 나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이 책속에 묘사된 과거의 세계와 출간 이후의 또 다른 10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물론 한반도의 모습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거울처럼 빗들어 마치 위협처럼 들리는 부분이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냉철한 역사학자이자 인문학적 관점으로 여러 인물들의 삶을 만나고 취재했노라 말한다. 그 안개와도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생생함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면서도 결코 멀리 뻗어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소리이다

젊은 청년에게서 듣는 회귀로서의 말은 그들에게 펼쳐진 미래에 대한 경고처럼 귀에 가 박힌다. 이 책으로 세컨드 핸드 세대들이 지향하고 모색해야 할 세계, 마침내 편견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진 시간 위에서 진정 공정한 심판과 희망적 기대일 수 있는 현재이기를 기도해볼 따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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